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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수도.안양.신필림과 근대 한국영화사 이야기

안양똑딱이 2016. 6. 11. 08:19

이 기록은 고 이영일 선생이 남긴 귀중한 자료인 원로영화인 녹취테이프를 소장 영화학도들이 풀어 정리한 것입니다.


이영일이 만난 한국영화의 선각자들 3 - 이필우 (1)
+ 열여덟에 일본으로 건너가 촬영과 현상기술 익혀, 한밤 촬영소에서 도둑실습도

이필우(1897∼1978)는 최초의 한국인 촬영기사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촬영·녹음·현상·편집에 두루 걸쳐 있는 그의 이력에서도 살필 수 있는 것처럼 개척기 한국영화사에서 절대적으로 중요한 공헌자이다.

열여섯살부터 우미관에서 영사기술을 익혔고, 열여덟살에 일본으로 건너가 고사카(小阪) 촬영소에서 촬영과 현상기술을 연구했다. 영화산업의 기초가 세워지고 있던 일본에서 닛카쓰(日活), 쇼치쿠(松竹)의 신인기사로 활동했다.

귀국 직후인 1924년에 제작한 <장화홍련전>은 감독만 한국인이었던 <월하의 맹서>(1923)와 달리 기술의 모든 부분을 한국인의 손으로 해결한 최초의 극영화가 되었다.

<멍텅구리><낙원을 찾는 무리들><종소리>로 이어지는 작품활동중 총독부의 검열로 몇편의 영화를 잃어버린 뒤 상하이로 떠나 국제적 규모의 제작사이던 ‘대중화백합영편공사’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국내로 다시 돌아와 경성촬영소 기술책임자로 자리하면서 일본 기술진과 합동으로 발성영화에 도전해 한국 최초의 발성영화인 <춘향전>(1935)을 실현했다. 동생 이명우를 비롯한 국내파 기술진들을 양성한 것도 이필우의 중요한 공로다.

해방 뒤에는 ‘조선영화건설본부’에서 뉴스영화들을 제작하며 기술의 명맥을 이었고, 그의 지휘 아래 정비된 안양촬영소(1957년 설립)는 1950∼60년대 한국영화 황금기의 토대를 이루었다.

‘한국영화 기술의 개척자’라는 이영일의 평가처럼 많은 순간 ‘처음’이어야 했던 이필우를 기점으로 한국영화의 전 시대를 아우르는 기술사의 방대한 계보가 그려질 수 있을 것이다.


대통령을 움직인 사나이
안양 수도영화사 기공식에 이승만대통령도 참석

홍성기 감독, <열애>를 찍고 국산영화 보호육성책을 마련하다

<열애>를 찍을 당시, 홍 감독은 다른 일로도 몹시 바빴다. 54년부터 수도영화사 사장 홍찬의 주도하에 우리나라 최초의 영화종합촬영시설인 안양촬영소가 막 지어지고 있었는데, 홍 감독이 시설 자문을 맡은 것이다.

기공식에 이승만 대통령까지 참석해 화제가 되었던 이 촬영소는 3만평의 대지 위에 각각 500평과 350평의 스튜디오를 갖추고 촬영, 현상, 편집, 녹음 등 영화작업을 일괄 처리할 수 있도록 한, 동양 최대의 시설이었다.

미국의 자본금이 대거 유입된 촬영소 제작 이면에는 이승만 대통령의 막강한 후원이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과 홍찬은 ‘부자(父子) 사이’로 불릴 만큼 관계가 돈독했다. 그런 홍찬이었기에 막대한 차관을 어렵지 않게 들여올 수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국산영화 제작환경 개선에 일조하는 정책을 많이 폈다. 그중에는 입장세법을 개정해 국산영화 관람시 전면적인 입장세 면세 조치를 내린 일도 있었다.

이러한 국산영화 보호육성책의 마련에는 홍성기 감독의 발언이 크게 작용했다. 입바른 말 잘하기로 소문난 홍 감독은 이 대통령에게 직접 면세조치에 대한 언급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촬영소 시설 자문단에는 홍성기를 비롯해 기획자 유한철과 허백년이 있었다. 유한철과 허백년은 촬영소 1기 연수생이기도 했는데, 이후 연수생들이 모여 만든 첫 영화 <생명>(이강천 감독, 1958)을 기획한다. 어쨌든 이들의 도움을 받으며 촬영소 건설은 순조롭게 이뤄진다.

홍찬은 이후 안양촬영소의 운영권을 홍 감독에게 맡기나, 얼마 못 가 신상옥 감독의 신필름으로 인수된다. <열애>를 찍으면서 홍 감독은 염매리와 스캔들에 휩싸였는데, 이 둘은 제법 심각해서 결혼설까지 나돌 정도였다.

그러나 철도공무원으로 근무하던 홍성기의 형이 배우와의 결혼을 극구 반대해 이루어지지는 못했다. 나중에 홍 감독의 형은 이 일을 미안하게 생각해서 김지미와의 열애설이 터졌을 때 순순히 교제를 허락한다. 그러나 김지미와의 결혼이 순탄치 않은 길을 걷자 누구보다 괴로워했다고 전해진다.

<애인>을 찍을 50년대 중반에는 세트장을 만들 촬영소가 없었기 때문에, 큰 창고를 빌려 촬영소 대신 사용했다. 홍감독 역시 지금의 남대문 경찰서 뒷쪽에 있었던 '희경창고'를 빌려 <애인>의 실내 촬영분을 마쳤는데, 창고의 천장이 낮아 조명을 설치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이와 같은 풍토는 60년대 후반 가벼운 조명기의 개발로 인해 일반 가정집을 빌려 촬영하는 오픈세트 형식으로 발전한다. <애인>의 촬영이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면서 홍 감독은 현장을 비우는 일이 잦았다. 원체 젊은 나이에다 풍류를 즐기는 사람인지라 촬영 중간에도 금세 자리를 비우고 당구를 치거나 술을 먹으러 가곤 했다.

한번은 감독이 자리를 비운 새에 내가 편집을 해놓은 적이 있었다. 감독이 돌아와 내가 한 일을 보더니 뒤통수를 때리며 혼을 냈다. 그러나 감독이 자리를 비울 때면 나는 어김없이 편집에 손을 댔고, 감독은 네 번째까지는 뒤통수를 때리며 혼을 내더니 다섯 번째부터는 아무 말이 없었다. 괜찮다는 신호였다.

홍 감독은 현장에서 누구에게든 반말을 하는 법이 없었다. 특히 배우들에게는 깍듯한 존대어를 쓰며 그들의 의견을 존중했는데, 그만큼 배우들도 홍 감독을 좋아하고 따랐다. 지금은 감독이나 스탭이 배우들을 ‘모시는’ 입장이지만, 그땐 감독과 촬영기사의 말 한마디면 배우들이 쩔쩔매던 시절이었다.

개런티 역시 감독이 200만∼300만환 정도로 가장 많이 받았고, 촬영기사가 150만환 정도를, 배우는 그것보다도 더 적게 받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만큼 감독이 감독으로서 대접받고 행세하던 때였음에도 홍 감독은 여전히 자신은 ‘2인자’고 스탭과 배우들이 ‘1인자’라고 치켜세우곤 했던 것이다.

홍 감독은 <애인>이 흥행에 성공을 거두고 제작자들이 앞다퉈 다음 작품에 대한 투자방안을 내놓자 어느 때보다 의욕이 넘치기 시작했다. 이규환 감독의 <춘향전>이 크게 성공을 거두자 영화계에는 사극 붐이 일었고, 홍 감독의 사극 <춘향전>의 기획도 이때부터 서서히 이루어진다.

구술 심우섭/ 영화감독·1927년생·<남자식모><운수대통>등 연출
정리 심지현/ 객원기자 simssisi@dreamx.net


▲ 신필림에서 제작한 "빨간 마후라" 영화포스터

“칠십 평생 촬영소 지으며 길 닦는게 일이었지”
이영일이 만난 한국영화의 선각자들- 이필우(5)

경성촬영소에서 안양촬영소까지, 초기 한국영화 제작 환경을 마련하다

영화계를 떠난다는 마음으로 금촌에 들어앉았는데, 일본감독하고 배우가 와서 소개할 사람이 있다며 한사코 서울로 끌어내 왔다. 올라와보니 일활(日活)에 있던 뚱뚱보 희극배우가 나와 있었다. 남산에서 술 한잔씩 하며 모여 앉았는데 그 얘기가, 기계는 자기 집에 얼마든지 있고 자본도 끌어올 테니 영화사를 하나 만들자는 것이었다.

그런 계획으로 모여서 왕래가 있던 중에 이 배우가 빚을 지고 동경으로 쫓겨 들어갔다. 남은 놈들끼리 조선문화영화협회를 만들기로 하고, 기계를 인수하러 나를 동경에 들여보냈다. 가서 보니 말이 전부 달랐다.

배우는 어디 가고 없고, 기계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 그 부인을 찾아갔는데, 남편은 감옥에 가고 없고, 기계는 전부 저당잡혀 있으니 돈 삼천원을 만들어 달라는 것이었다. 할 수 없어서 돈을 해다 주고 바르보 하나를 챙겼다. 그러고도 한 넉달을 고생해서 프린타 두채, 녹음기 전부를 실어 내왔다.

문화영화협회를 창설(1940년)하고부터는 <경일뉴스>라고 해서 처음 우리 손으로 뉴스를 백이기 시작했다. 청량리 산업박람회 때, 우리 기사들이 전부 나가서 조선총독을 촬영해온 것이 처음 일이고, 그때부터 문화영화, 기록영화, 뉴스를 제작해 전부 경일문화영화관에 갖다 붙였다(<경일뉴스>는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경성일보사가 조선문화영화협회와 계약을 맺고 제작한 뉴스 영화다.

1930년대 후반부터는 우리 영화계에 일본영화사와의 합작이 성행하는 한편, 군국주의적인 어용영화를 강제로 제작하게 되었다.- 필자). 이때 홍개명(<아리랑고개>(1936) 등의 감독- 필자)이가 일본에서 돌아온 뒤라 갈 곳 없이 있는 것을 들어와 있게 했는데, 이 사람이 일년이 못 가서 “구따이(舊代)하고 신따이(新代)가 교체돼야 한다”고 공작을 했다.

일본놈들이 거기에 넘어가서 나를 있지 못하게 했다. “이놈이 일본서 배웠으니 뭐가 나아도 날 게지. 이필우 나가라!” 그렇게 만주로 들어가서 해방될 때까지 있었다.

그곳에서는 <만주통신>의 전선사진부에 있었다. 사진을 백여서 벽에 붙이는 ‘벽신문’ 제작 일을 맡아보고 있었는데, 한번은 <만주통신>사장이 나를 찾아왔다. 일본에서 들여온 기계가 말을 듣지 않는 모양이었다. 나는 “출신이 한국사람이고, 벽보나 하고 있는 사람이 본다고 알겠느냐”고 내빼보는데, 어디서 알고 왔는지 내 이력을 아는 체하며 저녁으로 후대를 해주었다.

일주일 후면 만주건국기념식이 있는 날이고, 황제가 즉위하는 그 장면을 매일 동경으로 발신해야 하는 형편이었다(일본이 괴뢰정부인 만주국을 세운 1932년부터 1945년까지 만주영화계 또한 일본 국책영화를 강제로 제작했다.- 필자). 급한 대로 손을 봐주고 나니, 이번에는 즉위식 끝날 때까지 있어주면 어떻겠느냐고 붙잡았다.

저녁 한시부터 두시 사이에만 봐주고 하루에 이백원을 받기로 했다(이무렵 조선문화영화협회에 남아 있던 기사들의 월 급여가 170원이었다.- 필자). 그렇게 매일 이백원씩 받아서 돈을 모았다.

해방 후 미국영화를 배급하다

해방이 되고는 봉천으로 나와서 기회를 보고 있었다. 하루는 일본에서 배급소 하는 사람이 나와서 초대를 하니 명월관으로 모두 모이라고 소식이 왔다.

다들 필름을 좀 얻어 보려고 애들을 쓰고 그러는데(배급용 영화를 유치해보려 했다는 뜻- 필자), 거기서 단성사 시절에 <아라시노 고지>(あらしの 孤兒·그리피스의 1921년 작품, <풍운의 고아들>(Orphans of The Storm). 우리나라에는 1923년 무렵 수입·개봉되었다.- 필자)를 배급해주었던 유나이지트(유나이티드- 필자) 지배인을 만났다.

‘중앙배급소, 센트라르 무빙픽’을 만들고 있는데, “본사는 동경에 있고 여기는 지사가 될 테니 이필우 당신이 기초를 좀 잡아달라”고 해서 일을 시작하게 됐다. 실은 이게 그때까지만 해도 앞으로 나서지는 않았지만 미국 공보원에서 하는 사업이었다.

그때부터 배급에 대해서는 일절 내가 맡아서 극장마다 서양영화를 배급했다. 공보원에서 배급사업을 하다보니, 일을 좀 확대시켜보고 싶은 생각이 나서 일본에 들어갈 길을 찾았다. “우리야 해방이지만, 전쟁 후니 일본놈들 아마 다이나마이트로 맞은 고기 같은 꼴일 게다.” 무슨 조건을 붙여도 거래가 쉬운 사정일 것이라는 점을 노리고 들어가서 자동현상기 한대하고, 카메라 한틀, 필름 한 드럼을 접수해 가지고 나왔다.

이 필름은 후지필름, 전쟁통에 한 오백만자 땅 속에 묻어놓은 것을 동경에서 주워오다시피 사들였다. 해방된 후에는 영화인들이 미군부대에서 나온 뉴스용 필름을 쓰고 있었는데, 이건 여름이면 녹기를 잘하기 때문에 활동사진용 필름이라면 다들 욕심을 내고 있었다.

뉴스를 백여다가 녹음, 현상까지 할 수 있도록 공보원 시설을 확대시켜놓은 뒤에 유장산(촬영), 이명우(촬영), 이경순(녹음) 모두 한참 활동할 기사들이 들어와 있게 됐다. 카메라맨만 여덟이 있었고 전부 해서 구십명 조금 넘게 같이 일했다.

말하자면 청부제도인 셈인데, 재료는 일절 미국에서 대주고 우리는 인력을 대는 방식으로 <대한전진><세계뉴스>등을 만들었고 그렇게 해서 벌어들이는 돈이 한달에 사백만원에서 육백만원까지 되었다. 뭐, 밥 먹을 시간도 없었고, 아침 여덟시에 시작하면 저녁 여섯시까지는 옴짝달싹을 못했다.

인민군의 지시로 ‘국립촬영소 남조선지부’를 만들다

그렇게 현상하고 녹음하면서 6·25를 만났다. 중앙방송에서는 “사수한다”를 반복하는데, 카메라맨을 내보내 살피는 전선은 꽤 불리했다. 아니나 다를까 이튿날 뻥 터지더니 한강이 끊어졌다. 기계는 전부 녹음실에 모아놓고 집에 들어와 앉아 있는데, 영화동맹 친구들이 기계를 접수하겠다고 총들을 들고 우르르 들어왔다.

주인규, 강홍식이도 있고, 삼분의 일은 얼굴을 본 사람들이었다. 아직은 “동무” 그러지 않고 “형님” 그러는데, “형님은 아무 염려 마쇼. 협력만 해주십시오”. 협력도 좋은데 동생 명우 잡아간 일을 따지지 않을 수 없었다. “협력이라는 게 나만 협력이냐, 내 동생 내놓아야 되지 않니?”

들은 얘기로, 전부 묶여가지고 미아리 고개를 넘어가더라는 것이었다. 그때 잡혀간 것이 명우, 박기채, 최인규, 홍개명, 한 여섯 된다. 기계만은 안 뺏겨야겠다는 생각에 일을 합네 하고 기계를 살살 집어내 왔다.

옆에서 겁들을 내고 그러는데, “여기서도 죽고, 가도 죽고, 아무리 해도 죽는 건데 겁낼 필요없다”, 다독다독 해가면서 시키는 대로 현상실을 만들었다. 전선이 자꾸 남쪽으로 쫓겨내려가지만도 언제든지 일이 일어나면 대전까지는 후퇴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는 말을 들은 일도 있고 해서, 지연작전을 쓰리라는 계산으로 다 돼가는 공사를 말려가며 천천히 진행시켰다.

명칭은 국립촬영소 남조선지부라든가? 안 보이는 곳에다 만들라 해서 육상궁(毓祥宮·영조의 생모 숙빈 최씨를 봉사한 묘- 필자) 마루창을 뜯고 만들었다. 하루는 강홍식이하고 주인규가 먼저 이북으로 내려갈 사람이라며 명단을 죽 적어가지고 왔다. 영화학교를 모았으니 교장을 맡으라고 나를 앞세우고, 배우로는 유계선, 김신재가 걸려 있었다.

“전부 평양 보내고 나면 여기 일은 누가 보겠는가?”, 남한 점령에 뜻을 둔다는 놈들이 생각이 모자라다고 앞질러 공격을 하고는 징발을 막은 일이 있다.

수복된 뒤에는 해군을 따라 진해에 내려가 있었는데 홍찬(<수일과 순애>(1931)에서 진행을 맡은 것으로 영화계에 입문, 해방 후에는 영화사 경영을 거쳐 안양촬영소를 설립하게 된다.- 필자)이가 안양에다 촬영소를 짓겠다고 사람을 보내왔다.

정부 돈을 얻어다 하는 것이지만 살아 있을 때 꼭 만들어보겠다는 그 의의가 좋아서 올라왔는데, 촬영소라고 지어놓은 것이 꼭 격리수용소 모양으로 해놨다. 설계도를 보여주는데 현상실을 연구실로 잘못 알아듣고는(현상실을 레버러토리라고 불렀다.- 필자) 현상실 복판에다가 변소를 채려놨다.

그 길로 중지시키고 새 설계도를 그려다줬다. 삼십오미리 렌즈를 사용하게 될 것, 시네마스코프될 것을 전부 계산해서 사백평 스튜디오로 확장 지시를 해놓았는데 낙성식을 하고 대통령이 온다고 난리가 났다. 이제 겨우 막대기 박아놓은 걸 뭘 구경하는가 싶어 걱정을 하고 있는데, 영감님(이승만- 필자)한테는 일본보다 낫다면 그만이라고, 이기붕이가 와서 귀띔을 해주었다.

일행을 앞세우고 죽 둘러보는데, 영감님 묻는 말이 “일본보다 난가?” “낫고 말고요. 사백평짜리 스타디오 방음장치 한 것은 일본에는 없습니다.” “좋아, 하게.” 그렇게 해서 다 짓지도 않은 촬영소를 허가받았다.

다 만들어놓고 나니 젊은 기사들이 전부 들어와서 흔들고 차지하지, 나는 고만 휴직처분 받았다. 경성촬영소(1934), 조선영화사(1937) 시설 다 해놓고 겨나고, 문화영화협회(1940) 해놓고 쫓겨나고, 안양촬영소(1957) 해놓고 또. 칠십 평생을 시설 갖춰주고 길 닦고 그것이 내 일이다 생각해보는 것이다.

정리 이기림/ 동국대학교 영화과 석사과정·이영일 프로젝트 연구원 marie320@hanmail.net


▲ 신필림 제작 영화 "지옥화"

“독일서 사온 동시녹음 기계, 마루에서 썩었지”
1965년 한양스튜디오를 설립한 후 동시녹음의 재도입을 고민하다 - 이경순(2)

1954년 수복과 동시에 진해에서 주워 만든 기계를 전부 뜯어다 서울 공보처 영화과에 이양을 해줬어요. 그때 공보처 영화과에 아리후렉스가 두대가 들어와 있었고. 거기서 <북위 사십 일도>니 이런 것을 녹음을 했고. 그 당시에 공보처는 녹음 시설이 너무나 참(이경순은 당시 제대로 방음 장치된 녹음실을 구할 수 없어 자정 이후에 방송사 녹음실을 사용했다고 증언한다. 이경순, <소리의 창조>- 필자).

그래서 일본 세기정밀녹음기계 16㎜와 35㎜를 도입했어요. 그것을 조립을 해갖고 말이죠, 그거로 또 <대한뉴우스>와 <국방뉴우스>를 녹음해 줬어요. 그 기계로 극영화 녹음을 한 것이 <코리아>(신상옥 감독, 1954). 그러고선 16미리 기계로선 이강천씨 첫 작품 <아리랑>을 녹음해줬고. 이게 미군하고 같이 연구해서 한 거고. 그 담에 세기 기계로 <출격명령>(홍성기 감독, 1954), <고향의 노래>(윤봉춘 감독, 1954), 그러고 <운명의 손>(한형모 감독, 1954). 그해 다행히도 <고향의 노래>가 아시아영화제에 출품됐죠.

그리고 <춘향전>(이규환 감독, 1955)을 맨든 것이 55년 시월이죠. 프린또 라쉬(프린트 러쉬)된 게. 내가 “우리 연기자들이 모두 재주꾼들로만 뫼였으니, 필름 천자를 한번에 그대로 돌려보자” 그래서 옥중장면 천자를 애누지(NG) 하나도 안 내고 그대로 통과한 기록을 냈어요.

그러고선 12월20일 그 추운 겨울에 국도에 개막 붙였는데, 첫날서부터 대만원이데요. 그 영화가 누가 그렇게 터질 줄 알았어요? 그러나 터지나마나 토키가 나빠가지고 아주 고생했어요.

그러고 있다가 인제 1955년에 미국 웅크라(국제연합한국재건단 UN Korean Reconstruction Agency) 재단에서 아루시에(RCA) 자기(磁氣)녹음기 두대를 들여왔어요. 35㎜ 두대를. 이게 기증인지 도입인지 고거는 자세히 모르지만 일단 처음으로 자기녹음기 두대가 들어왔어요.

그 기계 가지고 첫 작품 한 것이 공보처에서 제작을 하던 <불사조의 언덕>이라고 있습니다. 이것을 촬영해 가지고서 16개국(6·25에 참전했던 UN군 16개국을 말함.- 필자)에다 전부 보냈어요. 이게 한국영화계 기계가 발전되는 과정이죠.

원조 물자로 들어온 부속품으로 녹음기 조립

1956년에 웅크라에서 2차로 아루시에 광음녹음기, 옵티칼이지 그러니까, 이걸 또 보내줬어요. 이건 원조로 들어온 거죠. 그 기계가 부속품만 와서 우리가 직접 조립을 했어요. 원조 물잔 그렇게 와요. 국립영화제작소에서 현재(대담 당시-필자) 사용하고 있는 기계가 이겁니다. 이 기계 가지고 극영화를 많이 했어요. 특히 이병일씨가 <시집가는 날>(1957)을 해가지고 아세아영화제에, 베를린영화제에 출품을 했습니다.

국방부 영화과에는 1955년에 아루시에 35㎜ 자기 녹음기 한대하고 옵티칼이 한 세트가 들어왔어요. 요기서 젤 첫 작품이 <망나니 비사>(김성민 감독, 1955)예요. 그게 최칠복(이경순과 함께 당시 대표적인 녹음기사로 전쟁 당시 진해에서 녹음작업을 하다가 55년경 서울로 올라왔다.- 필자)씨가 서울 올라와서 처음 헌 겁니다.

1958년에 한국영화문화협회가 있었어요. 거기가 아세아 재단에서 기계를 원조받았는데 날더러 꼭 녹음실로 와달라기에 기계를 시설해주고 거기로 옮겼죠. 그래 갖고서 거기에서 <별아 내가슴에>(홍성기 감독, 1958)를 했죠. 이것을 김지미가 직접 녹음을 했고. <별아 내가슴에>때 지미하고 홍성기하고 아마 둘이 조꼼 그런 일이 있었고.

“벙어리 된 녹음기계 입 열게만 해다오”

그런 다음에 수도영화사 안양촬영소에서 저헌테 교섭이 왔어요. 이것이 1958년이에요(당시 홍찬은 수도영화사와 평화신문사의 사장이었는데, 대통령 이승만의 특별 융자를 받아 안양에 동양 최대 규모의 영화 촬영소를 지으려 했다.

홍찬은 이경순을 이곳 녹음실 책임자로 끌어오기 위해 여러 사람을 보냈다.- 필자). 가 봤더니 참 기계가 어마어마합디다. 웨스트렉슨 사운드 시스템 일체, 미첼 카메라 3대. 일하는 사람으로서 웨스트렉슨도 한번 쓰고픈 의욕이 생기고, 또 홍 사장이 그거 들고서 “좌우간 어떻게든 벙어리된 녹음기계를 입 열게만 해다오. 내 원이 그거다” 그래갖고서 공보실이니 공보처니 떠나서 안양으로 내려갔습니다.

거기 내려가서 처음에는 뭐 갈비다, 닭이다, 잘 가져다 대접합디다. 한 15일 지나니까 벨안간에 고구마가 들어와요(동양의 헐리우드를 꿈꾸던 안양촬영소는 과도한 투자로 인해 극심한 경영난을 겪었다.- 필자). 뭐 고구마 한끼 두끼 먹는 건 아무것도 아닙니다.

목적은 여기서 우리가 기계를 제대로 동작허느냐 이것이 목적이 아닙니까? 그래갖고 거기서 약 한달을 고생을 해서 그 기계를 동작시켰어요. 그래서 첫 작품을 뭣을 했는고 허니 <꽃도 생명이 있다면>. 이것이 홍일명 감독입니다. 그러고서 <낭만열차>. 미첼 카메라로 박상호가 했을 거예요. 그외 여러 작품이 있어요.

그래가지고선 <꽃도 생명…>이 소리가 나고 허니까, 영화인들 사이에 안양촬영소 소리가 과연 좋다 하는 것이 그 소문이 나가지고서는 서울서 녹음을 허러 내려와서 녹음 스케줄을 잡고 말이죠, <그 여자의 죄가 아니다><후라이보이><곰>여러 작품을 했어요.

1959년에도 전창근씨의 <안중근 의사>등등을 했고. 이걸 허다가 어떻게 벨안간에 안양촬영소가 은행관계로 문을 닫게 되지 않았어요? 한여름을 쉬었어요. 쉬다가 공보처에서 <독립협회의 청년 이승만>이래는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스타디오(스튜디오)는 안양촬영소를 사용했고. 공문이 와가지고서 제가 공보처 올라와서 녹음을 해줬고요.(자유당 시절의 정치깡패 임화수가 운영한 한국연예가 제작사로 등록돼 있다. ‘공보처’ 관련사실을 회고하는 이 대목에서 이 정권과 임화수의 유착이 어느 정도였나 짐작할 수 있다. ― 편집자)

안양촬영소에서 여러 작품 허는 동안에, 1961년 안양촬영소 동태를 가만 보니까, 은행관계 이자관계로 와서 딱지를 붙이고, 일을 했다 안 했다 하고 상당히 불안해요. 그러믄 스타디오에서 내가 개인 기계로 동시녹음을 하고, 안양촬영소 기계로 후시녹음을 하고 이러면 어느 정도래도 뒷받침이 되지 않을까, 이런 생각에서 서독에다가 시멘스 녹음 기계를 주문했어요.

이것을 모모헌 사람들이 중상모략 해갖고 “이경순이가 저만 돈을 벌려고 안양촬영소에다 기계를 사왔다”, 그 소리를 듣고 홍찬씨가 날 만나도 이야기도 안 해요. 결국 저는 다시는 안양촬영소로 내려가지 못했고, 기계는 마루에서 썩었지요. 한 삼사개월 썩었어요. 그때 재정으로서 동시녹음을 허자니, 동시녹음 허자고 나오는 제작자도 없고, 그러는 동안에 한양영화사가 발족이 되기 시작했어요.

61년에 한양영화공사가 발족이 되면서 김소동(감독, 당시 한양대 교수- 필자)이가 나를 한번 만자자고 그럽디다. 만났더니 한양재단 김연준(당시 한양대 총장- 필자)씨가 영화제작을 할 테니, 너 기계 있는 걸 우리쪽에다 설치해 가지고서 녹음을 허면 어떠냐. 단 명칭은 한양녹음실로 해야 된다.

그 당시에 한양녹음실이건 뭐건 나도 악에 받쳤단 말예요. 어떻게든 동시녹음을 한번 키워보갔다는 의욕으로 있는 거 없는 거 다 팔아가지고 기계를 들여왔지만, 이렇게 된 마당에 후시녹음을 하더래도 연명을 해야겠다말야.

나는 무조건 좋습니다. 허겠습니다. 그런데 해필 장소가 어데 장손고 허니, 홍 사장네 평화신문사 자리, 바로 윤전기 돌아가던 그 자리란 말예요. 오해를 샀죠. 거기다 스타디오를 지어가지고 한양녹음실이라는 간판을 붙이고 시작을 한 것이죠.

한양스튜디오 설립

한양녹음실에 첫 작품으로 권영순 감독의 <목숨을 걸고>가 들어왔어요. 참 ‘목숨을 걸고’ 첫 작품을 했단 말예요. 첫 작품을 허고 나니 안양촬영소로는 한 작품도 안 내려가드라 말야. 전에는 안양촬영소밖에 없었는데 우리가 채려놨으니까 전부 들와가지고 2부제 3부제까지 녹음을 했단 말예요.

홍 사장이 그때 병원에 입원을 하셨습디다. 그래 내 병원에 찾아갔어요. 찾아갔더니, 과거는 다 내 잘못이라고 그때 참 손목 붙잡고 우리가 같이 울어도 보고 그런 일이 있었고. 그래도 그분이 안양촬영소라도 냉겨놓고 돌아가셨으니까. 공로는 있다고.

그래가지고선 오늘날 저희가 여기에 한양스타디오(한양녹음실은 1965년 한양스타디오로 독립한다.- 필자)로 해갖고, 여러분의 협조 아래서 참 지금 녹음을 하고 있고. 한양스타디오가 루므(룸. 방음시설된 녹음실- 필자)가 ABC로 돼 있고, 그러고 에코 루므가 있고. 도서실이 있고. 여기 현상기사가 장의환, 이덕영이 외 삼. 그러고 녹음에는 이경순, 손인호, 김병수, 김성찬, 이재웅, 그외에 여덟. 편집실 김창순 외 둘. 우리가 전부 해서 한 삼십명 돼요.

앞으로 어떻게 했으면 우리가 간편허게 동시녹음 진출을 할 수 있느냐, 이것이 지금 제일 문제거린데. 뭐 딴 기술분야는 많이 진보됐겠지마는 특히 우리 녹음분야에 있어서 극영화가 한해 백, 이백편 가까이 나오는데 이백편 몽땅 후시녹음이래는 것은 참 이야기가 안 돼요. 제작자가 여러 가지 애로도 있겠습니다마는 몇편이라도 동시녹음을 했으면, 우리 한국영화 녹음계가 체면이라도 서지 않을까 이런 것을 바라는 것뿐입니다.

정리 최예정/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졸업
이영일 프로젝트 연구원 shoooong@knua.ac.kr


▲ 신필림을 만든 신상옥감독

기업형 영화사 제1호 - 신필림 흥망사

1960년대 충무로의 패왕으로 군림했던 신필림의 등장은 한국영화 중흥을 예고하는 사건이었다. <로맨스 빠빠>(1960)는 그 서곡에 해당하는 작품으로, 김승호, 최은희, 김진규, 도금봉, 남궁원, 엄앵란 등 당시 내로라 하는 스타들을 총동원, 흥행에 성공하면서 신필림의 전신이랄 수 있는 ‘신상옥 푸로덕션’의 존재를 세상에 알린다.

신상옥 감독은 1952년 <악야>이후 자신의 이름을 내건 제작사를 차린 뒤, 1급 배우 최은희와 함께 15편의 영화를 만들었지만, 관객의 호응을 얻지 못해 제작자로서의 능력은 검증받지 못한 상황이었다.

<로맨스 빠빠>가 제작자 신상옥의 이름을 부각시켰다면, 1961년 <성춘향>은 신필림이 메이저 제작사로 발돋움할 수 있게끔 해주었다. 그해 1월28일 개봉, 서울에서만 40만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하면서 탄탄한 제작사로서의 물적 기반을 갖추게 됐기 때문.

같은 해 9월, 일정 요건(제작편수가 15편 이상)을 갖춘 이에게만 제작사 등록을 허가한다는 내용의 문교부의 고시 또한 왕국 신필림의 건설을 도왔다.

당시 박정희 군사정권은 제작사의 기업화를 영화정책의 모토로 삼고서 소수의 제작사에만 외화수입과 제작권을 내줬고, 그 결과 난립하던 65개의 영화사는 16개로 축소, 통합됐다. 그 과정에서 신필림은 신상옥 감독이 제작한 영화 15편을 앞세워, 단일 제작사로서는 유일하게 등록을 마친다.

‘주식회사 신필림’으로 명패를 바꿔 단 이때부터 1969년까지가 신상옥 왕국의 전성기다. 이 시기 신필림의 위용은 소유하고 있던 원효로 촬영소의 규모와 제작시스템만 보더라도 짐작이 간다.

월간 <영화잡지>(1964년 1월호)에 따르면, 당시 용산구 문배동에 위치한 1천평 규모의 촬영소는 2개의 스튜디오(320평), 2개의 녹음실(178평), 편집실(88평), 영사실(12평) 등을 갖추고 있었고, 부설 연기자 양성기관까지 마련해두고 있었다.

김승호, 신영균, 이예춘, 남궁원 등 신필림의 전속배우들이 직접 배우 양성에 나섰고, 신성일, 태현실 등 1970년대 주로 활동했던 영화배우들의 상당수가 이곳에서 연기훈련을 받았을 정도였다.

전속 작가, 감독, 촬영기사, 녹음기사까지 모두 갖춘 거대 스튜디오 신필림의 당시 제작편수 또한 놀랍다. 1961년부터 70년까지 신필림이 쏟아낸 작품의 수는 무려 102편. 휘하에 두고 있던 안양필름과 신아필름이 제작한 영화까지 합하면 150편이 넘는다.

하지만 거대 왕국의 몰락은 정점의 순간에서부터 시작됐다. 1966년과 67년, 신필림은 홍콩을 비롯한 해외와의 합작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안양촬영소를 인수하는 등 몸집 불리기에 나서지만, 기대했던 정부의 지원이 약속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서 막대한 유지비를 감당하지 못하는 재정적 위기에 처한다.

특히 1966년 영화인들이 영화법 폐기 건의문을 제출하는 등 반발이 심해지자 정부는 영화제작업자 등록제의 내용을 대폭 완화하는 조치를 취하고, 그동안 영화법을 방패막으로 삼았던 신필림은 쇠락의 길을 걷는다.

1965년까지만 해도 <연산군>을 비롯 일련의 흥행작들을 내놓았지만, 이후 과도한 제작편수에 따른 태작들을 양산한 결과, 흥행 성적마저 변변치 않은 신필림으로서는 자구책 마련 역시 요원한 일이었을 것이다.

결국 신필림은 1970년 회사 규모를 줄인 뒤 안양영화주식회사, 1973년 주식회사 신프로덕션 등으로 개명하면서 연명하지만, 전성기로의 회귀나 부활은 불가능한 것이었다. 더욱이 종국은 누구도 예상 못한 비극이었다.

1975년 11월28일, 신필림은 홍콩과 합작한 <장미와 들개>의 예고편 중 검열과정에서 삭제한 키스장면을 극장에서 상영했다는 이유로, 정부로부터 영화사 등록 말소 명령을 받는 수모까지 당하며 역사의 뒤안으로 사라진다.
이영진 anti@hani.co.kr


▲관악역에서 바라본 신필림로

1950년대의 후반에 이르러 한국영화는 비로소 일대 중흥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중흥기라고 함은 휴전직후인 1955년으로부터 5.16군사혁명이후 영화법이 새로이 제정공포된 1961년까지를 말한다.

1953년의 7월, 6.25동란이 휴전되고나서 1, 2년동안 정부기관과 피난민들의 서울환도와 함께 영화인들도 환도하여 전후의 영화제작활동을 재개하게 되었다. 동족의 싸움으로 남은 것은 엄청난 폐허와 빈곤의 현실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전후현실속에서 한국영화는 영화사상 가장 값진 중흥기의 발전을 맞이하게 되었으니 그것은 참으로 뜻깊은 일이었다.

그러면 이 시기를 중흥기라고 말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먼저 들 수가 있는 것은 영화제작에 있어서의 양적인 증가, 즉 영화산업의 놀라운 발전이다. 참고로 이 기간의 제작편수의 영화를 보면 다음과 같다.

1955년-15편, 1956년-42편, 1957년-28편, 1958년-83편, 1959년-108편, 1960년-90편, 1961년-69편이다.1955년에 불과 15편으로 시작한 전후영화는 불과 몇년 사이에 100편을 제작하는 놀라운 변모를 보인 것이다.

영화산업의 이러한 확장은 바로 영화가 대중적인 오락매체로서의 급속한 성장이라는 새로운 역할을 하게 되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동시에 영화의 이와 같은 산업으로서의 발달은 과거의 영세한 수공업의 시대로부터 어느 정도 현대적인 스튜디오와 기재를 마련하도록 촉진하게 되었다. 영화제작사는 72개의 영화사와 개인프로덕션으로 팽창하게 되었다.

수도영화주식회사는 동양최대규모의 스튜디오를 가진 안양촬영소를 건설하였으며 그밖에 군소 스튜디오가 다시 생겨나기 시작했다. 영화계의 이러한 변화는 또 과거보다 훨씬 더 많은 영화감독과 시나리오작가들 그리고 배우와 기술자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

영화계에는 갑자기 새로운 영화인들의 대거출현으로 열기를 띄게 되었다. 새로운 영화인의 교육을 위해서 한양대학교와 중앙대학교, 동국대학교 그리고 드라마 센터 같은 종합대학교와 전문대학에서 영화과를 설치하고 전문교육을 시작하게된 것도 괄목할만한 변화가 아닐 수가 없다.

전란으로 파괴되었던 극장들은 속속 복구되었으며, 신축된 극장의 급속한 증가는 필요한 시장확대의 결과를 말해주었다. 한국영화계의 이러한 급속한 성장으로 한국영화단체연합회와 한국영화제작가협회및 전국극장연합회가 새롭게 편성되었다.

김말봉 원작의 <생명>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시도한 시네마스코프 영화다. 시네마스코프는 화면의 가로길이가 세로의 2.35배나 되는 대형 스크린을 말한다(통상 비율은 1.33대 1). 할리우드가 53년 첫 시네마스코프 영화 <성의>를 제작했으니 우리는 5년만에 우리의 기술로 흑백에서 총천연색 영화를 만든 것이다.

당시 동양 최대라고 자찬한 촬영소를 안양에 세운 수도영화사가 1년여의 촬영기간을 통해 완성한 영화가 <생명>이다. 이 영화를 연출한 이강천감독은 이미 <피아골>로 리얼리즘의 연출 솜씨를 보인 재능있는 감독.

일본의동경미술학교를 나온 까닭에 와이드 스크린에 대한 화면구도를 누구보다 잘 처리할 수 있는 실력의 소유자였다. 촬영의 김학성은 6·25 전쟁사 기록영화에 종군하다가 부상을 당한 노련한 베테랑 기사였다.

“누님, 저는 등록금을 못냈다고 선생님에게 꾸지람을 들었어요. 오늘 팔려던 양담배마저 도둑맞아 식량을 살 수 없게 됐어요. 이제 나는 누님이 피를 뽑아 돈을 만드는 것을 더이상 싶지 않아요.”

살기 위해 제 몸의 피도 아낌없이 뽑아가며 동생 창수를 공부시켜 왔던 창님(문정숙)의 슬픔은 말할 수 없이 컸다.

창수는 기어이 한장의 유서만 남긴 채 자살하고 만다.

너무나 피를 많이 뽑은 창님은 병석에 누워 있었다. 이제는 오히려 남의 피가 필요해진 것이다. 병국은 굴욕을 참으며 화주(이민자)의 나체 모델이 되기로 한다. 그곳에서 받은 돈으로 창님을 구하자는 것이었다.

헤로인으로 나온 문정숙은 남달리 뛰어난 용모를 지닌 것도, 요염한 얼굴도 아니지만 순수하고 총명스런 눈동자가 주인공 역에 알맞는 정취를 지니고 있어 발탁됐다고 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시네마스코프 영화는 이렇게 연기꾼 김승호를 위시하여 최성진과 장민호, 김신재, 정성숙, 그리고 지금도 <전원일기>에 할머니로 출연중인 정애란이 장식했다. 【영화연구가】


▲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신상옥과 최은희


월간조선[인물연구]
다시 무대에 서는 崔銀姬의 진한 체험 - 삶과 예술, 南과 北, 사랑과 증오

신필름의 사형선고 / 이혼 / 북한에서 원도 없이 영화를 찍다

주요내용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인생 / 崔銀姬가 필라役에 어울릴까
현모양처役으로 굳어져버린 게 유감 / 극단 아랑 / 무대를 향한 탈출
첫번째 영화 출연 / 결혼, 6·25 / 탈출 1
야심찬 감독의 등장 / 황금기 / 「춘향전」과 「성춘향」의 대결
신필름의 사형선고 / 이혼 / 북한에서 원도 없이 영화를 찍다
『죽을 때까지 영화 찍고 연극하다 가면…』/ 하필이면 왜 우리였나 / 『애인이지요』

「성춘향」 이후 1960년대는 申감독과 崔銀姬씨의 시대였다.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상록수」, 「연산군」(이상 1961년), 「폭군 연산」, 「열녀문」(이상 1962년), 「로맨스 그레이」, 「강화도령」, 「철종과 복녀」, 「횃불」, 「쌀」(이상 1963년), 「빨간 마후라」, 「벙어리 삼룡」(이상 1964년), 「배비장」, 「청일전쟁과 여걸민비」(1965년), 「다정불심」, 「꿈」, 「마적」, 「이조잔영」, 「산」(이상 1967년), 「여마적」, 「대원군」, 「무숙자」, 「여자의 일생」, 「내시」(이상 1968년), 「사녀」, 「천년호」, 「이조여인 잔혹사」, 「장한몽」, 「육군 김일병」, 「여성 상위시대」, 「(속) 내시」(이상 1969년) 등의 작품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들 중 대부분의 작품에서 崔銀姬씨는 주연으로 활약했다.

申감독이 직접 감독한 작품 말고도 신필름에서 제작한 작품의 수는 이보다 몇 갑절이나 많았다. 전성기 한 때 신필름은 직원 수가 200명이 넘는 큰 회사였다. 명실공히 한국 영화 그 자체였다.

신필름은 朴正熙 대통령과 金鍾泌의 도움으로 안양의 2만5000평 부지 위에 영화촬영소를 건립하여 운영하고 있었다. 이 촬영소를 운영하기 위해서는 많은 작품을 양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한 해에 28편의 영화를 찍은 해도 있었다. 한 달에 두 편을 제작하려면 동시에 다섯 편을 찍어야 한다. 그 북새통을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상도 많이 받았다. 1958년에 생겨 2년 만에 없어진 문교부 영화상은 1회와 2회 모두 주연 여배우상이 崔銀姬씨의 차지였다.

1961년에 생긴 공보부 영화상도 1, 2회 연속 주연여배우상을 崔銀姬씨에게 수여했다. 1961년 제정된 대종상도 1회와 4회, 5회에 걸쳐 崔銀姬씨가 주연 여배우상을 수상했다. 崔씨는 또 홍콩에서 개최된 아시아 영화제에서 최우수 주연여배우상을 수상했다.

이때쯤 申감독은 국내 영화시장이 너무 좁다는 것을 실감하기 시작한다. 活路는 수출이었다. 그러나 국내의 검열이 너무 심해서 그런 제도 아래서 만든 작품으로 해외에서의 경쟁력이 생길 까닭이 없었다.

한국 영화의 활로는 목을 죄고 있는 검열의 족쇄를 푸는 길밖에 없었다. 모든 감독들, 작가들, 배우들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으나 그것을 풀기 위해 무슨 일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고 있었다. 때는 3選 개헌을 지나 유신의 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검열제도를 완화하여 예술의 생명인 「자유」를 얻어내기 위해 영화계는 申감독에게 총대를 메게 한다. 申감독 스스로 그 총대를 멨다고 볼 수도 있다. 국내 검열제도의 가장 큰 피해자가 바로 申감독 자신이었으니까. 그런 역할을 기대하여 영화인들은 그에게 먼저 감독협회장으로 추대하고, 이어 영화인협회장으로 추대했다.다음은 申감독의 회고다.

『그 시절 각 예술단체에 정부의 지원금이 나왔는데 영화인협회에 나오는 지원금은 중앙정보부와 협회가 갈라먹고 있었습니다. 내가 회장이 되어 그 짓을 못하게 하니까 불편한 사람들이 朴대통령에게 내가 젊은 감독들에게 이 체제 하에서 영화를 만들 수 없다고 선동했다는 식의 무고를 한 것입니다. 그래서 영화사 간판을 내리게 하고 여권까지 회수해 버렸어요』

발단은 오수미가 주연 여배우로 출연한 「장미와 들개」(1975년)의 예고편 때문이었다. 검열에서 삭제된 내용 3초짜리를 예고편에 집어넣어 상영했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 짧은 3초 때문에 20년에 가까운 연륜의 거대한 영화사 신필름이 사형선고를 받은 것이었다.

이혼

불행한 일은 한꺼번에 몰려오게 마련이다. 1970년대 들어 한국 영화계는 심한 몸살을 앓고 있었다. 이른바 외화 쿼터제 때문에 제작자들은 국산 영화를 할리우드 영화 수입권을 따내기 위해 제작 편수나 채우려고 만들 뿐이어서 생명력이 뿌리부터 시들어 가고 있었다.

여기에 본격적인 TV 시대의 개막으로 관객을 안방극장에 빼앗기고 있는데도 대항할 힘이 없었다. 이런저런 사정이 겹쳐 申감독의 아성은 하루 아침에 무너지고 더 이상 이 땅에서 영화 찍는 일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몰려 있었다.

이 무렵 崔銀姬씨는 안양 영화예술학교 교장으로 후배들 가르치는 일에 빠져 있었다. 崔銀姬씨에게는 신필름의 허가 취소에 못지 않은 고통스러운 일이 다가와 있었다. 오수미의 등장이 그것이다. 崔銀姬씨가 오수미의 존재를 알았을 때는 이미 오수미가 申감독의 아이를 낳은 후였다.

처음에 崔銀姬씨는 가정을 방어하기 위해 보통 여자들이 했던 것처럼 행동했다. 申감독에게 대들어 보기도 하고 오수미를 찾아가 이야기도 해보았다. 그러나 허사였다. 정말 알 수 없는 것은 申감독의 태도였다.

『기다려 달라. 해결하겠다』고 하면서 좀처럼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아이에 대한 연민이 그로 하여금 냉정하게 발길을 돌리지 못하게 만든 것이었다. 그러다가 둘째아이를 낳았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崔銀姬씨가 먼저 이혼을 요구했다. 처음에는 반대하던 申감독도 마침내 이혼에 합의했다. 법원에서 만나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은 다음 申감독은 말했다.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었다고 우리 관계가 끝났다고는 생각하지 말아요. 그래도 나는 감독이고 당신은 배우야. 또 만나게 될 거요. 우리는 절대로 이렇게 쉽게 끝날 관계가 아니오』

그 말대로 두 사람의 관계는 끝난 것이 아니라 그 이후 더욱 드라마틱한 상황 속에서 새롭게 이어졌다.


북한에서 원도 없이 영화를 찍다

1978년 1월14일 崔銀姬씨는 홍콩에서 북한에 납치된다. 崔씨를 납치해 간 장본인은 당시의 지도자 동지, 지금의 국방위원장인 金正日이었다. 그로부터 6개월 후 崔씨의 행방을 수소문하며 해외로 떠돌던 申감독도 똑같은 루트를 통해 북한으로 납치된다.

申감독의 자유를 향한 탈출극은 납치 다음 해인 1979년 1차로 시도된다. 1979년 12월30일 申감독은 밤나무골 초대소 앞에 세워둔 벤츠 승용차를 훔쳐 타고 韓中 국경 쪽으로 탈출하다가 붙잡혀 3년 반 동안 정치보위부 특수감방에 수감되어 있었다. 그 때문에 金正日이 연출하고 감독한 이 드라마에서 두 사람의 해후는 예정(?)보다 훨씬 늦어져 1983년 3월에야 이루어졌다.

일단 申감독의 전향(?)을 믿은 후부터 金正日은 이들 부부에게 전폭적인 신뢰를 보내고 아낌없는 지원을 한다. 표면적인 이유는 북한 영화를 발전시키라는 주문이었다. 그러나 속에 감추어진 진짜 이유는 한국에서 유명한 두 사람을 데려다가 국제적으로 실추된 북한 정권의 이미지를 개선하는 데 유효하게 써먹자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여기서 일생 최대의 연기를 한다. 북한에서 자유로운 활동공간을 얻기까지 「충성」을 다하여 金正日의 요구에 부응키로 한 것이다. 두 사람은 힘을 모아 북한 영화의 발전을 위해 헌신적인 노력을 다한다.

金正日도 열성적이었다. 申감독과 崔銀姬씨가 영화를 만드는 데 필요한 모든 지원을 아낌없이 제공했다. 아마 그곳이 북한 땅이 아니었고, 납치된 몸이 아니었다면 두 사람에게는 일생동안 가장 속 편하게 영화를 마음껏 만들 수 있는 마당을 만난 셈이었다.

1983년 이후 1986년 3월13일 서방으로 탈출하기까지 약 3년 동안 그들 두 사람이 북한에서 만든 영화는 「돌아오지 않는 밀사」를 비롯하여 「탈출기」,「소금」, 「사랑 사랑 내 사랑」, 「심청전」, 「방파제」, 「 불가사리」 등 7편이나 된다. 이데올로기의 장벽과 숨이 막히는 체제만 아니었다면 생애 중 원도 없이 영화를 만들어 본 행복한 세월로 기록됐을 것이다.

두 사람이 만든 작품은 모스크바 영화제를 비롯하여 공산권의 각종 영화제에서 북한 영화 사상 가장 좋은 성적으로 입상하는 영예를 안았다. 내친 김에 서방의 영화를 능가하는 수준의 영화를 만들어 달라는 주문과 함께 金正日은 두 사람에게 동구권을 비교적 자유스럽게 여행할 수 있는 자유를 주었고, 두 사람은 이 자유를 그들 자신들의 진정한 자유를 회복하는 기회로 활용했다. 1986년 3월13일 두 사람은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극적인 탈출을 감행, 서방세계로 돌아왔다.

부산국제영화제 회고전 계기로 재조명, 신상옥 감독의 영화인생 50년

신상옥은 거대한 미궁이다. 지난 50년간 한국영화가 걸어온 길을 추적하기 위해 굴려놓은 실타래는 언제나 신상옥이라는 존재 앞에서 뒤엉키곤했다. 고유의 스타일을 모색한 작가이자 장르를 넘나드는 장인이며 국내 유일의 메이저 영화사를 만든 제작자였던 그는, 아직도 여전히 물음표로 남아 있는 거장이다.

올해 부산국제영화제는 그를 `시대의 욕망을 연출한 한국영화의 거인`이라 일컬으며 회고전을 기획했다. <지옥화><연산군><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다정불심><내시><이조여인잔혹사><천년호><소금><증발>등 9편을 소개하는 이번 회고전은 감독 신상옥에 대한 궁금증에 답하는 것임과 동시에 잊혀진 한국영화 전성시대를 복원하는 시도이다.

<씨네21>은 이번 회고전에 앞서 신상옥 갘독을 만났고 그의 영화세계를 돌아보는 자리를 마련했다. 이제 그의 필름과 육성의 도움을 받아 엉킨 실타래를 풀어보자. 편집자

인터뷰 현장에 미리 나와 있는 신상옥(1926∼) 감독을 보았을 때, 필자는 결례가 되지 않을 정도의 몇초 동안 그의 얼굴을 찬찬히 새겨보았다. 반세기의 신화가 거기 앉아 있었다.

한 나라의 영화역사에서 첫 번째 등급에 기록될 걸작들을 만들어낸 감독이자, 영화산업 시스템을 선도한 사업가인 동시에, 십여년에 걸쳐 매년 20여편 이상을 극장에 쏟아낸 제작자이기도 했던 그는 75살의 나이를 굳이 생각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예의 그 매력적인 헤어스타일과 함께 감각적이고 활력있는 느낌을 유지하고 있었다.

나운규의 <아리랑>이 나온 해에 태어났을 뿐만 아니라 날짜조차 <아리랑>의 개봉일과 비슷하다고 강조하는 신상옥 감독은 한국영화사 1세대의 거장이자 한국영화 미학의 정초자였던 나운규를 자신의 영화적 스승으로 꼽는다.

반면 그가 영화계에 입문하여 실제적으로 영화를 배운 최인규 감독은 일제시대부터 해방 뒤까지 정력적으로 활동했던 화려한 테크니션이었다. 여기에 또 한명의 영화스승으로 일컫는 찰리 채플린을 더하면 신상옥 영화세계의 지반이 드러난다.

자신이 속한 시대의 맥락을 직관하고 탐구하면서 당대의 사회문화적 이슈들을 다양한 심도로 포착했으며, 기술의 실험가이자 확고한 테크닉으로 무장한 장르의 대가일 뿐만 아니라 공간과 시각 이미지를 아름답게 창조한 미장센의 대가, 게다가 개인 예술로서의 영화에 반대하고 철저하게 대중의 감성을 향해 승부하려 했던 승부사로서의 신상옥은 이렇게 세명의 앞선 거장들을 언급함으로써 자신을 우회적으로 언명한 것인지도 모른다.

또한 신상옥의 활동이 본격화했던 1960년 전후는 영화계 내적으로 주류 영화산업 시스템을 모색하는 시기였고, 외적으로는 물량 위주의 성장정책을 폈던 박정희 정권의 시기이기도 했다.

양자는 ‘기업화’라는 명분에 일치를 보았고 미국의 메이저 시스템을 본뜬 신필림의 거대한 발자국이 시작되었다. “박정희와 죽이 맞아 악덕 ‘영화법’ 제정에 앞장서고 신필림만 득을 보았다”는 세간의 쑥덕거림은 아직도 사라지지 않았다.

이 때문에 영화사가인 고 이영일은 신상옥을 알기 위해서는 “능글맞은 정도의 이해력과 관용을 필요로 한다”고 말했다. 이영일의 표현을 계속 인용하자면, 그의 내부에는 영화작가로서의 신상옥과 영화제작자로서의 신상옥이 지난 시기 동안 내내 공존해왔다.

그의 영화 편력은 영화라는 미디어와 인간 신상옥과 시대·사회라는 트라이앵글 속에서 불면불휴, 그야말로 치열하게 맴돌고 부딪치고 엉키면서 계속돼왔다. 그 속에서 신상옥은 영화를 발견하고 영화를 만들고 영화를 위해서 살아왔고 그런 의미에서 그는 철저하게 ‘영화적 인간’이었다.

그는 다른 사람처럼 아기자기한 가정을 영위한다거나 여가를 보내기 위한 취미생활, 교우들과의 사교생활 같은 것도 없고 언제나 영화에 관한 대화뿐이었다. 영화를 위해서라면 무슨 일도 했고 영화를 위해서 사는 그의 생활에 신상옥이 실존했다.

영화예술에 몰두했고, 그의 작품 속의 히로인을 아내로 삼았으며 불령(不逞)스러울 만큼의 의지로 영화의 왕국을 만들려고 기도했다. 신상옥은 영화라는 신화 속에서 살아왔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상옥 영화예술의 미와 함께 영화사회적인 모순 또는 트리비얼리즘도 함께 사랑하고 능글맞게 수용해야 한다(이영일, ‘신상옥론’, 계간 <영상시대>1978년 여름호).

이러한 맥락에서 본다면, 1975년 들어서 그의 정치적 후원자이기도 했던 박정희 정권과 불화가 생기면서 신필림의 영화사 허가가 갑자기 취소되었을 때 어느날 갑자기 북한의 공작원에 ‘납치’된 뒤 ‘신필림영화촬영소’의 총장으로 <소금><탈출기>같은 또다른 대표작을 만들고 있는 신상옥의 80년대 편력을 상상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그러다가 ‘우상숭배’의 족쇄가 채워지자 매년 300만달러씩 펑펑 쓰며 영화를 만들 수 있는 환경을 집어치우고 다시 남한으로 ‘탈출’하여 <마유미>(1990)라는 반공영화, <증발>(1994)이라는 정치적 색채가 강한 영화를 만들고 미국으로 가서 한동안 제작자 겸 감독으로서 활동하는 90년대의 편력 또한 지극히 신상옥적이다.

이처럼 신상옥의 영화활동은 크건 작건 영화계 안팎의 끊임없는 논란거리였다. 그러나 ‘오락성’과 ‘예술성’을 아우르는 신상옥의 폭넓은 영화세계 때문에 결국 ‘이번에는 무슨 영화를 어떻게 내놓을까’라는 호기심을 키우는 데 일조할 뿐이었다.

전통과근대의 대립, 그리고 여성의 섹슈얼리티

데뷔작 <악야>(1952)로부터 올해 부산영화제에서 상영되는 <지옥화>(1958)에 이르는 기간을 신상옥 작품 활동의 제1기로 꼽을 수 있다. 이때의 작품 경향은 리얼리즘과 문예 취향의 영화로 대별되는데,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신상옥 작품세계의 원형을 이룬다.

1950년대 데뷔한 전후 세대의 감독들이 모두 그러했듯이 식민지의 흔적과 전란으로 피폐해진 채 근대화의 광풍에 휘말린 사회현실이 그를 리얼리즘의 세계로 이끌었다.

신상옥 영화 역시 전통적인 문화와 가치체계로부터 근대적인 것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사회의 격렬한 혼란에 대해 호소하는데, 이같은 전통/근대의 대립이 여성의 섹슈얼리티문제와 결합하면서 흥미로운 양상으로 번지곤 한다.

바로 ‘전통’을 섹슈얼리티가 탈색 혹은 억압된 여성으로, ‘근대’를 섹슈얼리티 과잉의 여자로 등치시키는 것이다. <지옥화>는 ‘근대성=매혹적이고 위협적인 여성’이라는 남성감독의 판타지가 탁월한 장르적 기교 속에 형상화된 작품이다.

숨막히도록 매혹적이지만 죽음에 이르게 할 만큼 위험하고 타락한 존재, 이것은 영화 속 소냐의 이미지인 동시에 당대의 한국인이 경험하고 상상하는 미국식 모더니티의 실체였다.

반면 감독 스스로 리메이크하기도 했던 <꿈>(1955) 같은 작품들은 현실과 분리된 일종의 초현실 세계 속에서 설화적인 인생관과 이상적인 미의식을 피력하는 작품 계열의 단초를 이룬다.

이영일은 이른바 ‘문예영화’가 경험적인 현실과는 격리된 액자 속의 이미지 세계라는 스타일을 공유하면서 고급의 작품이라고 포장되는 것은 잘못이라고 비판하면서도, 신상옥의 경우에는 이것이 작가 체질의 근저를 이루는 중요한 경향임을 지적한다. 이러한 세계에 대한 집착이 결국 신상옥 영화미학 겸 한국적 영화미학의 한 정점으로 피어올랐기 때문이다.

또한 이같은 설화적 세계가 실존함직한 역사 속으로 들어가면서 <성춘향>(1961) <연산군>(1961) <폭군 연산>(1962) <대원군과 여걸 민비>(1968) <이조여인 잔혹사>(1969) <내시>(1968) <속 내시>(1969) <이조괴담>(1970) 같은 사극으로 변주되어 섬세하면서도 장려한 내면의 드라마를 펼친다.

“여성이 주인공 아니면 영화 아니다”

1960년대 접어들면 위와 같은 두 가지 서로 다른 충동이 원숙한 작가의식과 뛰어난 영화적 테크닉 속에서 숙성되면서 행복한 성과를 맺는다. 감독 스스로 “남한에서 만든 것 중에 가장 잘된 것”으로 꼽는 <상록수>(1961)를 비롯해서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1961) <열녀문>(1962) <벙어리 삼룡>(1964) 등 이른바 신상옥의 미학을 대변할 만한 작품들이 연달아 쏟아져나왔다.

이들 작품에서는 대부분 최은희가 아름답고 전통적인 여성으로서 수절하는 과부로 나오는데, 봉건적인 윤리와 여성의 인간적인 욕망이 아슬아슬하게 교차하면서 스러질 듯 휘황한 아름다움을 내뿜는다.

“오락성이 없거나 여성이 주인공이 아니라면 영화로 보지 않는다”, “나는 유교를 찬미한다”는 감독의 말에서 미루어 알 수 있는 것처럼, 전통적인 질서 속에 살아가는 여성에 천착하면 할수록 전통의 미덕과 결점이 동시에 아로새겨진 주인공이 탄생하는 것은 필연적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특징은 신상옥 개인의 특질인 동시에, 전통사회로부터 근대사회로 이행하는 당시 한국의 전반적인 기류와 맞닿는 지점이 된다. 이영일은 “전통을 수용한 신상옥이 필연적으로 봉착하는 지점이자 한국인 자신이 그 윤리사상의 전환점에서 형상해야 했던 것이며 따라서 한국영화가 아로새기고 넘어가야 했던 숙제이기도 하다”고 평했다.

이 경향은 다시 멜로드라마로 변주되어 당대의 라이벌이었던 홍성기 감독과 함께 대중의 일상적 감성을 어루만지고 영화산업을 살찌우는 주류 장르로 기능했다. 신상옥의 여성은 그의 작품세계를 펼치고 변주하는 주요 대상인 동시에, 후대의 우리에게는 당시 사회와 문화의 맥을 짚어내는 키코드로 읽힌다.

이 시기의 작품 가운데 몇편만 더 개별적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이조여인잔혹사>(1968)는 유교 이데올로기에 기반한 사회 제도와 가족 규범의 본질을 여성의 시선으로 날카롭게 폭로한다. 네편의 에피소드로 구성된 옴니버스에다 컬러와 흑백을 섞어 사용하는 등 형식의 파격도 두드러진다.

특히 마지막 이야기인 ‘금중비색’에서는 왕실 시중을 드는 궁녀(김지미)가 궐내에서 강간을 당하고 임신하게 되자 상궁 나인들이 똘똘 뭉쳐 은밀하게 출산을 돕고, 아이와 어머니를 궐 밖으로 몰래 내보내는가 하면 강간한 남자를 여자들의 치마로 묶어 죽인 뒤 연못에 빠뜨린다.

사극의 형식 속에 내포된 이같이 발칙한 전복성은 오늘날 ‘왕자 아기씨의 생산과 주상의 총애’에 넋을 잃은 TV사극 속의 주인공들을 한숨쉬며 되돌아보게 만든다.

원숙한 장르의 변주자

이십여개에 육박하는 각종 춘향전 영화 가운데 신상옥의 <성춘향>(1961)은 백미에 속한다. 이 시기의 영화 가운데 비디오로 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작품이지만, 군데군데 중요한 장면들이 잘린 채 출시돼 대가의 작품치고는 범작이라는 오해를 받고 있다.

지난 2월에 타계한 홍성기 감독도 당대의 유능한 흥행감독으로서 같은 해에 <춘향전>을 만들어 한판 자존심 대결을 벌였는데, <춘향전>이 <성춘향>에 비해 훨씬 정교한 고증과 우아한 분위기를 지녔음에도 관객은 신상옥의 손을 들어줬다.

두 감독이 각자의 작품을 통해 무엇을 보여주고 싶어 했는지는 첫 장면에서부터 확연하게 구별된다. 신상옥의 <성춘향>은 광한루에서 놀던 이도령이 방자와 수행 사령들에게 “상하의 구별을 다 치우고 함께 놀자”며 자상하게 술을 권하는 장면으로부터 시작했다.

반면 홍성기의 <춘향전>은 이도령을 다재다능하지만 권위적인 엘리트주의자로 묘사해나갔다. 대중은 민주적인(!) 이도령을 택한 셈이다. 또한 차곡차곡 의미있게 구축된 춘향 캐릭터 덕분에 옥중의 춘향은 마치 잔다르크처럼 보인다.

가부장적이고 부도덕한 권력에 온몸으로 저항한 여성에게 1960년 4·19를 정점으로 하는 민주주의 혁명시대를 살았던 관객이 열렬한 환호를 보냈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지 않을까.

1960년 전후에 나온 일련의 영화들을 통해 배우게 된 중요한 역사적 사실이 하나 있다. 그것은 4·19와 5·16이 단순히 정치적인 권력 다툼이 아니라, 해방 이후 새로운 한국을 어떤 방향으로 건설할 것인지를 둘러싼 두 가지 집단적 소망이 드러난 사건이라는 점이다.

이 무렵의 영화들이 다양한 장르에 걸쳐 4·19시대의 기운을 드러내는 반면, 신상옥 감독의 <쌀>(1963)은 특이하게도 5·16 방식의 근대화 노선에 대한 호감과 지지를 분명하게 표시하고 있다. 잘살아보겠다는 농민들의 처절한 투쟁에 공감하고 지원해 주는 유능하고 강력한 정부에 대한 소망을 피력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숙자>(1968)라는 서부극 또한 이례적인 흥미를 끄는 작품이다. 서부극에서 광활한 공간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모티브 가운데 하나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신상옥 감독은 황야에 대한 상상력이 대중의 집단적 기억에 남아 있는 시기를 찾아냈다. 바로 만주벌판을 유랑하던 일제시대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남성주인공은 전통적인 서부극과 달리 훨씬 가정 중심으로 수렴되면서 황야가 아니라 농토에 귀속하려는 충동을 가지고 있다.

또한 최은희가 연기하는 여성주인공과 그의 어린 아들은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여성상과 좀더 순수하게 욕망에 충실한 두 가지 내면을 나누어 갖고 있는 분신으로 기능한다. 이 모든 것들은 서부극이면서도 액션멜로로 전이하는 한국적 장르 변화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한국영화 미학의 핵심 형성

이처럼 현기증나는 다채로운 영화세계 때문에 신상옥은 “단일한 자아 대신 다중적 정체성을 지니고 있으며, 바쟁식의 작가가 아니라 푸코가 말한 담론의 발화자”라고 평가된다(김소영, <시네마 테크노 문화의 푸른 꽃>).

신상옥뿐만 아니라 김기영, 유현목, 이만희 등이 절정기의 작품을 쏟아낸 1960년대는 한국영화 미학의 핵심이 다양하게 형성된 시기이다.

할리우드 스타일과 시스템이 주도하는 상업영화, 유럽의 국제영화제가 주도하는 예술영화 사이에서 분열하고 있는 오늘날의 한국영화계에서 ‘예술성’에 대한 강박관념 없이, 또한 심도 낮은 ‘오락성’에 매몰되지 않고 양 날개의 균형을 소망하는 사람이 있다면 신상옥의 영화세계를 출발점으로 삼아도 좋을 듯하다. 그런 신상옥이 여전히 사라지기를 거부하는 현역 작가로서 올해 부산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김소희/ 영화평론가 cwgod@hanmail.net

▲ 최은희 주연의 영화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신상옥 감독 인터뷰
“남한에서 영화 못 찍게 했으면 내 발로 북한 갔을 거야”

지난 11월5일, 안정숙 <씨네21>편집장과 영화평론가 김소희씨가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열리는 회고전에 앞서 신상옥 감독을 만났다. 1949년 데뷔작 <악야>로 시작해 국내 유일의 메이저영화사 신필림을 거쳐 검열로 고통받고 북한에서 영화를 만들어야 했던 거장에게, 잊혀진 반세기 한국영화사의 진상을 들어본다. 편집자

회고록 집필은 마치셨는지요. 언제 출간하십니까.
직접 쓰다보니 자화자찬하는 것밖에 안 될 것 같아서 쓰기 싫어졌어. 다른 사람에게 집필을 의뢰했는데 내년 뉴욕 근대미술관에서 회고전이 열릴 무렵에는 나올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부산영화제에서도 회고전이 드디어 열리게 되었네요.
부산영화제쪽에 ‘김정일이 와도 하겠느냐’고 물었더니 그러겠다고 해서 성사된 것이야. 그동안 회고전을 하면 밤낮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벙어리 삼룡이>만 틀거든. 내가 60년대에 영화 만들고 끝난 사람도 아닌데 그 시절의 한두편만 대표작이라고 계속 이야기하는 것은 싫어. 이번에도 이북에서 만든 것까지 포함시킨다면 하겠다고 말했지. 우여곡절 끝에 <소금>과 <탈출기>가 동시에 상영돼. <탈출기>는 내 대표작 가운데 하나라고 여기고 있어요.

거기서 2년 반 동안 7편을 만들었는데 그중에 제일 낫고 사회성도 짙은 작품이야. 최서해의 단편 <탈출기>가 원작이지. 단편소설 가운데 최서해의 것이 영화로 만들기에 제일 쉬웠어. 같은 시기에 나온 강경애의 <인간문제>도 영화로 만들어보고 싶어. 북한에 머무는 동안 이런 유의 사회성에 좀더 친밀해졌다. 그렇다고 공산주의자가 된 것은 아니고. <소금>은 공산당이 세상에서 제일 몹쓸 짓을 한다고 여기던 한 여성이 아들을 통해서 ‘그리 몹쓸 것만은 아니로구나’ 생각하는 내용이야.

그래도 감독님의 50∼60년대 작품들은 그때야말로 진정한 한국영화의 중흥기였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충격을 줍니다.
어떤 것들이 그런가.

개인적으로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1961)를 가장 좋아하고, 그외에도 <지옥화>(1958) <성춘향>(1961) <로맨스 빠빠>(1960) <이조여인잔혹사>(1969) 같은 작품들도 그렇습니다.

남한에서 만든 것 중에 제일 좋은 작품은 <상록수>(1961)야. 수법이나 내용, 사회성 면에서 두루 그렇지. 경제적으로 유복해지면 사회성 있는 작품을 만들어 보고 싶었는데, <성춘향>이 성공했기 때문에 <상록수>는 돈 생각 않고 순수한 마음으로 만들었거든. <쌀>(1963)도 비슷하지. 박정희 편들어 준 거긴 하지만. 그래도 그때는 그리 생각했어. 뒤에 보니 잘못됐지만. <천년호>(1969)는 그땐 별거 아니었는데 요즘 사람들이나 밖에서들 많이 좋아하더구만. 시체스에서 상도 받고.

김기영 감독님이 같은 시기에 <고려장>을 통해서 5·16을 혹독하게 비판한 것과는 대조가 되는데요.

과도한 의미 부여 아닐까. 기영이의 실제 의도는 흥행성이었을 거야. 내가 박정희를 좋아했던 이유는 두 가지인데, 그 양반이 <상록수>를 보고 울었다고 하더구만. 그건 5·16 이전이야. ‘시골 사람이 대통령 해서 그런가’ 생각했지.

또 한 가지는 <청일전쟁과 여걸 민비>(1965)가 한-일회담 반대하던 시기에 나온 영화라서 하마터면 영화를 못 틀 뻔했어. 내가 청와대 드나들 때라서 사정 이야기했더니 박정희가 “그럴수록 보여줘야 한다”고 해서 상영이 가능해졌어.

요즘 명성왕후 이야기 많이 하는데 뮤지컬 <명성왕후>는 “대한민국이여 영원하라”는 국수주의 때문에 얼굴이 뜨겁더구만. 당시 국제정세가 복잡하고 근본적으로 창피한 이야기다. 미화 못할 바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국수주의로 가는 건 잘못이지. TV <명성왕후>는 의상 고증, 세트, 연출 면에서 여태껏 나온 사극 중 제일 좋아. 그래도 TV는 좀 처지지.

감독님 스스로 회고전을 기획하신다면 어떤 작품들을 고르시겠습니까.

내 작품 중에 열댓개밖에 쓸 게 없어. 특출한 것도 없고. 1949년부터 51년간 영화를 했는데 이북에 잡혀가고 왔다갔다 하느라 20년을 버렸으니 30년 일한 셈이지.

■데뷔, 그리고 60년대

1949년에 영화계 입문하신 건가요.
<악야>를 만든 해지. 1946년 말에 최인규 감독 밑으로 들어왔고.

1960년을 전후한 시기와 요즘은 둘 다 한국영화의 중흥기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두 시기를 비교하신다면 어떻습니까.

별로 다르지 않아요. <성춘향>때 40만명이 들었는데 여러 가지 요소를 감안하면 요즘의 흥행작과 비슷한 수치라고 봐야 할 거야. 근데 요즘 영화들은 곁말(욕설) 빼면 싱거워.

미학적으로는 어떻습니까. 당시에는 감독님을 비롯해서, 김기영, 유현목, 이만희 감독님 등 자기 세계를 가진 거장들이 잇따라 나온 시기인데요.

과거는 다 아름다워 보이는 것 아닐까. 그 당시는 한국영화가 처음으로 자신을 찾을 때였지. 해방 뒤에 기술적인 문제들이 해결되고 나서 작가랍시고 우리 같은 사람들이 나타난 때니까. 비교하자면 아무래도 요즘이 낫다고 해야겠지. 카메라도 아주 좋고. <사의 찬미>도 찍은 사람은 옛날 사람이 찍었는데, 이성춘의 카메라가 좋았어. 건방진 얘기지만, 난 한컷만 보면 그 영화가 어떤 영환지 알아요.

그때, 사실은 내가 봉우리에 올라서 있다 생각하고 다른 사람 작품은 안 본 거 아닌가요.

예술입네 하는 작품은 난 잘 안 봐. 누구라고 얘긴 안 하겠지만. 예를 들어서 내가 아직까지도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의 신상옥입니다, 하면 좋겠나?

돌아가신 안병섭씨가 평 쓴 거 보셨나요? 당시엔 여기 있는 김소희씨보다도 젊은 사람이었는데. 홍성기 감독의 <춘향전>은 원전에서 그대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신 감독의 <성춘향>은 반상의 차별 철폐를 암시하는 등 시대가 뭘 요구하고 있는지 알고 있는 영화라 했었죠.

뭐, 그런 어려운 얘기를. (웃음) 평이야 평단이 만들어내는 거니까, 뭐라고 얘기하든 강요는 안 하겠는데. 어쨌든 한국적 해학은 담으려고 했지. 그게 민심이니까.

<성춘향>은 오프닝부터 홍 감독님 <춘향전>하고 다르던데요.

그건 불성실이야. 문제는 불성실이라구. 홍성기는 공부를 안 해서 흥행에 실패한 거야. 그저 옷이 화려하면 된다, 이런 생각을 한 거지. 그쪽은 돈도 많이 있었고. 극장도 최고 극장인 국제극장이 잡혀 있었지. <성춘향>이 나오게 된 계기가, 한국 사람들이 설화 듣듯 알기 쉽게 각색하자는 거였거든.

그렇다고 나 혼자 우수해서가 아니었어. 렌즈가 독일 거였고 현상도 일본에서 했고 배우 앙상블이 좋았고. 거기에 내 연출이 아주 기본적인 거 무시하지 않고 찍은 점도 있지만 자기 혼자 힘으로 한다고 하는 거 자체가 말이 안돼.

정말 의상은 <성춘향>이 훨씬 떨어지더라구요. (웃음) <춘향전>은 모두 비단옷을 입었고 <성춘향>에서는 나일론 치마를 입었던데요.

아직도 안 잊혀지는 것은, 춘향이가 사또한테 불려갔을 때, 두꺼운 면으로 된 옷에 분홍 깃 달린 걸 입게 했거든. 소박하면서도 예쁜 옷이었지. 예쁘지 않게 입었는데도 은근히 예뻐보이는 그런 옷이야, 그게. 최 여사가 그런 면으론 아이디어가 많아. <민비>때도, 내가 민비한테 금색 옷에 검은색을 받쳐 입게 했지.

춘향이 캐릭터도 참 인상적으로 형상화되어 있는데, ‘일심’자를 쓰고 붓을 툭 던져버리고, 또 가야금을 치다가 줄을 끊는 장면 같은 것은 원래 판소리 대본에 있는 에피소드인가요.

그런 게 어디 있었을라고. 일심 쓰는 건 있지만 붓 던지는 건 원래는 없었어. 그보다도 내가 제일 크게 생각하는 수확은 고무신 에피소드인데, 원전 춘향전의 맹점이 뭐냐면, 춘향이랑 이도령이 한번도 만나지 않고 좋아하는 거야. 고전은 원래 그래. 근데 가까이 안 보고 예쁜지 안 예쁜지 어떻게 아나. 그걸 해결한 게 <성춘향>의 수확이라면 수확이지. <성춘향>에선 신발 벗은 거 찾아오라 그래서 춘향이 얼굴을 보잖아.

■최은희와 신상옥

최은희 선생님의 영화들을 보면 이제는 더이상 우리에게 남아 있지 않은 어떤 자태의 아름다움을 느낍니다.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를 만들고 동남아를 돈 적이 있어. 근데 동양 천지에 유교적인 미덕 가진 나라 한국밖에 없더라고.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에서 두 사람이 나중에 다시 만날지, 늘 궁금했어요. 전 만난다는 쪽으로 걸겠습니다. (웃음) 후반부로 가면 욕망을 담은 어머니의 시선이 카메라에 종종 클로즈업되거든요.

퀘스천을 둔 거야. 원작은 옥희가, 아저씨가 간 다음에는 어머니가 계란을 안 싼다는 불만을 얘기하는 걸로 끝나는데, 유치하잖아? 난 그냥 퀘스천을 뒀어. 최 여사가 피아노 치는 장면 있잖소? 원작에는 피아노가 아니라 오르간이었어. 오르간 좋지, 그런데 처지더라구. <쇼팽의 즉흥곡>인데 그걸 최 여사가 어떻게 쳐? 최 여사야 바이엘까지는 쳤지만(웃음) 한달간 죽을 고생을 했지. 그래도 어째, 한컷은 보여줘야겠는데. 얼마나 힘들게 했는지 몰라.

요즘은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처럼 어린이가 구조적으로 중요하게 등장하는 영화가 없는 것 같아요.

첫째로, 절대로 주인공 두 사람을 얘길 안 시켰어. 그랬더니 다 찍었는데 극장 상영할 길이가 안 되는 거야. 그래서 여러 가지를 더 찍었지. 김희갑씨가 시계 빌리러 가는 거라든지, 밥값 안 내면 쫓겨난다고 오고가는 것, 시어머니가 며느리더러 시집가라고 하는 것, 허장강이 점치는 얘기, 새로 찍은 게 한 대여섯개 돼. 아무튼 끝까지 얘기 안 시키는 게 힘들었다.

또 좋았던 건 미조구치 겐지 영화가 일본의 공간을 아름답고 특색있게 보여주는 것처럼, 한국적 공간이 보여지는 거였는데요.

수원이었는데, 지금은 다 없어졌지. 옛날 공간이니까 좋아보이기도 하겠지.
공간 연구를 많이 하시는 편이었는지요.

그야 내가 미술했으니까 그렇지. 난 대체로 사극을 많이 했으니까, 그런 영향도 있겠지. 이북에서 김정일이 나보고 제일 민족적인 작가라고도 하잖아.

■장르의 섭렵

<악야>는 볼 기회가 없었는데 <지옥화>와 유사한 작품이라고 들었습니다.

사회물이지. 일제시대에는 <임자없는 나룻배>같은 영화가 있었지만 해방 뒤 작품으로는 처음이었을 거야. 원작은 이런 거야. 어떤 작가가 술먹고 가다가 지프차에 치었는데, 자기가 과외하던 여학생이 나중에 보니 양갈보고. <백민>이라는 소설잡지가 해방 뒤에 있었어.

33인의 신예작가들 단편모음이 거기서 나왔는데, 거기 실려 있었거든. 줄거리가 없잖아. 그래서 나는 그때 사회상을 다 집어넣었지. 타협을 안 했어. 오히려 <지옥화>에선 타협을 했지만. 오락성을 겸하고 여자가 주인공이 아니면 영화가 아니라고 생각하니까.

<악야>는 최 여사(영화배우 겸 부인 최은희 여사 지칭) 만나기 전인데, 나중에 들어보니 최 여사는 <악야>를 보고 혹평했다더구만. 35mm 아니면 영화가 아닌 줄 알던 때인데다 <새로운 맹서><마음의 고향>이후에 콧대가 높아진 최 여사가 보기에 이제 막 데뷔한 무명감독이 뭐 눈에 차기나 했겠어?

이 참에 해둘 말이 있는데, 과거 작품들에 대해서 거짓말들을 많이 하더구만. 보지도 않고 줄거리를 쓰기도 하고. <열녀문>의 경우에 평자들은 유교사회에 대한 비판의식을 담고 있다고 하는데, 그건 소재에 불과하고 내 입장은 도리어 유교 찬미야. 인간 해방, 여성 해방의 기조로 해석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60년대 잡지에 실린 감독님 인터뷰에서도 비슷한 말씀을 봤습니다. 이 세상 여성들 중에 한국 여인이 가장 아름답다고 하셨지요. 여인들을 사랑하시다 보니까 그들을 괴롭히는 제도에 대해서 날카로운 비판도 동시에 묻어났던 것 아닐까요.

글쎄, 그건 잘 모르겠고.

<이조여인잔혹사>의 첫 번째 에피소드에 보면, 마지막에 여자 꼬마아이가 엉터리 열녀문을 째려보는 장면이 있죠.

그 영화는 에피소드 하나하나마다 색깔이 달라. 여하간에 나는 인내의 미덕이라는 게 좋다고 생각해.

마지막 에피소드에선 여자들이 떼를 지어 강간했던 남자를 죽이는데, 요즘 어떤 사극도 그렇게 여성들의 발칙한 도발을 보여주진 못합니다.

그 영화가 국제사회에서 평가받기에 결점이 있다면, 일본의 <무사도 잔혹이야기>에 비해 한발 늦게 나왔다는 거야. 국제무대에선 아무리 좋아도 독창성이 없으면 좋은 얘기 안 하니까.

<지옥화>는 그때 사회상이 굉장히 압축되어 있으면서 장르적인 숙련성이 초기작이라고는 믿기 힘들 만큼 대단한 영화라고 봅니다.

<지옥화>를 50년 만에 독일에서 처음 봤는데 나도 좀 놀랐다. 되게 열심히 찍었더라고. 그거 찍을 때 카메라가 잘 안 돌아가니까 연필로 돌리면서 찍었는데. 반짝반짝 신호하는 것도 조명 없으니까 미러로 하고. 근데 프린트가 상태가 좋지 않은 게 원판 없어져서 듀프에서 딴 거라 그래.

그렇게 다양한 장르를 섭렵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연출 수업 과정이 궁금합니다.

욕심이지. 죽기 전에 이것저것 하려고. 하지만 실제와 공부는 달라. 소질은 있었겠지만. 무엇보다 난 천재가 아니야, 무척 노력을 하는 타입이지. 최 여사가 질렸다구, 그런 거에. 최 여사는 책도 한번 정독하면 다시 안 보거든. 난 오래 보진 않지만 20∼30번은 반복해서 봐.

고 이영일 선생님은 신 감독님이 워낙 영화를 사랑하기 때문에 남한에서 영화 못 찍게 했으면 제발로 북한 갔을 사람이라는 말씀도 하셨어요.

갔겠지. 동구라파만 됐어도 안 올 거였어. 우상숭배만 없었으면. 사회주의라는 것이 당시 우리의 이상이었으니까. 근데 거기는 근본적으로 잘못된 사회야. 나야 1년에 300만달러씩 쓰고 잘살았지만.

■3인의 영화스승

연출 수업 할 때 외국영화를 많이 보셨나요.

프레드 진네만, 윌리엄 와일러 걸 많이 봤지. 중학교 때는 구라파영화들 볼 수 있는 건 다 봤어. 내가 제일 영향을 많이 받은 건 채플린하고 나운규. 두 사람을 스승이라고 말해도 될 것 같아. 내가 태어난 해가 나운규 <아리랑>이 나온 해거든. 어떻게 <아리랑>을 보느냐고? 우리 집 앞에 신발 벗고 들어가는 극장이 있었거든. 거기서 채플린의 <모던타임스>, 나운규의 <벙어리 삼룡>이니 하는 걸 다 봤어.

내 영화 <벙어리 삼룡이>에 나오는 손장면은 나운규 영화에서 따온 거야. 나운규 영화는 불나는 장면을 필름에 착색한 거였어. 나운규 정신이랄까, 그런 작가정신이 나한테 상당히 영향을 줬지. 또 그 당시엔 채플린 영화인지 뭔지 모르고 봤는데, 이게 <골드러쉬>고, 이게 <모던타임스>고, 나중에 다 알았지.

<모던타임스>에서 물에 들어갔는데 물이 여기까지밖에 안 오는 거나 깃발 들고 가다가 시위대 만나고 그런 거를 그땐 그냥 웃으며 봤는데, 다 사회성 있는 거더라고. (웃음) 그리피스도 봤고, 기술적인 면으로는 최인규 감독한테 많이 배웠지. 기술적인 면을 해결한 감독이야.

나운규 감독이나 최인규 감독의 작품이 남아 있지 않아서 그저 전설처럼 들리는데, 지금 기준으로 봐도 정말로 잘 만든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잠시 생각) 말할 수 있어요. 다만 최인규 감독은 테크니션이야. 그 사람은 시나리오가 좋으면 틀림없이 좋은 거 만드는 사람이야, 테크니션으로는 확실하지. 한형모 감독 <자유부인>도 봐봐, 테크닉 확실하잖아. 근데 원작이 나쁘면 죽을 쑤니까, 좋은 거 만들다가도 죽을 쑤고 그랬지. 좋은 책 주면 좋은 영화 나오고 나쁜 책 주면 나쁜 영화 나오지. <집없는 천사>는 일본에 프린트가 몇개 남아 있을걸?

얼마 전에 TV에서 <무숙자>(1968)를 보았는데, 서부극 장르를 한국에 토착화시키려면 어떤 변형이 이루어져야 하는가를 실험한 영화라 흥미로웠습니다. 후반으로 갈수록 가족 멜로드라마로 접근하던데요.

그렇지. 근데 그거 평야가 아니라 스튜디오에서 찍은 거요. 안양촬영소가 있으니까 가능했지. 말 달리는 장면에서 자막이 나와야 하는데 그게 사라진 상태라 답답하더구만. <연산군>도 그래. 그 영화에서 처음으로 데이 포 나잇을 시도했는데 노출을 투 스텝 낮추고 역광으로 찍어야 하거든. 근데 요새는 전부 낮 신으로 방영해버리더구만. <무숙자>에서도 밤 신이 다 하얗게 나와. 증인이 없으니까 아무도 몰라서 그렇게 된 거야.

요즈음 들어서야 본격적인 액션영화가 다시 나오고 있는데요. 하나씩하나씩 장르를 넓혀가는 시기라고나 할까요. 60년대에 감독님이 그토록 다양한 장르를 시도할 수 있었던 배경이 뭘까요.

첫째는 예술가로서의 얄팍한 야심이고, 둘째는 블록 부킹 때문이야. 영화법상 회사를 유지하려면 한달에 두편씩 일년에 스물여덟편을 찍어야 하는데 다양한 장르를 개척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지. 먹고살려고 한 거지, 다.

세 번째라면 내 딴에는 테크닉이 확실하다, 뭐든지 소화할 수 있다는 생각이 있었고, 또 하는 동안에는 열심히 했어. 뭐든지. 자본주의에는 스타시스템이란 게 있는 것처럼, 내 영화가 히트하니까 배급업자들이 자꾸 내거만 가져가려고 했어. 내 회사를 가지고 마음대로 했으니 좋았겠다고 하는데, 아니야. 내가 연출에 나서는 건 늘 회사 부도 막느라고 목까지 차올라서 힘들 때 했지. <빨간 마후라>도 아주 힘들게 만든 영화야.

 

■박정희와 반공법

 신필림의 위력에서 최은희 선생님을 비롯한 스타시스템의 위력도 빼놓을 수 없는 요소인데요.

다른 데서도 많이 했어. 그렇지만 많은 중요한 배우들이 전속이었지. 한꺼번에 네 작품씩 돌아가야 하는 상황에서 그렇게 하지 않을 수가 없었지.

스타성 말씀을 하셨는데, 배우 최은희와 감독 신상옥 가운데 누가 더 인기 요인이었을까요. 최 선생님이 출연하는 거와 신 감독님이 연출하는 거와 어떤 게 더 스타성이 있었을까요.

 (잠시 망설임) 모르지. 여자들이야 최 여사 나오는 걸 더 좋아했겠지. 현모양처로 나왔으니까. 현실은 현모악처지만. (웃음)

옛날 잡지 기사를 보니까 최 선생님이 신 감독님의 창작적 동반자로 신필림의 많은 연출 아이디어 가운데 상당부분이 최 선생님으로부터 나왔다고 하던데요.

우리는 비주얼에 강하고, 최 여사는 연극을 해서 드라마에 강한 건 있었지. 그래서 내가 드라마 공부한 감독들 많이 기용했다고. 근데 비주얼도 중요하지. 연기자한테 연출시키면 감정선만 따라가고, 시나리오 작가한테 시키면 책 쓰듯이 찍고 그런다고. 지금 TV <명성황후> 잘 찍긴 하는데, 그 사람 보고 영화하라면 힘들 거야. 늘어놓기만 해서. 압축을 해야 하거든.

 <연산군> 프린트는 왜 없애라구 하신 건가요.

저예산으로 엉터리로 찍었으니까. 지금도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해. 내가 <연산군>을 싫어하는 이유가 뭐냐면, 전편 찍고나서 후편을 한달반 사이에 찍었거든. 각본도 없어서, 내일 뭘 찍어야 되는지도 모르고. 밤늦게 시나리오 내일치가 나오면 복사기도 없어서 먹지대고 다 써가지고, 아침 6시 되면 나오는 사람들한테 그거 주고. 소도구와 의상은 아예 비원에 맡겨놨어.

그래서 한 얘기 또 하고 그런 게 많고, 템포니 뭐니 다 처져. 이북에서 내가 감옥에서 죽겠다 싶을 때, 이럴 바에 없애고 싶은 거나 없애고 죽자 해서 편지에 그거 태우라고 썼지. 근데 프랑스 놈들은 그게 또 제일 좋다고 하니.

박정희 대통령 좋아하신 것 때문에 박 정권이 만들어낸 영화법도 주도적으로 만드셨을 거라는 평판이 있습니다.

빈농의 아들이니까 그런 면에서 긍정적으로 봤지. 공무원들 복지부동하는 것만 보다가 박정희를 보고는 최소한 필요악은 된다고 생각했지. 그때 시대론 그랬던 건데. 박정희 두둔하려고 만든 게 아니라, 워낙 가난한 사람들이 많았던 때니까. 영화법이란 건 나는 잘 모르고, 내가 커지니까 내가 관여했냐고 그러는데, 그건 아니다.

신필림을 할리우드의 메이저에 비유할 수 있지 않을까요. 한국영화산업에서 전무후무한 사례인데.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에서 살아서 영화에 대해 이해가 있는 편이었다구. 이 대통령이 안양촬영소 상량식할 때 나와서 ‘영화인은 특별한 사람들’이라고 축사한 게 있지. 근데 잘못한 게, 시설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한 거지. 시설은 만들었는데 머리는 따라오지 못했지. 결국 산업은행으로 넘어갔어.

나중엔 풀이 우거지고 소가 왔다갔다 하는 지경이었으니까. 기계란 기계는 다 도둑질당하구. 근데 내가 신필림을 세울 때 콜럼비아를 따서 만들었거든. 그래서 안양촬영소를 인수했지. 스튜디오가 400평짜리, 200평짜리가 있었고 현상소도 있었고, 녹음기도 제일 좋은 거로 들여놓았지.

지금 양수리 종합촬영소 가보면 꼭 텔레비전 촬영소 같아. 물건 갖다놓을 데도 없고, 오픈 세트는 산중에 있어서 산불위험도 있어. 안양촬영소 인수한 거는 은행에서 빌려서 시작한 거였는데 나중에는 지탱할 수가 없었어.

결정적으로 힘들어진 이유는 뭐였나요.

검열 때문이야. 미칠 지경이었지. 정치적인 건 말할 것도 없고 미풍양속이란 것 때문에. 키스나 정사장면도 외국사람들 건 그냥 들어오는데 우리 영화는 그게 절대 안 되고. 전기료만 그때 돈으로 400만원이 기본요금이었는데, 유지하는 데 막대한 비용이 들었지. 영화법도 피해를 줬어.

제작쿼터를 1년에 4개씩 줬는데 그걸로는 못 먹고 살았지. 200평짜리 스튜디오가 있으면 영화사 등록을 할 수 있었거든. 우리는 600평을 가지고 있으니까 영화사를 3개 만들어서 제작쿼터를 더 땄다구. 그때 정치적으로 내가 움직였으면 훨씬 발전했을지 모르지. 정주영도 완전히 국가차관으로 한 거였으니까.

반공법에 한번 걸린 적도 있으시죠.

아시아영화제 집행위원을 했었거든, 내가. <민비>가 작품상을 땄을 때야. 그 영화제 출품작 중에 <일본 도둑이야기>라는 영화가 있었는데, 그게 공산당이란 건 알았는데, 상영했지. 그게 반공법에 걸린 거야. 그래서 공안부 끌려가서 한바탕했지.

 <내시> 가지고도 유죄판결 받았잖아. 음란죄라고. 많은 대중 앞에서 음란행위했다는 건데, 거기서 말하는 대중이라는 게 스탭들이거든. 근데 윤정희라는 애가 어디 벗을 애야? 브래지어도 하고 핫팬츠도 입었는데, 음란에 걸렸지. 관례에 따라서.

인터뷰 안정숙·김소희 정리 최수임·사진 정진환


[한국영화의 메카 신촌(新村) - 지금의 석수2동]

우리나라 연예계에는 이른바 「안양예고 사단」이 있다. 31년의 역사를 갖고있는 안양영화예술고등학교 출신들을 일컫는다.

그룹 룰라출신의 김지현, 신세대 탤런트 신은경 김민종 이상아 오현수, 개그맨 조정현 김보현 남희석, 슈퍼모델 김소연씨 등 일일이 꼽기가 힘들 정도다.

지난 66년 파란곡절의 영화배우 崔銀姬(최은희)씨가 국내 최초로 현재 관악역이 있던 곳에 세운 영화전문교육기관 안양예술학교가 이 학교의 전신으로 지난 82년 재단이 바뀌면서 안양영화예술고등학교가 됐다.

대학교나 마찬가지로 연극영화과 미술과 무용과 등 6개 과로 지원을 받아 실기성적 50%, 중학교 내신성적 50%를 합산해 합격자를 뽑는 이 학교는 입학부터가 쉽지 않다. 매년 10월말에 있는 입학시험에서 이 학교의 간판인 연극영화과는 1백명 선발에 1천명이상이 지원, 평균 10대 1 이상의 경쟁률을 보인다.

안양예고는 학생들의 「끼」를 살리고 개발하는데 교육의 중심을 두지만 학생의 본분인 학업에도 등한하지 않도록 「1년에 15일이상 수업에 빠질 수 없도록」 학칙으로 규정했다.

이런 학교방침에 힘입어 매년 대학진학률이 80%를 상회한다. 학습방식도 일반 고교와는 다르다. 학생들은 일반교과목과 전공교과목을 따로 배운다. 연영과의 경우 1학년때 연극반과 영화반으로 나눈 뒤 각 반마다 소규모 팀을 구성, 팀별로 매주 18시간씩 실기수업을 하고 매학기 발표회를 갖는다.

뮤지컬 배우가 꿈인 崔盛希(최성희·18·연영과 3년)양은 『다들 어느 정도 괴짜들이라 서로의 「튀는 끼」를 인정하며 생활한다』고 말했다.

 

2003-06-13 11:03: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