타임머신/옛사진읽기

[20241003]안양 호계동에 있던 범계방죽 1970년대 모습

안양똑딱이 2024. 10. 3. 18:05

 

2024.10.02/ #아카아브 #옛사진 #방죽저수지 #안양 #호계2동 #범계방죽 #방축말/ 

 

안양 호계동에 자리했으며 물이 밀려들어 오는 것을 막기 위하여 쌓은 뚝이면서 평촌벌에 농사 짓는 물을 대주었던 범계방죽의 모습이 담긴 사진을 새 건물을 짓고 새롭게 개청한 호계2동행정센터 사진전시회에서 만났다.

사진 전시회는 호계2동 주민자치위원회에서 기획한 것으로 호계2동이 새롭게 변화하고 있는 모습을 알리기 위해 수집한 총 26점의 기록으로 사진 대부분이 호계2동 토박이로 건축사인 인형수씨가 기록한 것들이다.
70년대 이전의 동네 모습을 볼수 있는 오래된 사진이 몇장 있지만 대부분 80-90년대 모습들이다. 그나마 1970년대 방축저수지에 물이 고인 모습을 담은 사진을 만날수 있었다.  

 

옛 기록들을 살펴보니 호계2동에 있던 방죽은 범계방죽으로 표기돼있는데 과거 안말과 샛터말 사이에 있으며 조선시대에 물의 범람을 막기위해 둑을 쌓았는데 그 주변에 마을을 방축말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그 방죽이 언제 만들어졌는지 명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숙종때 (1699) 발간한 과천읍지에 그 위치는 과천현 관아(현 과천시 중앙동)에서 서남쪽으로 약 7km지점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어 조선 중기에 이미 방죽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범계방죽은 의왕 모락산 계곡에서 시작돼 안양교도서 북쪽과 범고개옆을 통과한후 평촌벌을 지나 현 서로교동쪽에서 안양천과 합류하는 호계천 물줄기의 범람을 막기위해 축조했으며 저장된 물은 평촌벌 농사에 사용됐을 것으로 보인다. 

 

이 방죽은 후대에 이름이 바뀌어 호계에서 일제시대에는 범계방죽으로 불리다가 1974년부터  실시된 안양6지구 구획정리 사업(1974-1979) 때 주택지가 되면서 없어졌으며 방축말의 지명은 방축사거리 명칭을 통해 고스란히 남아있다.

 

얼마전 안양시정보통신과의 협조를 통해 공간정보팀에서 조사한 옛 지형도와 항공지도를 입수해 분석한 결과 범계방죽은 현재의 안양시 호계동 방축사거리 우측의 귀인로와 무궁화효성한양아파트 일부, 목련동아경남아파트 일부 지역과 귀인초교 주변에 있었던 것으로 조사됐다.

 

[20240806]기록으로 남아있는 안양 <범계방죽>은 어디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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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06]기록으로 남아있는 안양 <범계방죽>은 어디일까

2024.08.06/ #도시 #아카이브 #연구 #조사 #지도 #범계방죽 #방축말/  안양 호계동에 자리했으며 물이 밀려들어 오는 것을 막기 위하여 쌓은 뚝이면서 평촌벌에 농사 짓는 물을 대주었던 범계방죽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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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축말 (房築洞) <호계2동>
안말과 샛터말 사이에 있다. 조선시대에는 과천군하서면(果川郡 下西面)의 관아가 있었고, 그 후 1914년 3월부터 1917년 7월까지 시흥군 서이면(始興郡 西二面)의 면사무소가 있었던 유서깊은 고을이다. 이곳은 조선시대에 물을 막기 위하여 둑을 쌓았는데, 그  주변에 있는 취락이므로 방죽말 (房築洞)이라 칭했다. 그런데 이 방죽이 언제 조성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지만, 숙종 때 (1699) 발간된 제언조(堤壙條)에 호계제언재현서남문18리(虎界堤壙在縣西南門十八里) 라 했는데, 이로 미루어 보아 방죽(제언)의 이름은 호계이고, 그 위치는 과천치소(현 과천시 중앙동사무소)에서 서남쪽으로 18리 지점에 있었다. 축조년대는 숙종조 이전으로 보아야 할 것이므로, 최소한 조선 중기에 이미 방죽이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이 방죽은 후대에 내려 오면서 그 명칭이 바뀌었다. 광무 3년(1899)에 발간된 제언조(堤壙條)에 호계리경자제언일고재현서남간18리(虎溪里競子堤堰一庫在縣西南間十八里)라 하여 방죽은 호계에서 호계리경자로 되었고, 이어 일제때부터 범계방죽으로 불리우다가 1974년 부터 실시된 안양6지구 구획정리사업 때 주택지로 변모되었다. 마을에서는 해마다 음력 10월초에 길일을 택해 방죽 앞에 있던 수령 300년 되는 향나무 앞에서 마을의 안정을 기원하는 군웅제(群雄祭)를 지내다가 1970년대에 나무가 죽자 제를 지내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