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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원식]몽당(蒙堂)선생 한항길(Ⅲ)

안양똑딱이 2016. 6. 11. 08:28

안양학연구소장/ 성결대교수


 

6.25사변은 안양직물공장을 운영하면서 기업가로서 순탄한 길을 가던 선생의 인생에 또 한번의 전기가 되었다.

전쟁 발발 당시 시흥군의 민보단장(民保團長)겸 군촉탁(軍囑託)이었던 선생은 미처 피란하지 못하고, 부모님이 계시던 호계리 본가 뒤꼍에 땅굴을 파고 은거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때의 땅굴생활로 얻은 더부룩한 수염을 구태여 깍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여 계속해서 기르게 되는데, 이 수염이 이후 선생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었다.

후에 선생은 수염과 관련하여 “부산 피란시절 기자로 재직할 때나 혹은 기술학교 설립인가를 받을 때도 수염 때문에 한결같이 남의 이해를 받은 바 있고, 또한 외형이 두드러져 나쁜 일을 하다가는 남의 눈에 잘 띄게 되므로 행동거지에 조심하고 근신하게 되어 후진들을 양성해야 할 교육자로서는 덕을 보았다”고 술회하고 있다.

전쟁이 끝나고 공장재건에 나선 선생은 전쟁 당시 인민군의 숙소로 쓰인 안양직물공장이 유엔군의 폭격으로 완파된 사실을 확인하고, 지금의 부천 소사공고 자리에 있던 금정공업을 인수하여 ‘안양직물주식회사’로 등기하고 취체역 사장에 취임하였다.

이 때의 경험을 통하여 나라 경제의 부흥이 산업체의 육성에 달렸고, 훌륭한 산업체의 육성은 숙련된 기술자들의 손에 달렸다는 사실을 깨달은 선생은 1958년 마침내 공장 건물을 증·개축하여 ‘소사공과기술학교’를 인가받아 개교하였다.

3년 뒤인 1961년에는 ‘소사고등기술학교’와 ‘소사고등기술학교 전공부’를 각각 증설하였고, 1978년에는 고등교육의 기초인 전문대학 설립에 뜻을 두고 학교법인 한길학원을 설립하여 마침내 ‘부천공업전문대학’을 개교하였다. 이 학교가 바로 오늘날의 ‘부천대학’이다.

안양직물공장 당시 선생이 종업원들의 문해(文解)교육을 위해 공장 내에 세운 공민학교는 우리나라 공장 부설로 세워진 직업학교의 효시로 보는 견해가 높다.

선생은 옥고를 치르면서 얻은 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익힌 양생법을 아침마다 요 위에서 하고, ▶하면 된다. 내 일은 내가 하자. ▶우리 서로 아껴주며, 부지런 하며, 진실하며, 인내하자. ▶성공은 내 마음, 내 습관, 내 행동에 있다는 가훈을 외며 하루를 시작하였는데, 이 가훈이 공장 기숙생들의 입을 통하여 안양직물공장 사훈으로 정착되었다가 부천대학의 교훈으로 발전하였다.

외견상 선생의 일생은 학생으로서 3.1운동에 참여하여 옥고를 치룬데서 출발하여, 경성보인학교 선생, 신문기자, 연초판매회사 사원을 거쳐 안양직물공장 사장, 부산 국제신보 기자, 안양직물주식회사 사장, 소사공과기술학교 설립자, 학교법인 한길학원 이사장으로 마감하고 있다.

그러나 내용적으로는 배우고 익히는데 열심이었던 학생, 뜨거운 가슴으로 나라를 사랑했던 애국투사, 불의와 타협하지 않던 지사, 철저히 근면했던 생활인, 국가 경제부흥에 매진한 산업역군, 평생을 통해서 얻은 진리를 후학들에게 가르치려 했던 교육자의 모습으로 투영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근대 안양의 대표적인 인물인 선생은 부천공업전문대학이 개교한 1983년 5월 8일 83세를 일기로 돌아가셔서 시흥시 매화동 산 26번지에 모셔졌고, 부천시청 현관에 유일한, 변영로, 최희섭과 함께 부천을 빛낸 4인의 인물로 걸려 있다.

2003-06-28 02:51: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