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4.13/ #도시기록 #박달교 #박달군용지 #곤두레미고개 #만문누리/ 경기도내 전쟁과 분단의 역사 현장을 조사중인 경기문화재연구원 연구원들과 안양시사 편찬 연구위원, 경기문화해설사 등을 안양 현장인 박달교(박달군용지내 일제강점기 건설한 다리), 병목안 철길 흔적(100여M 남은 구간)과 채석장, 문둥바위 등으로 안내하다.
박달군용지 군부대앞에 있는 박달교는 일제강점기 당시인 1930년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다리는 일제강점기 이전에 안양에서 안산으로 가던 옛길의 길목으로 다리를 건넌후 곤두레미 고개를 넘으면 안산땅이다.
박달교는 현재도 군부대로 연결되는 진입로로 사용중으로 이날 현장 조사 및 사진 기록은 군인들의 철저한 통제하에 이루어졌다. 현장에 있던 군인은 현장 조사 연구원들의 카메라와 핸드폰 기록을 일일이 확인했음은 물론이다. 또한 다리 길이를 잴 줄자를 가져가지 않아 조사 연구원들이 이리저리 고심하던 모습을 지켜보던 히사관 계급장을 단 군인들이 감사하게도 줄자를 가져와 직접 다리 길이와 폭을 재어주는 등 협조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일제는 박달군용지에 평양육군병기창 안양분창을 건설하기 위해 이곳에 있던 마을 주민들을 박달2동 호현마을 인근으로 집단 이주시켰다. 기록을 보면 박달 군용지에는 일제강점기 이전 동수암, 막상골, 미름물, 선녀골, 양호다리, 붓골, 웃말, 웃박달리, 햇골 등 8-12개의 마을이 있었는데 일제가 1930년대 평양 육군병기창 안양분창 건설을 하면서 폐동하였다. 또 이곳에 있던 후령군, 엄정구, 엄황, 엄성 등의 묘 및 구만(충신)의 정문 등 선현묘와 문화재가 일실 되었다고 한다.
또 군용지(병기창)를 건설하면서 안양~안산간 곤드레미 고개길을 폐쇄했다. 이후 안산지방을 왕래하던 도로는 박달삼거리에서 호현(범고개)-시흥시 목감동을 잇는 우회도로(박달로)가 신설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현재의 박달교에는 다리 끝자락 난간 콘크리트 기둥에 박달이라 새겨진 글씨가 아직 선명하다. 반대쪽 기둥에는 소화 5년 5월 00라 적혀있는데 세월이 많이 지나 판독하기 다소 어려운 상황이다. 참고로 소화 5년은 서기 1930년이다.
해방 이후 박달군용지에는 미군이 주둔하고 탄약고로 사용된다, 당시 이곳에는 전술핵이 보관됐던 아주 중요한 비밀장소였다. 1968~69년 석수동 미군 83병기대대 전령으로 근무했던 닐 미샬포프 병사가 1968-69년에 찍었던 미군이 박달군용지의 옛 사진을 보면 박달교를 건너면 분지 형태의 넓은 공터가 있고 헬기장과 천막으로 친 막사촌이 있었다.
한편 박달교를 처음 발견한 당시인 지난 2020년 8월 16일 함께 탐사에 나섰던 KBS 이완희 PD가 보내온 자료(아시역사자료센터를 검색해보니 박달교 관련 문서가 있었다는 것)를 보면 1941년 5월 조선군경리부에서 안양-안산 도로 개축공사를 한 설계도가 있는데, 도로의 길이는 12M 폭 1,190M, 7M 폭 5,238M로 그 공사의 일부로 박달교를 만들었던 것 같다는것. 박달교는 길이 15M, 폭 4M라고 되어있는데 처음 만들 때는 목조다리로 만들었다가 나중에 콘크리트로 만들고 해방이후 미군이 보강공사라를 한 것 같다고 하면서 관련 문서 자료를 보내왔었다. 이는 현재 다리 상부의 폭과 한쪽 난간이 없어진 형태, 하부의 교각 등을 볼때 처음 축조된 다리는 폭이 좁았으나 이후 다리의 폭을 넓혔던 것으로 보인다.
<곤두레미고개>
안양 박달동의 자연부락이었던 선녀골(仙女谷)과 시흥 목감동 더푼물(신촌)과의 경계를 이룸. 목감쪽에서 박달동 범고개로 올라가는 오른쪽 더푼물에서 남쪽 약 500미터 거리에 있음.
옛날에는 안양에서 곤두레미 고개를 넘어 소래․안산으로 오갔는데, 숲이 울창하고 인적이 드물어 강도나 산적이 많아 고개를 곤두박질쳐서 빨리 넘어야 했기에 이런 이름이 붙게 되었다고도 하고, 몸을 가누지 못한 술 취한 사람들이 쉬어갔던 고개라 하여 붙인 이름이라고도 한다.
원래는 “곤드레뫼(산)고개”였는데 “곤두레미고개”로 부르기 쉽게 바뀐 것으로 여겨짐.
[정의] 경기도 시흥시 목감동과 경기도 안양시 박달동에 걸쳐 있는 고개.
[개설] 곤두레미고개는 안양시에서 안산시로 연결되는 자동차도로가 개설되기 이전에는 두 지방을 연결하는 유일한 교통로였다.
[명칭 유래] 예전에는 고개가 있는 곳의 산림이 우거져 험준한 데다 후미진 곳이어서 산적이나 강도 등이 많아 이곳을 지나갈 때는 황급히 서둘러 곤두박질쳐야 지나칠 수 있다는 데에서 ‘곤두박이고개'라 했는데, 근대에 들어서 곤두레미고개로 명칭이 바뀌었다고 한다. 또는 술에 만취해서 이 고개에 이르러 잠을 자다가 겨울이면 얼어 죽는 사람이 많았다고 하는데, 이로부터 술에 취해 몸을 가누지 못하는 상태를 의미하는 ‘곤드레' 명칭이 생겨났다고 한다. 곤드래미고개라고도 부른다.
[자연환경] 경기도 안양시에 있는 수리산의 산줄기가 북쪽으로 뻗어 박달로가 통과하는 지점에 이르기까지 고도가 낮아진다. 곤두레미고개는 조남동의 장군곡마을에서 수리산으로부터 흘러 내려온 높이 150m 내외의 구릉 사이를 통과하는 고개이며 높이는 약 80m에 달한다. 구릉지는 경사가 심하지 않은 완사면으로 이루어져 자동차나 사람이 통행하는 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고개 양쪽으로는 일찍부터 농경지가 발달하여 벼농사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행정구역상 안양시에 속하는 고개의 동사면은 군부대의 훈련장으로 변하였고, 시흥시에 속하는 서사면은 여전히 농경지가 남아 있다.
[현황] 곤두레미고개를 왕래하던 도로는 일제강점기에도 폐쇄된 적이 있다. 당시 일제가 평양육군병기창 안양분창을 지금의 안양시에 건설함에 따른 조치였다. 이후 곤두레미고개를 통과하던 도로는 다시 개통되었지만, 지금은 또다시 폐쇄된 상태이다. 고개 동쪽의 안양시 박달동에 군부대가 주둔함에 따라 고개를 통과하던 도로의 통행이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시흥시 목감동과 안양시 박달동은 일반 도로를 통해 연결되고 있다. 박달로라는 도로명을 가진 도로는 안양시와 광명시를 잇는 지방도397호선으로 개통했지만, 1996년에 지방도가 폐지되고 일반 도로로 전환하였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박달군용지의 역사
기록을 ...보면 조선시대에 이곳에는 모두 12개의 자연 취락이 있었는데 일제 강점기에 '평양육군병기차 안양분창' 시설을 조성하기 위해 1937년(일부 기록은 1941년) 일본 육군성에 의해 군용지로 강제 수용 당하면서 모두 쫓겨납니다.
시흥현읍지(1899) 능묘조, 시흥군지, 영월엄씨세보(世譜) , 안양시지(安養市誌) 등의 기록을 보면 군용지는 묘자리로도 좋았던 모양입니다.
태종(太宗)의 일곱째 서자(어머니 덕숙옹주 이씨(德淑翁主 李氏)인 후령군 이간(厚寧君 李衦, 1404∼1455)의 묘가 이곳에 있었는데 일제 강점기에 군용지가 조성되면서 1941년 2월 22일 수원시 장안구 이목동 산 19번지로 이장하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또 임진왜란 때 충신으로 翰林學士를 지내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天曹郞에 임명돼 노왜적 수천병과 전투를 벌이다 죽은 구만의 묘와 숙종 34년(1708)에 族閭를 내려 세윤 비각이 있었으나 일제때 군용지에 편입되어 다른 곳으로 이전되었다고 합니다.
또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인조 10(1632)에 전라도수군절도사(全羅道水軍節度使),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부총관(副摠管)등을 역임한 엄황(嚴愰) 1580(선조 13)∼1653(효종 4) 이란 이가 이곳에 묻혔었는데 군용지가 개설되면서 화장되었다고 합니다.
또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1612년(광해군 4)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을과(乙科) 6등으로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 1625년(인조 3) 사간(司諫)을 거쳐 왕의 자문에 응하기도 했던 엄성 (嚴惺) 선조 8(1575)∼인조 6(1628)의 묘도 이곳에 있었다고 하네요.
마을을 통째로 옮겨야 했으며, 선조들의 묘까지 이장토록 할 정도였으니 군용지는 그야말로 군사 요충지로 면적만도 23만677평에 달하는 방대한크기입니다.
평양 육군병기창 안양분창이 들어서기 전에는 안양에서 수암지방(안산)으로 갈때 박달삼거리에서 곤드래미 고개를 넘어갔는데 군용지가 들어서면서 왕래하던 도로를 폐쇄하고 새로운 도로를 개설했는데 이 도로가 범고개를 넘어 목감, 수암, 안산을 잇는 우회도로로 지금에 이르고 있지요. 곤드레미 고개는 탄약고들이 자리한 콘크리트 벙키로 진입하는 용도로 사용중인 것으로 사료됩니다.
안양 원로이신 '변원신' 어르신의 말씀에 의하면 일제는 2차 대전 때 박달동에 탄약고 시설을 뒀으며, 이곳에서 탄약을 갖고 가서 말레이시아 등 동남아에서 고무나 기름을 가져와 다시 이곳에 저장했다고 합니다.
또 일제의 패망으로 탄약저장 시설과 탄약을 인수한 미군은 일본군 탄약을 안산 넘어가는 본드레미 고개 아래 굴을 파서 그 안에서 폭발시켜 폐기처리했다고 합니다. 당시의 목격자 중의 한 분이셨던 고 변원신 선생은 주민대피령이 내린 가운데 지축을 울리는 폭발소리에 구도심의 창문이란 창문은 모조리 떨어졌고, 파편은 자신이 살고 있던 안양3동 양짓말까지 날아왔다고 증언했습니다.
광복 이후에는 미군이 주둔합니다. 비밀문서에서 해제된 미국 문건(인터넷에서 검색) 보면 1860년대 한국내 '핵탄두 저장소' 들이 있었고 그중 한곳이 '안양리'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곳이 박달동 군용지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 이유는 당시 그 부대에 전령으로 근무하던 '닐 미셜로프'가 찍은 사진(헬기 안)을 설명한 글을 보면 내 발 앞에 핵탄두가 있다고 써 놓았습니다.
한국전쟁이후 부터 1970년대 초까지 박달 군용지는 주한 미 83병기대대가 관리했습니다. 이 부대는 석수동 삼성천옆에 자리했던 대규모 부대(현재 석수 이편한세상아파트)였는데 1970년대 중반까지 있었습니다. 이 부대는 특수탄약을 관리하던 부대로 박달동 수리산 자락의 군용지라 불리우던 탄약 벙커에 있던 전술 핵탄두와 로켓을 관리.운용했지요.
부대내에는 PX는 물론 영화관, 소방대까지 있을 정도로 컸습니다. 당시 부대 주변 동네에는 양복점, 양화점, 잡화점, 병원, 여관(Hotel) , 고깃집, 식당 등이 있었고 미군을 상대로 하숙까지 치면서 당시 석수동은 안양시내 변두리에 있었지만 상권과 생활에 있어서는 오히려 더 풍족했던 동네였습니다.
개인적으로 군용지와 미군에 얽힌 기억이 있습니다. 제가 초등학교(만안초교) 다니던 무렵 안양여고에서 박달리로 가던 길이 흙길이었는데 하교실에 가끔 미군들이 대형 트레일러에 미사일(나이키, 허쿨리스)을 싣고 가던 모습을 목격했었지요. 차량에 타고 있던 미군들은 간혹 사탕과 쵸코렛을 던져 주기도 했는데... 어쩌다 처음보는 것을 던져주었는데 그것은 노란색에 검정글씨(기억이 안나요)가 찍혀있는 과일이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께 보여드렸더니 "이건 귀한 미깡(귤)"인데.. 하시던 말씀이 생각납니다. 미깡은 당시 우리네 시장에서는 볼 수도 없던 것이었지요.
석수동 미군부대는 1970년대 중반쯤 철수하고 현재 그 자리에는 안양 석수대림아파트 단지로 변모했고 경부선 철길에 있던 건널목도 없어졌으나 대림아파트와 경남아너스빌 아파트 단지 사이에는 옛 동네와 골목길의 흔적이 일부 남아있습니다.
미군이 주둔하던 군용지는 1970년 후반부터는 우리 군 부대시설들이 줄줄이 자리합니다. 이 일대는 평지만 면적이 9만3천여㎡(8만2천평)에 달하는데 기존 군 시설외에 육군의 군 부대시설과 서울시민들을 위한 예비군 훈련장이 현재까지 자리하고 있지요.
안양시는 한때 이곳 군용지를 공업지역 조성을 추진합니다. 지난 1994년 박달동 군부지의 대체공업부지를 전제로 호계 1.2동과 안양 7동 일원을 공업 및 준공업지역에서 주거용지로 변경한 '2011년 도시기본계획'을 수립 승인받았으며 '2016년 도시기본계획'에서 호계2동 16만4천여평을 주거용지로 용도변경했으나 2001년 국방부와의 협의에서 부대 이전계획이 없는 것을 확인하면서 물거품이 되고 말지요.
오히려 군용지에는 새로운 군 시설이 들어서게 됩니다. 국방부는 2008년 12월 정보사의 안양이전 결정을 발표한 것이지요. 이에 박달동주민들은 "지난 60여 년간 군부대로 인해 보행권(어린이, 노약자, 학생), 환경권(사격장 총성, 군차량 통행 소음 및 매연), 재산권 침해(군사보호시설 구역의 행위제한), 지역개발의 낙후성(건축물 행위제한 등) 등의 피해를 보며 살아왔다고 2010년까지 이전 반대운동을 벌였었지요.
히지만 안양시, 정보사, 지역주민들이 민·관·군 협의체를 구성하여 '주민지원사업 협약' 을 체결하고 군 부지 한쪽에 박달중학교 신설 및 정보사 진입도로 확장 등 현안 문제를 타결하도 정보사가 들어오면서 동네가 그야말로 천지개벽을 한듯 달라졌지요.
최근에는 문재인 정부 국정과제인 ‘서안양친환경융합테크노밸리’ 조성사업과 맞물려 또다시 관심을 받고있지요.
가칭 안양 박달테크노밸리 조성사업은 문재인 대통령의 19대 대통령선거 공약중 하나로 대규모 군사시설, 환경기초시설(도축장, 폐기물처리), 노후 공업시설(노루페인트) 등으로 개발이 정체된 박달동 일대를 기존 시설 재배치와 공업부지 고도화를 통해 오는 2025년까지 KTX 등의 광역교통망과 광명역세권지구를 연계해 수도권 내 대표적인 첨단산업·문화·주거 복합단지로 조성한다는 계획입니다.
이 사업은 지난 20대 총선에서 이종걸 국회의원의 공약으로 제시된 후 문재인 대통령 후보의 공약으로 담겼다가 정권 출범 이후 국정운영 5개년 계획에 포함된 과제로 채택되면서 내부적인 추진절차를 진행하고 있지요.
사업지역을 살펴보면 전체 부지 342만㎡ 중 군용지가 252만5000㎡, 공업지역 등 사유지가 89만5000㎡에 이릅니다. 특히 군용지 중 50탄약대대가 181만3000㎡, 관동예비군교장이 71만2000㎡에 달하는 등 자연녹지·개발제한구역으로 분류되고 있는데요.
시는 세부적으로 50탄약대대 탄약고를 이전 또는 지하화를 통한 가용부지 확보, 환경기초시설 이전 및 부지 개발, 노루페인트 등 노후 공업시설 이전 및 고도화를 추진해 4차 산업 육성을 위한 친환경 첨단산업, 문화, 주거 복합단지 조성을 이루겠다는 계획이지요.
이와관련 지난 2017년 7월 문재인 정부의 국정운영 5개년 계획에 포함되어 청와대에서 지역공약을 담당하는 황태규 균형발전비서관이 2017년 11월 27일 대상지인 안양시 만안구 박달동 탄약고 일대 현장을 방문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안양시도 발벗고 나서 2018년 3월 9일 제237회 안양시의회 임시회에서 ‘안양시 서안양 친환경 융합테크노밸리 조성 지원에 관한 조례안’과 ‘안양시 행정기구 및 공무원 정원 조례 일부개정조례안’을 원안 가결함으로 박달테크노밸리 조성 사업의 추진과 지원을 위한 근거를 마련했으며, 전담부서(테크노밸리전략관)를 신설하고 사업 추진을 위한 전담인력을 확보할 수 있게 됐지요.
특히 최근에는 국방부가 안양 박달동 소재 50탄약대대 재배치를 위한 운영 소요 검토를 마친 것으로 알려졌지요.
그런데 최근 여기에 변수가 생겼습니다. 정부가 ‘수도권 주택공급 확대 방안’으로 도심 내 유휴부지와 군 유휴시설, 장기 미집행 도시계획시설 등을 활용한다는 계획인데 <시사저널> <조선비즈> 등 일부 언론에서 대상지중 한곳으로 안양 박달테크노밸리 조성사업 지역을 거론한 곳이지요.
정부의 방침에 따라 과거 일제 강점기기 부터 군수물자를 저장하면서 군용지라 불리운 이후 탄약고, 군부대 등으로 개발이 제한되었던 이 지역에 탄약고가 지하로 건설되어 그대로 존치할지 아니면 공공택지로 개발될지 귀추가 주목됩니다.
한편 일제강점기 안양에는 비행기 공장도 있었습니다. 1944년 조선직물(이후 금성방직-대농) 공장에서 비행기 조립응 시작해 시제품 2기를 생산하고, 현 달안동에는 비행기 활주로 공사도 시작하다가 2차 대전이 일본의 패배로 해방되면서 중단되지요. 만약 전쟁이 계속됐다면 안양은 일제의 전투력을 뒷받침하는 전투기지로 기억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박달동군용지(軍用地)의 슬픈사연
박달동 군용지에는 이 땅의 식민역사를 포함하여 농민의 아픈 눈물이 배어있는 땅이다. 즉, 안양시 박달동 및 안양동 일원의 만 677 평에 달하는 지역은 귀속농지에 대하여 276 명의경작인들이 300 여년간조상대대로경작해온세전농토 l 였다
8.15 해방 직전 간악한 일본군은 이 조상 전래의 농토에다 군용시설을 한다는 핑계로 강제로 빼앗아버렸지만,그들은등기부에만육군성 이라해놓았을뿐경작은 그대로 해오다가 조국광복이 되자 그땅을 되찾은 우리 농민들은 기뻐하였다. 그러나 일본식민지화의착취의앞잡이동양척식이탈바꿈한신한공사 가경작료를강제로 징수하여갔으며 그 후 정부수립과 동시에 이 우리의 농토가 일본인 적산 이라 하여 귀속농지관리국 If !I" 에서경작료를받아갔다가농지개혁법 - 에따라합법적으로경작자에게 분배되었던 것이다 즉, 1941 년 일본육군성에 의해 군용지로강제 수용당했지만 경작을 계속해왔고,해 방후농지개혁법에따라경작자에게 분배되었다.
이렇게 분배농지상환곡 - 을 개년 분납부 하고 영농을 하여오던 중농민에게 분배된 이 농지들을 1960 관 5.16 쿠데타후불법적으로그 명의만을국유로등기 하는조치를내리게된다.이에 농지개혁법에따라분배를받아지가상환료 개년분이나납부하여소유권이확정된자기들의유일한농토재산을일부농민들은부득이 땅값의 몇 배의 돈을드려 법에 따른심판을구하고자소유권이전등기청구소송을 제기하였던바, 천만다행 사펼귀정으로 대법원까지 승소하였다(문원식 j 성결대 안양학연구소 소장 2006.6.23 안양시민신문) .
‘박달’이라는 이름의 유래를 현재 채록된 것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박달’은 ‘밝다’에서 파생되었다는 설이 있다. 즉 밝은 땅이라는 뜻이다.
2) 박달은 ‘박치기’에서 알수있듯이 ‘머리’에서 파생되었다. 예를들면 머리산,높은산 등이다
3) ‘달풀 이 있는 바깥 마을‘이라는 설이 있다. 이것은 가장 최근에 조사된 견해다.
4) ‘박달’의 의미는 안과 밖에 근거를 두고 있다. 예전엔 이곳이 달동네였는데 안양의 중심부에서 볼때 밖이라고 하여 ‘밖 달동네’라고 불렀고, 그후 ‘박달동’이 되었다.
그러나 ‘박달’이란 명칭은 매우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이 지역을 지칭하는 이름도 여러 차례 변천하여 그 유래가 깊다.
‘박달리(博達里)’라는 이름이 처음 등장한 시기는 조선 정조대이다. 그후 1963년 1월1일에 시흥군 안양읍 박달리가 만들어지고 그이듬해 박달1,2리로 분리했다. 1973년 7월 1일에는 안양시로 승격하면서 ‘박달동’이 되었고, 1994년 7월 1일에 ‘박달1동’ , ‘박달2동’으로 나뉘어졌다.
박달동의 유래에 대한 주민들의 구술 내용은 이러한 행정구획 변천 외 역사와 부합 하지 않는다, 아마도 이미 조선시대부터 ‘박달’이란 명칭을 사용해 왔다는 사실을 모른채, 안양 중심가에서 벗어나 있는 현재의 지리적 위치에 따른 해석이라고 보인다.
박달리에서 없어지고 남은 동네들 지명
■능골(陵谷) <박달2동>
범고개마을 서남쪽으로 시흥시 목감동 더푼물(新村)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 5호 남짓한 작은 취락이다. 이곳은 일제강점기 초만 해도 안양에서 안산, 소래 등을 가자면 이곳 앞(범고개)을 거쳐야 했으므로 강도.도둑이 득실거렸다고 한다.
마을의 유래는 이 마을 남쪽 약 200m 지점의 논 가운데에 섬같이 생긴 큰 무덤이 있어 애능(兒陵)이라 칭한데서 기인하고 있는데, 이 무덤은 1988년에 김모씨에 의해 경지 정리되었다. 주민의 대부분은 농업으로 생계를 잇고 있으며, 행정구역상으로는 안양시 박달동에 속하나 생활은 이웃 시흥시 목감동 더푼물 주민들과 함께 한다.
마을 초입에는 일우주철(박달동 753-11, 1989년에 설립)과 세원화학(박달동 753-9, 1972년에 설립) 등의 공장이 있고, 마을에서는 1970년대 까지 만 해도 범고개 주민들과 함께 해마다 음력 10월 2일에 범고개 요골에서 산신제(山神祭)를 지냈다.
■동수암(東秀岩) <박달2동>
작대들에 소재한 골짜기 중 가장 큰 골짜기에 있던 마을. 고려 때 창건된 동수암사(東秀岩寺)란 사찰이 있었는데, 사찰 주변에 민가가 생기면서 사찰명을 취해 동수암(東秀岩) 이라 칭한다고 한다.
일설에는 옛 시흥군 수암면 동쪽에 있는 마을이므로 동수암 이라 불렀다고 한다. 이 마을은 파주 염씨와 광주 이씨 등 15호 남짓한 취락이었는데, 일제 강점기에 이곳 일대가 군용지에 편입되면서 폐동되자, 이곳에 살던 주민들은 대부분 인근지역인 시흥시 목감동 더푼물(신촌)과 박달동, 능골로 분산 이주했다.
■미름물 <박달2동>
샛터말 남쪽에 위치해 있었다. 마을 주민들이 식수로 사용하는 대동우물을 미름물이라 했는데, 마을명도 우물명을 취해 미름물 이라 칭했다. 이 마을에 세거한 성씨는 최씨, 김해 김씨 등으로 알려지고 있다. 5호 남짓한 작은 취락이었으나, 일제 때 평양육군병기창 안양분창이 들어서자 폐동 되었다. 이곳에는 엄성(1575-1628, 응교), 엄황(1580-1653, 영흥부사), 엄정구 (1605-1670, 한성좌윤)등 영월 엄씨 선대의 묘가 많았다.
■범고개(虎峴洞) <박달2동>
친목마을 남쪽으로, 박달로변에 위치해 있다. 범고개(虎峴) 아래에 자리잡은 마을이므로 고개이름을 취해 범고개 (虎峴洞)라 칭한다. 예전에는 이곳 남쪽 (현재 군용지에 편입됨)에 웃말(上村)이란 마을이 있었다가 어느 부자가 화재로 가산을 탕진하자 마을을 떠난데 이어, 마을 주민이 범에게 잡혀 죽자 사람 살 곳이 못된다고 하여 모두 지금의 위치로 이주, 정착했다고 한다.
이 마을에 최초로 정착한 성씨는 나주 임씨와 안동 권씨로 알려지고 있으며, 번창하기 시작한 것은 일제강점기에 군용지의 건설로 안양-안산간 도로가 개설된 후 1972년 동아유리공업주식회사(박달동 620-5)등을 시 발로 각종 공장이 들어서면서부터 이다. 마을에서는 십수년 전까지만 해도 음력 10월 2일에 요골초입에 있는 소나무 앞에서 산신제를 지냈다.
■붓골(筆洞.富谷) <박달2동>
공군아파트 서쪽에 있는 마을로, 능성 구씨가 배판한 이래 안동 권씨, 전주 이씨, 김해 김씨등이 세거해 40여호의 촌락을 이루다가, 일제강점기에 군용지(軍用地)가 건설되면서 폐동되었다. 이 마을은 예로부터 물이 풍부할 뿐만 아니라 농지 또한 비옥해 연연세세(年年歲歲) 풍년이 들자 인근의 사람들이 부자가 많이 사는 고을이라 하여 부골 (富谷)이라 불렀는데, 1930년대 일본인들이 한자로 표기하면서 붓골 (筆洞)로 개칭되었다고 한다.
이 곳에는 임진왜란 때 충신으로 유명한 구만의 묘와 정려각(族閭閣)이 있었으나, 일제때 군용지에 편입되어 다른 곳으로 이전되었다. 구만은 한림학사(翰林學士)를 지내다가 선조때(1591) 사화(士禍)로 사면되었고, 이듬 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천조랑(天曹郞)에 임명되었다. 이때 왜란을 피하기 위하여 어머니와 할머니를 모시고 평안도 용만(龍灣)으로 향하던 중,왜병 수천명을 만나 적의 목을 무수히 베었으나 힘이 쇠하여져 적에게 잡힌 몸이 되었다.
그러나 적에게 잡혔어도 굴하지 않고 적을 꾸짖으니 왜병은 끝내 그를 죽이고 말았다. 다행히고 어머니와 할머니는 화를 면하게 되었다. 그 후 유시와 남조가 이르기를 구만은 충성과 효성이 지극하니 그 충효는 가히 일월이 서로 빛을 다투는 것과 같도다 라고 상소하여 숙종 34 년(1708)에 정려(族閭)를 내려 이곳(당시의 지명은 금천현 박달리)에 비각을 세웠다.
■삼봉마을(三峯洞) <박달2동>
삼봉 기슭에 위치한 마을로, 1950년대 말부터 비닐하우스 재배가 시작되면서부터 취락이 이루어졌다. 예전에는 논 가운데에 큰 산소가 있어 일명 섬마을이라 불렀는데, 마을 주민들은 이 산소를 말무덤이라 칭했다.
1970년에 주식회사 삼애기업(박달동 604-1)과 삼신아파트가 건설되면서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였다.
■샛터말(新其村) <박달2동>
조선 중엽에 영월 엄씨가 새로 터를 잡고 살기 시작한 마을로 그 후 달성 서씨, 김해 김씨 등이 세거했다. 일제강점기에 군용지가 건설되자 폐동 되었다. 동수암과 붓골 사이에 있었다.
■선녀골(仙女谷) <박달2동>
곤두레미고개 밑에 있던 마을로, 이곳 골짜기가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수리산 낙맥인데다가 습한 곳이라 안개가 많이 생겨, 흡사 선녀가 사는 고을 같다하여 선녀골 (仙女谷)이라 칭했다.
선녀골은 조선조 태종(太宗)의 11남인 후령군(厚寧君)의 묘를 이곳에 쓴 후, 그의 후손들이 묘하에 세거 하면서부터 취락이 형성될 만큼 전주이씨령군파가 집성(20여호)을 이루었다. 그 후 일제강점기에 평양육군병기창 안양분창이 건설되면서 폐동되었고, 후령군의 묘는 수원시 장안구 이목동으로 이장되었다.
■웃박달리(上博達里) <박달2동>
조선시대 박달동(리)에는 모두 12개의 자연취락이 있었는데, 그중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마을이 웃박달리였다고 한다. 선녀골 동쪽에 있던 웃박달리는 파평윤씨, 김해 김씨 등 15여 호가 일제강점기에 군용지(평양육군병기창 안양분창)가 건설되면서 폐동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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