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4월11일 타계한 한국영화계의 거장 故 신상옥 감독을 추모하는 추모 12주기 기념행사가 오는 10일 오후 2시 1960-70년대 한국영화의 중심지였던 안양에서 열린다.
(사)신상옥감독기념사업회가 주최하고 안양시와 안양문화예술재단의 후원 아래 안양아트센터 수리홀에서 열리는 추모 행사에는 원로배우 최은희, 신영균, 문희를 비롯 원로 영화감독 김수용, 이장호, 영화평론가 김종원, 전 부산국제영화제 김동호 조직위원장 등 영화계 인사들이 참석할 예정이다.
추모행사에서는 팝페라 그룹 파라다이스가 '빨간 마후라' 주제곡을, 신상옥, 최은희가 설립한 안양영화예술학교 출신의 남성듀엣 노고지리가 추목곡을 부른다.
또 4월 10일부터 15일까지 안양아트센터 갤러리 미담에서의 신(申)필름 영화역사전시회를 통해 申필름이 제작한 주옥같은 고전 영화들이 무료 상영되고, 60~70년대 영화 포스터 및 사진들과 영화 기자재도 전시돼 선보일 예정이다.
안양은 신상옥 감독이 동양 최대 규모로 1957년 건립된 안양촬영소를 1960년 인수해 申필름 간판을 내걸고 최초의 프로덕션 시스템을 도입하는 등 한국영화 발전에 기여했으며 연산군(1961·제1회 대종상 최우수작품상 수상),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1961·제1회 대종상감독상 수상), 성춘향(1961), 빨간 마후라(1964), 벙어리 삼룡이(1964) 등 80여편의 주옥같은 영화를 제작하며 한국영화의 메카로 자리매김하고 영화 왕국을 꿈꾸던 곳이다.
특히 1978년 북한으로 갔던 신상옥 감독은 영화배우 최은희와 함께 1987년 미국으로 망명했다가 한국으로 돌아온 이후인 지난 2002년 안양시, 성결대와 함께 예술교육 실천을 위한 전략적 협정을 통해 안양시로부터 옛 안양경찰서(안양8동) 임대해 '안양신필름인스티튜드'를 개관하여 과거 한국영화의 영광과 부흥을 기대하면서 영화도시로의 부활을 꿈꾸었다.
하지만 입시 사설학원으로 전락하면서 특혜 시비가 불거지며 시의회와 시민사회의 비판과 더불어 운영난에 봉착하면서 문을 닫고 만다. 당시 안양시가 '아트시티 측면에서 과거의 영화도시적 후광을 되살리기 위해 신 감독 부부를 영입했으나 젊은 영화감독들이 영화계를 이끌고 있는 시대변화를 인식하지 못했으며 영화도시로의 장기적인 종합계획 수립도 하지 않고 일을 벌렸다는 비판을 받았다.
국내뿐 아니라 북한에서도 김정일의 영화고문 겸 신필름영화촬영소 총장직을 맡아 북한을 탈출하기 전까지 돌아오지 않는 밀사(1984), 소금(1985), 심청전(1985), 불가사리(1985) 등 7편의 영화를 만드는 등 영원한 현역 영화 감독으로 머물고 싶어했던 신 감독은 2002년 '겨울이야기'를 만들었으나 개봉하지 못했으며 말년의 꿈이었던 '칭기즈칸' 역시 제작하지 못한 채 2006년 삶을 마감한다.
[자료]안양은 한국 영화의 산실이자 메카였다 http://anyangbank.tistory.com/2298
[자료]수도.안양.신필림과 근대 한국영화사 이야기 http://anyangbank.tistory.com/530
1956년, 이승만 안양영화촬영소 정초식 참석 대한뉴스 영상 http://anyangbank.tistory.com/378
故 신상옥 감독 평전
신상옥 감독은 1925년 함경북도 청진에서 출생해 경기고등학교의 전신인 경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도쿄(東京)미술전문학교에서 미술을 전공했다. 귀국 후 그는 고려영화협회 미술부에 입사해 영화와 인연을 맺었다. 이론과 촬영기술을 겸비한 영화감독 최인규 밑에서 조감독으로 기초를 닦은 신 감독은 1952년에 ‘악야(惡夜)’로 감독 데뷰했으며 신프로덕션을 설립했고, 1954년 영화 ‘코리아’를 제작하면서 이 영화에 출연한 배우 최은희와 결혼했다.
신 감독은 한국영화산업 근대화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61년 신상옥프로덕션, 서울 영화사, 안양영화, 신아영화, 신필림, 신필름 등 다양한 이름으로 통칭되어 온 한국 최초 기업형 영화사인 '신필름'을 설립해 한국 영화의 제작, 투자, 배급 등을 아우르는 영화 기업화의 모태로서 영화 제작에 필요한 인력을 자체 조달했으며 다양한 장르의 영화를 제작했다.
영화를 통해 예술성이 있는 문학작품을 알리려고도 노력했다. 심훈의 ‘상록수’와 주요섭의 ‘사랑 손님과 어머니’, 그리고 이광수의 ‘꿈’ 등을 영화화해 영화를 통해 문학성 있는 작품을 관객들에게 알리며 문예영화 붐을 일으켰다.
또 그는 영화의 사회적인 역할을 중요시했다. 영화가 대중의 사고와 사상을 바꿀 수 있는 정치적 영향력이 있는 매체라는 것을 인식하고, 계몽영화를 만드는 데 주력했다. 영화 ‘상록수’는 일제강점기 가난한 농촌에서 민족주의 사상과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고 ‘어느 여대생의 고백’에서는 6·25전쟁 직후 혼란기에 여성의 경제적 자립을 위한 여건 조성을 주장했다. 영화 ‘쌀’에서도 전북 무주 구천동의 실화를 바탕으로, 고난을 극복하는 인간의 의지를 담아냈다. 이런 그의 신념은 결혼생활에서도 잘 나타난다. 부인 최은희 씨가 출산과 내조에 충실하기보다는 안양예술고등학교를 운영하면서 영화인을 양성하는 데 주력하도록 뒷받침했다.
그의 삶은 영화 같았다. 1978년 최 씨가 납북되자 신 감독은 북으로 갔다가 부인을 데리고 1986년 극적으로 탈출하여 미국으로 갔다. 이에 한국 최초로 남한과 북한 그리고 영화의 메카 허리우드에서 영화제작과 감독을 했다. 북한에서는 김정일의 영화고문 겸 신필름영화촬영소 총장직을 맡아 돌아오지 않는 밀사(1984), 소금(1985), 심청전(1985), 불가사리(1985) 등 7편의 영화를 만드는 등 영원한 현역 영화 감독으로 머물고 싶어했다.
신상옥. 최은희 부부가 1987년 미국으로 망명해 살다가 1994년에는 한국인 최초로 칸국제영화제 심사위원을 지내기도 했다.
신상옥.최은희 부부는 한국으로 돌아온 이후인 지난 2002년 안양시, 성결대와 예술교육 실천을 위한 전략적 협정을 맺고 안양시 소유 건물(안양8동의 옛 안양경찰서)을 거의 무상으로 임대받아 '안양신필름인스티튜드'를 개관한다. 신필름아트센터와 산학협정을 맺은 안양 성결대는 연극영화학부를 신설하고 신상옥.최은희 부부를 명예교수로 위촉하기도 했다.
당시 ‘아트 시티’를 표방하고 있던 안양시는 시의 문화적 브랜드를 높이기 위해 고심하던 신중대 안양시장이 신 감독 부부가 미국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이를 절호의 찬스로 여겨, 부산영화제에까지 내려가 그들을 만나고 ‘한국영화의 메카’로서의 꿈을 재현시키기에 합의했다.
이에 신 감독과 안양시는 2002년 11월 안양영화촬영소 추억의 영화 회고전을 시작으로 안양에서의 한국영화의 영광과 부흥을 기대하면서 영화도시로의 부활을 꿈꾸었다. 석수동 석산 일대의 '징기스칸' 촬영세트건설, 안양아트센터의 '셰익스피어극장' 운영계획, 영화박물관 건립 구상 등 ‘영화도시 안양’의 재건을 위한 설계도는 참으로 웅대했었다.
하지만 신필림아트센터는 입시 사설학원으로 전락하면서 특혜 시비가 불거지며 시의회와 시민사회의 비판과 더불어 운영난 마져 겹치며 2006년 2월까지 운영하다 부지와 건물을 안양시에 반환하고 떠난다.
결국 안양시는 1960-60년대 석수동에 자리했던 동양최대의 영화촬영소(수도영화사-안양영화사-신필림)의 역사와 흔적을 시의 정체성으로 연결하는 '아트시티' 측면에서 과거의 영화도시적 후광을 되살리기 위해 신 감독 부부를 영입했으나 젊은 영화감독들이 영화계를 이끌고 있는 한국 영화시장의 시대적 변화를 인식하지 못했으며 영화도시로의 장기적인 종합계획 수립도 하지 않고 일을 벌렸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신 감독은 안양을 떠난 직후인 2006년 4월 11일 삶을 마감한다. 2002년 '겨울이야기'를 만들었으나 개봉하지 못했으며 말년의 꿈이었던 '칭기즈칸' 역시 제작하지 못했다. 정부는 한국영화의 발전에 기여한 신 감독에게 2006년 타계 후 문화계 최고의 문화체육부 금관훈장을 수여한다.
신상옥감독이 타계한 직후 한국영화감독협회는 '영화계의 큰 별' 신상옥 감독을 기리기 위해 '신상옥기념사업회' 후원과 공주시와 공동주최로 한국 대표 단편영화제로 젊은 영화인들의 등용문으로 공주 신상옥 청년 영화제를 시작했다. 공주 신상옥 청년 영화제는 35mm, 16mm, 디지털 시네마, HD방송 등 미래의 영화 연출 엔터테인먼트 환경을 준비하는 한국영화감독협회가 다양하고 역동적인 한국청년문화를 담은 영상작품을 공모 시상함으로서 우수한 작품을 소개하고 향후 미래의 영화산업을 이끌어 갈 새로운 인재를 발굴하는 기회의 장으로서 역할을 담당하고자 함에 목적을 두었으나 관심 저조로 결국 2011년 5회를 끝으로 중단됐다.
신 감독은 과거에 존재했지만 실제로는 미래를 살았다. 안양영화예술학교 설립과 이장호 감독을 비롯한 우리나라 영화계를 이끄는 후배감독 양성을 통해 한국영화의 미래를 준비했다. 영화가 경제적 수익을 내는 산업이나 감성을 표현하는 예술만이 아니라 국민의 의식과 사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정치적 매체라는 것을 일찍이 강조했다. 그는 미래를 살다가 간 우리나라 영화계의 선각자였다. 신 감독은 시대가 변해도 변하지 않는 한국을 대표하는 영화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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