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임머신/옛사진읽기

[20260921]안양 수촌마을에서 벼 농사 짓던 1970년대 전원 풍경

안양똑딱이 2026. 9. 21. 16:16

 

2026.09.21/ #아카이브 #기록 #역사 #옛사진 #수촌마을 #since1970/ 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에서 찾아내 안양 관양동수촌마을의 1970년대 모습으로 멀리 관악산이 웅장한 모습으로 조망된다.(사료원본: 

https://archive.history.go.kr/image/viewer.do?gid=DKI012_06_01&catalogId=DKI012_06_01V0000_033)

 

안양 수촌마을은 경기도 안양시 관양동에 위치한 자연부락의 명칭으로 뺌말 즉“ 빼어날 수 마을촌”을 합쳐 수촌(秀村)이라 부른다.

이 동네에는1970년대 이후 지어진 다세대 다가구들이 많은데 그래도 다보란, 꽃동산, 수목, 해동, 수촌등 여러개의 어린이놀이터겸 쌈지공원들이 자리하고 있다.

수촌마을 뒤 관악산 큰 골산에는 당집과 마을에 있는 15미터 높이의 느티나무(수령 150~200년/ 보호수-경기-안양5호/ 관리지 관양1동장) 당나무앞에서 지금도 음력 시월 초이틀에 마을공동 당제를 지내고 있다.

안양종합운동장 사거리에서 평촌대로 374번길과 마주치면서 오른쪽으로 이어지는 수춘마을을 지나는 관평로 305번길은 과거 안양읍내에서 인덕원을 거쳐 남태령과 청계, 말죽거리로 넘어가던 옛길이다. 1950~60년대에는 청계와 인덕원에서 걸어서 안양역까지 걸어서 서울과 수원으로 통학과 출근을 했었고, 1970년대에는 안양읍내 관문인 안양역~땡땡땡건널목~수푸루자다리-임곡마을~인덕원~청계저수지(백운호수) 또는 과천~사당과 말죽거리를 연결하던 버스가 다녔다.

수촌마을의 중심도로이자 옛길은 약 665m정도로 도로 양쪽과 주변에 약 200여개의 빵집, 커피숍, 술집, 식당 등 다양한 종류의 음식점들이 분포되어 있어 안양 동네 상권중에서는 최고다. 특히  수촌마을 먹거리촌은 여행자들이 찾는 관광지라기보다 진짜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가는 동네 맛집이 모인 거리에 가까우며 안양일번가, 범계역, 평촌역 못지않게 젊은이들이 많이 찾는 핫 플레이스 거리다. 현재 수촌마을 일대 곳곳에서 재개발이 추진증으로 멀지않아 세월이 담긴 옛모습이 사라질듯 싶다. 

 

[수촌마을 옛 지명]

 

■ 말무덤이(馬音洞) <관양1동>뺌막(秀村)과 가운데말(中村) 사이에 자리잡은 마을로, 조선시대 마장골 (현 매곡동)에서 기르던 말이 죽으면 이곳에 매장했다고 하여, 말무덤이 (馬音洞)이라 부른다고 한다. 일설에는 큰 무덤이 있는 고싱라 하여 말 무덤이라 부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1960년대만 해도 현 관양중학교 아래에서 말에게 편자했던 쇠 조각 등이 많이 출토되었다는 마을 촌로들의 증언이 있는 것으로 보아 말의 무덤이 있었던 것은 확실한 것 같다.

김해 김씨, 나주 정씨, 韋氏 등이 오래 살아 온 말무덤이 마을이 오늘 날처럼 크게 번창되기는 1978년에 시작된 안양7지구 구획정리 사업을 실시하면서부터 이다. 이후 1982년 현대식 건물이 간간히 신축되다가, 1985년에 이르러 농경지 (논)이었던 곳에 현대아파트가 들어선데 이어, 야산이었던 곳에 아리랑 아파트와 남광2차아파트가, 밭과 논이었던 곳에 태광아파트가 각각 신축되면 서 인구가 급격히 늘었다. 또 밭과 임야였던 관양동 538 일대는 1948년 관양국민학교가 세워졌는 데 이는 동안구청 관내에서는 최초의 현대식 교육기관인 동시에, 이 학교 校名으로 인해 1973년 시제가 실시되면서 이 일대를 冠陽洞으로 명명 하기까지 하였다. 그후 1977년에는 포도밭이었던 관양동 산 90-3에는 관양중학교가 세워져, 한낱 말의 매장지에 불과했던 불모지가 오늘날에는 교육의 요람지로 크게 탈바꿈 되었다. 마을에서는 뺌말, 가운데말 주민들과 함께 해마다 음력 10월 1일 뺌말 뒤에 있는 산에서 山神祭를 지내는 곳이 뺌말 지역이라는 연유로 1960년대 초부터 제를 지내지 않는다.


■ 망령골(亡靈谷) <관양1동>망령골 고개주변에 있다. 본래 동편에 속한 마을로 청주 한씨 등의 세 거지이며, 민가 7호의 작은 취락이다. 구전에 따르면 신라 말기에 어떤 사람이 서울에서 나무를 팔고 과천을 거쳐 이곳을 지나가는데, 어느 여인 이 소복을 하고 나타나 하룻밤을 유숙하며 여인과 관계를 맺었다고 한다. 그 후 그 여인이 다시 나타나 하는말이 관악산 바위 틈에 아이가 있으니 가보시오 라고 한마디 하고는 홀연히 사라졌다. 여인이 일러준대로 현장에 띵가보니 과연 바위 틈에서 아이가 울고 있어 데려다 정성껏 기르니, 이가 후에 귀주대첩의 영웅 강감찬 장군이라는 것이다. 망령골이란 亡靈, 즉 죽은 사람의 영혼이 나타났다 해서 붙여진 지명인데, 일설에는 어느 여인이 이곳에서 3년간을 하루도 빠지지 않고 관악산을 바라보며 기도했다고 하여 망령골(亡靈谷)이라 했다는 것이다.

 

■ 동편(東便) <관양1동>샌말(間村) 동쪽에 자리잡은 마을로, 이 곳에 최초로 세거한 성씨는 조 선중기에 전주 이씨 익양군파인데, 현재(1991) 동편의 57가구 중 30여 가구가 전주 이씨일만큼 전주 이씨가 크게 번성했다. 후손 중에 李冕薰(작 고, 전매청장 역임), 李書九(1923 .대림콘크리트 상임고문)가 있다. 관양1동 28통에 속한 동편마을은 서남지역을 아랫말, 동북지역을 웃말 이라 각각 칭하고 있다. 대부분의 지역이 개발제한구역인데다가 수도물도 안들어오는 도시속의 농촌이다.

 

■ 부림말 (富林洞) <관양1동>가운데말 동쪽에 위치한 마을로, 남평 문씨와 밀양 박씨가 배판했다. 이곳은 예로부터 산림이 울창했을 뿐만 아니라, 인근의 다른 마을보다 부 자가 많이 산다고하여 부림말 (富林洞)이라 칭한다. 부림말은 비산동- 인덕원간의 도로확장후 대도, 한미, 골드, 남광, 삼광, 원주 등의 연립 및 아파트가 건립되면서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였다. 마을에서는 해마다 음력 7월 1일에 관양우체국 옆에 있던 박우물과 신 장로우물, 부림우물(윗우물)에서 마을의 안정과 풍년을 기원하는 井祭를 지내다가, 우물 주변에 민가가 건립되면서 샘물이 끊겨 폐정되자, 1988년 부터 祭를 지내지 않는다.

 

■ 오촌말(吳村洞) <관양1동>샌말 북쪽에 있다. 이곳에 최초로 산 사람은 조선 숙종때 承政院 左承 旨에 증직된 吳益瑞(자는 龍佰, 호는 三山散人)로 알려지고 있으며, 그 후 그의 후손인 보성 오씨가 세거하면서 취락이 이루어져 오씨의 마을이란 뜻으로 오촌말 이라 칭하고 있다. 마을 뒤에는 그가 생존시에 암각한 三山洞天 이란 바위가 있다.

 

■ 뺌말(秀村) <관양 1동>말무덤이 서편에 있다. 이곳에 사람이 처음으로 살기 시작한 것은 조 선 중기로 알려지고 있다. 경상도 김해에서 과거를 보러왔던 김해 김씨 金寧君派의 유생 한분이 과거를 본 뒤 귀향하다 인덕원 쯤에 이르러 관악산을 바라보니 서북쪽 언덕의 지세가 완만하고 남향받 이므로 살기 좋은 곳임을 간파하고 정착하기 시작했다. 그 후 상주 김씨, 연안 차씨가 세거해 이들 세 성씨를 뺌말의 三大 姓氏 라 일컫는다. 뺌말 (秀村)이란 취락명은, 마을 내에 뺑대쑥(준말로 뺑쑥 이라함)이 많이 자생하고 있어 뺑말이라 했다가, 후대에 내려오면서 지금 의 지명으로 불리워 오고 있다. 마을에서는 해마다 음력 10월 2일이면 관악산 줄기 나즈막한 봉우리에 있는 당집에서 마을의 안정을 기원하기 위해 冠岳山 山神祭를 올린다. 산신제에 있어 가장 중요시되는 것은 산신제를 주관할 堂主를 선정하는 일이다. 당주는 몸가짐이 바르고 집에 상을 당한는 등 부정타지 않은 사람중에서 선정된다. 당주로 선정된 사람은 제를 지날 때까지 바깥 출입을 삼가하고 부정한 일을 저지르지 않으며, 대문앞에 진흙(또는 황토)을 발라 부정한 사람의 출입을 막는다. 예전에는 말무덤이, 가운데말과 함께 지내다가 부림말 등에 교회가 들어서면서 지금은 뺌말 주민들만 지낸다.

 

■ 샌말(間村) <관양1동>동편과 부림말 사이에 위치한 마을이므로 샌말 (間村)이라 부른다. 전주 이씨, 보성 오씨, 경주 이씨, 광주 이씨의 세거지로 전주 이씨가 대 성을 이룬 샌말은 안양일대에서는 오지에 속하며, 인근의 마을이 하나같이 하루가 다르게 급격한 도시화 추세로 변모되어 가고 있으나, 이 마을은 아직도 옛 모습 그대로 남아있는 전형적인 농촌이다. 이곳에는 중종조에 첨지중추부사를 역임한 柳秀獐(1435-1515), 李義駿 (황해도 관찰사), 柳寧(1507-1583, 전주판관 역임), 吳炳善(1904-1979, 만 안.안양.관양국교장역임)의 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