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지역얘기/담론

[김대규]‘아 ~ 신상옥 감독 !"

안양똑딱이 2016. 7. 1. 16:01
[김대규]‘아 ~ 신상옥 감독 !"

[2006/04/14]안양시민신문사 회장
‘아 ~ 신상옥 감독 !"

한국 영화계의 ‘큰 별’ 신상옥 감독이 지난 4월11일 타계했다. 신상옥 감독에게는 ‘산 증인’, ‘상징적 존재’, ‘거장(巨匠)’이라는 호칭보다 은막(銀幕)의 통용어인 ‘별(Star)’중에서 도 ‘큰 별’이었음을 재삼 강조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주지하듯 신상옥 감독은 1925년 함경북도 청진 출생으로 도쿄미술전문학교를 졸업한 미술학도로 영화계에 투신, 1952년에 영화 ‘악야(惡夜)’로 감독으로 데뷔한 후, ‘젊은 그들’(1955), ‘성춘향’(1961). ‘연산군’(1961).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1961), ‘빨간 마후라’(1964), ‘여자의 일생’(1968)등의 명작들을 연출·제작하여 한국영화의 기반을 다졌다.

1978년 부인 최은희 여사가 납북된 지 6개월 후에 신 감독도 납북되어, 북한에서 김정일의 영화고문 겸 신필름영화촬영소 총장직을 맡아 1987년 북한을 탈출하기 전까지 ‘돌아오지 않는 밀사’(1984), ‘소금’(1985). ‘심청전’(1985), ‘불가사리’(1985) 등 7편의 영화를 만들었다. 신 감독의 타계와 함께 그가 만들어낸 총 75편의 영화는 이제 한국영화의 ‘고전’으로 편입됐다 할 것이다.

신상옥 감독의 부음을 듣고 처음에는 ‘내가 만나본 신상옥 감독’이라는 제목으로 개인적인 소회(所懷)를 피력해보려고 했지만, ‘아~ 신상옥 감독!’이라 제목을 바꾼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다.

첫째는 신 감독의 존재가 한국영화계에서는 너무나 소중한 것이었기에, 그의 타계가 웬만큼 가슴 아픈 일이 아니었던 까닭이요, 더구나 북한 탈출 이후의 20년 가까운 세월을 보내는 동안, 마지막으로 영화에 대한 열정과 꿈을 집대성할 기회를 얻지 못한 것이 못내 안타깝고 서글프기 때문이다.

둘째는 ‘안양’과의 연관성 때문이다. 솔직하게 말해서, 영화인이 아닌 나로서 신상옥·최은희 두 분이 안양과 무관하다면 이토록 연민의 정을 느끼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신 감독은 1963년 과거 석수동 소재의 안양영화촬영소를 인수하여 안양과 인연을 맺고, 1966년 한국 최대의 영화사인 ‘신필름’을 설립, 1970년까지 운영했다. 현재의 안양예술고등학교도 그때 만들었다. 북한 탈출에 성공, 미국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마침 ‘아트 시티’를 표방하고 안양시의 문화적 브랜드를 높이기 위해 고심하던 신중대 시장에게 신상옥·최은희는 절호의 찬스로 여겨져, 부산영화제에까지 내려가 그들을 만나고 ‘한국영화의 메카’로서의 꿈을 재현시키기에 합의한 것. 그 자세한 내용은 알지 못하겠으되, ‘영화도시 안양’의 재건을 위한 설계도는 참으로 웅대했었다. 석수동 석산 일대의 ‘징기스칸’ 촬영 세트 건설, 문예회관의 ‘셰익스피어극장’으로 개축·운영, 영화 박물관 건립 등의 기반조성을 위해 안양영화촬영소 회고전도 열렸고, 세미나도 개최됐다.

그러나 호사다마라던가. 이들 원대한 계획은 무산되고, ‘신필름예술센터’로 명맥을 유지하던 일도 여의치 않아 철거 중에 있으니, 인생무상이라고는 해도 일국의 대감독·대스타의 말로가 이처럼 불행하게 되었다면 그 소재지의 시민들로서는 불명예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아~ 신상옥 감독 !’인 것이다. 내 자신의 역불급(力不及)이 원망스럽기도 하다. ‘신필름로’라고 작명한 것으로 안양시·시민들이 면죄부를 받을 수 있을까?

2006-04-14 16:55: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