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지역얘기/담론

[엄기표]마애종의 역사성과 지역공동체

안양똑딱이 2016. 6. 30. 14:58
[엄기표]마애종의 역사성과 지역공동체

[2005/10/08 시민연대]단국대 매장문화재연구소 전임연구원
1. 머리말

안양에는 오래전부터 사람들이 살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늦어도 청동기시대에는 하천을 중심으로 거주하였다. 이후 통일신라 후기와 고려시대에 들어와서 중앙정부와 일정한 관계를 유지하였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당시는 불교가 폭넓게 성행한 시대였으므로 불교문화가 이러한 사실을 간접적으로 전해주고 있다. 대표적으로 당간지주와 石塔(석탑)이 남아있는 중초사지, 석조부도와 귀부 등이 남아있는 安養寺 등이 있다. 이들 사찰들은 가까운 거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사찰이 입지하고 있는 지형적인 조건, 이 지역에서 대표적인 문화유산인 점 등을 고려할 때 당시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석수동 磨崖鐘은 이러한 연장선상에 위치하고 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한 조각품이다.

마애종은 아직까지 소속 사찰을 밝힐만한 자료가 나오지 않았으나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중초사 또는 안양사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추정된다. 어쨌든 이 마애종은 불교문화사적으로도 독특하고, 미술사적으로도 보기 드물며, 그 속에 담겨진 의미 등이 주목되는 문화유산이다. 특히 安養이라는 지명과 잘 어울리는 歷史性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마애종의 역사성을 파악하기 위하여 안양의 역사를 간략하게 고찰하면서 佛家에서 안양의 의미는 무엇이고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지 간략히 알아보고자 한다. 또한 마애종이 불교미술의 한 유형에 속한다는 점을 감안하여 미술사적인 고찰을 통하여 조성 시기와 그 의의를 추정해보고자 한다. 그리고 이 마애종인 안양 지역에서 어떤 의미가 있으며, 지역 사회에서의 상징성에 대하여 나름대로의 소견을 밝히고자 한다.


2. 安養의 歷史와 佛家의 安養世界

안양에는 적어도 청동기시대부터는 사람들이 거주하였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안양 평촌동 자유공원 내에 옮겨진 고인돌들이 간접적으로나마 방증해주고 있다. 명지대학교 박물관, 『안양 평촌의 역사와 문화유적 발굴조사보고서』, 1990.
또한 비교적 가까운 곳에 위치한 광명시 가학동 고인돌과 안산시의 월피동 등에 산재한 고인돌 군이 오래전부터 인간이 거주하였음을 알려 주고 있다.

고대시대에 안양 지역은 한반도에서의 패권을 누가 석권하느냐에 따라 고구려, 백제, 신라가 교대로 점령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안양은 백제나 고구려의 변경 지역이었으나 신라가 553년 한강유역을 빼앗고 新州를 설치하면서 중요한 지역으로 자리 잡았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안양이 한강과 인천 지역에서 비교적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화성에 소재한 당항성과도 그리 멀지 않은 지역이다.

이러한 안양은 통일신라 말기와 고려시대에 들어와 중앙정부와도 일정한 관계를 유지하는 지역으로 부상하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사실은 당시 폭넓게 신앙되었던 불교와 사찰들이 간접적으로 전해주고 있다. 특히 826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827년 완공되었다는 명문에 의하면 이곳이 중초사임과 동시에 당간지주가 826년(흥덕왕 1) 8월 6일 채석하여 827년 2월 30일에 완공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정확한 건립 연대가 銘文으로 남아있는 中初寺址 幢竿支柱는 박경식, 「安養 中初寺址에 대한 考察」, 『실학사상연구』 14집, 모악실학회, 2000.
당시 안양 지역과 경주의 중앙 정부와 일정한 관계를 보여준다. 먼저 당시 당간지주가 건립될 정도의 대규모 사원이 창건되어 있었으며, 지방에 소재하였지만 중앙에 있는 敎宗寺刹들과 밀착된 사찰이었음을 알려준다. 즉, 명문에 의하면 당간지주 건립에 황룡사 항창화상을 비롯하여 10명의 승려가 후원하였다고 한다. 당시 황룡사는 경주에 있었던 사찰로 불교계의 중심 사찰이었는데 중초사와 일정한 관계가 있었음을 알려준다. 이와 같이 중초사가 9세기 초반경에는 널리 알려진 사찰이었으며, 중앙에 있는 사찰과도 교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엄기표, 「통일신라시대의 당간과 당간지주 연구」, ꡔ文化史學ꡕ 6․7호, 한국문화사학회, 1997.

한편 안양의 역사와 오늘날까지 사용되는 지명과 관련하여 가장 주목되는 시기는 고려시대이다. 특히 고려 초기에 창건된 安養寺가 안양의 역사를 가장 잘 대변해주는 곳이라 할 수 있다. 안양사는 고려 태조 王建에 의하여 창건된 것으로 전하고 있으며, 창건 이후 고려 말기까지 이 지역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던 사찰이었다. 안양사에는 7층전탑 외에 다수의 전각이 건립되었다. 현재 전탑은 남아있지 않지만 전탑이 있었던 흔적과 일부 부재가 수습되기도 하였다. 박경식, 「安養 安養寺의 칠층전탑과 귀부」, ꡔ文化史學ꡕ 제 11․12․13 호, 韓國文化史學會, 1999.

그리고 안양사에는 龜趺(귀부)와 석조부도(석조부도)가 남아있다. 당시 석조부도와 귀부가 건립될 정도라면 안양사는 중앙의 왕이나 왕실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음을 시사한다.
이와 같이 현재 사용되고 있는 安養이라는 지명이 본격적으로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지만 고려 초기에 창건된 安養寺에서 직접적으로 유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즉, 安養은 불교적인 성격이 짙은 지명이며, 이 지역민들의 불교적인 성향이나 색채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나아가 안양이라는 지명은 현재 中初寺, 安養寺, 三幕寺 등이 분포되어 있는 지역에서 유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까지 정치, 행정, 문화의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던 사찰들이 이 지역에 밀집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지역이 적어도 삼국시대에서 고려시대까지 중심적인 곳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안양은 불교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이와 관련하여 소위 淨土三部經(정토삼부경)으로 불리는 『阿彌陀經아미타경』, 『無量壽經무량수경』, 『觀無量壽佛經관무량수불경』 등이 주목된다. 이 경전에서 안양과 관련하여 極樂世界의 모습과 극락에 이르는 길을 설하고 있는 내용이 주목된다. 극락은 현실 속에 존재하는 세계이며, 죽은 후에 가는 세계로 화려하고 고뇌가 없으며 쉽게 해탈에 이를 수 있는 세계라고 한다. 인간이 죽은 이후에 갈 수 있는 세상이고, 사바세계와 완전히 분리된 세계가 아니라 연결되어 있는 세계로 아미타 부처가 주재하고 있는 세계이다. 사바는 참고 견딘다는 뜻으로 인간을 비롯한 모든 중생들이 괴롭고 고통스러워도 참고 견디면서 살아가는 세계가 사바세계이다. 그러나 극락은 고통이 없이 짧은 기간 동안의 수행 정진을 통하여 윤회를 초월하고 해탈할 수 있는 곳이다.

이와 같이 佛家에서 말하는 극락은 서쪽으로 십만 억 불국토를 지나가면 한 세계가 나타나는데, 바로 그곳이 극락세계라고 하였다. 그래서 불경에는 현재나 미래나 모든 중생들이 청정한 善業을 닦게 되면 서쪽 방향에 있는 극락에 반드시 태어난다고 한다. 극락은 황금 기둥으로 집들이 지어져 있고, 수백 가지의 보석들이 줄줄이 박혀 있으며, 보석마다 일천 가지나 되는 광채가 나고, 광채마다 팔만사천의 빛깔이 있는 세계이다. 또한 항상 음악이 울려 퍼지며, 강당과 정자들이 칠보로 장엄되어 있고,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연못들이 아름답고 균형 있게 자리 잡고 있으며, 나무에서는 항상 향기가 나고, 온갖 기묘한 꽃과 향이 있으며, 의복과 음식이 수백 가지라고 한다. 이외에도 극락은 불가에서 가장 이상적인 상상의 세계로 묘사되고 있다. 인간이 현실 속에서 도달하기 힘든 세계이며, 희망과 기원을 가지고 갈구하는 세계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극락은 오래전부터 서쪽에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방위 관념이 불교에 습합된 것은 고대 인도에서 유래하였다. 인도에서 서쪽은 그리스 로마 문명이 있는 곳으로, 선진문물이 서쪽으로부터 전래되었기 때문에 인도인들은 오래전부터 西方을 이상적인 세계로 인식하였다. 이러한 관념이 불교에 반영되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래서 사찰에서는 서방을 신성시하며, 서쪽에 죽은 사람의 유골이나 사리를 매장 또는 봉안하는 장소로 많이 활용되고 있다.

이처럼 極樂은 불가에서 가장 평화스럽고 행복하고 안온한 세상이며, 근심 걱정이 없는 세계이다. 그리고 죽은 자의 영혼이 더 좋은 세계로 태어날 수 있다고 믿었던 방향이다. 安養은 바로 이러한 극락세계의 이칭이다. 글자 그대로의 안양의 의미는 마음을 편이하고 몸을 수양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佛經에 의하면 ‘모든 부처가 보살에게 말하여 安養佛을 찾아보게 하였다.’고 『無量壽經』下, 流通分.
한다. 즉, 阿彌陀佛아미타불을 安養佛이라 부르기도 하였으며, 부처들 중에서도 으뜸에 속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安養卽寂光안양즉적광’이라 하여 西方에 있는 극락은 4種의 국토가 있는데, 이중에서 安養 國土가 최하위이지만 圓融無碍원융무애한 도리로 말하면 최상의 극락이 安養이고 그곳이 寂光土적광토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래서 ‘安養知足’은 극락정토나 도솔천을 의미한다. 이와 같이 安養은 極樂의 별칭으로 극락세계는 安養界, 安養樂, 安養世界, 安養淨土, 安養淨業 등과 상통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安養은 『觀無量壽佛經관무량수불경』에 나와 있는 것처럼 ‘彌陀淨土 安樂莊嚴미타정토 안락장엄’의 세계임을 알 수 있다.

안양은 불교적인 색채가 강한 지명이며, 그러한 지명을 사용한 것은 안양이 곧 극락이라는 관념에서 유래하였음을 알 수 있다.


3. 磨崖鐘에 대한 美術史的 考察과 造成 時期

석수동에 소재하고 있는 磨崖鐘은 대형의 암벽을 비교적 고르게 다듬은 다음 낮게 음각과 양각을 활용하여 조각하였다.(암벽 535×505cm) 그리고 안양시 전체를 바라보도록 하였다. 이와 같이 바위 면에 범종을 조각한 것은 유일한 것으로 범종 연구뿐만 아니라 장인의 창의성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단국대학교 매장문화재연구소, 『안양시의 역사와 문화유적』, 2001, p. 174.

먼저 범종의 기원과 유래에 대하여 간략하게 살펴보도록 하겠다.

梵鐘은 중국 고대의 銅器로 악기 종류였던 용종으로부터 기원하였다고 한다. 이것은 周나라 때 제작되어 성행했던 樂器로 전국시대 이후 소멸되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종이 일찍이 불교에 채용되어 악기가 아닌 의식용 또는 신호용 도구로 사용되면서, 불교 공예의 중요한 한분야로 자리 잡게 된다. 그래서 점차 동종은 부처님의 설법을 상징하고 소리로서 중생들을 구제하는 신앙 활동의 중심적인 도구가 되어 가람에서 종을 걸어두는 별도의 건물이 만들어지기 시작하였다. 이와 같이 梵鐘은 佛家에서 불교 의식 시에 사용되었으며, 대중들을 모으거나 공양과 예불 시간을 알리는 중요한 佛具였다. 또한 종소리는 번뇌를 씻어주고 마음을 안정시켜 주며, 지옥에 떨어진 衆生을 구제해 준다고 믿었다. 불교에서는 소리로서 모든 생명들을 구제하기 위한 4가지의 중요한 佛具가 있는데, 이를 四物이라고 한다. 木魚는 나무를 물고기 모양으로 만든 불구로 물속에 사는 중생들을 구제하기 위한 방편으로 만들며, 눈을 깜박이지 않는 것처럼 끊임없이 수행에 전념하라는 의미가 있다. 북(鼓)은 法鼓라고도 하며, 군중들을 모으는 도구로 북소리가 널리 세상에 울려 퍼지듯이 佛法이 중생들에게 울려 번뇌를 끊고 해탈을 이루게 한다는 의미가 있다. 雲版은 청동이나 철로 만들어지며 소리로서 허공에 날아다니는 모든 생물을 구원한다는 의미가 있다. 범종은 그 소리로서 지상에서 걸어 다니는 중생들을 구제한다는 의미가 있으며, 범종의 소리는 부처의 설법이며, 부처의 음성 그 자체로 상징된다. 이중에서 범종이 대표적인 불구이며, 이러한 사물이 만들어진 이유는 소리를 통하여 모든 중생들을 구제한다는 大乘佛敎의 발전과 맥을 같이하고 있다.

우리나라 범종의 형태는 甬鍾과 유사하며 삼국시대 목조건축이나 석탑의 처마부에 장식하였던 風鐸풍탁과도 형식면에서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한편 梵鐘은 鐘身을 주요 구성 부분으로 하여 鐘口와 撞座당좌 등이 있는 기본적인 양식은 같지만 시대별․지역별로 부분적인 변천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신라의 범종은 동양의 어떤 나라의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소리를 내며, 독특한 양식과 구조를 구비하고 있다. 즉, 신라의 전형적인 범종이라 할 수 있는 上院寺銅鐘(725년), 聖德大王神鐘(771년), 禪林院址 出土 銅鐘(804년) 등은 중국이나 일본의 범종과는 다른 독특한 특성을 지니고 있다. 이외에도 통일신라시대 조성된 범종이 남아있다. 일본에 가있는 것으로 雲樹寺鐘운수사종, 常宮神社鐘상궁신사종, 宇佐神宮鐘우좌신궁종, 光明寺鐘광명사종 등이 있으며, 청주 운천동에서 출토된 신라 동종 등이 있다.

범종의 상단부 천판 위에는 龍鈕용뉴와 龍筒용통이 부착되어 있다. 龍鈕는 범종각에 종을 거는 부분을 용의 모양으로 하여 마치 용이 두발로 땅을 딛고 머리를 숙여 종을 한입에 물어서 힘차게 들어올리는 듯하게 형상화한 부분이다. 龍筒은 동종의 소리에 영향을 미치는 부분으로 천판을 뚫어 내부로 연결되어 있다. 종을 쳐서 내부에서 울리는 소리가 은은하게 오랫동안 殘音을 간직하고, 멀리 퍼져나가도록 하기 위한 구조이다. 종신은 상대-중대-하대로 나눌 수 있다. 上帶상대는 종신의 가장 윗부분을 띠모양으로 두르고 당초문이나 반원으로 장식된 부분이다. 종신에는 마치 젖꼭지의 모양과 같다고 하여 이름 지은 乳頭와 이를 둘러싼 乳廓유곽, 연꽃모양으로 打鐘되어지는 부분에는 撞座당좌가 대칭으로 배치되어 있다. 유곽은 보통 4개이며 하나의 유곽 안에는 9개의 유두가 솟아있는데, 이것은 한국 종만이 가지는 특징적인 부분이다.

그리고 기타 공간에는 飛天像비천상이나 菩薩像보살상을 莊嚴하거나 銘文을 새겨 넣기도 한다. 下帶하대는 종의 입구 부분을 띠모양으로 둘러 당초문이나 보상화문으로 화려하게 장식한 부위로 鐘口가 있는 부분이라고 하여 口緣帶구연대라고도 한다. 그리고 하단부에 종을 치면 소리가 울려 퍼져 나오는 부분을 종구라고 한다. 종의 아래에는 종소리가 진동하여 은은하게 널리 퍼져 나가 중생을 구제하도록 반원형으로 둥그렇게 만든다.

그런데 고려시대에는 통일신라의 범종 양식을 계승하지만 立狀花紋입상화문 장식이 새로이 첨가되고, 용의 입안에 있던 여의주가 발 위나 음통 위에 장식되며 종신에 주악비천상 대신 보살상 및 삼존상이 배치되는 변화를 가져온다. 특히 고려 말기에는 중국 원나라의 영향으로 중국종의 양식을 모방한 작품이 제작되어 조선 초기까지 지속된다. 조선초기의 종은 용통이 없어지고, 한 마리의 용뉴는 雙龍쌍용으로 변하며 立狀花紋帶입상화문대는 소멸되고 유곽은 上帶에서 떨어져 보다 밑으로 내려오며, 당좌는 없어지거나 장식문양으로 전락해 버린다. 또한 종신에는 합장한 형태의 보살입상이 장식되거나 용문․범자문․파도문 등이 표현되며, 기타 공간에는 명문을 새긴 점 등이 특징이다. 정영호, 「한국동종의 특성과 양식변천」, 『한국의 미』(금속공예편), 중앙일보사, 1985.
염영하, ꡔ韓國의 鐘ꡕ, 서울대출판부, 1991.
곽동해, 「韓․中․日 三國銅鍾의 조형양식 비교 연구」, ꡔ梵鍾ꡕ 18․19 합본, 한국범종연구회, 1998.
최원정, 「韓國 梵鍾 樣式 小攷」, ꡔ文化史學ꡕ 17號, 韓國文化史學會, 2002.

안양 석수동 마애종은 먼저 외곽에 일정한 너비로 돋을대를 사각형으로 구획하여, 종각을 飜案번안하고 있다. 좌우에는 높은 기둥을 세웠으며, 상부에는 기둥을 가로 질러 보(樑)를 걸쳤다. 보 좌우측 상부에는 독특한 구름문을 장식하였는데, 목조건축물의 보아지처럼 초각된 형태를 취하고 있다. 가운데에도 구름문이 寶珠形보주형을 이루며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모양으로 하였다. 이러한 문양들은 종각의 신성성이나 신비감을 더해 주기 위하여 장식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보의 한가운데에는 아래로 철띠를 촘촘하게 엮은 쇠사슬을 내려 범종의 용뉴에 걸었다. 그런데 범종의 규모에 비하여 기둥이나 보의 규모가 작아 전체적으로 불안정한 인상을 주기도 한다.

범종은 상단부에 龍鈕용뉴와 音筒음통을 구비하고 있다. 이러한 용뉴와 음통은 통일신라시대와 고려시대 제작된 전형적인 범종에서 많이 나타나는 우리나라 범종만의 주요한 특성이다. 음통은 오른쪽에 대나무의 한마디처럼 곧게 세워져 있다. 용뉴는 용신은 가늘고 비늘무늬는 표현되지 않았지만 龍頭는 역동적이고 사실적인 형상을 하고 있다. 용두는 입을 크게 벌려 범종의 天板에 연결되고 있으며, 코와 눈 등 통일신라 말기에 성행한 귀부의 귀두처럼 볼륨감이 강하고 생동감 있는 인상을 주고 있다.

鐘身은 크게 2부분으로 나누어 있다. 종신의 상부는 上帶상대와 乳廓유곽이 있고, 그 아래로 撞座당좌와 下帶하대가 있다. 유곽은 사각형으로 외부에 넓게 돋을대를 돌려 마련하였다. 상대나 유곽에 문양은 장식되지 않았다. 이러한 것은 재질의 특성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유곽 안에는 비교적 높게 돌출된 9개의 乳頭를 마련하였다. 유두에 특별한 문양이 표현되지는 않았지만 전형기에 조성된 범종처럼 9개의 유두를 배치한 점은 주목된다. 이와 같이 유곽을 마련하고 그 안에 9개의 유두를 배치하였다는 것은 한국의 범종을 표본으로 하여 조각되었으며, 이를 조각한 장인이 범종의 세부 특성을 잘 알고 있었던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다. 종신 하부에는 3곳에 당좌를 배치하였다. 당좌는 가운데에 원형으로 타종 부위를 만들고, 그 주위에 12엽의 연화문을 돌렸다. 좌우측 모서리에는 당좌가 반만 표현되었다. 한가운데 1개를 배치하고 좌우측에 반만 표현된 당좌를 배치한 것은 장인이 사실적인 조각 기법에 의하여 마애종을 표현하였음을 알 수 있게 한다. 장인은 사람의 눈에 보이는 그대로의 범종 형상을 조각하였다. 당좌는 타종하는 부분으로 다양한 문양이 장식되기도 하는데, 박은경, 「통일신라․고려 동종의 당좌와 上․하대 문양에 관한 연구」, ꡔ고고력사학지ꡕ 제3집(동아대 박물관), 1987.
마애종은 불교를 상징하는 화려한 연화문을 장식하였다. 그리고 下帶는 일정한 너비로 띠가 형성되도록 하였다. 하대에 문양은 표현되지 않았지만 唐草紋당초문이나 草花紋초화문이 화려하게 장식된 듯한 인상을 연상케 한다.

그런데 磨崖鐘에서 특히 주목되는 부분은 범종 좌측으로 기둥 앞쪽에 서있는 승려의 모습이다.(僧侶像승려상 높이 102cm, 머리 높이 19cm, 머리 너비 20cm) 승려는 길다란 法衣를 걸치고, 두 손으로 종을 치기 위한 형상을 하고 있다. 나무로 만들어진 打鐘具타종구를 들고 있다. 왼손은 손가락이 표현되었고, 오른손은 손등이 보이고 있어 타종구를 교차되게 잡고 있다. 얼굴에 눈, 코, 입 등이 분명하게 표현되기는 하였으나 섬세하지는 못하다. 僧侶像은 상체와 하체 등 전체적인 신체의 비례는 잘 어울리고 있는데, 얼굴이 다소 큰 인상을 주고 있어 불균형적인 조각 기법을 보인다. 특히 頭部는 머리를 깎은 승려를 표현하였는데, 평면적이고 사실적이지 못한 인상을 주고 있다. 따라서 사실적인 조각 기법을 보이는 통일신라 중기 이후에 조각되었으며, 간략화의 경향이 진전된 시기에 조각되었음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범종은 전체적인 모습이 종의 형태를 그대로 묘사하고 있다. 종의 외곽이 부드럽게 곡선을 이루면서 아래로 내려가도록 하였으며, 종의 상하부에 상대와 하대를 표현하고 유곽을 비롯하여 유두를 사실적으로 표현하였다. 또한 종의 상단부에 역동적인 용뉴를 조각하고, 음통을 세워 典型期에 성행한 동종을 모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석수동 마애종은 범종의 양식이 상원사동종이나 성덕대왕신종과 강한 친연성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鐘身에 飛天像을 조각하지 않았으며, 龍鈕용뉴의 龍身이 天板천판과 직접 연결되어 있고, 음통이나 종신의 상대와 하대에 문양이 표현되지 않았으며, 유곽이 단순한 형태로 조각된 점 등은 전형기 이후에 만들어진 동종의 형태가 모방되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鐘口를 간략하게 수평선으로 처리한 점 등도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리고 승려가 조각되어 있어 사실적인 모습을 표현하였는데, 승려상의 표현 기법이 간략화의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것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에 조각되었다고 보기는 힘든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통일신라 말기나 고려 초기인 10세기경에 조각된 것으로 보는 것이 무리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종과 종을 치고 있는 僧侶像을 같이 배치하였다. 모든 중생들을 소리로서 구제하고자 하는 장인의 기원을 담고 있는 화폭처럼 조각한 점은 돋보이는 구도라고 할 수 있다. 나아가 중생들을 구제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4. 磨崖鐘의 歷史性과 地域性

현재 안양 일대에는 고대시대 안양의 역사와 문화를 알 수 있고, 안양의 정체성을 확립시켜 줄 수 있는 문화유산이 상당수 전해오고 있다. 특히 안양시에 소재하고 있는 중초사지 당간지주와 석탑, 안양사의 석조부도와 귀부 등을 비롯하여 석수동 마애종이 대표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문화재들은 유형의 소산으로 안양에 살았던 사람들의 신앙 대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또한 이들은 불교 문화재들이다. 불교적인 미술품들은 한시대의 문화가 담겨 있으며, 장인들의 숨결이 배어있는 조형물이다. 불교가 전래된 삼국시대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한 불교미술품들은 나무, 돌, 금, 동 등 다양한 재료들이 사용되었다. 그 규모도 초대형에서 초소형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즉, 그것이 갖고 있는 重要性이나 신앙의 對象性에 따라 또는 用度에 따라 다양한 재료가 활용되었으며, 그 규모가 결정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현재 안양에 있는 불교적인 문화유산들은 안양이라는 지역의 역사성을 부여하고 지역 공동체를 형성케 하는 구심점이 되어 왔고, 앞으로도 될 것이다. 다시 말해 이 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문화적 구심점 역할과 동시에 공동체라는 의식을 형성시키는 상징적 의미가 내재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비록 그것들이 고대에 만들어졌지만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로 하여금 안양의 歷史性을 조명해 보게 한다. 안양이 짧지 않은 유구한 역사속에 형성된 도시임을 자각하게 한다. 나아가 왜 이곳에 만들어졌는가에 대하여 되새겨보게 함으로써 내가 살고 있는 지역과 一體感을 갖도록 하여 地域性을 형성시켜 주는 연결 고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안양에도 원래는 많은 문화유산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한 문화유산들은 안양의 역사나 안양에 살았던 사람들의 삶과 애환을 담고 있는 흔적물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것들은 한번 파괴되면 영원히 회복할 수 없이 사라지고 만다. 아직도 도시개발로 인하여 급속하게 지형과 도시 환경이 변화되면서 원형을 잃는 경우가 많다. 또한 보존과 개발이라는 논리 속에서 개발과 경제가 우선시되면서 문화유산들이 파괴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특히 현대사회는 도시화와 교통의 발달로 인구의 이동이 많고, 자기가 살고 있는 지역 사회에 대한 일체감이나 공동체 의식이 결여되어 가는 상황이다. 그런데 오랫동안 일정 지역에 위치한 문화유산들은 한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歷史意識을 함양하여 애향심을 갖게 하고, 共同體라는 同質性을 유지시켜 주는 중요한 매개체이다. 나아가 지역민들 간에 일체감이나 공동체 의식을 함양시킬 수 있는 구심점 역할을 할 수 있는 중요한 有形의 文化的 所産이라 할 수 있다.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석수동 마애종이 문화재로서 갖는 중요성이나 역할을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한편 안양에는 여러 가지 문화유산들이 전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중요한 문화재들이 석수동 마애종이 있는 일대인 中初寺, 安養寺, 三幕寺 등에 집중 분포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석수동 마애종과 관련하여 주목되는 문화재가 幢竿支柱당간지주이다. 중초사지는 安養寺로 들어가는 도로를 따라 가다가 왼편 개울 건너에 삼층석탑과 함께 세워져 있다. 현재 사지 일대에 건물이 들어서 있어 정확한 사역의 규모는 알 수 없지만 개울을 건너 경내로 진입하게 되어 있었으며, 당간지주가 그 입구에 배치되었음을 알 수 있다(안양시청, 『中初寺址 幢竿支柱 修理 報告書』, 2000). 당간지주 북편으로 초석을 비롯한 석재들이 일부 노출되어 있으며, 경작지에는 많은 기와 조각들이 흩어져 있다. 그리고 동쪽지주 내면 윗부분에는 끌구멍이 3군데 남아 있는데, 이것은 해방 이후 인근의 석공들이 반출하려고 했던 흔적이라고 구전되고 있다(경기도 편, ꡔ京畿文化財大觀ꡕ -國家指定篇-, 1989, p. 62).

당간지주는 幢竿을 세워 幢을 걸기 위한 구조물이다. 현재는 두 지주만이 남아있지만 원래는 높은 당간을 세워 그 꼭대기에 당을 걸어 휘날리게 함으로써 사찰의 位相을 드러내었을 것이다. 그런데 중초사지 당간지주는 銘文이 새겨져 있다. 명문에 의하면 당시 건립 책임자로 節州統절주통 皇龍寺황룡사 恒昌和尙항창화상을 비롯하여 10명의 승려가 후원하였음을 알 수 있다. 당시 불교계의 중심 사찰이었던 황룡사 승려가 후원한 것으로 보아 중초사가 늦어도 9세기 초반경에 널리 알려진 사찰이었으며, 중앙에 있는 사찰과도 교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것으로 보아 안양 지역이 통일신라 말기에는 중요한 사찰이 건립될 만큼 중요한 지역이었으며, 불교가 성행하면서 佛世界에 대한 인식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들 사찰이 소재한 지역이 중심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곳에 남아있는 문화재들은 고대시대의 중심지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안양의 역사성를 보여주는 문화재가 당간지주를 비롯한 마애종이며, 이들 문화재가 분포하고 있는 지역은 역사적인 관점에서 안양의 지역성을 대변해준다고 할 수 있다.

이후 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건의 발원에 의하여 安養寺가 건립된다. 절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안양사를 이곳에 세운 것은 安養世界, 즉 極樂世界의 구현과 실천이라는 사상과 관련되어 있었을 것이다. 당시 많은 佛徒들은 안양사를 지어 이 지역을 상상속의 극락이 아닌 현실속의 극락을 만들고자 했을 것이다. 그러한 발원의 일환으로 대형의 암반에 마애종을 새겼을지도 모른다. 마애종은 한 승려가 타종구를 들고 있어 마치 종소리가 정지된 것이 아니라 울려 퍼지는 듯한 인상을 주고 있다. 이 마애종을 새긴 장인은 보는 이로 하여금 종소리를 들으며 보도록 의도하였으며, 그러면서 경건한 신앙심을 갖도록 유도하였다. 기발한 착상이다. 동시에 범종은 불가에서 그 소리로서 부처의 진리를 전하여 모든 중생들을 구제해 준다고 한다. 석수동 마애종의 소속 사찰이 중초사든 안양사든 모든 중생들을 구제하여 다같이 극락에 이르고자 하는 발원과 바로 이곳이 현실속의 극락임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자 조각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인지 마애종은 멀리 안양시내를 굽어보고 있다. 이와 같이 마애종을 조각한 것은 불가의 세계처럼 안양 지역을 淸淨케 하고, 모든 중생들을 구제하여 極樂往生극락왕생을 염원코자 하는 바램에서 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석수동 마애종은 우리나라에서 유일무이한 문화재이다. 다시 말해 독특하기도 하지만 하나밖에 없는 창조적인 유산이다. 현대는 창조는 거의 없고 模倣모방과 飜案번안이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데 반해 오래전에 안양에 이러한 전무후무한 마애종이 조각되어 있다는 것은 안양의 역사성을 이해하는데 아주 중요한 자료이다. 즉, 안양이 오래전부터 창의적이고 새로운 문화에 대한 창출지로서의 의미가 내재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그와 같은 안양의 지역성이 그대로 계승되었으며, 앞으로도 그러한 가능성이 창출될 수 있는 가능성이 얼마든지 내재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마애종은 새로운 문화 창출의 원동력 대상으로 접근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안양의 문화산업 컨텐츠를 구성함에 있어서 핵심적인 요소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마애종은 안양=극락=살기 좋은 곳이라는 지역성을 부여할 수 있는 상징적인 문화유산이라 할 수 있다.

나아가 석수동 마애종은 교육 자료로서 훌륭한 가치가 있다. 안양시민들에게 향토 문화에 대한 관심과 안양에 대한 애향심을 고취시키는 정신적, 문화적 유대를 형성시켜 줄 수 있다. 장차 안양에 대한 首丘初心的수구초심적 애향심과 공감대를 갖게 하는 교육 자료로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있는 그대로의 의미에 역사성과 지역성을 부합시키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활용하여 안양의 역사성과 공동체로서의 지역성을 극대화하느냐가 관건이 될 것이다. 따라서 지역민뿐만 아니라 모두가 특별한 관심을 갖고 보존과 관리에 배려를 아끼지 않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가치에 대하여 평가하고, 그것이 만들어진 시대가 아니라 오늘날의 관점에서 새롭게 접근해야 할 것이다.


5. 맺음말

지금까지 안양의 역사와 그 지명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에 대하여 간략하게 개괄하고, 안양 석수동 마애종에 대한 미술사적인 고찰을 통하여 조성 시기를 제시해 보았다. 그리고 안양의 역사 속에서 그것이 차지하고 있는 가치와 앞으로의 활용 방안에 대하여 의견을 개진하였다.

안양 석수동 마애종은 오늘날까지 안양의 역사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有形의 문화유산이지만 안양이라는 지역사회에서 높은 無形의 價値를 創出할 수 있는 구심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안양 시민들에게 同質性과 一體感을 형성시킬 수 있는 훌륭한 문화유산이다. 그래서 안양의 역사에 歷史性을 부여하고, 안양이라는 지역에 地域性을 부여하고, 나아가 시민들에게 歷史意識과 愛鄕意識을 함양시킬 수 있는 매개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일들은 그것이 갖고 있는 의미를 올바르게 파악하여, 앞으로 어떻게 효과적으로 활용하느냐에 달린 문제이다.

2005-10-08 19:04: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