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5/10 48

안양천 나무다리-양명고앞(1981년)

안양 양명고 앞에 놓여있던 안양천 나무다리(1981년. 김귀연씨 제공) 수업을 마친 학생들이 검정 교복과 교련복을 입고 다리를 건너는 이 사진은 2009년 11월 안양2동주민센터에서 발간한 사진으로 보는 안양의 재발견 사진첩에 실린 사진중 하나입니다. 지금은 안양천 곳곳에 튼튼한 세월교와 커다란 돌을 놓은 징검다리가 있어 하천을 건너기가 편리하지만 예전에는 수량이 많아 6-70년대에는 드럼통으로 만든 줄배를 타고 건너거나 80년에는 사진처럼 나무로 만든 다리를 건너 다녔지요. 안양천은 60-70년대 초만 해도 은모래가 깔려있고, 어항을 놓아 물고기도 잡고, 멱도 감을 정도로 정감어린 곳이었지요. 그러나 70년대 중반들어 산업화와 도시화에 따른 인구집중, 공장 폐수, 생활하수가 뒤덮으면서 서서히 오염되기 ..

1970년대 안양읍내 풍경(현 CGV사거리)

현재의 안양CGV 사거리의 1970년대 모습입니다,. 안양 도심에 있던 절 용화사가 왼쪽에 보입니다. 이 자리는 이후 본백화점이 들어섰지요. 사진 오른쪽으로 가면 안양역입니다. 어릴적, 그러니까 족히 40년 이상은 되었을 그때의 용화사 경내에는 넓은 마딩이 있었고 큰 갓을 쓴 미륵불이 있었지요. 그리고 크나큰 대문이 가물가물해지는 기억속의 잔상으로 남아 있습니다.

1970년대 안양읍내 용화사 담벼락 상가

우리안양 제72호(2001년 11월호)에 실린 사진으로 1970년대 자전거가 한가롭게 지나가는 안양읍 중심가의 모습으로 정면이 현재의 본백화점(1983년 11월 23일 개점) 자리이지요. 안양CGV(과거 삼원극장) 쪽에서 사거리 대각선 방향으로 찍은 사진으로 사진 오른쪽 길로 내려가면 안양역, 왼쪽이 서울 방향(북), 오른쪽이 수원 방향(남)입니다. 사진에 보이는 상점들 뒤 왼쪽에 보이는 기와 건물이 안양역 광장 미륵당에 있던 미륵불을 경내로 옯겨와 모셨던 도심속에 있던 절 용화사입니다. 절 입구는 사진 왼쪽에 있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안양 용화사 자료에 의하면 용화사는 1943년 금강산에서 오신 화응큰스님이 창건한 사찰로 1983년 4월 안양시 동안구 호계동 337-6번지로 이전하였다가 인근에 아파트..

1968년 무렵의 안양영화촬영소

안양 석수동에 자리했던 안양영화촬영소 스튜디오. 신필림이 인수한 이후에 찍은 자료사진(1968년) 우명률의 기억 #안양영화촬영소.=안따까운 일이지만 현실이니 아쉽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국가도 어려운 그시절에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동양최대의 시설과 장비그리고 4만여평위에 웅장한 2개의 스타디오가 석수동에세워지고, 상량식사진이 보인다. 국가 개념인 수도영화안양촬영소 간판의 선명하게 보인다 또사진속엔 6,25전쟁시에 참전했던 밸프리트 장군과 초대홍찬촬영소장님도 보인다.안양석수동에서 제작된 첫영화는 "생명"이고2회는 "낭만열차"3번 "애정"4회는 지옥은 만원이다.그리고 허리우드감독과 미국무성작품은 고요한 한국의 아침.등 만들어졌다고 그시절 촬영스탭으로 했던 백영호[89]선배가 기록한내용이다 찍은 년도는 58~6..

안양영화촬영소 제2스튜디오 상량식(1958년)

안양 석수동에 자리했던 수도영화사 안양촬영소 제2스튜디오 상량식(1958년) 출처: 조선일보 한국전쟁 직후인 1954년 동양의 헐리우드를 꿈꾸며 수도영화사 홍찬 사장에 의해 안양시 석수동에 우리나라 최초의 종합영화촬영시설인 안양촬영소를 설립했다. 당시 기공식에서는 이승만 대통령까지 참석해 테이프를 끊고 축하했다. 안양영화촬영소는 대지 3만평에 500평과 350평의 스튜디오 2개동과 수중촬영장, 현상소 및 영사실 등을 비롯 촬영, 편집, 녹음 등 영화작업을 일괄 처리하는 동양최대의 시설로 한국최초의 시네마스코프 영화인 이강천 감독의 '생명'을 첫 작품으로 제작했다

1958년 동양 최대 규모였던 안양영화촬영소

안양 석수동에 자리했던 안양영화촬영소 전경(1958년) 1954년 수도영화사 홍찬 사장의 주도하에 우리나라 최초의 영화종합촬영시설인 안양촬영소가 안양시 석수동에 들어선다. 당시 기공식에는 이승만 대통령까지 참석할 정도로 동양의 헐리우드를 꿈꾸며 3만평의 대지 위에 각각 500평과 350평의 스튜디오를 갖추고 촬영, 현상, 편집, 녹음 등 영화작업을 일괄 처리할 수 있도록 한 동양 최대의 시설이었다. 그러나 수도영화사가 재정난으로 어려움을 겪자 신상옥 감독이 1963년 안양촬영소를 인수하여 1966년에 명칭을 '신필림'으로 바꾼다. 신필림에서는 1970년대 중반까지 150여편의 영화를 제작하고, 신상옥 감독과 최은희 부부는 1966년 설립한 안양영화예술학교를 통해서도 많은 연기자들을 배출하며 충무로의 패왕..

1970년대 안양천을 건너던 드럼통 줄배

1970년대 안양천을 건너던 드럼통으로 만든 줄배입니다. 사진속 어린이가 손으로 줄을 잡아 당기고 있는 것처럼 하천 양쪽에 로프줄을 묶어놓고 줄을 당겨 건너 다녔지요. 당시 안양천에는 물이 많았답니다. 이 배가 운행되던 곳은 현재의 양명고앞인데 먼길을 돌아다녀야 했던 주민들과 여름철에는 안양유원지로 가고자 하는 이들이 이배를 타고 건너가기도 했지요. 저도 어렷을 적 이배를 타본 경험이 있답니다

[안양권지도]1975년의 시흥군

2002년 1월20일 충남 공주시 계룡산 답사 도중 작고하신 고 이한기 선생이 수집한 자료중 하나인 1975년 시흥군 지도입니다. 현재 시흥시에 보관돼 있을껍니다. 지금은 서울시의 6개구와 안양, 군포, 의왕, 과천, 시흥, 부천, 광명, 안산시 등 경기도의 8개시로 나뉘어 뿔뿔이 흩어졌지만 1895년 5월 26일 탄생되어 1988년 12월 31일로 93년만에 폐군되기까지 거대한 행정구역이었지요.

1968년의 안양읍내 두번째 극장 읍민관

#안양 #닐미샬로프(http://www.mishalov.net/) #기록#역사/안양읍내에 있던 극장인 읍민관의 1968년의 모습입니다. 당시 안양 석수동 미군부대에 전령으로 근무하던 닐 마샬로프씨가 컬러슬라이드에 담은 기록으로 이젠 사진으로만 남아 있지요. 읍민관은 안양에서 두 번째 생긴 극장으로 1965년 무렵 안양4동 중앙성당 가는 길목 오른쪽(얼마전까지 1층에 외환은행 안양지점이 있던 자리. 현 1층에 다이소)에 문을 열었지요. 읍민관은 1968년 안양극장으로 상호를 바꿔 운영되다가 2005년에 폐관되고 맙니다. 참고로 안양시내 최초의 극장은 화단극장으로 해방 이후인 1953년 3월에 개관했지요. 위치는 구도로변 현재의 있었답니다. 1965년인가 ‘저하늘에도 슬픔이’라는 이곳에서 상영됐는데 제 기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