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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611]안양 망해암 석조 미륵불 전신 실체 처음 드러나다

안양똑딱이 2026. 6. 11. 09:12

 

안양시 비산동 비봉산에 자리한 망해암 용화전에 모셔진 석조여래입상(石造如來立像)의 전신이 처음으로 그 실체를 드러냈다.

 

안양시에서는 지난 2017년 보존처리공사를 통해 불상에 도포된 안료를 제거한데 이어 최근에는 용화전 보수공사를 진행중이다 

 

망해암 석조여래입상은 보개 하단부의 성화(成化) 15년 명문을 통해, 조선 성종 10년(1479)이라는 조성연대가 확인되었으나 오랜기간 불상의 무릎 아래는 법당 마루 아래에 묻히고  불상의 윗부분만 법당의 마루 위에 노출되어 있고, 불상 앞에는 불단이 놓여있어 그 실체를 알수 없었다. 다욱이  불상에 전체적으로 검은색과 흰색 안료가 칠해져 있어 온전한 모습을 확인하기 어려웠다.

 

이에 안양시가 지난 2017년 불상에 칠해진 안료를 제거하자, 눈꺼풀, 볼, 턱 등의 양감이 더욱 두드러지게 보였고, 석조여래입상 본연의 예스러운 아름다움이 나타났다.

이제 남은 것은 마루 아래에 묻힌 불상 하부였다. 안양시에서는 2021년 초부터 몇 차례 전문가 현지조사를 통해 불상 하부 조사의 필요성을 파악하였고, 망해암의 협조를 얻어 마루 일부를 제거하고 석조여래입상 하부를 조사하였다. 그 결과, 마루 아래에서 불상의 두 발과 추정 연화문이 새겨져 있는 대좌 일부를 확인하였다. 마루 아래의 깊이가 약 1m이고, 마루 위 불상의 높이가 약 2.4m이므로, 석조여래입상의 총 높이는 약 3.4m로 확인했다.

이러한 조사 결과, 망해암 석조여래입상은 신체비례, 수인, 옷주름 등의 특징을 근거로 하여 고려 전기 경기~충청지역 대형 석조여래입상 계통에 속하는 동시에, 정확한 조성 연대를 알 수 있는 보개를 갖추어 미술사적, 역사적 가치가 크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에 안양시와 망해암에서는 경기도 유형문화재 지정 신청을 하였고, 2022년 5월 27일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신규 지정되었다.

 

망해암 석조여래입상이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면서 안양시 관내 문화재로는 11번째가 되며, 석조불상으로는 1980년 삼막사 마애삼존불상 이후 40여년만이다.

 

따라서 망해암에 모셔진 석조여래입상(석조미륵불)은 대좌에서 머리까지 하나의 암석을 사용하여 조각하였으며, 전체 높이는 340cm 규모로 설법인의 여래입상이라는 점, 봉안된 전각이 용화전이라는 사실 등을 통해 미륵불을 표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형상은 원형 보개(寶蓋)를 쓰고 도톰한 코와 입, 길게 늘어진 귓볼에 법의(法依)는 통견(通肩)이며 굵은 U자형의 옷자락선이 조밀하게 표현 되어 있고 전체적으로 안정된 상호(相好) 등은 당시의 불교신앙과 대불조성(大佛造成)에 대한 시대적 유형을 살피는 자료로 평가된다. 

 

특히 석보미륵불 보개 하단 후면에 “成化十五年(1479.성종10)四月日造成”이라는 명문 기록이 남아 있다. 이를 통해 석조여래입상은 조선 전기의 석불로 알려져 왔으나, 양감이 두드러진 눈과 볼, 짧은 인중과 비교적 길고 두툼한 턱, 괴체화된 불신(佛身) 등은 고려 전기의 불상에서 보이는 특징이어서 조선 성종대에 보개를 결합한 사례로 추정되고 있다.

 

현재는 용화전 보수공사가 진행중이다. 전신이 드러난 석조여래입상을 세운 상태에서 전각을 다시 씌울것으로 보인다.  

 

한편 망해암(望海庵)  '바다를 바라보는 암자'라는 뜻으로 맑은 날에는 서해 낙조까지 조망할 수 있어 안양의 대표적인 전망 명소로  대한불교조계종(大韓佛敎曹溪宗) 소속 사찰이다.

 

1986년에 세워진 <안양망해암사적비>에 따르면 망해암은 신라문무왕5년(665)에 원효대사가 창건했다고 한다. 이것은 1940년대에 쓰여진 <봉은본말지>에 따른 것으로 보이지만 원효 창건설을 뒷받침할만한 근거는 없다. 대부분의 사찰이 원효와 의상의 창건설을 주장하는 것은 두 스님이 직접 창건했다기보다는 그 스님들을 계맥하고 있다는 차원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망해암이 역사기록에 등장하는 것은 조선 태종 때의 일이다. 태종은 한양의 풍수적 균형을 위해 사방에 절을 지었는데 이 때 망해암도 중수되었다. 망해암의 창건은 관악산의 연주암처럼 기암괴석 틈바구니에 옹색하게 지어진 지형적 특징으로 볼 때 드센 기를 누르고 취약한 부분을 치료하기 위한 비보사찰의 성격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적비에는 또 세종 때의 미륵불에 대한 전설이 기록되어 있다.

삼남지방에서 세곡을 거두어 여러 척의 배에 나누어 싣고 인천 앞바다의 팔미도(八尾島)를 지나고 있었다. 이 때 갑자기 심한 풍랑이 일어 배들이 전복될 위기에 처했다. 생사의 기로에서 당황한 선원들이 우왕좌왕하며 어쩔 줄 몰라 할 때 홀연히 스님 한분이 뱃머리에 나타나 선원들을 안심시키고 스님의 인도로 무사히 위기를 면하게 되었다. 풍랑도 잠잠해지고 안정되자 목숨을 건진 선원들은 ‘대사님은 어느 절에 사십니까?’하고 물었다. 이에 스님은 ‘관악산 망해암에 있노라’하고 또 홀연히 사라졌다. 선원일행은 한강까지 무사히 도착한 후 생명의 은인이요 신통자재했던 스님을 찾아 망해암에 올랐다. 하지만 스님은 보이지 않고 다만 스님과 용모가 비슷한 미륵부처님 만이 법당에 모셔져 있었다. 그들은 부처님의 크신 자비와 신통력으로 자신들이 살아났음을 깨닫고 곧 왕에게 상소하여 사실을 알렸다. 소식을 들은 왕은 크게 탄복하여 매년 한 섬씩의 공양미를 불전에 올리도록 했으며 이것은 이후 400년간 지속되었다.

이러한 전설은 미륵불의 신통력을 나타내는 것이며 다만 전설을 통해 태종 이후 조선 왕실과 인연을 갖고 망해암이 유지되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설이외에 조선중기 이후의 역사를 알 수 있는 것은 없으며 다만 순조3년(1803)에 홍대비(洪大妃)가 재물을 내어 중수했다고 하였다. 여기서 홍대비는 혜경궁 홍씨를 말하는 것으로 사도세자의 부인을 가리킨다. 조선시대에서 가장 비극적인 삶을 살다간 여인으로 꼽히는 혜경궁 홍씨가 절을 중창한 것은 남편의 비극적인 죽음을 달래기 위함이라고 보인다.

 

이후 철종14년(1863)에 대련(大蓮)주지스님이 중창하였고 1922년에 화재로 전소된 것을 1926년에 법당과 요사채를 중건했다. 1939년에는 용화전을 중건하고 1940년에는 대방을 중수하였으나 6.25전쟁으로 또다시 전소했다. 그래서 지금의 건물들은 6.25이후에 모두 새로 중창한 것들이다. 1973년에는 보경스님이 대방을 증축하고 도량을 일신하였다.

지금은 꽤 여러 채의 건물들이 있다. 절은 전체적으로 인천 앞바다를 바라보며 서향하고 있다. 현재는 차량으로 오르기 때문에 절 뒤쪽이라고 할 수 있는 동쪽에서 진입한다. 망해암의 주전은 미륵불을 모신 용화전이다. 용화전은 6.25 직후인 1952년에 지어진 것으로 정면3칸, 측면2칸인데 당시의 어려운 사정을 반영하듯 규모도 작고 부재의 쓰임도 열악하다. 전면에만 조각한 살미부재를 사용해 장식했으며 나머지 삼면은 아무런 장식이 없다. 처마는 부연이 있는 겹처마이고 팔작지붕이지만 웅장함과 화려함은 전혀 찾아 볼 수 없는 소박한 건물이다. 내부에는 미륵석불입상을 모셨는데 가슴 이하는 마루 밑에 묻히고 그 이상만 나와 있다. 얼굴과 몸은 하얗게 회를 발랐는데 특히 얼굴은 두껍게 발라 석불의 느낌이 전혀 없고 미륵불의 소박하고 투박한 맛이 사라졌다. 머리에는 둥근 두관을 썼는데 검은색 칠을 했다. 석불의 높이는 340㎝인데 극히 일부분만 노출되어 있다. 장기적으로는 건물을 헐고 원래 모습처럼 야외에 노출된 미륵석불로 중창불사 할 계획을 갖고 있다.

용화전 바로 앞에는 3층으로 된 콘크리트 건물의 설법전을 두었다. 1973년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원래 용도는 대방이었다고 한다. 대방은 경기도 사찰에서 많이 나타나는 것으로 왕실이나 귀족들의 원찰에서 왕실이나 귀족들이 절을 찾았을 때 기도하는 건물이다. 대개 불전 앞에 지으며 불전보다 큰 것이 특징이다. 미륵전 서북쪽으로는 정면3칸, 측면1칸의 맞배집으로 지은 삼성각이 있으며 그 앞에 석탑과 사적비가 놓였다. 미륵전 남쪽으로는 서향하여 정면3칸, 측면2칸의 규모가 작은 맞배건물로 관음전이 놓였으며 그 남쪽으로 인접하여 사방 단칸의 범종각이 있다. 관음전과 범종각 앞쪽, 즉 서쪽으로는 민가풍의 선실과 객실이 놓여 선방과 요사채의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러한 여러 건물들은 대개 바위 암반을 활용해 경사지에 옹기종기 놓였으며 건물들 앞으로는 최근에 마당을 만들고 마당 앞쪽에 정면8칸, 측면2칸의 우람한 누각을 새로 지었다. 이곳은 현재 종무소로 쓰고 있는데 규모가 절을 압도한다. 중창불사 계획도를 보면 앞으로 설법전과 관음전, 요사채 등을 헐고 정면3칸, 측면3칸의 대형불전을 지을 계획을 갖고 있다. 이러한 중창불사의 일환으로 대형 누각건물을 근래에 지은 것이다.

살고 있는 절집 사람들은 불편할지 모르지만 초창의 망해암은 기암괴석 사이사이에 보일 듯 말듯 건물들이 숨어들어가 자연과 약수가 어우러져 소박하고 멋진 풍경을 만들었다. 그러나 지금처럼 불사가 된다면 건물에 눌려 자연풍경은 소멸하고 운치는 사라질 것으로 보인다. 대지 면적도 턱없이 부족한 산 중턱에 이렇게 큰 사찰을 지어야 하는지 역사와 문화적 맥락에서 살펴보았으면 싶다.

 

관악산의 지류인 비봉산 정상 아래에 자리한 망해암은 산 정상의 좁은 대지와 절벽을 이용하여 건물들이 배치되어 있는데 <봉은사말사지>에 따르면 신라 때 원효대사가 창건했다고 하며 신경준이 지은 <가람고>에도 나오는 유서 깊은 사찰로 1407년(태종 7)에 왕명을 받아 중수하였고, 1803년(순조 3)에 정조의 어머니 홍대비가 중건하였으며, 1863년(철종 14)에 대연화상이 다시 중수하였다. 이후 6·25전쟁으로 완전히 폐사되었던 것을 승려 유청봉이 용화전, 삼성각, 요사(寮舍)를 재건하고 사적비를 세우는 등 사찰을 새롭게 정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