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14/ #아카이브 #옛사진 #안양 #냉천동 #충혼탑 #농촌지도소 #since1970 #이정범컬렉션/
주접동이라 불렸던 안양6동 현충사거리에서 현충탑( 1970-90년대에는 충혼탑이라 불렀음) 올라가는 도로(현 현충로)의 1970년대 모습으로 안양시청 홍보실에 근무했던 이정범 선생이 사진으로 남긴 기록이다.
정면에 현충탑 올라가는 돌계단이 보이고 그 왼쪽으로 보이는 집들이 소골안 마을의 시작점이다. 사진 중앙에 보이는 도로(현 현충로)에서는 주민들이 진입도로 확장후 소쿠리에 담아온 마사토를 길에 뿌리며 정비사업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도로 왼쪽에 건물이 보이지 않지만 농촌지도소(현 안양문화원 자리)가 있었으며 그위쪽으로 전봇대가 보이는 곳 왼쪽 땅에는 1976년에 안양소방서가 건립되었다.
현충탑이 조성된 산은 안양 만안구 15대 국회의원을 지낸 고 권수창 국회의원(1943년생. 자민련)의 부친이신 권용식 선생이 안양시에 기증한 땅이다.
권용식 선생은 안양의 땅부지로 안양 현충탑이 세워진 산을 기증했을뿐 아니라 안양대학교 땅 일부도 학교에 기증하는 등 안양시가 기부의날(삼덕제지를 공원으로 기부한 전재준 회장을 기려)을 제정하고 기부문화운동을 시작하기 훨씬 이전에 많은 땅을 기증함으로 앞서 기부운동을 시작하신 분이다. 기증한 땅의 가치를 현 시세로 환산하면 수백억 이상이 되지 않을까 싶다. 현충탑 옆에 자그마한 표지석이 있지만 행정기관이 이같은 사실을 알리거나 예우해 드리기는 커녕 무관심한채 사
실상 잊고 지냈기에 시민들도 이를 잘모른다. 안양시가 이를 좀더 구체적으로 알리고 기록으로 남겼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정범 선생 글-
1970년대 안양시 안양6동 농촌지도소(현 안양문화원)앞 도로변 사진이다. 이곳은 중앙로변에 위치한 은혜와 진리교회 사거리에서 농촌지도소를 지나 현충탑으로 올라가는 간선 도로다. 옛날에는 주변에 산소가 많아 분당골이라 불렀으며 일제강점기 중엽에 산소가 정리되었다. 1950~70년대에는 안양의 명물인 포도를 많이 재배하던 곳이며 안양과 서울을 왕래하던 시내버스 종점이 들어선 후 사람들이 모여살기 시작하였다. 주위에 안양소방서 안양농촌지도소가 있었으나 농촌지도소는 없어지고 그자리에 안양문화원이 들어섰다. 1970년대 수리산 끝자락에 국가와 국민을 위하여 산화한 호국영령들의 희생정신과 애민정신을 기리는 현충탑이 조성되었고 지금은 냉천지구 재개발사업이 시작되어 고층아파트 건설공사가 한참 진행되고 있다.
- 지명유래 주접동(住接洞) -
교하동 남쪽에 위치한 마을로, 본래의 주접동은 현재의 안양6동, 안양7 동, 안양8동을 통칭했으나 도시화의 추세로 인구가 증가하자 분가 또는 분동으로 분리되자 현재는 안양상공회의소, 만안구청 주변을 일컫는다.
이 마을은 정조와 인연이 깊은 곳이다. 정조는 양주 배봉산(拜峯山)에 있던 부왕(사도세자)의 묘를 1789년 수원 화산으로 천묘한 후, 처음에는 서울-과 천-인덕원-사근(현의왕시)을 잇는 노정을 택했다가, 1795년에 안양에 만안교를 가설한 후부터 서울-시흥(현 구로구 시흥동)을 잇는 시흥노정(또는 금천노정)으로 변경하고 아울러 안양 1동에 안양행궁을 짓고, 안양경찰서뒤 동아아파트 부근에 정각(亭閣또는 政閣)을 세워 능행과 환궁 때 잠시 쉬어 갔다고 한다.
그 후부터 이 마을을 주접동(佳接洞) 이라 불렀다고 한다. 보통 주젭이라 칭하며, 나주 정씨, 삭녕 최씨, 상산 김씨, 함평 이씨, 전주 이씨등이 오래동안 세거한 마을로, 예전에는 안양변전소 부근을 아랫말, 만안구청 부근을 가운데말, 성문중학교 아래(동)를 내곡동, 중앙병원 부근을 명학동, 덕천국교부근을 벌터(坪村)라 각각 칭하였다.
광복 직전만 해도 이상의 5개 마을의 민가라야 불과 100여호에 지나지 않았으나, 1960년대(?) 중앙로가 개설된 후 시흥군청(전 만안구청,현재 만안여성복지회관 ), 안양시청, 안양상공회의소 등이 들어서면서 번창되기 시작하였다. 만안구청 남쪽은 창녕 성씨의 분묘가 많았는데 도시화로 이장 또는 화장되어 현재는 모두 택지로 조성되어 민가가 들어섰다. 이곳에 있던 묘 중 세상에 알려진 인물로 성후영(1571-1626)이 있다. 임진왜란 때 아버지가 해를 당하자 대신 왜병의 칼을 맞아 장(腸)이 튀어나와 거의 사경(死境)에 이르렀을 때 부인 심씨의 구혈로 살아 일생을 폐업하고 두문불출하고 자취를감추어 스스로 서호처사(西虎處士)라 칭했다. 참고: 안양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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