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사진기록/탐사공지

[공지]안양탐사대 149차 탐방(20190309)_만세운동지 의왕 고천동일대

안양똑딱이 2019. 3. 7. 01:30

 

안양탐사대 149차_만세운동 전개된 의왕 고천동주민센터 주변

3월 9일(토) 오후 3시/ 집결_고천동주민센터 버스정류장


안양기억찾기탐사대(이하 안양탐사대)가 2019년 탐사를 3월부터 재개하며 관심있는 분들과 함께 하고자 합니다.

올해에는 재개발, 재건축 추진으로 삶의 흔적들이 사라지고 있는 동네와 골목을 기록으로 남기는 작업을 인근 군포와 의왕지역까지 확대하고 과거 1번국도, 오래된 옛길, 마을길, 개천과 물길도 걸어 보고, 각종 표지석과 오래된 흔적을 찾아 기록하고 그 의미를 되새기는 활동을 할 계획입니다.

 

3월 9일(토) 오후 3시 출발하는 149차 여정은 의왕지역의 3.1 독립만세운동의 중심지이자 정조대왕 효행이 서려 있는 사근행궁이 자리했던 역사문화의 얼이 이어지는 고천동주민센터와 주변의 동네와 골목들을 방문해 옛 흔적들을 찾아간다.

 

임금이 쉬어가던 사근행궁  
의왕 고천동주민센터 일대는 조선시대 임금이 쉬어가던 사근행궁이 있던 자리다. 사근행궁에 대한 기록은 현종 때부터 나타나지만 가장 많이 이용했던 임금은 정조였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를 화산 현륭원에 모시고, 이어 수원화성과 화성행궁을 설치한 뒤 자주 왕래하게 되면서 주정소를 수리 확장하고 ‘사근행궁’이라 명명했다. 일제는 바로 이 사근행궁을 그대로 의왕면사무소로 이용하였다. 곧이어 면사무소 가까이에 경찰관주재소도 설치되었다. 고천 일대에는 소규모 장을 볼 수 있는 곳과 주막이 들어서고 의왕면의 읍내로서 모습을 갖춰갔다.

1910년대 의왕면에는 800여 호 안팎에 4,000여 명의 주민이 생활하고 있었다. 농업인구가 90% 이상 절대적으로 많았고 약간의 상업인구가 있었을 뿐이었다. 게다가 농업인구의 거의 대부분이 영세빈민으로 불안한 소작인의 지위에 처한 주민들이 많은 아주 궁벽한 농촌마을이었다. 학교도 없어서 인근의 과천으로 가야 했고, 일본인은 한 두 가구 거주했을 뿐 조선인과 일본인의 차별을 크게 경험하지도 않았다. 그저 전통적인 마을공동체를 유지하며 평범한 농민들의 삶터에 불과한 곳이었다.

하지만 1900년대 초 경부선 철도가 설치되면서 철도용지로 수용당한 논밭과 임야의 주인과 소작인들은 불만이 많았다. 조상이 묘역이 훼손된 어느 가족은 저항하다가 ‘반일분자’로 몰리며 혼쭐이 나기도 했다. 1907년 일제에 의해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된 이후 청계산일대에는 의병들의 활동이 활발했다. 당시 광주군 학현(현 의왕시 청계동)에 거주하던 박성삼은 윤치장 의병부대의 일원으로 청계산 일대에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는 한편, 군량미와 군자금모집에 참여하다가 체포되기도 하였다.

특히 청계지역에는 마을마다 작은 서당을 중심으로 한학을 배우는 학동들이 적지 않았고, 19세기 후반 이후 하우현성당의 교세가 확장되면서 성당에서 운영하는 근대적인 학교인 경애강습소가 있어서 그곳에서 신학문을 습득하고 식민지 조선의 현실에 눈을 뜬 젊은이들이 있었다.

 

청계마을 청년들이 모여 독립만세운동을 준비하다

1919년 3월 1일, 서울과 평양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다. 3월 5일에는 서울지역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남대문역 앞에서 종로에 이르는 곳까지 행진하며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이 독립만세운동에는 의왕면 청계리 출신으로 배재고등보통학교 4학년에 재학 중이던 성주복도 참여했다. 성주복은 당일 아침 남대문 밖에서 고향에서 온 동생 성주관을 만나 자신이 가지고 있던 학교 도구와 양복을 동생에게 건네주고, 두루마기를 건네받아 갈아입고 만세운동 시위 대열에 합류했다.

서울에서 독립만세운동 소식은 성주복의 동생을 통해 청계 마을에 있는 친구 이복영(호적에는 이봉근으로 되어 있다)에게 전달되었다. 훗날 이복영의 사촌 동생 이철영의 증언에 따르면, 이복영은 뜻을 같이 하는 동지들과 사전에 의왕지역에서 만세시위 계획을 세웠다고 한다.

먼저 청계지역을 중심으로 인근 4개리(포일리, 내손리, 청계리, 학의리)의 책임자를 정하였다. 그리고 1주일 동안 비밀리에 만세시위에 필요한 태극기를 제작하였다. 또한 집집마다 한 사람씩 동원하여 ‘숲밖에’(현 백운호수 뚝방 주변 지역) 집결하기로 했다. 이러한 계획은 마을 이장에게 통문으로 전달되었고, 이장의 책임 아래 의무적으로 한 집마다 한 사람씩 참가하도록 했다. 만약 이 기밀을 누설하거나 만세운동에 불참하는 가정에 대해서는 만세시위 후 방화한다고 경고까지 했다고 한다. 이러한 사전계획과 준비는 고개 너머 고천리와 오전리, 삼리에도 전달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3월 31일 의왕면사무소앞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다

 

"수원군의 의왕면 고천리에서는 삼월 삼십일일 밤에 다수한 군중이 모여 면사무소와 경관주재소에 대하여 폭행을 함으로 수원주둔병대가 출동하여 해산시켰다는데 주모자로 인정할 만한 자 46명을 체포하였다가 그 이튿날 41명만 태형에 처하여 방송하였다더라."

 

3월 중순 이후 독립만세운동은 전국적으로 급속히 확산되었다. 평화적인 만세시위는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면서 폭력화 양상을 띠기 시작했다. 3월 27~28일 인근지역에서는 시위대가 군수를 협박하는가 하면 면장을 구타하고 헌병의 총기를 빼앗고, 면사무소를 습격하기도 했다. 안양과 군포, 과천에서도 300명에서 1천명이 넘는 시위대의 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군포장역 경찰관주재소 부근에서는 3월 31일 2,000여 명의 군중이 만세시위를 벌였다.

1919년 3월 31일 의왕지역에서도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청계마을 주민들은 3월 31일 저녁 무렵 ‘숲밖에’ 모여 시위대를 형성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시위대는 300~350여 명에 달했고, 그들의 손에는 태극기와 횃불이 들려 있었다. 시위대는 오전리 고개를 넘어 오매기 마을과 전주나미 마을을 지나고, 고천리 사그내마을에 있는 경찰관주재소를 거쳐 의왕면사무소로 나아갔다. 일부는 지지대고개의 산봉우리에 올라 횃불을 높이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의왕면사무소에 모인 사람들은 대부분 농민인 마을주민들이었으며, 기독교인과 천도교인들도 참여했다. 군중 수는 800여 명에 달했다. 인근의 왕곡리와 이리, 삼리지역의 주민들도 함께 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시위대는 준비해온 태극기를 흔들고 횃불을 높이 들어 의왕면사무소와 경찰관주재소를 오가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의왕면사무소앞 시위대에는 면장도 함께 했다. 시위대는 주재소로 달려갔다. 주재소에 있던 조선인 순사는 “저는 (총독부)에서 주는 제복을 입고 녹을 먹는 관리이므로 내몸은 여러분들과 함께 할 수 없으나 마음은 함께 합니다. 계속해서 만세를 부르세요. 그래서 우리가 독립을 쟁취하기를 고대합니다” 라며 시위대를 격려했다고 한다.

시위대의 만세시위가 계속되자 수원으로부터 일본 헌병이 출동하였다. 갑자기 나타난 세 명의 헌병은 총을 쏘기 시작했고, 시위대 두 명이 부상을 입고 쓰러졌다. 피하던 동료 시위자들은 부상자를 부축하기 위해 되돌아왔다. 이들은 모두 현장에서 체포되어 포승줄에 묶여 수원경찰서로 압송되었다. 46명이었다. 체포된 시위대는 이틀 동안 조사와 신문을 받고, 이들 가운데 41명은 4월 1일 태형 60~90대의 매를 맞고 풀려났다. 부상자 두 명 가운데 한 명은 서울 세브란스 병원으로 후송되어 치료를 받았다.

당시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와 일본군 육군성에서 1920년 12월 30일 발행한 '조선소요사건관계서류'를 보면 일제 경찰은 군대를 불러 시위대를 해산시켰으며 이날 46명의 주민이 체포돼 즉결 태형을 맞았는데 걷지 못할 정도로 맞았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독립기념관 자료에 따르면 1919년 당시 의왕시 남부인 고천지역뿐 아니라 동부지역에서도 학생조직을 바탕으로 인근 4개리에서 매호당 1명씩이 참가하여 백운저수지에 집결하여 고천주재소와 내손리를 돌며 만세운동을 전개했던 것으로 조사됐다.

당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했던 이들이 청계동 출신의 이봉근 선생과 배재학당 출신인 친우 성주복,이복길 등으로 이들은 태극기를 7일간 야간에 제작해 각 리에 배포하였다.

특히 이봉근 선생(1903~?)은 고천주재소와 현 내손동(갈미)에서 대형 태극기를 들고 지휘하다 총에 맞아 오른쪽 허벅다리에 관통상을 입었으며 이후에는 문맹퇴치운동에 힘써 청계 계명야학원을 설립하기도 하였다.

 

3.31일을 의왕시 독립만세운동 기념일로 지정해야!  

1919년 3월 31일 의왕면사무소앞 독립만세운동은 다음과 같은 역사적 특징을 갖는다. 첫째 계획적이고 조직적으로 준비되어 실행되었다는 점, 둘째는 비밀 누설자 또는 불참자에 대한 시위조직자들의 매우 강력한 통제 아래 진행되었다는 점, 셋째는 농민만이 아니라 기독교인과 천도교인들도 다수 참가하였다는 점, 넷째 순사와 면장도 함께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는 점, 다섯째는 면사무소와 경찰관주재소를 습격하는 폭력적 양상을 보이고 있는 점, 여섯째는 일본군의 무력적인 탄압과 경찰의 폭력적 고문이 자행되었다는 점 등이 확인된다.

이와 같은 의왕면사무소 앞 독립만세운동을 역사적으로 기리기 위해 의왕문화원은 2011년 독립만세운동 사실을 역사적으로 규명하고 2012년부터 매년 3.1절을 기해 기념행사를 진행해 오고 있다. 특히 2017년부터는 기념식 중에 중고등학생들로 구성된 연극반을 구성하여 의왕면사무소앞 독립만세운동을 주제로 한 연극을 공연하고 있다.

2012년부터 의왕시민사회단체들은 연합하여 3월 31일 저녁을 기해 독립만세 시위가 전개되었던 의왕면사무소터(현 고천동 소재 의왕시청 별관/사근행궁터)에서 독립만세운동 재현행사를 해오고 있다. 특히 3.1운동이 우리나라의 자주독립뿐만 아니라 평화와 민주주의 및 인권의 가치를 지켜내기 위한 혁명임을 인식하고 마을공동체, 장애인단체, 생활협동조합, 교육공동체, 노동조합 기타 시민사회단체가 각각 3.1운동을 기념하는 ‘선언서’를 낭독하고, 횃불과 태극기를 들고 1919년 만세시위대의 발자취를 따라 거리행진을 펼치고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의왕시의 독립만세운동의 현장은 재개발사업으로 인해 사라질 위기에 놓여 있다.

의왕시문화원 박철하 향토문화연구소장은 "3월 31일을 의왕시의 독립만세운동 기념일로 지정하고, 독립만세운동의 현장을 보존하고, 시위대가 행진하던 거리를 ‘만세거리’로 조성했으면 싶다"고 말한다.

 

 

 

안양탐사대는 도시와 마을과 동네의 골목길에서 사라지고 변화되는 흔적들을 찾아 지난 2013년 2월부터 매주 토요일 마을과 동네 골목길을 걷는 마실을 해 왔습니다. 사진, 영상, 스케치, 이야기 등으로 도시를 기억하고 기록하고 이를 통해 또다른 프로젝트, 기획 등을 해보려는 도시.마을.골목연구, 건축, 사진, 걷기 등에 관심있는 시민은 탐사여정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탐사에 참여코자 하시는 분은 SNS 페이스북 안양기억찾기탐사대 ( www.facebook.com/groups/132023160294699/ )에 접속후 신청해 주시거나 전화주시기 바랍니다. 문의: 길라잡이 최병렬(016-311-1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