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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314]안양시, 건축지도원 위촉장 수여

안양시(시장 이필운)는 지난 13일 시청 3층 상황실에서 안양지역건축사회 소속 건축사 20명에게 건축지도원 위촉장을 수여했다. 건축지도원은 건축법 또는 건축법에 따른 명령이나 처분에 위반되는 건축물의 발생을 예방하고 건축물을 적법하게 유지․관리하도록 지도하는 자를 말한다. 시는 건축법 위반행위가 사용승인 직후 많이 발생하고 있는 점에 착안하여 건축지도원이 사용승인 직후 6개월간 주1회 지속적인 점검을 하여 위반행위를 초기에 바로잡는다는 계획이다. 한편 안양시는 안양지역건축사회와 긴밀한 협업을 통해 건축행정의 투명성 및 공정성을 높여 ‘2016년 건축행정 건실화 평가’에서 국토교통부 주관 평가는 우수상, 도 주관 평가는 최우수상을 수상한 바 있다. 이필운 안양시장은 “건축법 질서 확립과 올바른 건축문화 정..

[20170311]안양-과천 연결하던 옛길 수촌마을앞 도로

2017.03.11/ #안양 #관양동 #수촌마을/ 사진속 도로는 과거 과천에서 안양을 연결하던 옛길로 도로가지나가던 구간을 보면 인덕원에서 관양사거리-수촌마을-안양종합운동장 남문앞-동양월드타워-비산동-비산1동주민센터-임곡교(과거 수푸루지다리)-안양1동주민센터앞(과거 구시장)-안양역까지 연결되었다

[안양]신안 세발낙지 맛보는 안양 천사섬 낙지포차

#안양 #낙지 #천사섬낙지포차 #신안 #안양1동/ 1004개의 섬이 있다는 전남 신안에서 고속버스를 타고 직송으로 올라오는 세발낙지를 맛볼수 있는 안양에 있는 천사섬낙지포차입니다. 안양1동 대농단지 건너편 시내버스정류장 옆 골목길로 들어서면 골목 오른쪽에 숨어 있는데 사실 찾기가 그리 녹녹치 않지요. 여름철 몸보신으로 삼계탕에 장어도 많이 먹지만 힘하며 낙지이지요. 이 집에사는 세발낙지, 탕탕이, 산낙지복음, 국물이 끝내주는 연포탕에 숙회 등등 말이 포차이지 낙지 전문점 뺨치는 그 이상이네요, 특히 처음 간날 연포탕을 맛 보았는데 주방에서 해삼물을 푹 끓여 욕수를 내고 손님상에 내놓고는 낙지를 넣는데 이 집 만큼 푸짐하게 주는 집은 처음, 무안이 고향인 이 집 주인장의 손맛으로 내주는 찬도 아주 정갈하고..

[20170313]안양6동 밧데리골목, 이젠 빠골목

2017.03.13/ #안양 #밧데리골목 #빠골목 #안양6동 / 어두움이 깔리면 간판에 화려한 LED 불빛이 밝혀지는 안양6동 밧데리골목. 예전에는 자동차 부품을 교환하고 수리해 주던 골목이 이젠 빠골목으로 바뀌었네요^^ 안양에는 1970년대 부터 지금까지 밧데리골목이라 불리우는 곳이 두군데 있다. 한곳은 안양2동의 구도로(만안로)에서 수암천을 따라 우측으로 이어지는 골목길로 이 골목길은 1950-70년대 금성방직 공장으로 이어지던 철길이 놓여져 있던 곳이기도 하다. 또 한곳은 안양6동의 검역원사거리에서 주접지하차도쪽 구도로(만안로) 방향으로 이어지는 골목으로 두 곳 부도 오래전 자동차 정비를 하던 업소들이 많았기에 밧데리골목이라 불리웠는데 안양 토박이들은 밧데리골목하면 일반적으로 안양6동의 골목으로 이..

[기억-조성원]안양천변에는 마부들이 살았다

[조성원]안양천변에는 마부들이 살았다 (마부) 동네는 물 흐름을 따라 자연 형성이 된다. 우리는 수리산 물이 그 차지였다. 물은 소골안을 지나 지금에 평촌에 해당하는 쌍개울이란 곳으로 흘러내렸으며 동네는 개울을 사이로 나뉘었다. 개울 건너편엔 마부들이 많이 살았다. 그들에게 말은 삶의 전부였다. 여물을 솥단지에 끓여 드럼통을 잘라 만든 함지박에 담아 나르는 것이 아낙의 몫이었고 그 놈들 잠자리를 보아주고 똥을 치우는 것이 아이들 할일이었다. 긴 막대기로 여물이 잘 섞이라고 휘젓고 나면 녀석은 곁눈으로 냄새를 슬쩍 훑곤 입맛을 다셨으며 꼬리를 설레설레 흔들며 고맙다는 시늉도 빼 놓지 않았다. 다 먹고는 녀석은 꼭 오줌을 누었는데 지켜보던 우린 뜻도 제대로 모르고 한마디씩 하였다. “오줌발 보니 세긴 세겠는..

[기억-조성원]아버지 닮은꼴 작은 손

[조성원]아버지 닮은꼴 작은 손 (당신의 손 ) 본디 타고나는 것이 어디 천성뿐인가. 나의 손은 무척이나 작다. 어찌나 작은지 기타 줄 C코드를 간신히 잡을 정도다. 그래서 그 언제던가 기타교본 ‘에델바이스’란 곡을 겨우 마치고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라는 곡을 칠 때쯤 자연 포기하고 말았다. 아내를 맨 처음 만났을 때 손 작음을 고백하였었다. 작게 보이기는 한데 꽤 궁금했던 모양이다. 아내가 친해지자마자 덥석 내 손을 먼저 잡았다. 그 후로 지금까지 나의 손은 자연 아내 손에 안기는 꼴이다. 결혼반지도 조그만 손에 투박하고 무겁기 그지없어 얄팍한 실반지를 따로 맞춰 끼고 다녔었다. 술집에서는 아리따운 여인들이 오히려 내 손을 탐하여 내 손을 만지작대기 일쑤였다.그런 나의 손을 닮은 것이 또 아들들이..

[기억-조성원]삽질 잘하면 먹고 살았다

[조성원]삽질 잘하면 먹고 살았다 (삽질) 한참 동네가 새마을로 변신을 하던 그 무렵. 우리 동네는 삽 하나로 먹고사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른 새벽 장화를 준비하고 장갑을 끼고 신작로에 오르면 큰 트럭 한 대가 기다린다. 그 중에는 지난해까지 마부였던 사람도 번데기를 파는 아저씨도 벌터에서 소작을 했다는 사람도 끼어 있다. 웬만해선 그 무리에 끼기도 쉽지 않다고 했다. 돈벌이가 괜찮은 만큼 서열도 있고 끼려는 사람들도 줄을 대야 했다. 우리 동네에 그런 사람이 많았던 것은 그나마 줄을 잘 선 덕분인지도 모른다. 목수나 미장이가 떼거지로 산 동네였으니 굴비 엮듯 꼬인 트럭 한차였다는 생각도 든다. 나는 그들이 하는 일을 여러 번 목격했다. 그야말로 삽질에 도가 튼 사람들이다. 시멘트 포대를 한 손에 딱 잡..

[기억-조성원]안양은 나의 영웅본색이었다

[조성원]안양은 나의 영웅본색이었다 (Q등급을 꿈꾸며) 안양의 변천을 보면 우리 사회의 단면을 그대로 보는 것 같다. 이 시대 산업의 첨병으로 자리한 안양이기 때문일 것이다. 50년대 논과 밭 그리고 포도밭이 그득하였던 안양은 서울의 위성도시답게 늘 발 빠른 변모를 하였다. 가발이 수출항목에 껴 있던 60년대 당시의 선도 산업은 방직업이나 제지업이었다. 우리 동네는 바로 그 산업의 본거지나 다름이 없었다. 이후 그 산업은 보다 임금이 싼 지역으로 옮겨갔으며 70년대에 들어서는 서울에 가까운 특성을 십분 살려 우수인력들이 대거 몰려들어 경제개발 계획이란 국가 시책에 부응한 이를테면 현대양행이나 만도기계 같은 중공업의 시대로의 전환이 급속히 전개되었다. 90년대에 와서는 근교농업을 하던 비닐도 모두 걷혀지고..

[기억-조성원]세월따라 입맛도... 어렷을적 먹거리

[조성원]세월따라 입맛도... 어렷을적 먹거리 (새월따라 입맛도) 그 시절은 한 여름 온 식구가 평상에 나와 앉아 두런두런 얘기꽃을 피우거나 로케트 배터리를 고무줄로 칭칭 감은 파나소니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정 중앙에 모셔두고 메르데카 배 나 킹스컵 축구 중계를 듣곤 했다. 고국에 계신 동포 여러분으로 시작하는 아나운서의 멘트는 아주 극적이라서 가슴은 늘 조마조마했다. 어머니는 채반에 포도나 소사란 동네서 나온다는 복숭아도 때론 내오기도 하였지만 우리 텃밭에서 기른 옥수수나 고구마가 대부분을 차지했다. 겨우 크림빵을 맛보았던 시절이니 줄줄이 사탕 뽀빠이과자 크라운 산도 맘보 캬라멜 해태 풍선껌 라면땅 건빵들은 알기는 해도 간식으로 먹을 처지는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께끼 통을 둘러멘 동네 아이에게 공짜로 삼..

[기억-조성원]안양유원지의 추억

[조성원]안양유원지의 추억 그 시절을 말할 때 꼭 필요하다 싶은데 표준어에서 이탈이 되었다든지 지금은 사용하지를 않아 들이밀기가 애매한 말들이 더러 있다. 국민학교라고 해야 내 경우 실감이 나는데 이 말이 초등학교로 바뀌어 영 느낌이 안 산다 싶고 얼마전에 되찾은 짜장면이란 말도 한 동안 자장면으로 표기를 하는 바람에 영 꺼림칙하였다. 촌뜨기들이 서울말을 쓰다 같은 고향사람들을 만나면 어느새 사투리가 툭하고 튀하고 나오듯이 그 시절은 그때 그대로 느껴야 제 맛이다. 그 시절을 회상한다는 게 무릇 그런 물성들이 아닐까. 나는 그 시절 아이들하고 안양유원지를 곧잘 찾았다. 야! 저기 깔치 데리고 간다. 그러면 우리는 일제히 그들을 쳐다보았다. 새끼 손가락으로 표시를 하며 깔치라는 말을 음흉한 말투로 내뱉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