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2년 지방지도중 과천지도(果川地圖)
1800년대 군포와 안양에서 장이 열린듯 1872년 지방지도 <과천현>편 지도에 軍浦場과 安養場이 명기돼 있다.
흥선대원군(1820~1898)은 국방력의 강화를 위해 전국 군현과 군사기지(진보와 수영 및 병영), 역참 등의 지도와 지리지를 제작하여 올릴 것을 명령하였다. 이에 1872년 과천현에서 직접 그려 올린 [과천지도]를 보면 [해동지도]에는 표시되지 않았던 안양장(安養場)과 군포장(軍浦場)이 표시되어 있다. 당시 군포장은 과천현 관내이며 안양장은 금천현 관내였다. 그런데 그 표시 방법이 특이하다. 두 개의 장을 만안교에서 왼쪽 아래(남쪽)의 삼남대로와 연결된 도로가 관통하고 있는 모습으로 그린 것이다.
『안양시 지명유래』등 역사적 기록을 들여다보면 군포장(軍浦場)은 안양장(安養場) 보다도 역사가 더 깊다. 군포장(軍浦場)은 수원에서 지지대 고개를 넘어 안양을 거쳐 한양으로 가던 시흥로 역로(驛路)의 중간 지점인 현재의 안양천 (맑은내, 군포천) 군포교와 구군포교 중간 지역인 안양시 호계동 평촌두산위브(더프리임+리버뷰) 아파트 단지와 호계구사거리 주변으로 군포장이 사라진 이후에도 이곳을 구장터라 불렀다.
또 주변 도로는 구군포길로 불리우고, 옛 군포장이 위치하던 지역에는 ‘구장터1로’에서 ‘구장터3로’까지의 도로 명칭으로 지명한바 있어 이곳이 장터였음을 증명하고 있다.
5일마다 개설되던 군포장은 처음에 군포천장(軍浦川場)이라 불리웠다. 1770년 편찬된『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에 ‘군포천장(軍浦川場)’이라 표기되어 있는데 군포천 옆에 장이 섰기 때문으로 보인다.
숙종25년(1699)에 간행된 [과천현 신수지읍지]와 [과천현지도]에 '군포천'이라 표기되어 있고, 철종12년(1861) 김정호 선생이 발간한 [대동여지도]에도 '군포천'이라 표기되어 있다.
군포장(軍浦場)은 조선시대부터 있었는데 도양리, 지금의 안양시 호계3동 구군포사거리 근처였다. 이곳은 시흥길과 삼남길의 갈림길이다. 이 군포장은 수원 북문밖장과 연계되어 있어서, 19세기 후반에는 작은 장으로 언급되지만 인근 안양장에 비해서는 3배의 장세를 내고 있어 안양장보다 훨씬 활성화되어 있던 것으로 보인다. 또 안양천의 상류로 옛날부터 수운을 이용하는 군포 포구로서 널리 알려져 왔기에 한강에서 부터 물자운송이 용이했을 것으로 보인다.
경부선 철도를 놓을 때 당시 과천군 남면 당리, 지금의 군포시에 역을 짓고 군포장으로 들어가는 역이라 해 이름을 군포장역으로 지었다. 이 군포장역이 지금의 군포역이다. 만약 이때 역 이름을 지명에서 따서 당리역이라고 지었으면 시 이름도 당리시가 되지 않았을까?
사실 원래는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군포장(현 안양 호계구사거리)을 바로 지나서 수원과 의왕을 가르는 지지대고개를 지나도록 노선을 정했는데, 황실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땅인 지지대 고개를 훼손하는데 반대하는 수원지역민들의 반발로 지금의 군포역과 의왕역을 지나도록 우회한 것이다. 원래 계획대로 군포장을 바로 지나도록 노선이 정해졌다면 나중에 안양시가 될 서이면에만 철도역이 둘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1901년 4월 대특 침락과 수탈의 발판으로 경부철도 노선을 그리던 일본인들이 수원을 답사하며 노선을 표시하였을 때 수원사람들은 지지대 고개를 지키고자 했다. 즉 당시 계획된 철도노선은 안양을 지나 지지대 고개를 터널로 뚫고 서문 밖으로 팔달산 뒤쪽을 관통하여 상유천-대황교 동편을 지나는 노선이었다. 이 계획된 노선은 팔달산과 지지대 고개를 훼손하는데, 팔달산이 정조의 사당인 수원 화령전 (水原 華寧殿)의 주산이고 지지대 고개도 정조와 유서 깊은 유적으로 황실에서도 중요하게 여기는 땅이었고, 그 사이에 전답과 분묘가 많기 때문에 수원 지역민들의 반발은 거셌다.
수원 군민들은 남문 밖에서 모여 철도의 지지대 통과 반대 시위를 벌였고, 대한제국 황실도 팔달산과 지지대의 훼손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이에 철도원 총재 유기환은 기존 계획된 노선의 대안으로 군산포-사시현-대대동-서둔동-상유천을 지나는 노선을 주장했다. 결국 경부철도 노선은 수원 군민의 의지대로 수원 읍치에서 서북쪽으로 바같쪽을 돌아 군포-부곡-수원역-병점으로 확정됐다.
지지대 고개와 팔 달산에 터널을 뚫는 난공사를 피해 평야지대를 관통하는 노선이므로 일제의 입장에서도 손해되는 것은 아니었다. 경부선이 1905년 개통되면서 영등포-부곡 수원-병점-오산-진위-서정리- 평택으로 이어지는 경부 철도의 노정을 따라 변화의 흐름이 밀려 왔다. 그 거대한 흐름은 일본의 탐욕스러운 자본과 경이로운 산업적 기술로 무장한 채 식민지적 수탈과 자본주의적 이윤의 극대화를 가져 오는무기였다.
지지대 고개는 1번 국도, 수원과 의왕이 맞닿은 곳에 위치하는데, 정조 이전의 과거에는 서울(의왕)에서 수원으로 넘을 때의 이름이 사근 현 즉 사근고개(지도의 야구르트삼거리 위의 골사그내(골사근내)라는 지명이 남아있다)라 했고 수원에서 서울(의왕)로 넘을 때는 고개의 우측에 미륵당이 있어 미륵고개, 즉 미륵현(배#에)으로 불렸던 곳이다.
경조는 아버지의 묘소인 현릉원을 참배하고 되돌아가는 길에 이 고개를 넘으면 수원 땅 족 현통원이 있는 화산이 보이지 않으니 이 고개에 서 어가를 멈추고, 내가 이 고개를 넘어 한양 길로 접어들면 원소는 영영 멀어지는구나' 하고 머웃거려 귀경길을 지체하면서 더디게 진행했다. 이에 1795년 을묘년 원행을 마치고 서울로 을라가는 길에 원래 고개 이름을 늦을 '지( (遲)'자를 2개나 붙여서 '지지대(遲遲臺)'라 고쳐 부르게 했다.
역사적으로 군포장(軍浦場)은 조선시대 지도에도 표기될 정도로 컸다. 1872년 지방지도-과천편에는 군포장과 안양장(安養場)이 표기돼 있다. [임원십육지(林園十六志)](1827)에서도 군포장과 안양장이 있었음이 확인된다.
군포장이 서는 날은 이웃 안양장과 더불어 수차례 바뀌어 왔다. 조선시기에는 개시일이 3․8일로 나와 있는데 1905년 군포장이 되면서 1․6일로, 1923년에는 5․10일로, 1926년에는 2․7일로 나타나는 등 주변장의 영향에 따라 변화를 거듭한 것으로 보인다.
군포장은 충청도에까지 입소문이 흘러 장돌뱅이들과 장꾼들을 불러 모았다고 한다. 담배를 비롯하여 소금, 광목 등과 쌀, 콩, 조, 보리쌀 등 농산물이 주로 거래되었으며, 안양, 군포, 의왕, 과천 등은 물론 멀리는 용인, 남양, 판교 등지의 상인이 붐벼 성시를 이루었다. 군포장의 명물은 씨름과 정월 대보름에 개최되는 줄다리기로, 이때는 시장의 열기가 고조를 이뤘다고 한다.
활기 넘치는 군포장은 역 명칭에도 영향을 미친다. 광무4년(1900)에 경부선 철도를 가설하면서 군포장에서 다소 거리가 떨어진 군포 남면 당리에 역사를 짓고 역명을 군포장역(軍浦場驛)이라 했기 때문이다.(영업개시 1905년 1월 1일) 역사 설치 후 민가가 늘어나자 군포역 일대 또한 점차 상설로 문을 여는 가게들도 생기는 등 주거지로 자리잡기 시작한다.
군포장역이 생기면서 주변에 면사무소·순사주재소·우편소 등 주요 시설도 자리를 잡았다. 1913년에는 군포장역의 이용객수가 연간 2만 9,727명, 발착화물은 1,997t으로 이용객수 연간 2만 7,166명, 발착화물 1,367t이었던 안양역보다 더 컸다. 이는 지금의 의왕역인 부곡간이정차장이 1944년 세워지기 전까지는 의왕과 반월 주민들도 이 역을 이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후 안양 지역이 군포 지역보다 더 먼저 산업화하면서 군포와 안양의 세는 뒤집어지고 만다.
특히 군포장(軍浦場)하면 만세 시위를 빠트릴 수 없다. 만세 시위는 1919년 3월 31일 군포와 안양 인근의 주민 2,000여 명이 모여 펼졌는데 당시 시위 군중은 경찰관주재소(시흥군 남면 당리 군포장역 앞)로 행진하며 시위를 계속했다. 특히 주민들이 사전에 매우 조직적이고 치밀한 계획하에서 대대적인 시위운동을 전개한 것으로 짐작된다. 이는 당시 군포장이 안양과 의왕, 군포의 경계지이자 당시 서울-수원 가도에서 과천, 안산으로 갈라지는 곳으로서 상업적 요지였기에 시장을 중심으로 인근의 주민 참여가 자연스럽게 이뤄질 수 있었다는 분석이다.( 독립기념관 사적지 http://sajeok.i815.or.kr/i815/view_region/1755 )
1938년 경부선 복선화가 되고 기차역 주변이 지역유통의 중심지로 자리잡자 그해 4월 1일부로 군포장역(軍浦場驛)은 군포역(軍浦驛)으로 역명이 바뀌게 된다. 또 5월 1일에는 새로 신축한 역사가 준공된다.
번창하던 군포장은 1925년 소위 을축년 대홍수로 맑은내(군포천, 안양천)이 범람하자 그해 12월 23일 장을 군포역 앞(현재의 군포 역전시장)으로 이전하고 5일장 시장 명칭은 그대로 승계한다. 당시 안양 북쪽에 있던 안양장도 하천 범람으로 피해를 입자 안양1동 소재 구시장(안양1동 진흥아파트앞)으로 장을 옮기고 상설시장인 안양시장으로 개설했는데 그해인 1925년 12월 안양시장이 조선총독부 경기도지사에 의해 인가되었다.
역이 설치되면서 지역의 중심이 이동하였고, 군포라는 지명이 유지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던 군포장 마저 이전해 오면서 군포역 일대가 기존 ‘군포’를 대신하여 새롭게 군포가 되면서 5일장으로 열리던 군포장은 도시화와 함께 사라지고 상설시장(현 군포역전시장)이 생긴다. 이후 옛 군포장이 서던 지역(호계3동)을 구군포(舊軍浦)라 했고 '당말'이라 부르던 군포역 인근을 신군포로 부르기 시작하였다.
번창하던 군포장은 1925년 소위 을축년 대홍수로 맑은내(군포천, 안양천)이 범람하자 그해 12월 23일 장을 군포역 앞(현재의 군포 역전시장)으로 이전하고 5일장 시장 명칭은 그대로 승계한다. 당시 안양 북쪽에 있던 안양장도 하천 범람으로 피해를 입자 안양1동 소재 구시장(안양1동 진흥아파트앞)으로 장을 옮기고 상설시장인 안양시장으로 개설했는데 그해인 1925년 12월 안양시장이 조선총독부 경기도지사에 의해 인가되었다.
[참고글]시흥의 열째 딸, 군포
한때는 안양보다 더 번화했던 군포장역에서 태어나다
브런치스토리 by 이원규 May 21. 2024
https://brunch.co.kr/@wgmagazine/13
지방지도 설명
과천은 과천시, 안양시, 군포시와 서울시 서초구와 동작구 일부에 해당한다. 읍치는 관문동이었고, 관아 터는 현재의 과천초등학교 자리인데, 지금도 객사(지도상의 행궁과 인접하였다)의 주춧돌이 교정에 남아 있다. 冠岳山을 주산, 淸溪山을 안산으로 여기는 과천읍은 한양에서 삼남지방으로 가는 대로변에 위치하였으며, 과천읍내는 읍취락인 동시에 교통취락의 역할이 컸다.
고구려의 율목군(栗木郡), 신라 경덕왕 때는 율진군(栗津郡), 고려 초에는 과주(果州)라 불렀다. 조선 태종 13년(1413)부터 과천(果川)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주변 지역과 합해진 시기도 있었다. 고려 현종 9년에는 광주(廣州)에, 조선 태종 14년에는 금천(衿川)과 합해져 금과(衿果)라 불리기도 했다. 세조 때에도 잠시 금천에 합해진 적이 있으나 이후 조선시대 내내 독립된 군현으로 존재하였다.
1914년 3월 1일 군면 폐합에 의해 시흥군에 편입되면서 과천면으로 불렸다. 과천시 중앙동 주민센터를 옛 면사무소 위치로 보면 된다. 1982년부터 정부 제 2 종합청사와 서울대공원이 들어섰고 1986년 1월 1일부터 과천시로 불린다.
위에 있는 조선후기 지방지도 과천지도는 한강을 지도 오른쪽에 배치하였다. 나루터인 노량진, 동작진, 한강진을 표시하였다. 노량진과 동작진 옆에 그려놓은 용양봉저정은 정조가 배다리를 건넌 후 쉬어갔던 곳이다.
지도 위쪽에 그려 놓은 산이 과천의 진산(鎭山)인 관악산이다. 연주대와 자운암이 보인다.
한강을 건너 수원으로 향했던 두 갈래 길이 보인다. 관악산 서쪽을 지나는 길은 시흥통로이다. 만안석교를 지나는 길이다. 또 다른 길은 남태령을 넘어 과천행궁을 지난다.
지도에 行宮이나 행궁터가 보이는 것은 정조대왕의 초기 헌릉원행 등 왕의 행차가 잦은 구간이었기 때문이다. 다리가 많은 것도 같은 이유이다. 향교는 지금도 관악산 등산로 입구에 남아 있다. 南泰嶺은 본디 여우고개라 했으나 정조대왕이 수행원에게 고개 이름을 물었을 때 속된 이름을 꺼내지 못했던 수행원이 ‘남태령’이라 답한 데서 이름이 바뀌었다는 전설이 있다. 서울에 올라가는 관문이었기에, ‘남태령에서 긴다’ ‘과천에서 긴다’는 말이 행인들 사이에서 전해져 왔다.
관악산은 한강으로 유입되는 하천의 발원지가 된다. 관악산 서쪽에서는 도림천이 나와 안양천과 합류하여 한강으로 들어간다. 이 하천은 조선시대 시흥 땅에 해당하므로 이 지도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관악산 동쪽에서는 양재천이 나와 탄천과 합류하여 한강으로 유입된다. 지도 오른쪽 아래에 양재천교를 그려 놓았다. 동작진 옆에 그려진 승방천은 지금은 복개된 사당천이다.
현재는 서울특별시에 속하는 강남 지역은 조선시대에는 경기도였다. 관악산에서 한강까지 과천현이었다. 지도 아래쪽에는 청계산이, 왼쪽에는 수리산이 그려졌다. 그 사이에는 안양장, 군포장, 군포천, 인덕원천이 표시되었다. 지금보다 훨씬 넓은 지역이 조선시대 과천현이었음을 알 수 있다.
과천시가 최근 ‘남태령 옛길’을 복원해 놓았다. 삼남대로는 이 고개에서 지금의 동작대로를 따라 북상해 銅雀津(동재기나루)에 이르러 한강을 건너 한성으로 들어갔다.
軍浦場은 이름 그대로 현 군포시의 기초가 된 장터거리인데, 지금도 ‘구장터’(현재 안양 호계구사거리)라는 취락명이 남아 있다. 기타 鷺粱津을 거치는 시흥로, 漢江津과 良才川橋를 거치는 영남대로 등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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