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 비산3동 매곡마을의 전설
경기도 안양시 비산3동에는 옛날부터 마장골(梅谷洞)이란 마을이 있었다. 구름울(雲谷洞)과 안날미(內飛山) 사이에 위치해 마장골을 웃말, 구름울을 아랫말이라 불렀다 한다. 조선시대 관가에서 사용하던 말을 이곳에서 사육했기 때문에 마장골이라 불렀는데 오늘날 매곡(梅谷)마을이라 불리는 곳이 이 곳이라는 것이다.
매곡마을로 불린 연유에는 조선 중엽 마장골에 사는 어떤 농부의 아내가 밭에서 일을 하며 갓난아기는 풀밭에서 놀게 했는데 갑자기 큰 매가 날아와 아기를 낚아채 날아갔다. 임금님이 이 소식을 듣고 원님을 보냈으나 도착했을 때는 이미 아기는 없어져 이후 매가 자취를 감추었다 하여 매곡동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슬픈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다.
현재 이 지역은 안양종합운동장을 비롯하여 실내체육관, 실내빙상장, 실내수영장 등 안양의 스포츠 메카이다.
매가 날아와 아기를 낚아채 간 마을, 안양 비산3동
안양문화 제3호(1984년)에서
매곡마을의 전설
김행웅( 안양문화원 부원장)
"安養은 관악산과 수리신의 정기를 이어빋아 냐날이 발전해 가는 공엽도시이며 수도 서울의 판문으로서 아름다운 자연은 이 고장의 자랑업니다"
위의 글은 안양시민현장 내용중의 일부이다. 나날이 발천해 가는 공업도시라고 운운하였지만 세계속의 한국, 공업입국으로서 발전 성장을 자랑한 우리고장의 표현입니다.
옛날의 안양의 모습은 관악산과 수리산하에 자리잡고 산세수렴하며 세속의 물은 옥류와 같아서 안양사랍들의 인심이 좋고 지하수가 맑아 사랑 살기가 좋다하여 우리 고장의 이름이 안양이라 불리워졌는지도 모릅니다.
또한 전원도시로서 안양땅의 절반 가량은 포도밭으로 이루어져 포도하연 안양, 안양하연 포도를 연상하리만큼 유명했던 것입니다.
특히 물이 좋아 공장이 하나 둘씩 늘어난 것이 현재에 이르러 대 • 중 · 소 기업체 수가 500여개를 넘고 있습니다.
시민헌장문의 내용과 같이 나날이 발전해가는 공엽도시로서 생산기업체의 수가 날로 증가함에경제적인 발전은 있으나 반면 생활주거의 환경과 농토는 침체됟고 산성화는 물론 중독물로 오염되어 농사도 제대로 경작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물이 좋고 인심이 좋았던 시결은 옛날과 옛말이 되었고, 안양의 포도는 자취를 감춰 향수를 찾는 이들의 회상만으로 전하여지고 있습니다. 또한 안양천의 흰 모래와 맑은 개울물은 어린시절 미역감고 모래무지, 피라미, 붕어, 매기, 어치 둥올 잡아 회먹고 천렵하던 옛날 안양의 정취는 사라지고 공업 입국으로 가는 산압공해의 폐기물로서 악취와 폐수는 흉뮬로 변하여 안양천은 오늘도 한강으로 유유히 흐르고 있습니다.
인구가 3-3만명 정도 하던때의 안양은 명물도 안양리가 중심올 이루어 동으로는 비산리, 마라벨판(비산 1동), 뱅말(秀村), 말무덤(馬함), 간촌, 중촌, 동편, 샘말, 부립말, 인덕원(관양동) 벌말, 민백이, 범계, 귀인(평촌동) 냥으로는 안말 內村), 신군포사거리 호계동) 서쪽으로는 박달러(박달동), 북쪽으로는 충훈부, 삼악, 석수동, 꽃챙이(석수1동)로 불리워졌고 또 飛山洞안에 iJ 里가 데그 안동네에는 수푸루지 林짝洞) 날외 (날 ), 안날외 안날마 ) (雲.洞 ,곡동( 장골)이 있£며, 서쪽£로 위치한 동속의 동네로는 양짓말, 병옥안(후두미) 담배촌이 있고 동은 당안, 동은 찬우울 冷폈洞, 6동은 소골얀, 주접동, 명학동에 미학바위가 도시계획으로 자취를 감취 안양의 옛 모습과 우리 말 고유의 지명이 점차 사라져가고 있어 향수에 젖은 안양을 잊게하고 있습니다.
이글을 쓰고자 옛 지명을 조사하고 고중자료를 수집하던중 노인들로부터 미채하여 오는 우리고장의 전설 한토막을 소개합니다. 때는 모르지만 비산동 소재 매곡마을(마장골)에 얽힌 이야기입니다.
지금의 수도군단 입구로부터 더러미산 입으로 덕둘 보가 있었는데 이 냇가를 매꾸마율 사람들은 앞 냇가라 불러왔다. 앞 냇가 주위에는 기름진 논받이 있었으며 또한 더러미산 주위에는 소 나무가 율창하여 두루미와 학의 서식지였다. 그리고 마장균 횟산에 위치 한 학꾸과 매봉재에는 솔개와 커다란 매의 서식지였다. 그리하여 매는 항 상 덕둘보와 앞냇가가 내려다 보이는 매봉재가 있는 산꼭대기에서 서식하고 있었다.
하루는 농삿군의 아낙네가 갓난아기를 업고나와 치맛폭을 품어 풀반위 에 깔고 갓난아기를 눕혀 눈게하고 김을 한창 매던 중이었다. 어느름엔 가 하늘에는 커다란 매 한마리가 아래를 내려다 보며 유유히 날고 있었 다. 아무것도 모르는 농삿군의 아낙네는 김을 매는데만 열중하고 있었다. 그러던중 벼란간 푸드덕하는 소리에 놀라 뒤를 들아다 본 순간 아이쿠 이게 웬일인가 갓난아기를 날카로운 매발로 채어 가지고 공중으로 한없이 날고있지 않은가, 소스라치게 놀란 아낙네는 김매던 호미률 내던지 고 우리아기 내놔라, 우리아기 살려다오. 소리치며 발을 동동 구르며 명곡 하여 보았지만 공중에서 한 바퀴를 돈 매는 북쏙 하늘로 날아가버렸던 것이다.
갓난아기를 잃어버린 아낙네는 줄달음쳐 쫓아가 보았지만 갓난. 아기를 낚아 랜 커다란 매는 벌써 어디론지 사라져 보이지않고 텅빈 하 뿐만이 아낙네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혼비백산하여 집으로 물아온 아낙네는 그날로 옴져놓게 되었다, 그러고 그날로 동리의 사람들은 공포에 싸이기 시착하였다.
갓난아기가 매에 채여간지 몇개월이 지난 어느날 동네에 사는 나뭇꾼이 냐무를 하러 옹재 부근을 오르려는 순간 커마란 매는 한날개짓올 하며 공중을 벙벙 돌기 시작하였다. 나뭇꾼은 뼈란간 채어간 갓난아기의 생각이 운득 떠올라 숲속 사이로 자기의 몸을 숨기여 살금살금 매봉재를 기어오르기 시작하였다.
숨을 죽여가여 애봉재를 숨어 올라가던 냐뭇꾼은 주위를 살피기 시작하였다. 그순간 구석진 곳에 보금자리인듯한 장소에서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려오고 있지 않은가. 갓난아기가 커마란 매에 채여와 무사히 살아 있마는 것을 목격한 나뭇꾼은 헐레벌떡 단숨에 마을로 뛰어 내려왔다. 달려온 냐뭇꾼은 놀란 가슴을 억제하지 못한채 동네 사람들에게 이 소식올 전하였다. 소식을 전해들은 부모와 마을사암들은 갓난아기를 구해야 된다고 막대기와 낫올 들고 매봉재가 있는 산으로 달려가기 시착하였다.
마을사람들이 산 중턱에 도달할 즈음 놀란 매들운 사랍둘에게 날카로운 발톱과 부리로서 공격올 가하여 오기 시작하였다. 동네 사람들은 낫과 작대기를 휘저으며 맞싸웠으나 날카로운 매들을 물리칠수는 없었다. 하는수 없이 산을 내려온 주민들은 갓난아기가 걱정은 되었으냐 한펀으로는 매들이 갓난아기를 키운다는게 이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소문은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퍼져 갔고 시간은 흘러 결국에는 이 소문이 한양에까지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 소문은 임금닝의 귀에까지 전하여져 어전회의에서까지 중론이 일게 되었다. 대신들 중에서 한 신하가 비산리 마장골 뒷산 매봉재와 학곡에 커다란 매들이 갓난아기를 채어다가 돌보며 키우고 있다는 사실을 아뢴뒤 이러한 괴이한 사실은 장차 냐라에 좋지않은 사건을 불러 일으킬 징조이오니 군사들로 하여금 그 곳을 퇴치시킴이 마땅하마고 건의하였다. 어전회의에 참석한 대신들도 옳다고 찬성하여 이는 곧 어명으로 고을 원님에게 전달되었다.
어영올 받은 원님은 무장한 포졸들과 함께 학곡과 매봉재를 향하여 올라가기 시작하였다. 순조롭게 목적지에 도달한 고을 원님은 주위가 너무나도 조용하여 파수병을 보내어 자세히 살펴 보았으나 갓난아기와 커다란 매들은 온데 간데 없이 보금자리만 그 자리에 있었다.
고을 원님은 괴이 여기며 역시 범상한 아이가 커다란 독수리의 보호를 받으며 자라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후 매봉재와 학곡에는 매 한마리 날아오지 않았으며 마장고을에는 매가 자취를 감추었다. 고을 원님은 괴이한 일도 다 있다 하시며 동네의 마올 이릎을 매곡마을이라 고쳐 부르게 하였다. 이것은 매곡마을의 전설이여 매곡마을이라는 이름은 오늘날까지 불려오고 있습니다. 지금도 매곡동 뒷산에는 계곡으로 이루어진 학곡이 있으며 산 봉우리 위로는 비위, 벼랑으로 이루어진 매봉바위가 있어 전설어런 사실을 입증하고 있는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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