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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원식]몽당(蒙堂)선생 한항길(Ⅱ)

안양똑딱이 2016. 6. 11. 08:20
안양학연구소장/ 성결대교수
3.1 독립만세운동은 선생의 전 생애를 통하여 매우 중요한 일대 전환점이 되었다.

그간 가슴속에 응어리진 반일감정을 한꺼번에 쏟아 학생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대가로 3년간의 옥고를 치러야만 했고, 출옥 이후에도 요시찰인물로 낙인 찍혀 ‘죄인 아닌 죄인’으로 사소한 사회활동조차 일경의 감시·감독 하에 제약을 받아야만 했다. 더하여 심리적 압박과 좌절감은 신경쇠약증을 골수에까지 깊게 해 거의 폐인이 될 지경이었다.

선생은 “어린 시절부터 가슴속에 품었던 청운의 꿈이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허탈에 빠진 나는 오랜 동안의 정신적 방황을 해야만 하였다”고 이때의 심경을 유고집에서 토로하고 있다.
결국 자기완성과 경제적 자립만이 실의에 빠진 자신을 구하고, 나라를 되찾을 수 있는 길이라는 자각을 한 선생은 이후 굳센 삶을 살게 된다.
튼튼한 몸과 굳건한 심지를 갖기 위해 술과 담배를 끊고, 정좌법과 팔다리를 구부리고 두드리는 독특한 양생법을 터득한 선생은 이후 평생 몸과 마음을 건강한 상태로 지킬 수 있었다. 이때 선생의 부친이신 한용익(韓用翼) 옹도 아들과 함께 술과 담배를 끊었는데, 술은 광복과 함께 반주로 하루에 두 잔씩 마셨으나 담배는 평생 끊었다는 일화가 전한다.

건강을 회복한 후 경기보통학교 교원양성과를 졸업한 선생은 경성보인학교에 부임하여 교사로서 열성을 다하여 학생을 가르쳤다.
또한 법률지식이 실질적인 사회생활에 많은 도움을 준다는 것을 깨닫고 퇴근 후 야학으로 경성법정학교에서 법률도 공부하였다.
1927년 모범교사 위로명목으로 구성된 일본학사시찰단의 일원으로 일본을 방문한 선생은 당시의 학교교육이 결국은 조선인의 일인양성정책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귀국하는 길로 사직서를 제출하였다.

이후 선생은 신문기자 생활을 잠시 한 후, 연초판매회사의 사원으로 여러 곳을 부임하였다. 이 당시 선생은 십 만원을 십년계획으로 모아 천석지기 추수를 성공하겠다는 결심을 한 후, 콩나물죽을 삼년간 먹는 근검절약을 실천하였다고 자술하고 있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재산을 모으는 동안에도 일경의 감시는 수그러들 줄 몰랐고, 또한 선생의 강직한 성품도 여전하여 함경도의 영흥과 삼수갑산, 강원도 양구 등 춥고 외진 곳으로 전전해야 했다.

8.15광복을 양구의 임지에서 맞은 선생은 동년 10월에야 안양에 정착하여 안양동 603번지 현재의 수의과학검역원 인근에 ‘안양직물공장’을 설립하게 된다. 이 공장에서 생산한 제품이 워낙 튼튼하여 ‘쇠가죽’이란 별명이 붙어 외제상표를 붙여 판매하는 웃지 못 할 일이 벌어지는 일까지 있었다. 결과로 회사는 모범공장이라는 칭호도 받고, 신용도 높아져 식산은행에서 운영자금도 빌려 받고, 금융조합연합회에서는 물건값도 선불로 받을 정도로 탄탄한 성장을 계속했다.

1948년 8월 15일 광복일을 기념해 선생은 8세 되던 해 조부께서 우리나라를 다시 일으키라는 의미로 이름 지은 한흥이(韓興履)라는 본명을 버리고, 평생의 소원인 한국의 항상 길함이라는 뜻을 가진 한항길(韓恒吉)로 개명했다고 술회하고 있다.

2003-06-28 02:57: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