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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마애종/‘안양 마애종의 종합적 고찰’에 관한 토론문

안양똑딱이 2016. 6. 11. 22:05
[자료]마애종/‘안양 마애종의 종합적 고찰’에 관한 토론문

[2008/11/14 안양민예총]임 영 애 경주대학교 문화재학부 교수


 

‘안양 마애종의 종합적 고찰’에 관한 토론문
임 영 애 경주대학교 문화재학부 교수

안양의 마애종처럼 범종을 실물이 아닌 암벽 면에 새긴 경우는 적어도 한국에서는 그 유례가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특히 이 마애종의 경우 고부조는 아니지만, 범종의 각 문양이라든지, 걸쇠, 가구의 구조까지 섬세하게 새겨져 있어 주목됩니다. 이를 통해 당시 범종의 모양뿐만 아니라 범종을 어떻게 걸어두었는지, 또 어떻게 생긴 당목으로 범종을 쳤는지까지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임에 틀림없습니다.

도대체 ‘이 마애종은 언제, 왜 새긴 것일까’에 관해 의문을 가져왔는데, 오랫동안 범종연구에 매진해 오신 최응천 교수님께서 10세기 중반~후반이라는 보다 구체적인 제작시기와 그 의미를 명쾌히 밝혀주셔서 그동안 궁금했던 점이 모두 해소되었습니다.
다만 이왕 토론의 장이 마련된 만큼 몇 가지 궁금한 점을 여쭙도록 하겠습니다. 금속공예 전공자가 아닌 제가 혹 선생님의 논지를 잘못 이해하고 드린 질문이 있더라도 양해 부탁드리겠습니다.
첫째, 마애종의 형태가 10세기 중~후반의 범종형식을 따르고 있어 시기적으로 볼 때 10세기 전반에 창건된 안양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셨습니다. 하지만 마애종은 지리적으로 안양사지보다는 중초사지와 더 가깝습니다. 또 중초사지는 통일신라시대 후기에 창건되었지만, 각종 기와나 치미 등 출토유물의 대다수가 고려시대 전기와 중기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특히 중초사지의 당간지주는 최응천 교수님께서도 말씀해주셨듯이 황룡사 승려가 관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직 본격적인 발굴이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유유산업에 보관되어 있는 수습유물 만을 놓고 보아도 당시 중초사의 사세가 만만치 않았던 것으로 짐작됩니다.
흥미로운 점은 수습유물 중 마애종의 용뉴와 같은 양식으로 보이는 금동용두가 있다는 것입니다. 크기는 7센티미터밖에 되지 않는 작은 유물이지만, 가늘고 긴 목이나, 머리 뒤로 솟은 뿔 등이 유사한 모양이어서 비슷한 시기의 작품으로 함께 두고 보아도 좋을 듯합니다. 이와 같은 정황으로 미루어 보면, 이 마애종이 중초사의 권역에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에 대한 최응천 교수님의 견해를 듣고 싶습니다.
둘째, 타종하는 승려의 키로 환산하여 실물로 존재하였다면 2미터에 달하는 대형종이었을 가능성을 말씀해주셨습니다. 과문한 탓이겠지만, 토론자가 알고 있기로는 고려시대 범종 중 2미터가 넘는 범종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물론 2미터가 넘는 고려시대 실물종이 현존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 존재 자체를 부인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현존예가 없고, 통상적인 미술표현에 있어서 비중이 큰 대상의 크기를 강조하는 통례를 고려하면 이 마애종이 실제 2미터 크기의 범종을 형상화한 것으로 볼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2008-11-14 15:3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