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임머신/옛사진읽기

1960년대 안양천과 덕천마을 일대

안양똑딱이 2017. 7. 28. 14:56

 

#안양 #덕천마을 #안양천 #안양7동 #안양8동 #안양1동 #비산동 #태평방직 #비산대교 #안양냉동사 #삼풍 #동화약품 #쌍개울/ 1960년대 안양천과 안양1동, 안양6동, 안양7동, 안양8동, 비산동 등 광범위한 지역의 모습이 한눈에 보이는 귀중한 사진으로 안양 비산동 대림대학교 뒷산에서 의왕. 수원쪽 방향으로 찍은 것으로 사진 앞쪽이 남쪽 방향이며 왼쪽은 평촌벌, 오른쪽은 안양읍내쪽이다.
사진 아래 오른쪽에서 구비구비 곡선으로 왼쪽으로 희미하게 가로지르는 폭넓은 하천이 안양천이다. 하천 중앙과 오른쪽에 교량(다리)을 놓기 위한 교각들이 서 있는데 경수산업도로(석수동~호계삼거리)가 놓여지기 전으로 2개의  다리가 만나는 지점이 현재의 비산동 이마트 자리쯤 된다.

사진 오른쪽 아래 안양천에 놓여진 측면으로 보이는 교각은 이후 비산대교(안양 우체국사거리-이마트앞)가 놓여진 반면 안양천 중앙의 엄청 넓은 교각은 연결도로 노선이 취소되면서 이후 모두 철거됐다.
사진 오른쪽 하단에 하얗게 보이는 건물들은 시대동(현 안양1동)의 태평방직 공장으로 안양3동의 금성방직과 함께 많은 나이 어린 많은 여자노동자들이 일했던 곳으로 1953년부터 1970년 초까지 있었으며 1983년 10월에 진흥아파트 저층 단지에 이어 추가로 고층아파트단지 들어섰으며 현재 재개발사업이 추진중에 있는 곳이다.
당시 태평방직 정문앞으로는 안양읍내에서 비산동, 인덕원, 청계, 과천, 말죽거리로 가던 도로가 지나갔는데 왼쪽으로는 1920년대 개설된 안양 최초의 시장(안양시장-구시장) 자리해 1940-60년대 안양의 다운타운이었으며 오른쪽으로는 안양천을 건너는 수푸루지다리(현 임곡교)가 있었다.
사진 오른쪽에서 위쪽으로 구비구비 놓여진 길은 경부선 철도길이며 그 옆으로는 당시 1번국도(현 만안로)가 함께 이어진다.
사진 오른쪽위의 나무 숲이 우거진 곳이 현재의 만안구청이다.
만안구청을 비롯 인근의 지방이전 정부기관(전 국립농산물검사소, 국림종자관리소 등) 터는 일제 강점기 밤나무가 무성한 율원이었는데 1937년 안양식림묘포장(경기도임업시험장)이 설치되어 1971년까지 운영되다가 1973년 안양읍이 시로 승격된후 1974년 기공식을 갖고 안양시청사 신축에 나서 1년후인 1975년 현재 모습의 건물이 완공되 시청사로 사용하다가 1996년 안양시청이 평촌으로 이전하면서 현재는 만안구청사로 사용중이다.
사진 중앙의 논밭이 있는 벌판은 지금의 안양7동 덕천마을 일대로 당시 주변에는 삼품, 안양냉동, 동화약품 등의 공장들이 있었다. 사진 중앙 윗쪽 야산 밑자락에 보이는 공장이 동양나일론(현 효성 안양공장)이며 그 앞으로 하얗게 보이는 길이 안양경찰서 사거리(현 성결대사거리)에서 명학대교를 건너 갈현마을(평촌벌)로 이어지던 도로다.

덕천마을의 역사

안양 덕천마을은 주접동 동북쪽에 있는 안양천변에 자리한 마을로 조선시대에는 사람들이 거주하지 않았으나 일제강점기 초에 시흥시 정왕동에 살던 원정상(元貞常, 안양여고 원종면 선생의 증조부)씨가 분가를 나와 지금의 안양7동 213에 정착했고, 이어 전주 이씨, 창령 성씨등이 세거하면서 자연마을이 형성되었고 ‘벌터’라 불리었다. 1978년 마을의 유지들에 의해 ‘덕천마을’로 개칭되었고, 이듬해 5월 1일 안양 6동에서 분리되어 안양7동으로 분동(分洞)된다.
이곳은 1960년대만 해도 대부분의 지역이 농경지였다. 예컨대, 명학역과 주접지하도에 이르는 경부선 철도변은 아카시아 동산이었으며, 안양 냉동사(안양7동 196-15)자리는 농경지(논), 주식회사 삼풍(안양7동 199)자 리는 논과 포도밭, 대영모방주식회사(안양7동 196-12)자리는 잎두밭, 동화 약품공업주식회사(위치, 안양 7동 189)자리는 농장이었다.
이 마을이 번창하기 시작한 것은, 토박이 원종만(안양7동 138-32, 원정상 증손)씨가 허허벌판에 덕천슈퍼 건물을 신축한 후, 7동새마을금고(안양7동 130-27)를 비롯 덕천국민학교(안양7동 192-5), 덕천우편취급소 등의 기관과 공장들을 유치하는데 부터다.
1960년대 산업화의 물결을 타고 안양냉동, (주)삼풍, 대영모방, 동화약품 등 크고작은 공장들이 속속 들어서면서 덕천마을 남쪽은 공업지대로 변하였다. 이어 덕천초등학교가 개교하였고 지금은 아파트형 공장인 유천팩토피아 건물에 공장들이 많이 들어섰으며 동아아파트, 준마아파트를 비롯한 다세대 주택들이 많이 건축되면서 공업과 상업 주거지역이 공존하기 시작했다.
덕천마을은 지난 1973년 구획정리사업으로 계획적으로 개발된 지역이지만 급속한 산업화에 따른 도시화로 인한 인구과잉, 도시기반시설의 과부하, 도로폭의 협소, 안양천 범람으로 인한 잦은 침수와 철도소음에 시달려 왔다.
결국 주거지역이 자리했던 만안구 안양7동 148의 1 일원 25만7천590㎡에 달하는 면적에 대한 재개발사업이 추진돼 안양시는 총 4천250가구의 아파트를 건설하는 주택재개발사업에 대해 지난 2006년 9월 7일 사업시행자로 한국토지주택공사(LH) 를 지정 고시했다.
이어 LH는 2008년 12월 19일 사업시행 인가를 받아 삼성물산·동부건설을 시공사로 결정했다. 또 2009년 2월10일 권리가액을 통보한데 이어 8월 25일 분양신청을 완료했다.
안양 덕천지구 재개발사업은 대규모 공공물량으로 사업규모가 클뿐 아니라 주택공사가 턴키베이스 방식으로 발주한 아파트중 최대 규모인 5950억원에 달하는 대형 프로젝트로 대형사들이 눈독을 들인 결과 삼성물산 건설부분과 동부건설이 65:35 지분 컨소시움으로 참여해 수주했다가 동부건설의 부도로 삼성물산이 단독 시공에 나서 대규모 아파트단지를 조성했다.
이에 덕천마을에는 전용면적 39㎡ 633가구를 비롯 49㎡ 96가구, 59㎡ 1천308가구, 84㎡ 1천634가구, 114㎡ 384가구, 139㎡ 195 가구 등 32층 높이 아파트 35개동이 들어서, 세대수만 4천2백50가구. 입주자만 1만 2천여 명에 미니 신도시인 '래미안 안양 메가트리아'가 태어났다.
여름철 물난리가 나면 안양천의 범람으로 골목길이 물에 잠기던 동네 덕천마을은 이제 고층 건물이 우뚝선 미니 신도시로 변모해 과거의 모습은 흔적없이 사라지고 추억과 기억만으로 남게됐으며 마을의 절반에 해당하는 덕천초교 주변의 동네와 더불어 남쪽의 명학역까지 이어지는 소규모 공장들과 아파트형 공장들이 자리한 지역 또한 서서히 개발의 바람이 불고 있다.

덕천마을 지명유래

이 마을 본래의 이름은 넓은 벌판에 있다고 하여 벌터 (坪村)라 칭했는데, 1977년 7월 대홍수 때 안양천의 범람으로 많은 수재민이 발생하자 수재민촌(水災民村)으로 불리웠고, 이 해 9월에 안양의 시내버스(삼영운수)가 이 곳에 버스노선을 개설하면서 버스 안내판에 수재민촌으로 명기하자, 당 시 이 마을의 새마을지도자였던 최돈세(崔燉世)가 중심이 되어 긴급 주민회의를 개최한 결과 수재민촌 이란 마을명이 좋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장차 2세 교육을 위해서도 바람직스럽지 못하므로 차제에 새로운 마을명을 짓자는 제의가 많아, 큰 하천인 안양천에 위치해 있다고 하여 큰 德 자에 내 川 자를 취해 덕천마을 (德川洞)으로 명명했다가, 안양천의 오염으로 이미 지가 좋지 않다는 여론에 따라 1년만인 이듬 해(1978) 9월에 이곳 어린 이들이 샘솟듯이 씩씩하게 자라서 나라에 큰 일꾼이 되라 는 뜻으로 큰 德 자에 샘 천(泉) 자를 취해 덕천마을 (德泉洞)로 개칭하고 마을입구에 덕천마을 이란 표석을 설치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