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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05]안양시청 홀 안양시민 소리북 이야기

안양똑딱이 2021. 1. 6. 11:58

 

안양시청 홀에 있는 안양시민의 소리북은 기능보유자로 경기도 무형문화제 제30호 악기장(북메우기)인 임선빈/樂器匠)씨가 제작해 1997년 11월 27일에 설치한 당시 국내 최대 크기의 대북으로 지난 1월 5일 찍은 사진과 1997년 11월 27일 안양시청에 들어오던 입고 당시의 설치 모습과 북에 대한 이야기다.
북은 고대 사회부터 제사와 주술용, 경고와 신호의 도구로 사용되는 한편 음악적으로는 리듬과 선율 악기로 중요하게 취급되어 왔다. 북 제작의 일반적인 과정은 가죽무드질과 북통짜기 피씌우기, 고리달기, 북줄메기, 소리잡기, 칠과단청의 순서로 진행되며 조선조에는 신문고(申聞鼓)라 불리우는 대형북을 의금부 당직청에 달아 민의상달의 제도로 활용하기도 하였다.
임선빈(1950년생) 기능보유자는 36년간의 북만들기 장인으로 일찍이 북공예의 대가 황용옥, 박일오, 박균석 선생에게 북공예 기술을 사사받았다. 대형북 공예가로 이름이 높으며 1997년에는 "안양시민의 소리북"(북통길이 220㎝, 울림판 240㎝)을 제작하기도 하였다.
임선빈 선생이 대전에서 북을 만들던 시절, 안양시에서 기증할 북을 제작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1997년 안양에 올라와 8개월간에 걸쳐 국내 최대의 소리북을 완성했으니 울림통 240㎝, 통길이 220㎝ 크기로 제작된 ‘안양시민의 소리북’이다. 1997년 11월 안양시청에 입고돼  1층 홀에 자리매김을 한 안양 시민의 소리북은 춘향목과 쇠가죽을 재료로 해 총길이 220센치미터, 울림판 240센치미터 등 당시 국내  최대의 규모로 이름은 두개의 여의주는 서로 여의주를 탐내며 싸우지 않는 의미로 넉넉하고 풍요로운 안양시민의 정서, 화합을 상징하며 봉황새를 배치하므로써 봉황의 깊은 참뜻과 그 복이 안양시에 고루 넘치는데 그 의미를 두고있다.
악기장(북메우기) 임선빈 선생과 관련하여 지난 2020년 개최된 제12회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서 임선빈 선생님을 3년 동안 카메라에 담은 영상 이정준 감독의 작품 <울림의 탄생>이 한국경쟁작에 선정됐다.(출처: https://ngoanyang.or.kr/6181 [안양지역시민연대/안양지역정보뱅크])
제12회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조직위원장 이재명, 집행위원장 정상진)는 2020년 9월 17일부터 24일까지 8일간 고양·파주시 일대에서 열려  40여 개국 120여 편의 국내외 우수 다큐가 상영될 예정이었으나 코로나19가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서 정부의 사회적 거리두기 지침 2단계 격상에 따라 21일과 22일 예정됐던 다큐멘터리 야외상영회 'DMZ시네라이브 페스티벌'이 전면 취소되는 등 차질을 빚어 아쉬웠다.
<울림의 탄생> 을 연출한 이정준 감독은 TV프로그램 제작으로 영상제작일을 시작했으며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바람커피로드>, <올드마린보이>, <나의 노래는 멀리멀리>의 조감독 및 촬영을 담당하며 경력을 쌓았으며 <울림의 탄생>이 그의 첫 연출작이다.

"하늘을 열고, 땅을 울리고, 심장을 뛰게 만드는 웅장하고 장엄한 소리는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분명 자연에서 올 것 같은 이 커다란 울림은 한 장인의 손끝에서 만들어져 온 대지 속으로 공기를 가르며 퍼져나간다."

경기도무형문화재 제30호 악기장(북메우기) 임선빈 선생은 청각장애를 뛰어넘어 북의 완전한 울림을 만들어 내는 하늘이 낸 장인이다. 천지를 진동케 하고 삶에 기운을 북돋아주는 큰북 만들기를 특기로 한다.
임선빈 선생이 생명이자 천명과도 같은 북과 만난 것은 넝마와 거지생활을 하던 10살 어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6·25가 나던 1950년 선천성소아마비로 태어난 임선빈 선생은 서울 이촌동에서 집단거지생활 중 폭력을 견디다 못해 몇몇 형들과 탈출했다. 기차를 타고 무작정 간 곳이 전라도 여 수 덕양. 그러나 덕양 우시장에서 선천성소아마비로 다리가 불편한 임선빈 선생은 걸리적거린다고 버림을 받았다. 더구나 동네 아이들이 던진 돌을 맞아 머리에 피까지 흘렸다. 임선빈 선생을 발견한 것은 그를 운명처럼 북소리로 이끈 첫 스승 황용옥 선생이었다. 소가죽을 사러 왔다가 그를 보고는 대구 공방으로 데려갔다. 잔심부름을 하던 임선빈 선생은 11살부터 북 만드는 기술을 익혔다. 손재주와 눈썰미가 뛰어났던 임선빈 선생의 실력이 눈에 띠자 이를 시기한 선배들이 임씨를 때려 오른쪽 청력을 잃었다. 나머지 한 쪽 귀마저 청력이 약해 보청기를 사용해야 하는 임선빈 선생은 소리가 생명인 북메우기 장인으로서 최고의 결함을 가졌지만 그가 천상을 울리는 북소리를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은 그의 첫 스승의 사랑과 가르침 때문이었다. 스승은 그에게 북만드는 법은 물론 소잡는 법과 가죽 고르는 법, 심지어 북을 만들기 전 마음속으로 관세음보살을 찾으라는 마음가짐까지 모든 것을 내주었다. 지금도 대형북을 만들 때는 스승의 말씀을 잊지 않는다.
스승이 세상을 뜨면서 공방이 문을 닫은 후 생계를 위해 단청을 배우던 시절, 두 번째 스승인 대구시무형문화재 김종문 스승을 만난다. 첫 스승으 로부터 미처 배우지 못했던 기술까지 전수 받은 임선빈 선생은 본격적으로 북메우기에 들어갔다.
북의 생명은 소리다. 임선빈 선생은 소리를 고를 때 보청기를 뺀다. 오로지 손끝 울림과 마음으로 소리를 듣는 것이다. 소리가 좋지 않을 경우 완성한 북을 몇 번이고 뜯어낸다. “형상이 있어도 소리가 틀어지면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미세한 북의 울림을 감지하는 능력은 수없이 반복된 노력에 의한 것이든, 천부적인 것이든 임선빈 선생은 혼신을 바쳐 전통북을 만든다.
북메우기는 소나무로 만든 울림통에 무드질한 쇠가죽으로 피를 씌우는 작업이다. 여기에 고리를 달고, 줄을 매고, 소리를 잡고, 칠과 단청까지 마치면 하나의 북이 탄생한다. 북의 소리는 가죽의 두께뿐만 아니라 소의 부위별로 다르다. 소리북은 소의 목 부위, 사물놀이 북은 엉덩이, 무속인들이 쓰는 소북은 배 부위를 사용한다. 특히 대북은 앞·뒤 한 마리씩 2마리의 소가죽이 들어가는데다 웅장한 느낌과 상, 하, 좌, 우의 음을 다르게 잡아야하기 때문에 부위별로 가죽을 다듬는 방법이 다를 뿐 아니라 앞·뒤 균형까지 맞추려면 정신을 바짝 차려야한다. 북메우기란 가죽을 이용해 북을 만드는 기술로 예전에는 이를 고장이라 불렀으며 고대 사회부터 제사와 주술용, 경고와 신호의 도구로 사용되는 한편 음악적으로는 리듬과 선율악기로 중요하게 취급되오고 있다. 다듬어진 쇠가죽의 부위까지 맞출 정도로 뛰어난 촉을 자랑하는 임선빈 선생도 어쩔 수 없다.

임선빈 선생은 1999년 경기도무형문화재로 지정되던 날의 감격을 잊을 수 없다. “이루었구나!” 하는 감동과 함께 지난날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임선빈 선생은 요즘 몸이 점점 더 나빠지고 있다. 기력이 남아 있을 때 길이 남을 수 있는 대 북을 만드는 게 소원이다. 기계식 북이 대세가 돼 가는 오늘날 정교한 소리를 만들어내는 전통 방법의 계승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대북에서 울려퍼지는 천둥같은 소리로 일깨워지길 기원해 본다.
한편 많은 사람들과 지자체에서는 최초 최대를 나타내는 것을 좋아한다. 국내 최대 크기의 대북은 경북 영동군이 국악 성지를 조성한다는 구상 아래 조성한 난계국악박물관에 설치한 대북이다. 이 북은 북·장구 등 ‘타악기 제작의 달인’으로 통하는 이석제씨가 제작한 ‘천고’로 울림통 길이 6m, 폭 6.5m, 울림판 지름 5.5m, 무게 7t으로 이 북을 만드는 데 15t 트럭 4대 분량의 150년 이상 된 소나무 원목과 어미 소 40마리의 가죽이 재료로 쓰였다고 한다. 북 제작과정을 들여다보면 영동의 국악기제작촌은 산조장구·정악장구·소고·특수북 등 70여 종의 악기를 만들고 있는 타악기공방 이석제 대표와 더불어 현악기공방 조준석 대표가 중심이 되어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2006년 무렵 영동군에서 초대형 북 제작을 이석제씨에게 처음 제안해 왔을 때 의욕 이전에 더럭 겁부터 났었다. 그래서 이씨는 조건을 붙였다. “어디선가 수령 150~200년 되는데다 5년 동안 잘 건조된 우리 소나무들을 본 적 있는데 이것을 찾아오면 한번 해보겠다”고 한 것이다. 그런데 영동군은 수소문 끝에 인천으로 팔려간 그 소나무들을 사 오는데 성공함으로써 어쩔 수 없이 전대미문의 작업을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예산 2억3000만원의 이 프로젝트는 이씨의 지휘 아래 6명의 악기장이 대형 크레인까지 동원해가며 2009년 6월부터 15개월의 산고 끝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무게 7t의 거대한 울림통과 소 40마리의 가죽으로 만든 초대형 울림 판을 제작하고, 지난해 8월30일 울림통 표면에 용무늬 단청작업을 마치면서 화려하고 웅장한 모습의 ‘하늘북’ 제작에 성공한 것이다. 하지만 사실 고졸 학력의 이씨가 세계에서 가장 큰 북을 제작하게 되자 곳곳에서 ‘과연 만들 수나 있을까. 소리는 잘 날까’ 라는 질시와 비난이 교차했었다.
“아마 다시 하라면 절대 못할 겁니다. 어째서 설계도도 없이 만드느냐고 묻는데, 이는 전통기법을 모르고 하는 소리입니다. 오랜 경험과 감으로 해야 하는데 한 치의 오차도 없어야 하지요. 그동안 주변의 오해·질시·비난 등으로 많이 힘들었습니다. 15t 트럭 4대 분량의 조선 소나무로 울림통을 제작했는데, 울림통은 6명의 악기장이 길이 1.5m·너비 15㎝·두께 7㎝로 만든 800여개의 나무 조각을 1350개의 나비장으로 일일이 끼워 맞춰야 했습니다. 일본의 북은 울림통이 일직선의 원통이니 쉽지만 이 천고는 배가 나오는 타원형의 원통이니 참으로 어려운 작업이었지요. 두 달 정도 자연건조를 하며 울림통을 견고하게 접합한 뒤 소가죽을 이어 붙인 초대형 울림판을 쇠줄로 붙잡아 맸지요. 또 울림통을 견고하게 하기 위해 내부에는 알루미늄을 덧대고 바깥에는 옻칠을 한 뒤 다섯 마리의 용그림 단청으로 치장했습니다. 나도 생전 처음해보는 대작인데다 그 어느 것 하나 삐걱하면 끝장나는 것이니 날마다 밤잠을 설쳐야 했지요. 따로 점안식을 못한 것이 지금도 아쉽습니다.”
그동안 기네스 기록상 세계 최대의 북은 2001년 일본에서 제작한 지름 4.8m, 폭 4.95m, 무게 2t의 북으로 알려졌는데 영동군은 이보다 훨씬 더 큰 이 북의 기네스북 등재를 위해 제작 과정 등 증빙자료를 갖춰 기네스 월드레코드에 등재를 신청해 인증을 받았다.


조선일보 기사
"청력 잃고 소리 더 잘 들려" 북 만드는 청각 장애인
김우성 기자
입력 2008.01.15 13:58 | 수정 2008.01.15 14:20

"청력 잃고 소리 더 잘 들려" 북 만드는 청각 장애인 - 조선일보 (chosun.com)

 

임선빈(58)씨는 보청기를 뺐다. 북 양쪽에 씌운 가죽면에 두 손바닥을 갖다 대고 오른손으로 가죽면을 두드렸다. 타닥타닥. 소리가 북을 타고 왼손을 지나 임씨의 가슴으로 올라온다. 그는 이 소리가 아닌 듯 고개를 저었다. 북가죽 가장자리에 끼운 갓줄을 오른손에 감아 쥔 뒤, 그는 북을 벽에 밀착시키고 왼손과 발바닥으로 밀어내며 갓줄을 힘껏 잡아당겼다. 다시 타닥타닥.

그렇게 당기고 풀고 두드리길 수십 번, 임씨는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뺐던 보청기는 다시 귀에 끼웠다. 이젠 손으로 만든 소리를 귀로 확인할 차례다. 북을 두들기는 임씨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거리의 소년에서 북 공예가로

지난 8일 경기도 안양시 공방에서 만난 임씨는 충남 예산군 법원사에 보낼 법고(法鼓·절에서 불교 의식에 쓰이는 북)의 소리를 잡고 있었다. 8개월의 작업 끝에 완성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소리를 확인하는 것이라 했다. 법고를 새로 만들 때마다 삭발을 한다는 그는 이마를 간신히 덮는 짧은 머리에 낡은 군용바지 차림이었다.

임씨는 북메우기(가죽을 이용해 북을 만드는 기술) 악기장으로 1998년 10월, 경기도 무형문화재 30호로 지정됐다. 소아마비로 왼쪽 다리를 절면서도 한평생을 ‘북장이’로 살며 얻은 ‘명예’였다. 대신 그는 청력(聽力)을 잃었다. 40년간 북통을 두드리며 소리를 잡을 때마다 북 가까이 귀를 댄 까닭이었다.

1949년 충북 청주에서 소아마비로 태어난 임씨는 3남6녀 중 막내였다. 11살 때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임씨는 홀로 서울에 올라왔다. 임씨를 맞이한 곳은 당시 판자촌이던 서부 이촌동. 그는 그곳에서 넝마주이 생활을 하며 하루하루를 버텼다.

그러나 왼쪽 다리를 절던 임씨는 같이 다니던 형들에게 늘 매질과 놀림의 대상이었다. 참다 못한 그는 무작정 호남행 기차를 훔쳐 탔다. 전남 여수시에 도착, 한없이 걷다 굶주림에 지친 그를 거둔 이가 당시 북 공예의 대가였던 고 황용옥씨. 황씨는 먹고 자는 것을 해결해 주는 대신 북 공예를 배우길 요구했다. 어린 나이의 임씨는 먹고 재워준다는 말에 지체없이 황씨를 따라나섰다. 북장이 인생의 시작이었다.

12살 때 소의 배를 갈라 가죽을 구하고 북통을 짜기 시작한 그는 당시 시절을 ‘탱자나무 몽둥이의 찌릿함’으로 기억했다. “스승한테 맞았다 하면 그 자리에서 혹이 불거져. 혹독한 세월이었지.” 그 혹독함 속에서 보내길 12년, 그는 가죽 다루는 법과 가죽 부위를 구별해내는 안목, 소리를 조율하는 법 등을 익혔다.

황씨가 작고한 이후 그는 북 메우기에 필요한 기술을 배우기 위해 전국 곳곳을 돌아다녔다. 당시 전남 광주에서 북을 만들던 박일호씨에게선 가죽에 약품을 이용해 맑은 소리를 내는 비법을, 단청(丹靑)기법의 소유자 최성웅씨에게선 문양 넣는 법을 익혔다.

그렇게 쓰레기 더미를 뒤지던 거리의 소년은 북 공예가로 다시 태어났다. 동료들과 함께 청와대 춘추관북과 통일전망대 통일북, 88서울올림픽 기념북 등을 만들기도 했다.

◆ “소리는 귀가 아닌 마음으로 듣는 것”

“소리는 귀로만 듣는 게 아니야. 몸으로도 듣지. 가죽을 두드리면 떨림이 심장까지 이어져. 보청기를 끼면 집중력이 떨어지니까 오히려 거추장스러워.”

청력을 잃은 지 올해로 20년째. 1987년 어느 날 아침, 임씨는 아내가 깨우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그 길로 병원으로 달려갔지만 병원에선 “귀가 망가졌으니 손 쓸 도리가 없다”는 말만 들을 수 있을 뿐이었다. 임씨는 당시를 “아득한 시절”로 기억했다. “한 달 정도를 먹지도 씻지도 않고 살았어. 그러나 어쩌겠는가, 해온 게 이것뿐인데. 이런 생각으로 다시 북을 잡았지.”


그때부터 그는 법고를 만들 때마다 보청기를 뺐다. 아련하게 들려오는 소리에 의존하느니 손에 느껴지는 북의 떨림으로 소리를 잡는 것이 낫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했다. 임씨는 “처음엔 귀가 안 들린다는 사실에 충격이 컸지만 귀로 듣는 것보다 온몸으로 듣는 게 음을 더 정확히 알 수 있다는 걸 깨달은 지금은 오히려 축복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가슴으로 소리를 듣는 임씨는 북을 새로 만들 때마다 길일(吉日)을 잡아 삭발을 한다. 평균 북을 만드는 데 걸리는 시간은 8개월, 그 기간 동안은 아내와 잠자리를 따로 할 뿐 아니라 술·담배도 피한다고 했다. “혹여 마음에 티끌 같은 먼지라도 끼면 안 되니까. 그러면 소리가 제대로 안 들려. 최대한 정결한 자세로 임해야 하지.”


◆“내 작품 전시할 박물관 갖고 싶어”

북의 생명은 소리다. 그리고 소리를 결정짓는 것은 가죽이다. 제일 좋은 것은 네댓 살짜리 황소 가죽. 가죽을 벗긴 뒤 동백기름을 먹이고 햇볕에 말리는 과정을 2개월 정도 반복한다. 단, 시기가 중요하다. 한여름은 피하고 선선한 바람이 오는 가을에 해야 한다.

북통에 쓰일 나무를 다듬는 과정은 더 힘겹다. 사시사철 변하지 않는 소나무를 최고로 치는데, 요즘은 국내에서 큰 소나무를 구하기 힘들기 때문에 캐나다 록키 산맥에 있는 소나무를 주로 수입해 쓴다. 수입한 소나무는 제재소에서 다듬은 뒤 석유통 같은 통에 넣어 떡 찌듯이 찐다. 그래야 나무 안에 박혀 있는 송진이 빠지면서 맑은 소리가 나기 때문. 찌는 과정을 세 번 되풀이한 뒤엔 건조가 남아있다. 건조는 자연의 흐름과 궤를 같이 한다. 여름엔 비를 맞히고, 가을에 말리고, 겨울에 창고에 보관했다가 봄철에 다시 햇볕에 말린다. 그래야만 나무가 나중에도 모양이 변하질 않는다. 임씨는 “3년 정도 이렇게 건조해야 북이 깨끗하고 맑은 소리를 낸다”고 했다.

북 만들기의 지난한 과정 때문에 임씨처럼 전통적인 방식으로 북을 만드는 장인은 이제 찾기 힘들다. 임씨는 “내가 10만원짜리 북을 만들면 중국 북은 2만원”이라며 “우리나라에 팔리는 악기의 99%가 중국산일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임씨는 “미련을 버리지 못하겠다”고 했다. 자신의 이름 석자를 내걸고 세상에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을 북을 만들고 싶은 미련. 그 미련으로 임씨는 한 평생을 버텼다.

임씨는 매달 80만원을 받는다. 무형문화재로 지정돼 받는 돈이다. 그러나 이 돈으론 8개월 걸려 만들곤 하는 대북의 재료 값도 되지 못한다. 임씨는 “주문이 들어올 때만 제작하는 장식용 북과 장고를 팔아 생계를 유지한다”고 했다. 힘들지 않냐는 질문에 임씨는 고개를 저었다. “돈 문제보단 명예가 중요해. 다만 욕심이 있다면 내 작품을 전시할 수 있는 박물관을 갖고 싶어. 사람이 죽어서 이름만 남기면 뭐 하는가? 작품을 넘겨서 후대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게 가장 큰 욕심이지.”

그리고 그의 곁엔 7살 때부터 아버지의 ‘북장이 인생’을 지켜 본 아들 동국(25)씨가 있다. 동국씨는 아버지의 대를 잇겠다고 했다. “돈이야 어떻게든 벌 수 있잖아요. 북을 만들고 그 북을 쳐서 소리가 ‘꽝’ 퍼졌을 때 가슴이 웅클웅클한 느낌, 그걸 놓치기 싫어요.” 임씨가 힘들지 않은 또 다른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