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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부성]어디까지가 수리산 '병목안'인가? (2)

안양똑딱이 2016. 6. 11. 08:30

[03/04/25]수리산을 사랑하는 사람들 회장


 

(1)에서 이미 언급한대로 두 개의 다리가 있던 곳부터 시작되는 병목안은 언제 생겼을까?

이땅을 강점한 왜놈들이 금수강산을 유린하며 대륙쪽을 넘보고자 할 때 눈여겨본 곳이 바로 이곳, 수리산 자락의 엄청난 석산이었다.

철도공사에는 수많은 자갈이 쓰이는데 경부선 철길에 깔 자갈을 생산 공급하던 채석장이 들어서면서 전국각지의 슬프고 고단한 사람들이 부평초처럼 떠돌다 모여들면서 이루어진 동네가 바로 병목안이었다.

당시에는 지금과 같은 현대적인 장비(크락샤, 함마드릴, 덤프트럭 등)가 없었으므로 망치 하나로 바위를 깨고 또 깨서 먹고 살던 사람들.

면장갑인들 제대로 있었을까? 가진 거라고는 망치 하나, 자갈 걸르는 쇠로 된 얼개미 하나가 전재산인 사람들!

망치 하나로 자갈 만들어 먹고 살던 사람들, 병목안 사람들.

마스크는 물론 없었으므로 하루 종일 돌을 깨면서 먹은 돌가루로 허기진 배는 저녁 연기 피어오를 즈음, 막쐬주 한 잔으로 하루의 피로를 풀면서 만족했던 사람들, 고단하고 서글펐던 병목안 사람들.

그런 연유였을까? 기억 저편에서 가물거리는 병목안 사람들은 대단한 술꾼이었고(일부), 억척스러웠으며 어뗜 면에서는 깡패스러웠다.(부디 이 기억이 병목안 사람들의 일부의 기억이기를 바란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수리산 정기(?)가 쫙 깔리는 동안 그 수리산 정기(?)를 망치 하나로 쪼개어 나누는 동안 병목안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산더미같이 쌓인 자갈더미 사이로 기차(자갈운반용 화차)가 들어오면 그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화차마다 가득 싣고 떠나가는 기차를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나는 철길따라 다니기를 좋아했는데, 육상부에 축구부까지 했으니. 10리길 학교를 새벽에 갔다. 안개낀 새벽, 채석장에서부터 철길따라 나는 내려가고 채석장에 일가는 사람들은 거슬러 올라오곤 한다.

벙어리 아줌마 부부가 제일 기억에 남는다. 참 좋은 아저씨와 아줌마로 지금껏 기억에서 살아있다. 몇번을 꿰맨 무명수건을 머리에 쓰고 계시다.

쇠얼개미(삼태기 비슷하다) 속에는 필시 망치 한 자루와 점심용 감자나 고구마가 몇개 들었을 터였다.

"아줌마 안녕하세요?" 씩씩하게 인사하면 듣지도 못하는 분이 그렇게 반가히 웃어주실 수가 없다.

희뿌연 안개는 꼭 낀다. 철길에선 김이 피어오른다. 꼭 지금의 금용아파트 못미쳐에서 만나곤 한다. 이제 철길은 100m쯤 남았나 보다.

노정권때 뜯었는데 고만큼만 남겨두었다. 잘한 일이다. 허기사 금용아파트도 철길이 여적 남아 있으면 짓지 못했을 것 아닌가?

그래서 나는 몇년전부터인가 수리산행을 마치는 길에 꼭 수리산 순두부 앞에 다리를 건너 사람들을 일부러 채석장터로 인솔(?)하곤 한다.

지금은 관광버스 차고로 쓰고 있지만 자갈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던 현장을 밟게 하곤 한다. 이제 일방차로 공사로 그나마 현장답사의 시간도 별로 많지 않다.

채석장 자갈 쌓였던 곳부터 다리(철교)까지 레일 따라 걷는다. 80년쯤된 다리가 아직도 생생하다.버팀목도 썩지 않았다. 물론 보수하지 않아 좀 낡았지만,역사의 현장임에는 틀림없다.

어릴적에는 물이 많아서 다리에서 다이빙도 하곤 했는데 이젠 허연 돌맹이만 깔려있는 마른 개울이며 마른 다리이다. 안양시에서는 이 다리를 보존했으면 좋겠다. 한 번 검토해주기 바란다.

경부선 자갈의 출발지이며 대륙침탈의 첫돌맹이들이 건넌 다리라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잖는가?

수리산을 사랑하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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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7-12 06:41: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