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역전 이야기
문화영님이 세안양회 50년사 기고문을 제공해 주셨습니다.
새안양회 50주년을 맞이한 것을 축하드립니다.
어려서부터 안양역전에서 성장하여 학업을 마치고 군대 제대후 편찮으셨던 아버님이시였기에 하고 싶었던 앞길을 제치고
1957년 창업한 ‘현대공업사’에서 년노하신 부친의 오른팔 역할을 하다가 왼팔 역할까지 맡게 되었습니다.
2007년 안양 국제유통단지에서 현대툴파크를 창업하여 오늘에 이르다가 철의도시 당진에 툴파크 자재 물류창고를 짓고 전자상거래 쇼핑 몰을 본사에 두며 전국을 무대로 수요자가 필요로 하는 상품을 신속 정확하게 공급하며 대를 이어 오늘에 이르고 있는 사업체가 되었습니다.
1. 개괄
평범하고 한적한 시골 농촌이었던 안양은 일제가 경인선에 이어 1905년 경부선을 개통시키며 안양역이 1월 1일 보통역으로 개통되며 시작이 되었다. 6.25 한국 전쟁 중 1.4후퇴 때인 1951년 1월 26일 중공군의 포화로 안양역사가 소실되었다가 1956년 6월 23일 안양역사가 준공되었고 1974년 8월 15일 수도권 전철 1호선이 개통되며 전철역도 개통되었다.
잘아는 대로 경부선 1구간 역 중 하서면 안양리에 개설된 역사의 명칭이 공교롭게도 하서역도 명학역도 아닌 안양역으로 결정되었다. 이때부터 호계리와 군포장을 중심으로 형성된 기존의 지역 대표성은 안양역을 중심으로 비약적인 성장·발전하는 안양리에 그 자리를 내주는데 서울 외곽의 작은 도시로 시작된 안양이지만 그 교통의 편의성과 편익성으로 인하여 처음에는 우리나라 제지를 중심으로한 공업지역으로 성장하였는데 우리나라 남쪽에서 서울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필히 안양을 반드시 거쳐야하는 길목이었으며 서울에서 남쪽 부산과 호남으로 내려가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반드시 도착하는 곳이 길목인 안양이었다.
안양은 항구도시 인천 다음으로 물자와 사람이 항상 붐비며 바쁜 유일한 서울의 위성도시였고 서울과 연결되는 유일한 교통수단은 오로지 철로가 유일하였다. 도로는 있다고 하지만 자동차가 오늘날 처럼 일반화되지 않았던 시기에 가끔 다니는 소륜차나 마차나 도보가 유일한 교통수단이었다. 안양역(安養驛)은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안양동에 있는 경부선의 중요한 철도역으로 일부 무궁화호와 수도권 전철 1호선의 모든 열차가 정차하며 역은 엔터식스 2층 통로와 연결되었고 인근에는 대림대학교, 연성대학교, 안양대학교, 성결대학교.안양1번가, 롯데백화점 등이 있으며 향후 월곶-판교선 (경강선)이 개통되면 환승역이 될 예정이며, 급행열차 운행 일환으로 대피선 설치 계획도 있다.
이렇게 사람과 물자가 빈번하게 드나드는 안양역은 그런 물자와 사람이 반드시 거쳐가야 하는 곳이 되다보니 그런 관문이 안양역이니 안양역전은 그야말로 문전성시의 대문으로 물자와 사람이 항시 밤낮없이 드나들어야 하는 너무도 바쁜 도시였다.
부링말(동편)이 종가로 조부님을 비릇한 선친 때부터 이곳 지역에 연고를 가진 조상님들 덕분에 이곳이 나에게는, 나를 잉태하여 사람을 만든 것은 부모님이지만 내가 60년된 한 그루의 성목이라면
내 인생과 정신의 뿌리와 나무 등걸과 나뭇잎들은 안양이라 할 정도로 안양은 나의 분신으로 도저히 분리할 수도, 분리되어서도 안되는 곳으로 잊을 수 없는 고향이요 그 고향애서 고향을 사랑한 나머지 고향 발전을 위해서 나름 보이지 않는 여러 작은 노력들을 하거나 시도하였지만 말만 앞세우고 이용만 할 줄 아는 정치지도자나 이 지역 실력자들의 헛공약만 난무하다 보니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매듭지어진 것이 없다보니 잠깐 뒤돌아보니 이도 저도 아닌 오늘의 어쭙잖은 안양역 주변이 되고 말은 것 같다.
나름 생업을 위해서 사업에 진력하느라 지역 발전과 지역 일들에 참여했다 말았다 하면서 걸자해지도 못하고 오늘에 이르며 살아가고 있다.
2. ‘안양역전’의 오래된 과제와 대책
안양역 역세권의 상업지역은 1970년도에 형성된 것으로 오래된 건축물이 대부분 아직도 그대로 잔존하고 있으며 1970년대 이후 지금까지 동 지역의 제대로된 개발행위는 전혀 없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것이다
갖가지의 임시방편의 선심공약으로 뉴타운 계획이 반복되었으며 국회의원이나 안양시장, 도 광역의원이나 시의원들의 빛바랜 복제된 사탕발림의 애드벌륜에 이용만 당했던 토사구팽식 지역 공약이요 관료들은 눈가림용 기만행정만 난무하였던 것이다.
선친께서는 안양시 전의 지명인 경기도 시흥군 시절부터 운수 및 타이어, 간이 주유소. 자동차 수리업을 하셨다. 안양역앞,
한집에서 살아온 전용석 부친은 군자에서 오셔서 역전 철공소.구 시장 삼거리 이환기(은하수회)형님 부친이셨던 이준상아버님을 기억하며 우리 회원들에게 알리고져 하는 것은 의왕에 있는 고려합섬( 나중 ‘고합’으로 변경됨)은 한국에서 할수있었던 일본에서 가져온 기계도면만 갖고 설비공사를 했던 분이 이 시대에 어진 기술을 이어주셨던 삼성공업사 이준상아버님이시다.
안양에서는 첫 기계공작소였으며 전용석(만안2회)어머님께서 콤프레샤를 선뜻 부지런하신 선친께 선물 이와 함께 자동차 수리업이 태동한 사건이었다.
안양역전을 중심으로 주변에는 공업사, 기계제작소, 차량서비스업, 산업용재상이 우후죽순으로 창업했으며 버스터미널 근교, 태극당, 안양약국, 화단극장, 연미예식장. 화성철강. 삼창정미소(현대코어) 대영장 카바레. 원앙예식장. 안양역 로타리 전에는 말마차 쉼터와. 대영장(복생여관 이무용). 적벽돌 건물 바로 앞 마당에 써커스 단과 함께 흔적을 남기고 버스터미널만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던 곳이 안양역전 이야기이다,
안양 구 안양경찰서 자리 아래의 건양공업 (김성호대표)도 운수 사업후 정비사업소의 시작이었으며 시작되어지면서
최이성 어르신 (최상용형님 부) 원영희,.이원림, 강철희, 전지홍 (전성덕부친-안우회) 등등 일일이 기억은 할수 없겠지만 GMC.도요다.차량이 저의집 마당 앞에 안양 운송사업의 화물차들 성시를 이륐다.
바로 안양을 신도시로 개척한 어르신들의 노고와 근면임을 기록코져한다
관양동 부림말381번지 출신 선친 (문현식)께서는 처음 군부대와 미군부대에서 나오는 고물자로 “역전앞 현대공업사‘로 창업 출발하셨다.
토박이 안양사람들이 기억하는 안양 산업화의 태동지역 이였던 점이며 선친께서는 손재주가 남다르셔서 기름.오일도 만드셨으며 배달과 빵구도 트랙터 마차까지 만드셨던 맥가이버 부친이셨다.
그런 기계산업의 첫 단추가 선친이 창업하신 현대공업사에서 시작되었다 대를 이어 이를 바탕으로 ㈜ 현대툴파크로 ‘보국사업’을 이어가고자 얼마전 지금 3대째 가업 승계를 준비중 임을 밝힌다
이와같이 현대 공업사가 발전 승계 하였지만 이웃하고 함께 성장하며 오늘에 이른 몇 개 기업을 ‘안양 50년사’에 포함한다면 구 신도예식장앞 밀가루 상점 대동상회 손창권아버님의 과천. 청계 버스주차장을 기억한다
태극당 윤창로대표 (윤대진부친) 부림말 안oo, 그리고 선친과 함께 첫 운송사업을 시작했는데 초창기때 마이크로 버스와 택시사업을 하셨었다 어르신들의 첫 안양 운송사업이라는점이 초석이라는 사실을 밝힌다
지금은 한국에서 내노라 하는 거대한 운송회사가 바로 ‘삼영운수’이다.(초대회장:정봉수-회사명을 지은것으로 기억)
운수회사라고 알고 있겠지만 안양의 오랜 세월을 함께 한 분들은 최초 첫 발자국인 운수사업의 원동력은 첫삽을 뜬 세분의 노고가 그 단초이고 뿌리였었다.는 사실이다.
산업화로 우우죽슌으로 박달리에 위치했던 계룡산업, 유리공장, 삼영하드보드, 앞개울 좋은집(정어진원장) 근교 한국제지, 평촌 벌말 동일방직, 안양 구시장 철로변 태평방직, 호계동 금성전선, 안양 3동의 대농(금성방직-쌍용), 주변에는 화단극장과 안양3동의 신장로 길의 조산파 의료시설과 기억이 흐리지만 미륵당 절(본백화점)과 문화예술의 요람임 동시에 갖가지 많은 추억을 자아냈으며 벽산사거리 읍민관, 안양의 종교시설중 천주교, 기독교장로교회 제일장로교회, 안양성결교회로 선친때부터 신앙생활을 하던 교회였다.
(부림말 안씨집안 성중학교 (야간 학습소)정창선이사장. 그후 신성재단으로 최태술 장로(마애종), 안양 감리교회 대교 옆 태양공업사 군자 강태현장로(장래동 기독교장로교회 박주안장로(박홍일부)은 일제때부터 공장장으로 기업에 근무 하셨고 특히 주목해야할 사건은 삼덕제지 전재준회장과 함께 안양사람이라면서 안양을 위해서 커다란 선물을 하셨던 것을 면면히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한국제지는 거대한 아파트 단지가 조성되어 조망을 가리며 안양역전에서는 다시는 관악산 망해암을 영영 볼수가 없게 만들고 안양을 떠난 기업이 되고 말았다
길이 길이 후대에 반드시 알려야만 한다는 점을 다시 한번 밝히고자 한다
그러면서도 안양지역은 공업지대로 발전 도약했지만 아무리 현대 사회가 물질만능과 배금사상, 양육강식이라지만 말없이 고향의 발전과 고향을 지키며 돈을 떠나서 헌신했던 의인들과 일제 35년 강점기 시기와 한국 전쟁으로 이데올로기의 와중에서도 후대와 자손들은 안양을 지키셨던 선친들의 소사를 기록을 전하고 진실을 기록으로 남겨 교훈을 삼아야 할 것이다
안양시의 과거 흑역사를 상기해보면 채석장 철길로 많은 인명 사고와 수암천 1977년 물난리, 연탄공장과 대한통운외 적잖은 고통을 감내하며 진폐증으로 선친 및 상주 하시던 어르신 몇분이 세상을 떠나셨다.
지하상가 바로 인접 3만톤 물탱크를 공사를 한다고하는데. 안양시 행정당국은 오히려 민폐를 만들고 있는 것도 현재 진행되고 있다는 실정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배우기로는 민주주의는 글자 그대로 분명 나라의 주인은 국민이며 그 땅 위에 살고있는 지역민이며 주인이다.
그러나 실제는 관리들만이 갑이고 나라의 주인행세를 하며우리 백성들은 그저 그들이 해주는대로 꾸역 꾸역 맹종이나 해야하는 말못하는 신세가 아닌가? 하는 생각만 자꾸 들면서 도대체 우리들에게 희망이란 단어는 실종된지 그 언제인가 헤아릴 길이 없다
그 예로 지금은 전체 국가기관이 국가 과제를 정할 때 공청회를 열고주민 의견을 수렴하는것과 대비되고 비교되는 이유이다.
새안양회는 안양을 지키는 애향 선후배의 단체이다.
안양시민의 얼과 정신을 지키는 정신적 지주가 되어야 한다는 사명감을 가진 안양인들의 결사로서 부끄럽지 않도록 앞장서서 노력해야만 할 것이다.
이런 지난하고 지루하였던 지난 날이 안양역전 이야기를 기록했으며
끝으로 ‘새안양회’회원은 묵묵히 안양을 수호하는 관악과 수리산같이
안양시 발전을 위해서는 꼭 필요한 병풍 역할을 해온 단체이요 모임인 사랑방이다 자부하며 회고하고져 합니다.
특히 2020년은 인류의 역사가 개명한 이후 몇 번 겪지 않았던 전대 미문의
펜대믹을 겪으며 우리세대가 이들과 싸우고 이겨내는 격전의 투쟁시기로 우리 역사에는 기록될 것입니다. 통상 바이러스와의 전쟁에서 항상 패한 것이 인류였는데 비록 주변국 정권의 철없는 불상사로 시작된 세계적 위기였지만
전 인류가 합심하여 백신을 개발하고 일상에서 많은 불편을 견뎌내며 마스크를 쓰고 지내야 하는 1년이었지만 인류는 이 험난한 난관을 극복하고 마침내 인류가 바이러스를 이겨내는 기적을 이루어가는 여정이었지만
새해에는 기필코 극복될 것입니다.
우리의 일상은 우리들 곁으로 곧 돌아오며 회복될 것입니다.
안우회 친구들은 지난 50년을 함께 헤쳐온 여러분과 함께 새안양회 발전을 위해 노력하며 변함없이 제 고향 땅에서 고향을 지킨다는 자부심을 갖고 살아왔습니다. 언젠가는 우리 안양인들의 정신적 표상인 선후배 뒤를 잇는 진정한 안양인의 모습을 우리 회원들과 안양시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보려 노력하겠습니다.
새안양회의 50년사를 맞아 영원히 후대까지 기록이 남는 역할을 하면서 이곳 안양에 그 정수들이 모여 아르다운 꽃들을 피우는 시절이 도래하기를 진심으로 기원하면서 다시 한번 새안양회 50년사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2021년 1월 19일
안우회 문화영
[편집자 주]
문화영님은 안양 부림말 출신의 토박이로 환일고&안양공고.기계과졸 성결대학교에서 공부했으며, 육군 8사단16연대본부
사격감독관으로 군 복무를 하고 현재 (주)현대툴파크 회장. Asan Steel공업(주) 전무이사로 일하면서 안양시민회 회원, 새안양회회원, 안양문화원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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