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사진기록/오래된곳

[20190703]100년(1901년) 넘는 안양 석수동 한옥 기와집

안양똑딱이 2019. 7. 2. 2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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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양시 석수동 화창초등학교 아랫길(안양시 화창로 92번길 10)에 자리한 한옥 한채.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바로 천장 대들보에 쓰여진 상량문에 신축년(1901년) 2월로 기록돼 있어 지어진지 100년이 넘는 안양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건물로 가히 안양시의 문화유산감이라 할수 있다.
과거 안양읍내에 있던 옛날 집들은 도시 개발로 인해 모두 사라졌지만 이 집은 도심 변두리였기에 남아 있지 않았을까 싶다.
집안에 들어가 자세히 살펴보지 못했지만 대문 위로 솟아 있는 나무틀을 볼때 1900년 당시 비교적 신분이 있던 사람이 살았던 집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현재 이 한옥이 자리한 화창마을이 재개발 추진중으로 몇년 지나지 않아 철거될 것으로 보여 안타깝다.
안양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건축물인 이 집에 대한 조사가 필요할듯 싶다.
한편 이 한옥 주택이 자리한 마을은 조선조 말엽까지만 해도 미곡을 저장하는 창고와 철쭉밭이 있던 곳이라 하여 꽃챙이(花倉洞)이라 불렀다. 조선지지자료 경기도 시흥군편에 申昌 이라고 기재된 것으로 보아 예전엔 이곳 일대가 안양천변에 위치한 곶(申, 바다에 뽀죽하게 내민 땅)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마을 인근 산자락(만안구 석수동 산168)에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이항복 문하에서 수학하고, 과거에 급제한 후 인조 때에는 황해도관찰사, 사간원 대사간, 의금부총관을, 효종 때에는 도승지, 공조판서, 예조펀서, 병조판서를 지낸 박서(1602-1653) 신도비와 무덤이 있다.
신도비는 종2품이상 관리를 지낸 사람의 묘 아래 길가에 세우는 석비인데 박서신도비는 1665년 만들어 졌는데 사각형의 받침돌위에 비신을 세우고 그 위에 팔작지붕 형태의 옥개석을 얹은 형태인데, 받침돌과 옥개석은 화강암을, 비신은 대리석을 사용했으며 총고 3.82m에 달한다.
비문의 글은 낙정재(樂靜齋) 조석윤(趙錫胤)이 썼다. 박서가 병조판서를 지낼때 효종의 두터운 신임을 받으며 군사력 증강에 힘쓰기도 하였으며, 52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나자 효종이 매우 애통해 하였다고 한다.
신도비가 세워진 위치는 화창마을에서 똥골(현 안양천생태이야기관)로 넘어가는 화창로 우측으로 과거에는 높은 고개였으나 산자락을 깍아 도로가 놓여지면서 신도비는 길에서 잘 보이지 않은 도로변 담장 위 산자락에 자리하고 했으며 전혀 관리가 안되는듯 사람의 접근이 곤란할 정도로 수풀이 우거져 있어 도로에서 잘 보이지도 않고 접근도 쉽지않다.
박서 묘소는 신도비로부터 북쪽 20m 지점 산자락에 있으며 묘소앞에 문인석이 서있고 묘비는 없다. 신도비에서 묘소 안내판 및 가는 길 이정표 조차 없어 무관심한 문화재 관리에 씁쓸하다. 안양에 있는 유일한 신도비라면 좀 더 관리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박서 (朴 )1602(선조 35)∼1653(효종 4)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상지(尙之), 호는 현계(玄溪). 온양출신. 병조좌랑(兵曹佐郞) 효남(孝男)의 아들이다. 일찌기 부친을 여의고 백형(伯兄)에게 글을 배워 열살 때부터 시(詩)를 잘 썼다. 그 후 이항복(李恒福)문하에서 수학했다. 인조 2(1624)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3년 후 금화사별좌(禁火司別座)가 되었다가 곧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선공감주부(膳工監主簿)·종묘사직장(宗廟寺直長)을 역임했다. 1630년(인조 8)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 2등에 급제하여 1632년 정언(正言)이 되었고, 1634년 지평(持平)이 되었으며, 이듬해 《홍문록 弘文錄》에 올라 홍문관부수찬(弘文館副修撰)·부교리(副校理)를 역임하였다. 1641년 수찬(修撰)이 된 뒤, 집의(執義)·교리(校理)를 차례로 거쳐, 1643년 사간(司諫)이 되었으며, 이어서 황해도관찰사에 재직중에 선정을 펴 칭송이 자자했다. 1647년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임명되어 천추사(千秋使)로 연경으로 갔다가 돌아온 후 도승지에 제수되었다. 이듬해 사간원대사간(司諫院大司諫)·사헌부대사헌(司憲府大司憲)을 거쳐 한성부 좌윤 겸 의금부총관(義禁府摠管)으로 있을 때 대사간과 함께 차자(箚子)를 올려 의견을 말하자 왕이 차자에는 비유가 사리에 맞지 않으니 고쳐서 바칠 것을 명했으나 '차자를 고치라고 명하는 것은 왕의 잘못이므로 언론을 맡은 신하로서 어찌 할 말도 아니하고 묵묵히 있을 수 있겠으며 임금의 잘못을 간한 내용은 고칠 수 없다' 고 하여 왕의 비위를 건드려 경주부윤으로 좌천당하였다. 인조가 승하(1649년)하자 그해 겨울에 부총관(副摠管)으로 기용되었고 효종1(1650년)도승지에 이어 공조판서가 되었으며, 지경연(知經筵)과 지춘추관사를 겸하였고, 이듬해 진향부사(進香副使)로 다시 청나라에 다녀와 대사헌·지의금부사·우참찬·예조판서 등을 거쳐, 다시 병조판서가 되었다. 1653년 병조판서로 병권확립에 진력하다가 병으로 휴가를 얻어 집에 있다가 갑자기 병세가 위독하여 52세를 일기로 사망하자, 왕은 매우 애통해 하며 해조(該曹)로 하여금 관재(棺材)와 상장(喪葬)에 필요한 여러가지 물자를 지급하도록 하였다. 묘는 안양시 만안구 석수동에 있는데, 신도비의 비문은 조석윤(趙錫胤)이 찬(撰)했다.
참고문헌 : 인조실록(仁祖實錄), 효종실록(孝宗實錄), 국조방목( 國朝榜目), 시흥군지, 경기인물지, 시흥인물고, 안양시지(安養市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