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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안양탐사대 152차 탐방(20190330)_군포1동과 군포역 만세운동 100주년 행사

안양똑딱이 2019. 3. 27. 15:00

 

안양탐사대 152차_군포1동과 군포역 만세운동 100주년 행사

3월 30일(토) 오후 3시/ 집결_군포역 1번 출구


안양기억찾기탐사대(이하 안양탐사대)가 2019년 탐사를 3월부터 재개하며 관심있는 분들과 함께 합니다.

올해에는 재개발, 재건축 추진으로 삶의 흔적들이 사라지고 있는 동네와 골목을 기록으로 남기는 작업을 인근 군포와 의왕지역까지 확대하고 과거 1번국도, 오래된 옛길, 마을길, 개천과 물길도 걸어 보고, 각종 표지석과 오래된 흔적을 찾아 기록하고 그 의미를 되새기는 활동을 할 계획입니다.

 

2019년 3월 30일(토) 오후 3시 출발하는 152차 여정은 100년전 3.1 독립만세이 전개됐던 안양권역 운동지를 찾아서 3번째로 1차 의왕 고천동, 2차 군포장 만세운동길(안양 호계동 구군포사거리-군포역)에 이어 군포역과 군포1동 일대 골목을 돌아볼 계획입니다.

특히 이날 군포역에서는 군포시가 만세운동 100주년 행사를 대규모로 개최해 볼거리도 풍성합니다. 행사는 오전부터 열리는데 오후 3시까지의 시간은 각자 자율적으로 행사(아래 행사포스터 참조)를 참관하시고 오후3시 군포역 1번 출구앞에서 만나겠습니다.

덧붙여 군포역 일대는 군포의 원도심으로 산본 신도시가 들어서기전 가장 번화가였던 곳으로 1959년 문을 연 설렁탕집으로 1970년대 대통령의 입맛을 사로잡은 안양권에서 가장 오래된 노포식당인 군포식당과 외국인이 운영하는 맛집들이 많습니다. 이날 탐사 후에는 군포역앞 골목에서 베트남 현지인이 직접 운영하는 쌀국수 맛집( Pho Viet Quan(포비에꽌 )을 찾아 봄맞이 뒷풀이를 할까 합니다. 

 

군포장 만세운동

 100년전 1919년 3월 31일 군포장터(현 안양시 동안구 호계동 666번지/ 시흥군 서이면 호계리)에 모인 2천여명의 주민들은 장터에서 만세를 부르면서 1.8km 떨어진 군포장역 경찰관주재소(현 군포시 군포1동 750-8/ 시흥군 남면 당리) 앞까지 행진하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당시 군포장 규모가 컷기에 시장을 중심으로 안양.군포.의왕지역의 주민들이 함께한 이 만세운동은 사전에 치밀한 계획하에 진행됐으며 매우 조직적으로 전개한 대대적인 시위운동이었는데 군포역 경찰관주재소의 일본 경찰은 이를 멈추기 위해 군대까지 불러들여 무차별적으로 총을 쏘며 강제 해산에 나선다.

군포시는 조국독립을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았던 분들의 애국심과 희생정신을 많은 이와 함께 기억하기 위해 2016년 5월 10일 군포역 광장에 ‘군포항일독립 만세운동기념탑’을 세웠다. 높이 11m의 기념탑은 3∙1 정신을 상징하는 3개의 기둥 위에 항일의 혼을 의미하는 불꽃을 두 손으로 감싸는 형상을 하고 있으며 탑의 양옆에는 독립운동에 참여한 시민들과 이들을 총으로 제압하려는 일본 경찰의 대조적인 모습이 조각돼 있다.

반면 안양시는 호계동 구사거리 군포장이 있던 곳이 100년전 3월 31일 만세운동이 시작된 곳임에도 이를 알리는 만세운동 표지석이나 조형물은 커녕 이를 시민들에게 알리는 홍보도 전혀 없어 안양에서의 만세운동 연구와 이를 알리는 작업이 필요하다.

 

군포역

군포에 있는 경부선의 기차정거장이다. 광무 8년(1904) 일본이 경부선 철도부설권을 얻어 개통됨에 따라 1905년 1월 1일부터 업무를 개시한 이후 군포의 이름이 전국에 알려지고 남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정식 행정지명인 군포읍으로 개명되었으며, 시 승격으로 오늘의 군포시가 되는 등 군포라는 이름이 깊이 뿌리박은 근원은 군포역의 이름에서 유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군포역 주변은 당리에서 으뜸되는 마을이며, 군포읍 소재지로서 학교·우체국·경찰지서·상설시장 등이 있다.

 

당넘어(堂下里)

계명고교 주변에 자리잡은 마을로 정식명칭은 당하리(堂下里)이다. 선시대에 당말 사람들이 마을의 편안과 풍년을 기원하는 당제를 이 마을 뒤에 있는 도당사(都堂詞)에서 지냈다. 이후 도당사 너머에 취락이 형성되자 "당넘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마을의 동동 제의(祭儀)와 관련하여 지명이 유래된 사실을 알수 있다.

 

도램말(渡來洞)

군포1동 동사무소 주변으로써 밤바위산과 47번 국도 안에 자리잡은 마을이다. 도내말 즉 길안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도랫말'이라 부르게 되었다. 일설에는 옛날 이 마을에 의좋은 형제가 살았다. 형은 자식이 없으나 아우는 슬하에 자식이 많아 형에게 자식을 양자할 것을 제의했으나, 형이 이를 거절하므로 동생이 멀리 떠나가 살았다고 한다. 그 후 형이 죽자 아우가 돌아와 살았는데, 이로부터 이 마을을 도래말이라 했다.

 

동막

군포중학교 아래(동쪽)에 위치한 마을이다. 이곳의 동막마을(花山洞)이 개발되기 전에는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낮은 구릉에는 키 큰 나무가 없어 봄철이면 진달래꽃·철쭉꽃이 만발하여 '화산동'이라고 불렀다.
동막의 지명유래는 다른 지방에서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① 충북 청원군 강내면 내곡리는 "막을 짓고 살았으므로"

② 강원 철원군 갈말은 "옹기를 만드는 막이 있었으므로"

③ 충남 보령시 옹천군 평리는 "나무토막으로 막을 짓고 살았으므로"
등으로 막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우리 군포의 동막에도 아마 무슨 막이 있었던 것은 아닌지 헤아려본다. 농경사회에서 점심이나 휴식을 위해 편의시설인 모정을 일반적으로 세웠기 때문이다.


아구랑(阿口洞)

상업은행 군포지점 위(서쪽)에 자리잡은 마을이다. 조선 중엽에 흰개 2마리가 입을 벌리고 이곳 언덕을 넘어 갔다고 하여 「아구랑」이라 불렀다고 한다. 일부에서는 이곳의 지세가 개가 입을 벌리고 있는 모습이기 때문에 아구랑 이라 했다고도 한다.

 

우래산 (雨來山)

우래산(129.5m)은 군포고등학교와 군포중학교 사이에 있는 산이다. 이곳에는 세조대 호조참판과 대호군을 역임한 홍일동의 묘가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답사하여 보니 법해암 뒤에 몇 기의 산소가 있을 뿐 장군의 묘소는 찾을 수가 없었다. 산 이름의 유래는 무엇일까? 혹 옛날에 홍장군의 묘를 모실 때 많은 사람들이 이 산에 올랐는데 마침 비가 와서 비에 젖었던 고로 그 후 비오던 산 또는 비맞았던 산이라 해서 '우래산'이라고 전해온 것은 아닐까. 아니면 어느 지체높은 분이 이 산에 올랐다가 비를 맞았기에 이르는 말은 아닌지 등으로 추리해 본다.

 

월구지 고개

재궁동의 쟁골과 당동의 아구랑 사이에 있는 고개인데, 고갯마루에 법해암이 있다. 이 고개를 일명 '당말고개' 또는 '굴다리'라고도 한다. 또 '월구지고개' 는 달이 걸치는 고개 즉 '월걸이 고개'가 변한 이름이라고 한다.

 

흐린내

이 내는 군포1동, 오금동, 대야동의 경계에 있는 감투봉(189.1m)에서 발원하여 군포1동의 새터말골, 당거리들을 지나 군포1동, 2동과 당정동의 경계를 이루면서 흐린내교, 금정1교, 금정2교, 검정3교를 지나 금호교 못 미쳐서 맑은내 즉 군포천과 합류하여 안양천이 되고 한강으로 유입되는 내이다. 흐린내라는 이름은 이 내의 상류지역이 진흙지대이므로 물이 언제나 흐리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연혁

1912: 과천군 남면 당리,봉성리

1914: 시흥군 남면 당리,봉성리

1914. 12: 시흥군 남면사무소 현위치 이전

1979. 5. 1: 경기도 군포시 당리

1989. 1. 1: 군포시 군포1동(당동)

1998. 10. 1: 당정동 군포1동으로 통합

 

 

 

 

 

 

 

 

 

군포장의 역사

 

안양시 지명유래』에 따르면, 군포장은 현재의 안양시 호계3동 구장터길 일원으로 호계동 삼신아파트와 진우아파트 지역에 인접한 구군포 사거리 부근이다. 이곳 구장터 부근 도로는 구군포길로 불리기도 하며, 옛 군포장이 위치하던 지역은 ‘구장터1로’에서 ‘구장터3로’까지의 도로 명칭을 지니고 있어 이곳이 장터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군포와 안양, 의왕의 경계점인 호계3거리 인근인 이곳은 한양-과천-인덕원-사그네(고천)-지지대고개 구간인 삼남길과 한양-금천-안양-사그네(고천)-지지대고개 구간인 시흥대로가 교차하던 수원과 안양, 안산, 과천의 길목으로 조선시대부터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 중반까지 안양.군포.의왕 일대에서 가장 규모가 컷던 장(5일장)이 섰으며 당시에는 상업적 요충지였다.

5일마다 개설되던 군포장은 처음에 군포천장(軍浦川場)이라 불리웠다. 1770년 편찬된『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에 ‘군포천장(軍浦川場)’이라 표기되어 있는데 군포천 옆에 장이 섰기 때문으로 보인다.

숙종25년(1699)에 간행된 [과천현 신수지읍지]와 [과천현지도]에 '군포천'이라 표기되어 있고, 철종12년(1861) 김정호 선생이 발간한 [대동여지도]에도 '군포천'이라 표기되어 있다.

군포장이 서던 곳(현 호계동, 구 군포사거리)은 시흥길과 삼남길의 갈림길이다. 또 안양천의 상류로 옛날부터 수운을 이용하는 군포 포구로서 널리 알려져 왔기에 한강에서 부터 물자운송이 용이했을 것으로 보인다.

군포장은 조선시대 지도에도 표기될 정도로 컸다. 과천시지를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흥선대원군(1820~1898)은 국방력의 강화를 위해 전국 군현과 군사기지(진보와 수영 및 병영), 역참 등의 지도와 지리지를 제작하여 올릴 것을 명령하였다. 이에 1872년 과천현에서 직접 그려 올린 [과천지도]를 보면 [해동지도]에는 표시되지 않았던 안양장과 군포장이 표시되어 있다. 그런데 그 표시 방법이 특이하다. 두 개의 장을 만안교에서 왼쪽 아래(남쪽)의 삼남대로와 연결된 도로가 관통하고 있는 모습으로 그린 것이다.

[임원십육지(林園十六志)](1827)에서도 군포장과 안양장이 있었음이 확인된다.

군포장이 서는 날은 이웃 안양장과 더불어 수차례 바뀌어 왔다. 조선시기에는 개시일이 3․8일로 나와 있는데 1905년 군포장이 되면서 1․6일로, 1923년에는 5․10일로, 1926년에는 2․7일로 나타나는 등 주변장의 영향에 따라 변화를 거듭한 것으로 보인다.

군포장은 충청도에까지 입소문이 흘러 장돌뱅이들과 장꾼들을 불러 모았다고 한다. 담배를 비롯하여 소금, 광목 등과 쌀, 콩, 조, 보리쌀 등 농산물이 주로 거래되었으며, 안양, 군포, 의왕, 과천 등은 물론 멀리는 용인, 남양, 판교 등지의 상인이 붐벼 성시를 이루었다. 군포장의 명물은 씨름과 정월 대보름에 개최되는 줄다리기로, 이때는 시장의 열기가 고조를 이뤘다고 한다.

활기 넘치는 군포장은 역 명칭에도 영향을 미친다. 광무4년(1900)에 경부선 철도를 가설하면서 군포장에서 다소 거리가 떨어진 군포 남면 당리에 역사를 짓고 역명을 군포장역(軍浦場驛)이라 했기 때문이다. 역사 설치 후 민가가 늘어나자 군포장(현 호계3동)을 구 군포라 했고 '당말'이라 부르던 '군포장역'(현 군포역) 인근을 신 군포로 부르기 시작하였다.

번창하던 군포장은 1925년 소위 을축년 대홍수로 맑은내가 범람하자 군포역 앞으로 이전하고 시장 명칭을 그대로 승계한다. 당시 안양 북쪽에 있던 안양장도 맑은내의 범람으로 피해를 입자 안양1동 소재 구시장(안양1동 진흥아파트앞)으로 장을 옮겼는데 상설시장으로 자리 잡으면서 명칭이 안양시장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특히 1938년 경부선 복선화가 되면서 기차역 주변이 지역유통의 중심지로 자리잡아 거주지로 커지면서 군포장역은 군포역으로 이름을 바꾸게 된다. 1960년대에 와서 5일장은 도시화와 함께 사라진다. 이미 그 자리는 상설시장이 자리잡았다. 처음 장이 서던 곳은 구군포 또는 구장터로 불리웠다.
군포장은 1930년대 말까지만 하더라도 활발하게 장이 섰다. 수원과 안양, 안산, 남양, 과천에서 모여들 수 있는 길목이었기에 숱한 이야깃 거리를 생산하면서 발전했고, 수많은 장꾼들의 기대를 불러 모았다. 웬만한 장꾼들이라면 <군포장>을 모르는 사람들이 없을 정도였다고 하니 그 규모가 얼마나 컸던지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겠다.

당시 군포장하면 소설가 이무영을 빼놓을 수 없다. 죽마지우이자 시인인 ‘이흡’을 따라 군포로 낙향했던 이무영의 눈에 비친 군포장은 예사로움이 아니었다. 그는 군포장으로 생산되는 이야기를 1938년 동아일보에 <군포장 깍두기>로 연재하면서 장터의 애환과 서민들의 생황상을 그려냈다. 그 후, 이무영은 10여년간 군포에 거주하면서 농경생활에 깊은 참여를 하게 되고, 그 실천적인 체험을 바탕으로 <궁촌기> <흙의 노예> 등을 발표함으로서 <상록수>의 작가 심훈과 더불어 농민 문학의 양대 산맥이라 불리울 정도로 군포는, 그의 문학 활동에 큰 영향을 끼쳤다. 아울러 궁촌 마을(군포) 하면 이무영의 농민소설 요람지로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군포장에서는 1919년 3월 31일 2천여명의 주민들이 모여 만세운동을 펼쳤다. 군포장터(현 안양시 동안구 호계동 666번지/ 시흥군 서이면 호계리)에 모인 주민들은 장터에서 만세를 부르면서 1.8km 떨어진 군포장역 경찰관주재소(현 군포시 군포1동 750-8/ 시흥군 남면 당리) 앞까지 행진하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당시 군포장 규모가 컷기에 시장을 중심으로 안양.의왕지역의 주민들까지 함께한 이 만세운동은 사전에 치밀한 계획하에 진행됐으며 매우 조직적으로 전개한 대대적인 시위운동이었는데 군포역 경찰관주재소의 일본 경찰은 이를 멈추기 위해 군대까지 불러들여 무차별적으로 총을 쏘며 강제 해산에 나선다.

 

 

안양기억찾기탐사대는 도시와 마을과 동네의 골목길에서 사라지고 변화되는 흔적들을 찾아 지난 2013년 2월부터 매주 토요일 마을과 동네 골목길을 걷는 마실을 해 왔습니다. 사진, 영상, 스케치, 이야기 등으로 도시를 기억하고 기록하고 이를 통해 또다른 프로젝트, 기획 등을 해보려는 도시.마을.골목연구, 건축, 사진, 걷기 등에 관심있는 시민은 탐사여정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탐사에 참여코자 하시는 분은 SNS 페이스북 안양기억찾기탐사대 ( www.facebook.com/groups/132023160294699/ )에 접속후 신청해 주시거나 전화주시기 바랍니다. 문의: 길라잡이 최병렬(016-311-1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