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보따리/자료

[20220820]경기도 도시이야기 안양편-최병렬(경기문화재단)

안양똑딱이 2022. 8. 20. 01:49

지난 2월 어느날 인천일보에 근무했던 이동화기자로 부터 연락이 왔다. 경기문화재단이 빌행한 책(경기도 도시이야기 경기그레이트북스 30)에 내 이야기도 실려있다면서 책자와 관련 내용의 페이지를 찍은 사진을 보내왔다.

이 책을의 글을 쓴 사람은 세사람(양훈도, 이동화, 김예옥)인데 그중 한명과 인터뷰한 기억이 없어 안양지역정보뱅크(지금은 안양지역도시기록연구소)에 올린 글들을 편집해 안양에 대한 이야기를 게제한듯 싶었으나 2020년 가을 무렵 2시간 여  인터뷰한 내용을 기록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는 당시 저를 인터뷰한  김예옥님이 2022.08.25일 전화를  걸어 알려주어서  알게됐다. 또한 책자를 보내려 했으나 연락이 안돼  보내지 못했다며  보내준다고하여 주소를 알려드렸다.

왜 인터뷰했던  기억이 없지 의아해 했던  궁금증 하나가 해소됐다. 

어쨋든 경기문화재단이 발행한 경기도 도시이야기(안양:사라진 마을과 공단 편)에 실린 글을 정리해본다..

 

경기도 도시이야기 ; 경기그레이트북스 30

이 책은 ‘개발 광풍 속 경기도 도시의 모습’을 다각적으로 살펴보고자 기획되었다. 특히 경기도의 현재는 수도 서울의 성장과 밀접한 관계가 있기에 경기-서울 관계사에 초점을 맞추었다. 또 우리 사회의 탐욕을 잘 드러내 보여주는 난개발의 현장을 언론 보도를 중심으로 정리하고, 신도시 개발과 난개발의 현장에서 저항했던 주민들의 외침과 몸부림도 전하고자 했다. 아울러 이런 도시에서 살아가는 경기도민의 모습도 담고자 노력했다.

 

안양 : 사라진 마을과 공단

안양지역시민연대(현 안양지역정보뱅크)를 만들어 안양의 시민운동가이자 사회운동가로 활동하고 있는 최병렬 씨는 2013, 안양기억찾기탐사대를 만들었다. 개발로 인해 사라지는 마을을 찾아 골목골목을 누비면서 사진과 글로 기록하기 위해서였다. 15명의 정회원을 가진 이 모임은 매주 한 차례씩 현장을 누비고 있는데 202010월 현재 187차까지 실시했다. 이제는 범위를 넓혀 군포와 의왕지역까지 탐사를 나가고 있다. 최씨 혼자 돌 때도 있고 많을 때는 20-30명의 회원과 시민들이 참여하기도 한다. 그를 만나 이제는 사라진 안양의 마을풍경을 들어본다.(편집자 주)

 

 

시대동市垈洞, 임곡林谷마을

 

도시가 커져갈수록 골목과 마을이 사라지는 게 안타까웠다. 그래서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우선 없어지는 동네를 제일 먼저 탐사하고 그 다음에는 옛것이 남아있는 마을을 돈다. 아무리 돌아도 여전히 돌 곳이 있다. 여름에 갔던 곳을 겨울에 가면 그림이 달라지고, 연립주택지가 단독주택단지로 바뀌는 것 같은 변화가 계속 일어나기 때문에 찍을 거리가 많다. 처음 시작한 것이 20133월이었다. 마을과 골목이 없어지기 시작하니까 그것을 기록으로 남겨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사진가, 건축가, 작가, 영상기록자, 도시재생연구자까지 참여해 각자의 눈으로 작업을 해나가기 시작했다. 다양한 작품을 사진으로 만들고 건축가는 또 다른 식으로 표현하면서 발전, 도전, 기획의 고리로 삼고 있다. 지금까지 한 작업은 안양지역시민연대의 사이트에 올라가 있고, 페이스북에도

올렸다.

임곡마을(수푸루지 마을, 지금의 대림대학과 비산동 일대)20136월에 첫 탐사를 시작하고 그 해 다시 한번 갔고 2018년까지 여러 차례 갔다. 2018년에 철거되어 이주가 시작되었다. 안양의 구시장이 있던 곳은 시대동이라고 했는데, 1950-60년대 가장 번화했던 곳이다. 1950년대 이전에는 5일장이 서던 곳이었고 1929년에는 안양에서 처음으로 전기가 들어온 곳이다. 1930년대부터 1960대까지 안양, 의왕, 과천, 군포지역의 중심지였다. 이 구시장을 통해야 인덕원, 과천, 청계, 서울의 강남을 갈 수 있었다. 시대동의 정확한 위치는 안양역에서 진흥아파트를 넘어가던 철길이 있던 곳이다. 철길을 넘어가야 해서 땡땡이 건널목이라고 했다. 그 철길을 넘으면 시장이 나타나는데 우시장, 대장간, 다방,

이발소, 중국집, 호떡집 같은 것들이 있어서 지역경제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그 끝부분에 태평방직 공장이 있었고, 또 북쪽으로는 한국제지 공장이 있었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과천에 가려면 남부시장에서 그 땡땡이 건널목을 지나고 수푸루지다리(임곡교)를 건너야 비산동이 나오는데 그 비산동 일대가 임곡마을이다. 임곡마을에서 핵심은 구시장이었다. 임곡마을을 지나면 현재 이마트 앞쪽이 나오고 더 나가면 종합운동장이 있고 그 우측에는 공동묘지가 있었다. 거기를 지나면 이제 수촌마을이다. 지금 마을버스 다니는 곳이 옛길이고 거기서 중촌마을과 부림마을을 지나면 인덕원이다. 인덕원을 지나서 청계, 과천, 말죽거리로 넘어갔다. 인덕원은 조선시대 행정관리나 일반 사람들이 머물다 지나는 곳이어서 교통의 중심지였다.

다시 임곡마을로 돌아가 보자. 현재의 진흥육교는 전철이 개통되면서 놓아진 것이고 육교가 있기 전에는 안양 최초의 다방(안양다방), 양복점(광창라사), 정미소(삼창 정미소), 이발소 등이 있었다. 그 당시에는 아이들에게 기찻길 주변은 일종의 공작소이자 놀이터였다. 기차 레일에 못을 놔서 판판하게 펴서는 연필깎이로 사용하기도 했다.

한국제지가 있던 곳은 1970년대와 80년대까지도 막걸리집이 다섯 군데나 있어서 공장을 다니는 직원들의 참새방앗간 구실을 했다. 구시장이 그렇게 번화했으면서도 없어진 이유는 아마 안양천이 가까워 물이 범람해서일 것이다.

자주 시장이 침수되어 1961116일 안양 4동에 새시장(지금의 중앙시장)이 들어서면서 구시장의 상권이 침체되기 시작했다. 현재 구시장 자리에는 주택공사에서 지은 뜰안채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고(2004), 한국제지 자리에는 삼성 래미안아파트가 생겼고 태평방직 자리에는 진흥아파트가 들어서면서 구시장은 흔적없이 사라졌다. 최근에는 진흥아파트도 낡아서 철거에 들어갔다. 그 현장을 가보니 가장 안타까운 게 나무였다. 단지 안에 잘 키워졌던 나무들이 베어져나가는 것을 보자니 너무 슬픈 마음이 들었다. 단지에서 오래 키웠던 나무들은 다른 곳으로 옮겼다가 이식해 새로 심는 게 필요하다. 기후변화가 심해지고 있으므로 몇 십년 키워 놓은 나무를 나무뱅크를 만들어 제대로 키웠으면 좋겠다. 도시의 가로수를 보면 마치 닭발처럼 되어 있다.

임곡마을은 임곡1(대림대 동편), 임곡2(대림대 남쪽), 임곡3지구(나머지 동네로 현재 아파트를 짓고 있음)로 나뉘어 개발이 되고 있다. 원래 살던 주민들이 다 떠나고 주거문화가 아파트로 변화하면서 사람들이 바뀌니까 아쉬움이 많다. 원주민이 떠나서 생활 수준이나 삶의 환경이 더 좋아졌을지는 모르지만 공동체가 깨지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살던 주민이나 외주인들이나 아파트가 들어서면 재산증식이 된다고 생각하겠지만 그 콘크리트문화가 과연 좋은지는 모르겠다.

 

 

안양을 먹여살린 3천 궁녀, 금성·태평방직

 

태평방직의 전신은 1953, 안양읍 안양리 97번지 일대에 자본금 1억환으로 설립된 삼흥방직이었다. 당시 방기 1만 추, 직기 50대를 구비하고 195410월부터 생산을 시작하지만 자금 사정으로 안양3동에 있는 금성방직에 1956515일 넘어갔다.

당시 금성방직과 태평방직은 지역경제를 살리는 대표적인 기업으로 두 공장에서 일하는 수많은 여성 노동자들이 1960-70년대 안양 경제발전에 지대한 공을 세웠다. 당시 두 공장에만 3천여 명의 여성 노동자들이 근무하고 있어 월급날이 되면 안양 시내 식당과 술집이 호황을 누릴 정도였다. 금성방직과 태평방직의 3천 궁녀가 안양을 먹여 살린다는 소리가 오랫동안 회자될 정도로 안양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있다.

특히 태평방직과 금성방직은 안양의 인구를 늘리는 계기도 만들었다. 1960년대 당시 안양시 인구는 불과 5만여 명 정도에 불과해 공장에서 일할 인력이 태부족했다. 이 때문에 두 공장에서는 수시로 지방에 내려가 일할 사람을 모집했는데 보릿고개로 어려웠던 시기였기에 중학교를 갓 졸업하면 취업이 가능했다. 이대 충청도와 전라도 경상도에서 상경한 이들이 많았는데 그중 가까운 충청도에서 올라오는 경우가 제일 많았다. 이들이 안양에서 남자를 만나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리기도 했지만 오빠, 삼촌 등 형제 친척들까지 안양으로 불러오는 계기를 만들었다. 그래서 안양은 현재까지 팔도민이 골고루 분포돼 있고 다른 위성도시와 달리 팔도향우회가 매우 활성화되는 배경으로 작용했다.

이 같은 사실은 안양시 인구수에서도 나타난다. 1941101일 시흥군 서이면이 안양면으로 개칭되었던 당시의 인구는 10,000, 1949815일 안양읍 승격 당시 인구는 20,021명에 불과했는데 많은 공장이 들어서면서 197371일 안양시 승격 당시에는 111,075명으로 무려 9만여 명이나 증가했다.

태평방직은 196710월 금성방직과 함께 대한농산(대농)에 매각되고 한국토지금고에 의해 택지개발을 통해 대규모 아파트단지가 들어섰는데 1983년 신축한 진흥아파트(5/12. 33개동1940세대)도 이제 재개발을 앞두고 있다.

 

 

안양근로자회관을 아십니까?

 

1960년대의 안양은 정부가 이끈 경제시책으로 섬유공장, 제지공장으로 대표되는 많은 공장이 들어서면서 급성장한 도시였다. 공장이 하나둘 생겨나자 근로자들의 수도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근로자들은 갑자기 팽창된 인구 때문에 살 집을 구할 수 없었다. 그러자 안양 사람들은 남는 방을 하숙이나 자취방으로 내놓게 되었는데 이것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많은 근로자들이 주거지를 찾는데 어려움을 겪었고 특히 섬유, 제지 등 경공업이 많았던 만큼 여성 근로자들의 어려움은 더 커 지역사회의 문제로까지 대두되었다.

당시 장내동성당(현 중앙성당) 주임신부였던 정원진(루까) 신부는 교회가 지역의 문제를 적극 해결해야 한다면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자청하고 나섰다. 그는 근로자들을 위한 기숙사 시설을 만들자고 교구에 건의했다. 1960년대 말 수원교구는 갓 설정된 가난한 교구였다. 세운 지 얼마 되지 않은 교구청도 외국의 원조를 받은 기금으로 건설비를 충당했을 정도다. 하지만 당시 교구장이었던 윤공희 대주교는 이 건의를 받아들여 기숙사 시설 신축사업에 나섰다. 윤 대주교는 국제가톨릭형제회(AFI)에 협조를 요청했고 AFI는 독일인 선교사 서말가리와 한성인(벨따)을 파견했다. 말가리와 한 벨따는 성당 한 귀퉁이에 살면서 일용노동자들에게 국수를 무료로 제공하는 사업을 시작했고, 오스트리아와 독일 등에 지원을 요청했다. 그후 교구는 장내동성당 안양유치원이 있던 땅을 내놓았고 외국의 원조기관과 외국인 후원자들은 후원금을 내놓았다. 1969910, 김수환 추기경, 윤공희 대주교, 독일대사 등이 참석한 가운데 여자청소년기숙사와 강당을 갖춘 근로자회관개관식이 거행되었다. ‘근로자회관은 이때부터 2007년까지 근로청소년, 노동조합, 노인, 외국인노동자 등 소외된 이웃과 시민을 위한 다양한 사업과 프로그램을 운영하였다.

1976년에는 건물 증축을 통해 남성근로자를 위한 기숙사도 마련했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근로자복지 프로그램을 실시하기 시작했다. 근로청소년기숙사의 경우 10~20대 청소년·청년층이 주를 이루었던 만큼, 단순히 숙식을 제공하는데 그치지 않고 낯선 도시에서 가정처럼 의지할 수 있는 곳으로 거듭나기 위해 힘을 기울였다. 장시간 노동에다 저임금에 시달리는 청소년 근로자들을 경제적으로 지원하기도 하고 인간적 성숙을 위한 공동체 생활교육과 사회적응에 필요한 교양교육, 노동자들의 권리를 위한 노동교실, 신앙 교육 등을 제공하였던 것이다. 근로청소년 기숙사를 거쳐간 근로자 수만도 2000여 명에 달한다.

또 근로자회관은 노동자 및 일반 시민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도 운했다. 노동법 강좌 등 노동교육과 당시 국내에서는 상영조차 할 수 없었던 사회·노동 관련 영화 상영, 서예, 꽃꽂이, 포크댄스, 그림교실, 판화교실, 탈춤, 사물놀이 등 사회교육프로그램, 노조 창립, 워크숍 및 세미나, 교육 등 옥내외 행사가 수월치 않았던 시기에 지역사회 단체들에 공간 제공, 근로자가정 임대주택사업, 무료급식소 등 시대의 변화와 더불어 다양한 사업들을 펼쳤다.

1970년대 안양권(안양·군포·의왕)은 서울의 위성도시면서도 1980년대 중반까지 민주화운동이나 사회운동이 부재한 지역이었다.

1970년대 안양권(안양·군포·의왕)은 서울의 위성도시면서도 1980년대 중반까지 민주화운동이나 사회운동이 부재한 지역이었다. 대학에서의 민주화 시위도 없었고 교수를 비롯한 지식인들의 활동도 없었다. 교회를 비롯한 종교계에서의 활동도 거의 없었다. 이러한 척박한 조건에서 1982년부터 장내동성당의 근로자회관(현 전진상복지관)에서 JOC(가톨릭교회 노동청년회) 활동이 시작되었고. 1983~87년 사이에 노동법 강좌가 진행되었다. 이러한 조용한 활동은 안양권 노동운동의 기초가 되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지역의 근로자 문제가 점차 해소되자 회관은 빈민 청소년, 이주노동자, 노인 등 소외계층을 위한 지원으로 활동영역을 넓혀나갔다. 1980년에는 근로자 가정을 위한 임대용 주택(10가구)과 상가를 신축해 청소년기숙사에 살았던 기숙생이 결혼 후 가정을 꾸리면 살 공간을 마련해주기도 했다. 1990년도에는 노인과 노숙인을 위한 무료급식소를 운영해 매일 점심에 따뜻한 한 끼를 제공했다.

1998, 천주교구는 그동안의 기숙사 사업을 종료하고 근로자회관에서 천주교 수원교구 전진상복지관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시대의 변화에 따른 것이었다. 전진상복지관에서는 외국인노동자 상담소를 비롯해 가정폭력상담소 및 여성 쉼터 등을 운영했다. 그러다 20071231, 지역사회 운동 및 노동사업의 39년간 대장정을 마무리하고 문을 닫게 되었다. 전진상복지관은 천주교 수원교구로 넘어갔다.

근로자회관은 안양지역을 빛낸 공로를 인정받아 국민훈장 목련장을 비롯 ,독일 십자훈장, ‘좋은 한국인 대상’, ‘아름다운 사람상등을 수상했다.

한편 천주교 수원교구는 이 건물에 대한 대대적인 리모델링 공사를 진행하여 20091216일부터 가톨릭복지회관으로 재개관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기록하는 1인 문화원’, 최병렬

 

안양에 살았던 사람이라면 근로자회관에 대한 추억을 하나쯤은 갖고 있을 법하다. 근로자회관이 노동자들의 터전으로 자리를 잡아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던 1980년대부터 90년대까지 그곳에서 총무를 맡았던 최병렬 씨는 자연스럽게 시민운동가로 변모해갔다. 1997년 안양지역에 시민단체의 필요성이 대두되었을 때 단체 조직에 앞장을 선 것도 근로자

회관에서의 경험 때문이었다. 그때 꾸린 단체가 안양지역시민연대였다. 사진을 찍어 기록을 남기는 것이 그가 하는 시민운동의 주요 활동이다.

중학교 때부터 사진을 찍었다는 그는 군대에서도 사진병이었다고 한다. 그러다 근로자회관에서 사진의 중요성을 알게 되었다. “거기서 일할 때 독일인 수녀님이 계셨는데 그분이 우리나라에 대한 사진과 영상을 많이 가지고 계셨어요. 그래서 저도 근로자들의 생활 모습이나 데모 현장 등을 사진으로 찍으면서 기록에 대해 알아갔던 거죠.” 근로자회관을 나온 후에도 기록을 남기는 작업을 계속 해와서 지금까지 찍은 사진은 셀 수 없이 많다. 그는 외장하드 3-4개가 된다고 말했다. 그가 없어지는 것들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민들도, 공무원들도 도시나 마을이 가진 고유한 것들에 관심이 없어요. 그래서 없어지는 거죠. 대표적인 것을 꼽아보겠습니다. 안양역에서 병목안까지 철도가 있었어요. 1934년 경부선 복선화 작업을 하면서 경인선 철도를 놓을 때 자갈을 나르던 레일이었죠. 병목안에서 자갈을 깨서 안양역까지 싣고가 평택이나 인천으로 나르는 거예요. 그 화물열차가 다니던 레일이었는데 80년대까지 100미터는 남아있었어요, 그런데 결국 다 없어졌어요.” 일제의 식민지 흔적이 시나브로 없어지는 것에 아쉬움이 너무 컸다.

그는 다른 예를 하나 더 들었다. 보통 안양 3동을 대농단지라고 부르는데 그 유래를 설명했다. 1944년에는 그 자리에 조선비행기주식회사가 있었는데 일제가 화신백화점의 박흥식에게 만주에 있던 비행기 생산시설을 이곳으로 옮겨 맡게 했고 1회기까지 생산하다가 해방을 맞게 되었단다. 그후 금성방직이라는 섬유공장이 들어섰고 이것이 역시 방직회사인 대농으로 이어지면서 대농단지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된 것. 80년대까지도 공터로 남아있던 이곳은 그후 택지분양을 하면서 개인주택이 들어서게 되었고 안양의 중산층들은 이 대농단지의 주택을 분양받아 들어가고자 하는 게 꿈이었다. 마당이 있는 이층 양옥집은 사람들의 로망이었던 것. 90년대에 접어들면서 평촌의 신도시가 개발되자 사람들은 다시 신도시로 이주했고, 이후 비산동의 래미안이나 동편마을의 아파트로 입주하면서 인구의 이동이 이루어졌다. “1970년대 말까지 안양에서는 만안구가 살기 좋았어요. 관공서가 다 모여있었기 때문이죠. 그러다가 신도시가 조성되면서 관공서도 다 평촌으로 옮겨가 그곳이 중심지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는 근로자회관에서 일할 때 안양, 의왕의 노조집회를 위해서나 아니면 사물놀이나 판화를 배우려는 단체에 강당을 대여하면서 시민 노동운동을 알게 되었다. 세상이 민주화되면서 시민단체의 활동이 줄어들자 그는 사라져가는 것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역사는 미래의 근거 자료입니다. 과거와 현재 것을 미래와 연결시켜 보존하는 게 중요합니다. 앞으로 건강이 허락하는 한 계속 기록을 정리할 생각입니다. 저 개인적으로도 안양 토박이로 60년동안 살아온 삶을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 기록해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