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기독역사여행] 2400여명, 고아들의 아버지는 기쁘게 '여관'을 떠났다
2019. 12. 6. 18:27
https://v.daum.net/v/20191206182700056
[한국기독역사여행] 자유와 방종 사이.. "나는 그저 하나님 딸이다"
[국민일보]수원·안양=글·사진 전정희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2020. 3. 20. 18:00
'구원과 자유' 외친 나혜석과 수원·안양
https://v.daum.net/v/20200320180003046
"빈민 생활을 탈취하는 의사는 쓸데없다 " 한국식 의료 헌장
[쿠키뉴스]전정희2022. 12. 5. 10:15
근대 인술의 현장(7) 의사 오긍선과 경성보육원(상)
마마 앓은 5세 연상 아내와 평생 해로하며 도덕 실천
https://v.daum.net/v/20221205101502406
의사 오긍선 "부산 가덕도 피난길...돌보던 고아 20여 명 폭사" 통한
[쿠키뉴스]전정희2023. 1. 2. 14:32
근대 인술의 현장(8) 의사 오긍선과 경성보육원(하)
의사 명성 불구 고아, 독거 노인 위해 헌신..."이 여관에서 신세 많이 졌소"
대한제국, 일제, 군정기, 대한민국 시대 살며 노블레스 오블리주 실천
https://v.daum.net/v/20230102143202523
[쿠키뉴스]근대 인술의 현장(7) 의사 오긍선과 경성보육원(상)
1937년 1월 대한제국기 서양 의학을 배운 한 의사가 ‘청년 의사에게’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이 권한다.
하나, 부자의 황금보다 빈자의 두 눈에 혹 눈물이 있을 것을 더 중히 여겨라
둘, 의사가 병자에게 대한 것은 수단이어서는 안 된다. 막연히 시험 삼아 하지 말고 매우 조심함으로 세밀하게 진찰하라.
셋, 항상 학술을 연구하고 병자의 신용을 받도록 유행을 따르지 말고 근거 없는 말을 하지 말며 허망한 명예를 구하지 말라.
넷, 매일 주간에 진료한 것을 야간에 다시 상세하게 생각할 것. 그리고 이것을 집성하여 서책을 작성할 것.
다섯, 불치의 병자라도 환고를 원행하게 하며 생명을 보존하게 할 것은 의사의 할 일이다. 이를 방기하고 불원함은 인도에 배반된다.
여섯, 병자의 비용이 적도록 하고 설혹 명을 구하여도 그 생활을 탈취한다면 쓸데없으니 빈민의 사정을 자세히 살펴보라.
이 여섯 가지 충고 중 ‘직무에 충실’ 등은 히포크라테스 선서와 유사하다. 어쩌면 ‘조선 의사의 선언’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
이 조항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의술은 인술이다’라는 얘기가 된다. 일제강점기 피압박 민족에게 이러한 선언을 한 이는 1903년 조선 군산항에서 배편으로 미국에 도착, 켄터키주 센트럴대 의대(현 루이빌대 의대)에서 수학하고 서재필 김점동(박에스더)에 이어 한국인으로서 세 번째 미국 의사 면허를 취득한 오긍선(1878~1963)이다. 지금도 의학계에서는 피부과학 개척의 선구자로 불린다.
오긍선은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계몽사상가이자 민족운동가, 의학자요 교육가이며 사회사업가이다. 1934년 그는 외국인이 독점하던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연세대 의대 전신)의 첫 한국인 교장이기도 했다.
이러한 오긍선의 삶을 들여다보자면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실천이다. 사회 고위층 인사에게 요구되는 높은 수준의 도덕적 의무를 철저하게 지키고자 했다. 그는 평생 소외된 이웃에게 인술과 구제 활동을 펼쳤다. 1920년대부터 공창제 금지 운동과 청소년 음주·흡연 반대 운동을 추진했다. 나아가 대마초 등 마약 퇴치에도 앞장섰다.
또 도덕적으로도 자신에게 엄격했다. 의사인 아들 오한영(1898~1952)이 개인병원을 설립하려 하자 “의사가 이익을 추구할 목적의 개업이라면 반대”라며 말렸다. 당대 사대부나 지식인 대개가 첩을 두거나 기생을 끼고 살았는데 그는 단 한 번도 한눈을 팔지 않았다. 자신보다 5세 연상인데다 마마를 앓아 곰보였던 아내와 평생 해로했다.
오긍선은 조선 시대에 태어나 대한제국기 서양 의학을 배웠고, 일제강점기 가난한 이들에게 30여 년간 인술을 베풀고 후진 양성에 힘썼다. 그런 그에게 해방과 함께 숱한 권력의 ‘유혹’이 뻗쳤다. ‘경성보육원’과 ‘경성양로원’을 설립, 버려진 고아와 오갈 데 없는 노인들을 돌보고 있을 때였다.
개화기 청운양로원 터. 지금은 현대그룹 정주영家가 들어서 있다. 이 자리가 한국 근대식 양로원의 시작이었고 한때 화가 나혜석이 말년에 머문 곳으로 알려져 있다. 사진=임형택 기자
개화기 청운양로원 터. 지금은 현대그룹 정주영家가 들어서 있다. 이 자리가 한국 근대식 양로원의 시작이었고 한때 화가 나혜석이 말년에 머문 곳으로 알려져 있다. 사진=임형택 기자
1945년 9월 미국 해리 트루먼 대통령의 특사 해리스가 서울 충정로 그의 집을 찾았다. ‘신탁통치’라는 밑그림을 그리고 있던 미국은 한국에 대한 군정을 단행했다. 특사는 오긍선에게 민정장관을 제의했다. 모든 권력이 그에게 쏠리는 순간이었다.
“정치는 정치인이 해야지 나같이 정치를 모르는 사람은 정치를 할 수 없다.”
그가 권력이나 명예에 가치를 두지 않은 사람이란 걸 미국이 몰랐었던 듯하다. 그의 이러한 삶의 자세로 인해 더러는 ‘외골수’라는 비판을 하기도 했다. 대한제국기와 일제강점기 미국 선교사들의 입김이 막강할 때 세브란스병원과 의학교에 근무하면서도 선교사들의 잘못이 있으면 호되게 나무라는 성격이었다. 1927년 2월에는 미국 기독교 선교 잡지에 “한국에서 선교 기관이 운영하는 병원의 한국 이관이 필요하다”라고 기고할 정도였다.
해방됐다. 일제 말 조선총독부에 짓눌렸던 미국 감리회나 장로회의 권한이 복권되면서 한국의 정치적 지형도 미국 기독교 네트워크를 통해 움직였다. 건국준비위원회, 한국민주당, 국민당 등이 미국 유학파 오긍선의 한국에서의 위치를 아는지라 서로 안으려 했다.
맥아더 사령부도 군정장관 아널드 소장과 주한 미군 사령관 하지 중장을 통해 오긍선을 접촉했다. 그러나 오긍선은 이를 단호히 거절했고 자문관직마저 사양했다. 그는 자신의 소명이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돕는 일이라고 했다.
실제 오긍선은 이들을 만났을 때 “일본 기술자들이 철수한 이후 우리나라의 공장 가동이 멈추었으니 남아 있는 일본 기술자들을 억류시켜서라도 우리가 기술을 전수 하여 공장 가동이 될 수 있도록 해달라”라고 부탁했다. 또 하루빨리 사립대학 설립을 인가해 교육을 통한 입국을 도와달라고 역 제의를 했다. 그러면서 자신은 아이들을 보살피고 어르신들을 섬기겠다고 했다.
미군정에서는 민정장관에 안재홍(독립운동가), 문교장관에 유억겸(연희전문 교장), 경무부장에 조병옥(독립운동가·전 연희전문 교수), 보건후생부장에 이용설(당시 세브란스의원 교수) 등을 임용했는데 원로였던 그의 기독교 민족주의 성향의 자문과 무관치 않다.
그렇게 본분을 지키고자 했던 오긍선은 해방 이듬해인 1946년 3월 경성보육원(경성고아구제회 후신)과 경성양로원을 병합하고 ‘병 고치는 의사’에서 소외된 이웃을 돕는 사회사업가로 소천할 때까지 헌신의 삶을 산다.
일제강점기 세브란스의학교 피부과 학생들을 지도하는 오긍선. 지금의 연세대 의대 전신이다.
일제강점기 세브란스의학교 피부과 학생들을 지도하는 오긍선. 지금의 연세대 의대 전신이다.
의사 오긍선, ‘반민특위’에 자수했던 친일의 문제
조선총독부는 안정된 식민 통치를 위해 하층민 밀집 지역 통제를 위한 방면위원회를 운영했다. 빈민 구제가 명분이었으나 내용상으로 통치 목적이었다.
오긍선은 방면위 경성부 협의위원으로 위촉됐다. 세브란스병원과 학교가 속한 경성 서부 지역의 빈민 조사와 구제, 교육 등을 벌인다며 그를 끌어들였다. 당시 세브란스의전은 일본 문부성 지정학교 승격을 앞두고 있었다. 교장에 임용된 오긍선으로서는 내치지 못할 압박이었다. 일제는 강화된 교육 관련 법령으로 민족학교들을 정식학교에서 탈락시키는 정책을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일제는 1937년 중일전쟁이 본격화되면서 한국 지식인에 대한 노골적 부역을 요구했다. 이때 오긍선은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 및 평의원(1941)으로 위촉되어 ‘임전 하의 정로(征路)’ 등 몇 편을 신문에 기고했다. 일생의 큰 오점이었다.
1948년 반민족행위처벌법 법령이 공포됐다. 오긍선은 1949년 8월 반민특위에 자수하고 조사받은 후 풀려났다.
전정희 편집위원 lakajae@kukinews.com
[쿠키뉴스]근대 인술의 현장(7) 의사 오긍선과 경성보육원(하)
“평생에 가장 가슴 아팠던 일은 1·4후퇴 때 안양에 남아 있던 30명 아이 가운데 20여 명을 폭격에 잃은 일이다. …이 다음에 나도 죽으면 그 원한의 고혼들이 묻힌 보육원 뒷산에 묻히고 싶다.”
경기도 안양기독보육원(현 안양 사회복지시설 '좋은집') 잔존 건물. 현 안양 양명고교 내에 남아 있다. 일제강점기 의사이자 사회사업가였던 오긍선에 '경성보육원'이라는 이름으로 시작됐다. 사진=임형택 기자
경기도 안양기독보육원(현 안양 사회복지시설 '좋은집') 잔존 건물. 현 안양 양명고교 내에 남아 있다. 일제강점기 의사이자 사회사업가였던 오긍선에 '경성보육원'이라는 이름으로 시작됐다. 사진=임형택 기자
1962년 11월 의사 오긍선(1878~1963)이 새싹회의 ‘소파상’ 수상식장에서 한 얘기다. 그는 당시 84세의 고령에도 안양기독보육원(현 안양 사회복지시설 ‘좋은집’) 원장을 맡고 있었다. 1907년 미국 켄터키주 센트럴의대(현 루이빌의대)에서 한국인으로 세 번째로 미국 의사 면허를 받은 뒤 귀국해 군산·목포 예수병원장 등을 지냈고 이후 서울 세브란스병원의학교에서 29년간 교수·의사·교장 등으로 살면서 ‘조선의 명의’로 명성이 자자했다. 개화기 선구자였다.
철저한 신앙인이었던 그는 1922년 경성보육원 이사로 참여하면서 조선의 고아들을 돌보기 시작했다. 전편("빈민 생활을 탈취하는 의사는 쓸데없다 " 한국식 의료 헌장)에 얘기했듯 미군정의 장관 제의도 “정치는 정치인의 몫”이라며 거절했다. 또 배재학당 3년 선배인 이승만이 대통령이 되어 사회부장관, 보건부장관을 맡아 달라고 해도 “관직 주지 말고 고아원이나 좀 도와 달라”며 사양했다.
1924년 무렵의 '경성보육원' 자료 사진. 보육원이 운영했던 양로원으로 추정된다.
1924년 무렵의 '경성보육원' 자료 사진. 보육원이 운영했던 양로원으로 추정된다.
6·25전쟁 직후 보사부장관과 문교부장관을 역임한 최재유(1906~1993) 박사의 회고.
“보사부장관 시절 공무로 안양 갔던 길에 불시에 오긍선 선생이 경영하시는 고아원을 방문했어요. 그 더운 여름날인데도 선생께서는 사무실에서 사환 아이 한 명만 두고 영문 타이프를 한 자 한 자 타자하시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후원자들에게 보내는 인사말이었어요.”
단적인 예이나 그의 85년 삶은 ‘시종 소외된 자와 함께’였다.
오긍선은 조선말에 태어나 대한제국, 일제강점기, 미 군정기, 신생 대한민국이라는 격동기를 살았다. ‘명의’로 호사로울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단 한 번도 돈이나 권력을 탐하지 않았다. ‘돈은 일만 악의 뿌리다’라는 성서 말씀을 좌우명 삼아 자손에 본이 됐다.
의사이자 사회사업가였던 오긍선. 1963년 '대한민국장'을 수상했다.
의사이자 사회사업가였던 오긍선. 1963년 '대한민국장'을 수상했다.
오긍선가(家)는 지금도 우리나라의 손꼽는 의사 집안이다. 5대째 이어진다. 그의 아들 오한영(1898~1952)이 세브란스의전 교수 시절 일본의 압박에 지쳐 개업 의중을 드러내자 “서양 사람들은 남의 나라 와서 청년 교육을 위해 일생을 바치는데 우리 청년 교육을 외면하고 돈을 벌기 위해 개업하겠다는 건 너무 이기적이다”라고 나무랐다.
오긍선의 장손 오중근이 ‘봉사 정신’ 가훈에 따라 개업을 버리고 국립마산병원장, 국립의료원장 등 공직에 몸담았을 때 “조부님께서는 ‘끼니를 굶지 않으면 됐지 의사가 물욕을 바라면 이미 의사가 아니다’라고 하셨다”라고 회고한 바 있다.
한편 해방이 되고 혼란이 가중되면서 거리에는 고아가 넘쳐났다. 오긍선은 재산을 정리해 서울 ‘경성보육원’(영천시장 뒤편)을 안양역 옆으로 확대 이전해 더 많은 고아를 수용했다. 가건물을 짓고 200여 명을 입소시켰다. 그런데 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오긍선은 고아들을 3개 조로 나눠 부산 인근 가덕도(당시 창원군)로 피난시켰다. 1, 2진은 걷고 또 걸어 가덕도에 도착했다. 오긍선도 그곳에서 아이들과 함께 먹고 잤다. 한데 3진 30여 명은 소식이 끊겼다. 미쳐 출발을 못 하고 있을 때 보육원이 폭격당해 숨지고 말았다.
부산 가덕도. 6⋅25전쟁 당시 경기도 안양기독보육원 원아들이 이곳으로 피난 길에 올랐다. 그 와중에 20여 명이 폭사했다. 사진=박성기
부산 가덕도. 6⋅25전쟁 당시 경기도 안양기독보육원 원아들이 이곳으로 피난 길에 올랐다. 그 와중에 20여 명이 폭사했다. 사진=박성기
더구나 전쟁 중에 이승만의 간곡한 부탁으로 보건부장관에 임명됐던 아들 오한영도 1년 3개월 만에 과로로 숨졌다. 누구보다 아들의 청렴결백한 공직 수행을 자랑스러워했던 오긍선은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이 어이없는 일들을 겪지 않았을 것”이라며 괴로워했다.
‘소파상’ 수상 1년 후 그는 조선의 선비 정신과 기독교 정신으로 일관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삶을 마쳤다. 그의 마지막 말은 이러했다.
“내 이 여관에 와서 오랫동안 신세 많이 졌소. 나는 이제 집으로 돌아가야 하겠소.”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최고 훈장인 ‘대한민국장’을 수여했다.
전정희 편집위원 lakajae@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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