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마애종/안양의 역사성과 마애종의 문화적 가치
[205/11/14 안양민예총]엄 기 표 경기도 문화재 전문위원
[205/11/14 안양민예총]엄 기 표 경기도 문화재 전문위원
안양의 역사성과 마애종의 문화적 가치
편집자 주_ 2005년 「제2회 安養世界 마애종 문화포럼」의 발제문입니다.
엄 기 표 경기도 문화재 전문위원
단국대 매장문화재연구소
Ⅰ. 머리말
Ⅱ. 안양의 역사와 불가의 안양세계
Ⅲ. 마애종의 양식과 조성 시기
Ⅳ. 마애종이 갖는 과거와 현재의 의미
Ⅴ. 맺음말
국문요약
안양 석수동 마애종은 통일신라시대와 고려시대 안양 지역에서 불교문화의 중심지였던 중초사지(中初寺址)와 安養寺가 위치한 지점에서 가까운 곳에 자리 잡고 있어 지역적으로 중요한 역사적 의의가 있으며,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한 조각품이다. 마애종은 아직까지 소속 사찰을 밝힐만한 자료가 발견되지 않았으나 지리적인 조건 등으로 보아 중초사 또는 안양사였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추정된다. 어쨌든 이 마애종은 불교문화사적으로도 독특하고, 미술사적으로도 보기 드물며, 그 속에 담겨진 의미 등이 주목되는 문화유산이다. 특히 安養이라는 지명과 잘 어울리는 역사성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석수동 마애종은 범종의 양식이 전형적인 신라 범종의 양식을 보이고 있지만 세부적으로 문양이나 구성 수법 등이 간략화와 형식화의 경향을 보인다. 또한 기둥이나 문양의 조각 수법이 정교함이나 세련된 화려함보다는 단순화시켜 표현되었다. 타종구를 들고 있는 승려상은 경직된 인상을 주고 있으며, 승려상과 범종이 다소 어색한 비례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점으로 보아 고려 초기에 조각된 것으로 추정하였다.
주요단어 : 안양(安養) 마애종(磨崖鐘) 중초사지(中初寺址) 안양사(安養寺) 동종(銅鐘) 극락(極樂)
Ⅰ. 머리말
안양에는 늦어도 청동기시대부터 사람들이 거주하기 시작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후 삼국시대에는 백제 영역으로 편입되었다가 고구려의 영향 하에 있었던 지역이었다. 그러다가 안양 지역은 통일신라 말기에 들어와 중앙과 일정한 관계를 유지하였던 것으로 파악된다. 고려시대에도 수도가 개경으로 옮겨졌지만 중앙정부의 지원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당시 폭넓게 성행한 불교를 통하여 간접적으로 알 수 있다. 불교문화가 융성하였던 통일신라시대에 건립된 중초사지 당간지주(中初寺址 幢竿支柱)와 삼층석탑(三層石塔), 고려시대에 조성된 安養寺의 석조부도(石造浮屠)와 귀부(龜趺) 등이 당시 안양 지역이 중앙과 일정한 관계 하에 있었음을 알려준다. 이들 사찰들은 가까운 거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사찰이 입지하고 있는 지형적인 조건, 안양 지역에서 대표적인 문화유산인 점 등을 고려할 때 당시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 사찰들을 중심한 지역이 당시 안양의 정치, 행정, 문화 등에서 중심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安養 石水洞 마애종(磨崖鐘) 안양 석수동 마애종은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석수동 산 32번지에 소재하고 있으며, 경기도 유형문화재 92호로 지정 보존되고 있다.
은 통일신라시대와 고려시대 안양 지역에서 불교문화의 중심지였던 中初寺址와 安養寺가 위치한 지점에서 가까운 곳에 자리 잡고 있어 지역적으로 중요한 역사적 의의가 있으며,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한 조각품이다. 磨崖鐘은 아직까지 소속 사찰을 밝힐만한 자료가 발견되지 않았으나 지리적인 조건 등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중초사 또는 안양사였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추정된다. 어쨌든 이 마애종은 불교문화사적으로도 독특하고, 미술사적으로도 보기 드물며, 그 속에 담겨진 의미 등이 주목되는 문화유산이다. 특히 安養이라는 지명과 잘 어울리는 歷史性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마애종의 造成 時期와 歷史性을 고찰하기 위하여 안양의 역사를 간략하게 고찰하면서 佛家에서 안양의 의미는 무엇이고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또한 마애종이 佛敎美術의 한 유형에 속한다는 점을 감안하여 美術史的인 고찰을 통하여 조성 시기와 그 의의를 추정해보고자 한다. 그리고 마애종이 안양 지역에서 어떤 의미가 있으며, 그 역사적 의의는 무엇인지 나름대로 접근해보고자 한다.
Ⅱ. 안양의 역사와 불가의 安養世界
안양에는 적어도 청동기시대부터 사람들이 거주하였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안양 평촌동 자유공원 내에 옮겨진 고인돌들이 간접적으로나마 방증해주고 있다. 명지대학교 박물관, 『안양 평촌의 역사와 문화유적 발굴조사보고서』, 1990.
또한 비교적 가까운 곳에 위치한 광명시 가학동 고인돌과 안산시의 월피동 등에 산재한 고인돌 군이 오래전부터 인간이 거주하였음을 알려 주고 있다. 그리고 서울 암사동과 미사리 선사유적지도 방증해주는 자료들이다.
고대시대에 안양 지역은 한반도에서의 패권을 누가 석권하느냐에 따라 고구려, 백제, 신라가 교대로 점령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시대 안양 지역은 처음에는 백제의 영역이었으나 고구려 장수왕이 한성을 함락하면서 고구려의 영향이 미미하게 미치는 변경지역으로 변화되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안양 지역은 백제나 고구려의 변경 지역이었다가 신라가 553년 한강유역을 빼앗고 新州를 설치하면서 중요한 지역으로 자리 잡았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안양 지역이 한강과 인천에서 비교적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서해안의 화성에 소재한 당항성(黨項城)과도 그리 멀지 않은 지역이었던 것으로 보아 그 중요성이 서서히 부각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안양은 통일신라 말기와 고려시대에 들어와 중앙정부와도 일정한 관계를 유지하는 지역으로 부상하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사실은 당시 폭넓게 신앙되었던 불교와 그에 따른 사찰의 건립이 간접적으로 전해주고 있다. 특히 826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827년 완공되었다는 명문에 의하면 이곳이 中初寺임과 동시에 幢竿支柱가 826년(흥덕왕 1) 8월 6일 採石하여 827년 2월 30일에 완공되었음을 알 수 있다(엄기표, 『한국의 당간과 당간지주』, 학연문화사, 2004, pp. 320~323).
정확한 건립 연대가 銘文으로 남아있는 中初寺址 幢竿支柱는 朴慶植,「安養 中初寺址에 대한 考察」,『實學思想硏究』 14집, 모악실학회, 2000.
안양시청, 『中初寺址 幢竿支柱 修理 報告書』, 2000.
당시 안양 지역과 경주의 중앙 정부와 일정한 관계를 보여준다.
먼저 당시 당간지주가 건립될 정도의 대규모 사원이 창건되어 있었으며, 지방에 소재하였지만 중앙에 있는 敎宗寺刹들과 밀착된 사찰이었음을 알려준다. 즉, 명문에 의하면 당간지주 건립에 황룡사 항창화상(皇龍寺 恒昌和尙)을 비롯하여 10명의 승려가 후원 寶曆二年歲次丙午八月朔六辛丑日中初寺東方僧岳 (보력이년세차병오팔월삭육신축일중초사동방승악)
石分二得同月卄八日二徒作初奄九月一日此處至丁未年 (석분이득동월입팔일이도작초엄구월일일차처지정미년)
二月卅日了成之 節州統皇龍寺恒昌和尙上坐 (이월삽일요성지 절주통황룡사항창화상상좌)
眞行法師貞坐義說法師上坐年嵩法師史師二 (진행법사정좌의설법사상좌년숭법사사사이)
妙凡法師則永法師典都唯乃二昌樂法師法智法師 (묘범법사칙영법사전도유내이창락법사법지법사)
徒上二智生法師眞方法師作上秀南法師 (도상이지생법사진방법사작상수남법사)
하였다고 한다. 당시 황룡사는 경주에 있었던 사찰로 불교계의 중심 사찰이었는데 중초사와 일정한 관계가 있었음을 알려준다. 이와 같이 중초사가 9세기 초반 경에는 널리 알려진 사찰이었으며, 중앙에 있는 사찰과도 교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엄기표, 「통일신라시대의 당간과 당간지주 연구」, 文化史學 6․7호, 한국문화사학회, 1997.
한편 안양의 역사와 오늘날까지 사용되는 지명과 관련하여 가장 주목되는 시기는 고려시대이다. 특히 고려 초기에 창건된 安養寺가 안양의 지명과 역사를 가장 잘 대변해주는 곳이라 할 수 있다. 안양사는 고려 태조 王建에 의하여 창건된 것으로 전하고 있으며, 창건 이후 고려 말기까지 이 지역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던 사찰이었다. 고려시대 安養寺에는 칠층전탑(七層塼塔) 외에 다수의 전각(殿閣)이 건립되었다. 현재 전탑은 남아있지 않지만 전탑이 있었던 흔적과 일부 부재가 수습되기도 하였다. 박경식, 「安養 安養寺의 칠층전탑과 귀부」, 文化史學 제 11․12․13 호, 한국문화사학회, 1999.
그리고 안양사에는 고려시대 건립된 귀부(龜趺)와 석조부도(石造浮屠)가 남아있다. 당시 석조부도와 귀부는 王師나 國師를 역임하였거나 그러한 지위에 상응하는 예우를 받았던 고승들에 한하여 건립되었다. 엄기표, 『신라와 고려시대 석조부도』, 학연문화사, 2003.
이러한 사실에 비추어볼 때 안양사에 귀부와 석조부도가 건립되었다는 것은 안양사가 왕실이나 중앙정부와 밀접한 관계에 있었음을 시사한다. 이러한 것으로 보아 현재 사용되고 있는 安養이라는 지명이 고려 초기에 창건된 안양사에서 유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즉, 安養이라는 지명은 불교적인 성격이 짙으며, 이 지역민들의 불교적인 성향이나 색채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安養은 불교적인 세계관과 내세관이 반영된 지명이라 할 수 있다. 나아가 안양이라는 지명은 현재 中初寺, 安養寺, 三幕寺 등이 분포되어 있는 지역에서 유래되었으며 이 지역이 적어도 고려시대까지만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시대까지 정치, 행정, 문화의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던 사찰들이 이 지역에 밀집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지역이 적어도 삼국시대에서 고려시대까지 중심적인 곳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안양은 불교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이와 관련하여 소위 정토삼부경(淨土三部經)으로 불리는 『아미타경(阿彌陀經)』, 『무량수경(無量壽經)』, 『관무량수불경(觀無量壽佛經)』 등이 주목된다. 이 경전에서 안양과 관련하여 극락세계(極樂世界)의 모습과 극락에 이르는 길을 설하고 있는 내용이 주목된다. 극락은 현실 속에 존재하는 세계이며, 죽은 후에 가는 세계로 화려하고 고뇌가 없으며 쉽게 해탈에 이를 수 있는 세계라고 한다. 인간이 죽은 이후에 갈 수 있는 세상이고, 사바세계와 완전히 분리된 세계가 아니라 연결되어 있는 세계로 아미타 부처가 주재하고 있는 세계이다. ‘사바’는 참고 견딘다는 뜻으로 인간을 비롯한 모든 중생들이 괴롭고 고통스러워도 참고 견디면서 살아가는 세계가 사바세계이다. 그러나 극락은 고통이 없이 짧은 기간 동안의 수행 정진을 통하여 윤회를 초월하고 해탈할 수 있는 곳이다.
이와 같이 佛家에서는 서쪽으로 십만 억 불국토를 지나가면 한 세계가 나타나는데, 바로 그곳이 극락세계라고 하였다. 그래서 불경에는 현재나 미래나 모든 중생들이 청정한 善業을 닦게 되면 서쪽 방향에 있는 극락에 반드시 태어난다고 한다. 극락은 황금 기둥으로 집들이 지어져 있고, 수백 가지의 보석들이 줄줄이 박혀 있으며, 보석마다 일천 가지나 되는 광채가 나고, 광채마다 팔만사천의 빛깔이 있는 세계이다. 또한 항상 음악이 울려 퍼지며, 강당과 정자들이 칠보로 장엄되어 있고,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연못들이 아름답고 균형 있게 자리 잡고 있으며, 나무에서는 항상 향기가 나고, 온갖 기묘한 꽃과 향이 있으며, 의복과 음식이 수백 가지라고 한다. 공파스님 번역, 佛說阿彌陀經, 불광출판부, 1998, pp. 270~273.
이외에도 극락은 불가에서 가장 이상적인 상상의 세계로 묘사되고 있다.
인간이 현실 속에서 도달하기 힘든 세계이며, 희망과 기원을 가지고 갈구하는 세계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극락은 오래전부터 서쪽에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방위 관념이 불교에 습합된 것은 고대 인도에서 유래하였다. 인도에서 서쪽은 그리스 로마 문명이 있는 곳으로, 선진문물이 서쪽으로부터 전래되었기 때문에 인도인들은 오래전부터 西方을 이상적인 세계로 인식하였다. 이러한 관념이 불교에 반영되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래서 사찰에서는 서방을 신성시하며, 서쪽에 죽은 사람의 유골이나 사리를 매장 또는 봉안하는 장소로 많이 활용되고 있다. 이처럼 極樂은 불가에서 가장 평화스럽고 행복하고 안온한 세상이며, 근심 걱정이 없는 세계이다. 그리고 죽은 자의 영혼이 더 좋은 세계로 태어날 수 있다고 믿었던 방향이다.
安養은 바로 이러한 극락세계의 이칭이다. 글자 그대로의 안양의 의미는 마음을 편이하고 몸을 수양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佛經에 의하면 ‘모든 부처가 보살에게 말하여 安養佛을 찾아보게 하였다.’고 『無量壽經』下, 流通分(大正新修大藏經 卷 12, p. 360a).
한다. 즉, 아미타불(阿彌陀佛)은 安養佛이라 부르기도 하였으며, 부처들 중에서도 으뜸에 속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안양즉적광(安養卽寂光)’이라 하여 西方에 있는 극락은 4種의 국토가 있는데, 이중에서 安養 國土가 최하위이지만 원융무애(圓融無碍)한 도리로 말하면 최상의 극락이 安養이고 그곳이 적광토(寂光土)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래서 ‘安養知足’은 극락정토나 도솔천을 의미한다. 이와 같이 安養은 極樂의 별칭으로 극락세계는 安養界, 安養樂, 安養世界, 安養淨土, 安養淨業 등과 상통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安養은 『관무량수불경(觀無量壽佛經)』에 나와 있는 것처럼 ‘미타정토 안락장엄(彌陀淨土 安樂莊嚴)’의 세계임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안양은 불교적인 색채가 강한 지명으로 불교적인 세계관이 반영되었으며, 그러한 지명을 사용한 것은 安養이 곧 極樂이라는 관념에서 유래하였음을 알 수 있다.
Ⅲ. 마애종의 양식과 조성 시기
안양시 석수동에 소재하고 있는 磨崖鐘은 대형의 암벽을 비교적 고르게 다듬은 다음 낮게 陰刻과 陽刻을 활용하여 조각하였다.(암벽 535×505cm) 그리고 안양시 전체를 바라보도록<사진-1>. 上院寺銅鐘(725년)
<사진-2>. 聖德大王神鐘(771년)
하였다.
이와 같이 바위 면에 범종을 조각한 것은 유일한 것으로 범종 연구뿐만 아니라 장인의 창의성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단국대학교 매장문화재연구소, 『안양시의 역사와 문화유적』, 2001, p. 174.
먼저 범종의 기원과 유래에 대하여 간략하게 살펴보도록 하겠다.
범종(梵鐘)은 중국 고대의 동기(銅器)로 악기 종류였던 용종(甬鍾)으로부터 기원하였다고 한다. 이것은 周나라 때 제작되어 성행했던 樂器로 전국시대 이후 소멸되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영호, 「한국동종의 특性과 양식변천」, 金屬工藝, 韓國의 美 23, 중앙일보사, 1985, p. 169.
정명호, 「타명구의 종뉴과 조형뉴의 기원에 관한 고찰」, 梵鐘 18․19 합본, 한국범종연구회, 1998.
이러한 종이 일찍이 불교에 채용되어 악기가 아닌 의식용 또는 신호용 도구로 사용되면서, 불교 공예의 중요한 한분야로 자리 잡게 된다. 그래서 점차 동종은 부처님의 설법을 상징하고 소리로서 중생들을 구제하는 신앙 활동의 중심적인 도구가 되어 가람에서 종을 걸어두는 별도의 건물이 만들어지기 시작하였다. 이와 같이 梵鐘은 佛家에서 불교 의식 시에 사용되었으며, 대중들을 모으거나 공양과 예불 시간을 알리는 중요한 佛具였다. 또한 종소리는 번뇌를 씻어주고 마음을 안정시켜 주며, 지옥에 떨어진 衆生을 구제해 준다고 믿었다.
우리나라 범종의 형태는 甬鍾과 유사하며 삼국시대 목조건축이나 석탑의 처마부에 장식하였던 풍탁(風鐸)과도 형식면에서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한편 梵鐘은 鐘身을 주요 구성 부분으로 하여 鐘口와 당좌(撞座) 등이 있는 기본적인 양식은 같지만 시대별․지역별로 부분적인 변천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신라의 범종은 동양의 어떤 나라의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소리를 내며, 독특한 양식과 구조를 구비하고 있다. 즉, 신라의 전형적인 범종이라 할 수 있는 상원사동종(上院寺銅鐘/ 725년 주성),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鐘/ 771년 주성), 선림원지 출토 동종(禪林院址 出土 銅鐘/ 804년 주성) 등은 중국이나 일본의 범종과는 다른 독특한 특성을 지니고 있다. 이외에도 통일신라시대 조성된 범종들이 있는데, 일본에 가있는 것으로 雲樹寺鐘, 常宮神社鐘, 宇佐神宮鐘, 光明寺鐘 등이 있으며, 청주 운천동에서 출토된 신라 동종 등이 있다.
<사진-3>상원사 동종 용뉴와 용통
<사진-4>. 성덕대왕신종 용뉴와 용통
범종의 상단부 천판 위에는 용뉴(龍鈕)와 음통(音筒)이 부착되어 있다. 용뉴는 범종각에 종을 거는 부분을 용의 모양으로 하여 마치 용이 두발로 땅을 딛고 머리를 숙여 종을 한입에 물어서 힘차게 들어 올리는 듯하게 형상화한 부분이다. 그래서 용뉴부는 용의 모습을 형상
화함으로써 수호적인 의미와 함께 범종이 갖는 상징성을 가장 잘 드러내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黃壽永, 「新羅鐘의 鐘鈕」, 梵鐘 9, 한국범종연구회, 1986.
音筒은 범종의 소리에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치는 부분으로 天板을 뚫어 내부로 연결되어 있다. 음통은 종을 쳐서 내부에서 울리는 소리가 은은하게 오랫동안 잔음(殘音)을 간직하고, 멀리 퍼져나가도록 하기 위한 구조이다. 이러한 것은 소위 맥놀이 현상으로 종소리에 생명력을 불어넣고 심오함을 더해주고 있다. 이장무․김석현, 「한국종의 진동특성에 관한 연구」, 梵鐘 18․19 합본, 한국범종연구회, 1998.
鐘身은 상대-중대-하대로 나눌 수 있다. 상대(上帶)는 종신의 가장 윗부분을 띠모양으로 두르고 당초문이나 반원으로 장식된 부분이다. 종신에는 마치 젖꼭지의 모양과 같다고 하여 이름 지은 乳頭와 이를 둘러싼 유곽(乳廓), 연꽃모양으로<사진-5>禪林院址 出土 銅鐘(804년)
打鐘되어지는 부분에는 당좌(撞座)가 대칭으로 배치되어 있다. 유곽은 보통 4개이며 하나의 유곽 안에는 9개의 유두가 솟아있는데, 이것은 한국 범종만이 가지는 특징적인 부분이다. 그리고 기타 공간에는 비천상(飛天像)이나 菩薩像을 莊嚴하거나 銘文을 새겨 넣기도 한다.
上院寺銅鐘은 천판에 명문이 새겨져 있지만 聖德大王神鐘을 비롯하여 대부분의 동종이 종신에 명문이 새겨져 있다. 下帶는 종의 입구 부분을 띠모양으로 둘러 당초문이나 보상화문으로 화려하게 장식한 부위로 鐘口가 있는 부분이라고 하여 口緣帶라고도 한다. 그리고 하단부에 종을 치면 소리가 울려 퍼져 나오는 부분을 鐘口라고 한다. 종의 아래에는 종소리가 진동하여 은은하게 널리 퍼져 나가 중생을 구제하도록 반원형으로 둥그렇게 만든다. 이러한 양식적 특징은 우리나라 범종의 주요한 특징이기도 하며, 신라시대 범종이 중국이나 일본 범종과 대별되는 특징이기도 하다.
<사진-6>안양 석수동 마애종 원경
그런데 고려시대에는 통일신라시대의 범종 양식을 계승하지만 상대에 立狀花紋 장식이 새로이 첨가되고, 용의 입안에 있던 여의주가 발 위나 음통 위에 장식되며 종신에 奏樂飛天像 대신 菩薩像 및 三尊像 등이 배치되는 변화를 가져온다. 특히 고려 말기에는 중국 원나라의 영향으로 중국종의 양식을 모방한 작품이 제작되어 조선초기까지 지속된다. 조선초기의 범종은 음통이 없어지고, 한 마리만 배치되던 용뉴가 雙龍으로 변하며, 立狀花紋帶는 소멸되고, 유곽은 上帶에서 떨어져 보다 밑으로 내려오며, 당좌는 없어지거나 장식문양으로 전락해 버린다.
종신의 주요 구성 부분이 갖는 장식성이나 기능성이 서서히 간략화되는 경향을 보인다. 또한 종신에는 합장한 형태의 보살입상이 장식되거나 용문․범자문․파도문 등이 표현되며, 기타 공간에는 명문을 새긴 점 등이 특징이다. 鄭永鎬, 「韓國銅鐘의 特性과 樣式變遷」, 金屬工藝, 韓國의 美 23, 중앙일보사, 1985.
廉永夏, 韓國의 鐘, 서울대출판부, 1991.
곽동해, 「韓․中․日 三國銅鍾의 조형양식 비교 연구」, 梵鍾 18․19 합본, 한국범종연구회, 1998.
崔元禎, 「韓國 梵鍾 樣式 小攷」, 文化史學 17號, 韓國文化史學會, 2002.
<사진-7>안양 석수동 마애종 근경
안양 석수동 마애종은 먼저 외곽에 일정한 너비로 돋을대를 사각형으로 구획하여, 鐘閣을 飜案하고 있다. 좌우에는 높은 기둥을 세웠으며, 상부에는 기둥을 가로 질러 보(樑)를 걸쳤다. 보 좌우측 상부에는 독특한 구름문을 장식하였는데, 목조건축물의 보아지처럼 초각된 형태를 취하고 있다. 또는 목조건물의 용마루 양 끝에 장엄되는 치미를 형상화한 듯한 모습이다. 그리고 가운데에도 구름문이 寶珠形을 이루며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모양으로 조각하였다. 이러한 문양들은 鐘閣에서 유일하게 보이는 장식들로 종각의 신성성이나 신비감을 더해 주기 위하여 장식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보의 한가운데에는 아래로 철띠를 촘촘하게 엮은 쇠사슬을 내려 범종의 용뉴에 걸었다. 그런데 범종의 규모에 비하여 기둥이나 보의 규모가 작아 전체적으로 불안정한 인상을 주고 있다. 또한 기둥과 보의 연결 부위를 밋밋하게 처리하여 생략된 기법을 보이고 있으며, 초각된 문양이나 구름문양도 단순하게 처리하여 사실성이 다소 떨어진다.
보와 쇠사슬로 연결된 마애 범종은 상단부에 龍鈕와 音筒을 구비하고 있다. 이러한 용뉴와 음통은 통일신라시대와 고려시대 제작된 전형적인 범종에서 많이 나타나는 우리나라 범종만의 주요한 특성이다. 음통은 오른쪽에 대나무의 한마디처럼 곧게 세워져 있다.
용뉴는 용신은 가늘고 비늘무늬는 표현되지 않았지만 龍頭는 역동적이고 사실적인 형상을 하고 있다. 용두는 입을 크게 벌려 범종의 天板에 연결되고 있으며, 코와 눈 등 통일신라 말기에 성행한 龜趺의 龜頭처럼 볼륨감이 강하고 생동감있는 인상을 주고 있다. 龍身은 반원형으로 굽히고 있으며, 굽힌 안쪽으로 쇠사슬이 연결되고 있다. 용뉴의 규모는 종신의 규모에 비하여 다소 작게 표현되었다. 그리고 龍身에서 뻗어 나오는 다리를 표현하지 않은 점은 磨崖라는 평면적인 조각의 한계도 있었겠지만 사실성이나 긴장감이 다소 이완된 시기에 조각되었음을 간접적으로 시사한다.
鐘身은 크게 2부분으로 나누어 있다. 종신의 상부는 上帶와 乳廓이 있고, 그 아래로 撞座와 下帶가 있다. 유곽은 사각형으로 외부에 넓게 돋을대를 돌려 마련하였다. 상대나 유곽에 문양은 장식되지 않았다. 이러한 것은 재질의 특성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유곽 안에는 비교적 높게 돌출된 9개의 乳頭를 마련하였다. 유두에 특별한 문양이 표현되지는 않았지만 신라 典型期에 조성된 범종처럼 9개의 유두를 정확하게 배치한 점은 주목된다. 이와 같이 유곽을 마련하고 그 안에 9개의 유두를 배치하였다는 것은 한국의 범종을 표본으로 하여 조각되었으며, 이를 조각한 장인이 범종의 세부 특성을 잘 알고 있었던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종신 하부에는 3곳에 撞座를 배치하였다. 당좌는 가운데에 원형으로 타종 부위를 만들고, 그 주위에 12엽의 연화문을 돌렸다. 좌우측 모서리에는 당좌가 반만 표현되었다. 한가운데 1개를 배치하고 좌우측에 반만 표현된 당좌를 배치한 것은 장인이 사실적인 조각 기법에 의하여 마애종을 표현하였음을 알 수 있게 한다.
즉, 장인은 사람의 눈에 보이는 그대로의 범종 형상을 조각하였다. 당좌는 타종하는 부분으로 다양한 문양이 장식되기도 하는데, 朴銀卿, 「統一新羅․高麗 銅鐘의 撞座와 上․下帶 文樣에 관한 硏究」, 考古歷史學志 제3집, 동아대학교 박물관, 1987.
마애종은 불교를 상징하는 연화문을 장식하였다. 그리고 下帶는 일정한 너비로 띠가 형성되도록 하였다. 하대에 문양은 표현되지 않았지만 唐草紋이나 草花紋이 화려하게 장식된 듯한 인상을 연상케 한다. 그런데 상대와 하대의 표면에 문양을 생략한 점은 사실주의에 입각하여 세련되고 정교한 미를 추구하였던 통일신라시대보다는 간략화 경향이 진행된 고려시대에 조각되었음을 시사한다.
또한 상대와 하대를 일정한 너비로 표현하였지만 밋밋하게 처리한 점이나 당좌의 위치를 사실적으로 표현하였지만 일정한 간격으로 적당하게 위치를 선정하여 표현하고 있어 형식화의 경향이 엿보인다.
<사진-8>마애종의 동종
<사진-9>마애종의 僧侶像
그리고 磨崖鐘에서 특히 주목되는 부분은 범종 좌측으로 기둥 앞쪽에 서있는 승려의 모습이다.(僧侶像 높이 102cm, 머리 높이 19cm, 머리 너비 20cm) 승려는 길다란 法衣를 걸치고, 두 손으로 종을 치기 위한 형상을 하고 있다. 두 손으로 나무로 만들어진 打鐘具를 들고 있다. 왼손은 손가락이 표현되었고, 오른손은 손등이 보이고 있어 타종구를 교차되게 잡고 있는데 다소 어색한 자세이다. 얼굴에 눈, 코, 입 등이 분명하게 표현되기는 하였으나 세련되거나 섬세하지는 못하다.
僧侶像은 상체와 하체 등 전체적인 신체의 비례는 잘 어울리고 있는데, 얼굴이 다소 큰 인상을 주고 있어 불균형적인 조각 기법을 보인다. 특히 頭部는 머리를 깎은 승려를 표현하였는데, 평면적이고 사실적이지 못한 인상을 주고 있다. 또한 타종구와 종신의 당좌 위치가 어울리지 않아 형식적으로 표현된 경향을 보이고 있다. 스님이 종을 치기 위해서는 타종구를 상당히 들어 올려 타종하여야 하는데, 당좌의 위치가 다소 높게 표현되어 사실성이 떨어진다. 그리고 스님이 걸친 법의도 옷주름을 주름지게 대충대충 처리하여 간략화의 경향이 보인다. 또한 두 발은 발등을 측면으로 90도 정도 완전히 틀어 두발이 나란히 배치되도록 기형적인 표현 기법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표현은 의학적으로 불가능한 표현이다. 따라서 스님상은 사실적인 표현 수법이 이완되고, 간략화의 경향이 진전된 시기에 조각되었음을 알려<도면-1>. 안양 석수동 마애종 도면
준다.
어쨌든 석수동 마애종에서 범종은 전체적인 모습이 종의 형태를 그대로 묘사하고 있다. 종의 외곽이 부드럽게 곡선을 이루면서 아래로 내려가도록 하였으며, 종의 상하부에 상대와 하대를 표현하고 유곽을 비롯하여 유두를 사실적으로 표현하였다. 또한 종의 상단부에 역동적인 용뉴를 조각하고, 음통을 세워 典型期에 성행한 동종을 모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석수동 마애종은 범종의 양식이 통일신라시대 조성된 상원사동종이나 성덕대왕신종과 강한 친연성을 보이고 있다. 그런데 鐘身에 飛天像을 조각하지 않았으며, 龍鈕의 龍身이 天板과 직접 연결되어 있고, 음통이나 종신의 상대와 하대에 문양이 표현되지 않았으며, 유곽이 단순한 형태로 조각된 점 등은 전형기 이후에 만들어진 동종의 형태가 모방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종신의 전체적인 형태에서 상대에서 하대로 이어지는 외곽선이 유려하지 못하고 밋밋하게 처리된 점도 고려 범종의 경향을 보인다. 또한 하대를 평면적으로 단순하게 표현하였으며, 鐘口를 간략하게 수평선으로 처리한 점 등도 전형적인 신라 범종과는 차이를 보이고 있다. 한편 범종 옆에 승려가 조각되어 있어 종을 타종하는 생생한 장면을 사실적으로 표현한 점은 돋보인다. 그런데 마애종의 조성 시기와 관련하여 승려상의 표현 기법은 간략화의 경향을 보이고 있으며, 다소 경직된 인상을 주고 있다. 또한 범종의 규모나 위치를 고려할 때 스님상의 규모나 타종구의 위치가 다소 어색하며, 스님상 자체의 표현 기법도 단순하게 조각하였다. 이러한 것으로 보아 석수동 마애종은 고려 초기에 조각된 것으로 추정된다.
Ⅳ. 마애종이 갖는 과거와 현재의 의미
현재 안양 일대에는 고대 안양의 역사와 문화를 알 수 있고, 안양의 정체성을 확립시켜 줄 수 있는 문화유산이 상당수 전해오고 있다. 특히 안양시에 소재하고 있는 중초사지 당간지주와 석탑, 안양사의 석조부도와 귀부 등을 비롯하여 석수동 마애종이 대표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문화재들은 유형의 소산으로 안양에 살았던 사람들의 신앙 대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또한 이들은 불교 문화재들이다. 불교적인 미술품들은 한시대의 문화가 담겨 있으며, 장인들의 숨결이 배어있는 조형물이다. 불교미술품들은 불교가 전래된 삼국시대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하였으며 나무, 돌, 금, 동 등 다양한 재료들이 사용되었다. 그 규모도 초대형에서 초소형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즉, 그것이 갖고 있는 重要性이나 신앙의 對象性에 따라 또는 用度에 따라 다양한 재료가 활용되었으며, 그 규모가 결정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현재 안양에 있는 불교적인 문화유산들은 안양이라는 지역의 역사성을 부여하고 지역 공동체를 형성케 하는 구심점이 되어 왔고, 앞으로도 될 것이다. 다시 말해 이 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문화적 구심점 역할과 동시에 공동체라는 의식을 형성시키는 상징적 의미가 내재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비록 그것들이 고대에 만들어졌지만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로 하여금 안양의 歷史性을 조명해 보게 하는 문화유산들이다. 안양시민들에게 안양이 짧지 않은 역사 속에 형성된 도시임을 자각하게 하는 소중한 유산이다. 나아가 왜 이곳에 만들어졌는가에 대하여 되새겨보게 함으로써 내가 살고 있는 지역과 一體感을 갖도록 하여 地域性을 형성시켜 주는 연결 고리가 될 수 있다.
안양에도 원래는 많은 문화유산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한 문화유산들은 안양의 역사나 안양에 살았던 사람들의 삶과 애환을 담고 있는 흔적물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것들은 한번 파괴되면 영원히 회복할 수 없이 사라지고 만다. 아직도 도시개발로 인하여 급속하게 지형과 도시 환경이 변화되면서 원형을 잃는 경우가 많다. 또한 보존과 개발이라는 논리 속에서 개발과 경제가 우선시되면서 문화유산들이 파괴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특히 현대사회는 도시화와 교통의 발달로 인구의 이동이 많고, 자기가 살고 있는 지역 사회에 대한 일체감이나 공동체 의식이 결여되어 가는 상황이다. 그런데 오랫동안 일정 지역에 위치한 문화유산들은 한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歷史意識을 함양하여 애향심을 갖게 하고, 共同體라는 同質性을 유지시켜 주는 중요한 매개체이다. 나아가 지역민들 간에 일체감이나 공동체 의식을 함양시킬 수 있는 구심점 역할을 할 수 있는 중요한 有形의 文化的 所産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안양에는 여러 가지 문화유산들이 전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중요한 문화재들이 석수동 마애종이 있는 일대인 中初寺, 安養寺, 三幕寺 등에 집중 분포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석수동 마애종과 관련하여 주목되는 문화재가 幢竿支柱이다. 중초사지는 安養寺로 들어가는 도로를 따라 가다가 왼편 개울 건너에 삼층석탑과 함께 세워져 있다. 현재 사지 일대에 건물이 들어서 있어 정확한 사역의 규모는 알 수 없지만 개울을 건너 경내로 진입하게 되어 있었으며, 당간지주가 그 입구에 배치되었음을 알 수 있다(안양시청, 『中初寺址 幢竿支柱 修理 報告書』, 2000). 당간지주 북편으로 초석을 비롯한 석재들이 일부 노출되어 있으며, 경작지에는 많은 기와 조각들이 흩어져 있다. 그리고 동쪽지주 내면 윗부분에는 끌구멍이 3군데 남아 있는데, 이것은 해방 이후 인근의 석공들이 반출하려고 했던 흔적이라고 구전되고 있다(경기도 편, 京畿文化財大觀 -國家指定篇-, 1989, p. 62).
당간지주는 幢竿을 세워 幢을 걸기 위한 구조물이다. 현재는 두 지주만이 남아있지만 원래는 높은 당간을 세워 그 꼭대기에 당을 걸어 휘날리게 함으로써 사찰의 位相을 드러냈을 것이다. 그런데 중초사지 당간지주는 銘文이 새겨져 있다. 명문에 의하면 당시 건립 책임자로 節州統 皇龍寺 恒昌和尙을 비롯하여 10명의 승려가 후원하였음을 알 수 있다.
당시 불교계의 중심 사찰이었던 황룡사 승려가 후원한 것으로 보아 중초사가 늦어도 9세기 초반경에 널리 알려진 사찰이었으며, 중앙에 있는 사찰과도 교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것으로 보아 안양 지역이 통일신라 말기에는 중요한 사찰이 건립될 만큼 중요한 지역이었으며, 불교가 성행하고 사찰이 건립되면서 佛世界에 대한 인식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불교에 대한 인식과 이해가 安養이라는 지명이 태동되는 배경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들 사찰이 소재한 지역이 당시 중심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곳에 남아있는 문화재들은 고대의 중심지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안양의 歷史性를 보여주는 문화재가 당간지주를 비롯한 마애종이며, 이들 문화재가 분포하고 있는 지역은 역사적인 관점에서 안양의 地域性을 대변해준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건의 발원에 의하여 安養寺가 건립된다. 절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안양사를 이곳에 세운 것은 安養世界, 즉 極樂世界의 구현과 실천이라는 사상과 관련되어 있었을 것이다. 당시 많은 佛徒들은 안양사를 지어 이 지역을 상상속의 극락이 아닌 현실속의 극락을 만들고자 했을 것이다. 그러한 발원의 일환으로 대형의 암반에 마애종을 새겼을지도 모른다. 마애종은 한 승려가 타종구를 들고 있어 마치 종소리가 정지된 것이 아니라 울려 퍼지는 듯한 인상을 주고 있다.
이 마애종을 새긴 장인은 보는 이로 하여금 종소리를 들으며 보도록 의도하였으며, 그러면서 경건한 신앙심을 갖도록 유도하였다. 기발한 착상이다. 동시에 범종은 불가에서 그 소리로서 부처의 진리를 전하여 모든 중생들을 구제해 준다고 한다. 석수동 마애종의 소속 사찰이 중초사든 안양사든 모든 중생들을 구제하여 다같이 극락에 이르고자 하는 발원과 바로 이곳이 현실속의 극락임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자 조각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인지 마애종은 멀리 안양시내를 굽어보고 있다. 이와 같이 마애종을 조각한 것은 불가의 세계처럼 안양 지역을 淸淨케 하고, 모든 중생들을 구제하여 極樂往生을 염원코자 하는 바램에서 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마애종은 안양=극락=살기 좋은 곳이라는 지역성을 부여할 수 있는 상징적인 문화유산이라 할 수 있다.
안양 석수동 磨崖鐘은 우리나라에서 유일무이한 문화재이다. 다시 말해 독특하기도 하지만 하나밖에 없는 창조적인 유산이다. 현대는 창조는 거의 없고 模倣과 飜案이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데 반해 오래전에 안양에 이러한 전무후무한 마애종이 조각되어 있다는 것은 안양의 역사성을 이해하는데 아주 중요한 자료이다. 즉, 안양이 오래전부터 창의적이고 새로운 문화에 대한 창출지로서의 의미가 내재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마애종은 새로운 문화 창출의 원동력 대상으로 접근해야 할 것이다.
Ⅴ. 맺음말
지금까지 안양의 역사와 그 지명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에 대하여 간략하게 개괄하고, 안양 석수동 마애종에 대한 미술사적인 고찰을 통하여 조성 시기를 제시해 보았다. 그리고 안양의 역사 속에서 그것이 차지하고 있는 가치와 앞으로의 활용 방안에 대하여 필자 나름대로의 소견을 개진하였다.
安養이라는 지명은 佛家의 極樂世界에서 유래하였다. 따라서 안양은 불교적인 색채가 강한 지명으로 불교적인 세계관이 반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곳에 새겨진 석수동 마애종은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예이며, 모든 중생들을 소리로서 구제하고자 하는 장인의 기원을 담고 있는 화폭처럼 조각된 점은 돋보이는 구도이다. 나아가 불교를 통하여 중생들을 구제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안양이라는 지명이 불가의 극락세계에서 유래한 것처럼 석수동 마애종을 후원하였거나 조각한 장인들은 종소리로 중생들을 구제하고 극락왕생을 염원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석수동 마애종은 범종의 양식이 전형적인 신라 범종의 양식을 보이고 있어 주목된다. 그런데 범종은 세부적으로 문양이나 구성 수법 등이 간략화의 경향을 보이고 있으며, 형식화의 경향도 보인다. 또한 조각 장인은 마애종과 승려상 등 전체적으로 정교함이나 화려함보다는 단순화시켜 표현하고자 하였다. 승려상은 경직된 인상을 주고 있으며, 승려상과 범종이 다소 어색한 비례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점으로 보아 고려 초기에 조각된 것으로 추정하였다.
안양 석수동 마애종은 오늘날까지 안양의 역사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안양 시민들에게 同質性과 一體感을 형성시킬 수 있는 훌륭한 문화유산이라 할 수 있다. 안양에 歷史性을 부여하고, 안양 지역에 地域性을 부여하고, 나아가 시민들에게 歷史意識과 愛鄕意識을 함양시킬 수 있는 매개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편집자 주_ 2005년 「제2회 安養世界 마애종 문화포럼」의 발제문입니다.
엄 기 표 경기도 문화재 전문위원
단국대 매장문화재연구소
Ⅰ. 머리말
Ⅱ. 안양의 역사와 불가의 안양세계
Ⅲ. 마애종의 양식과 조성 시기
Ⅳ. 마애종이 갖는 과거와 현재의 의미
Ⅴ. 맺음말
국문요약
안양 석수동 마애종은 통일신라시대와 고려시대 안양 지역에서 불교문화의 중심지였던 중초사지(中初寺址)와 安養寺가 위치한 지점에서 가까운 곳에 자리 잡고 있어 지역적으로 중요한 역사적 의의가 있으며,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한 조각품이다. 마애종은 아직까지 소속 사찰을 밝힐만한 자료가 발견되지 않았으나 지리적인 조건 등으로 보아 중초사 또는 안양사였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추정된다. 어쨌든 이 마애종은 불교문화사적으로도 독특하고, 미술사적으로도 보기 드물며, 그 속에 담겨진 의미 등이 주목되는 문화유산이다. 특히 安養이라는 지명과 잘 어울리는 역사성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석수동 마애종은 범종의 양식이 전형적인 신라 범종의 양식을 보이고 있지만 세부적으로 문양이나 구성 수법 등이 간략화와 형식화의 경향을 보인다. 또한 기둥이나 문양의 조각 수법이 정교함이나 세련된 화려함보다는 단순화시켜 표현되었다. 타종구를 들고 있는 승려상은 경직된 인상을 주고 있으며, 승려상과 범종이 다소 어색한 비례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점으로 보아 고려 초기에 조각된 것으로 추정하였다.
주요단어 : 안양(安養) 마애종(磨崖鐘) 중초사지(中初寺址) 안양사(安養寺) 동종(銅鐘) 극락(極樂)
Ⅰ. 머리말
안양에는 늦어도 청동기시대부터 사람들이 거주하기 시작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후 삼국시대에는 백제 영역으로 편입되었다가 고구려의 영향 하에 있었던 지역이었다. 그러다가 안양 지역은 통일신라 말기에 들어와 중앙과 일정한 관계를 유지하였던 것으로 파악된다. 고려시대에도 수도가 개경으로 옮겨졌지만 중앙정부의 지원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당시 폭넓게 성행한 불교를 통하여 간접적으로 알 수 있다. 불교문화가 융성하였던 통일신라시대에 건립된 중초사지 당간지주(中初寺址 幢竿支柱)와 삼층석탑(三層石塔), 고려시대에 조성된 安養寺의 석조부도(石造浮屠)와 귀부(龜趺) 등이 당시 안양 지역이 중앙과 일정한 관계 하에 있었음을 알려준다. 이들 사찰들은 가까운 거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사찰이 입지하고 있는 지형적인 조건, 안양 지역에서 대표적인 문화유산인 점 등을 고려할 때 당시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 사찰들을 중심한 지역이 당시 안양의 정치, 행정, 문화 등에서 중심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安養 石水洞 마애종(磨崖鐘) 안양 석수동 마애종은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석수동 산 32번지에 소재하고 있으며, 경기도 유형문화재 92호로 지정 보존되고 있다.
은 통일신라시대와 고려시대 안양 지역에서 불교문화의 중심지였던 中初寺址와 安養寺가 위치한 지점에서 가까운 곳에 자리 잡고 있어 지역적으로 중요한 역사적 의의가 있으며,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한 조각품이다. 磨崖鐘은 아직까지 소속 사찰을 밝힐만한 자료가 발견되지 않았으나 지리적인 조건 등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중초사 또는 안양사였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추정된다. 어쨌든 이 마애종은 불교문화사적으로도 독특하고, 미술사적으로도 보기 드물며, 그 속에 담겨진 의미 등이 주목되는 문화유산이다. 특히 安養이라는 지명과 잘 어울리는 歷史性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마애종의 造成 時期와 歷史性을 고찰하기 위하여 안양의 역사를 간략하게 고찰하면서 佛家에서 안양의 의미는 무엇이고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또한 마애종이 佛敎美術의 한 유형에 속한다는 점을 감안하여 美術史的인 고찰을 통하여 조성 시기와 그 의의를 추정해보고자 한다. 그리고 마애종이 안양 지역에서 어떤 의미가 있으며, 그 역사적 의의는 무엇인지 나름대로 접근해보고자 한다.
Ⅱ. 안양의 역사와 불가의 安養世界
안양에는 적어도 청동기시대부터 사람들이 거주하였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안양 평촌동 자유공원 내에 옮겨진 고인돌들이 간접적으로나마 방증해주고 있다. 명지대학교 박물관, 『안양 평촌의 역사와 문화유적 발굴조사보고서』, 1990.
또한 비교적 가까운 곳에 위치한 광명시 가학동 고인돌과 안산시의 월피동 등에 산재한 고인돌 군이 오래전부터 인간이 거주하였음을 알려 주고 있다. 그리고 서울 암사동과 미사리 선사유적지도 방증해주는 자료들이다.
고대시대에 안양 지역은 한반도에서의 패권을 누가 석권하느냐에 따라 고구려, 백제, 신라가 교대로 점령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시대 안양 지역은 처음에는 백제의 영역이었으나 고구려 장수왕이 한성을 함락하면서 고구려의 영향이 미미하게 미치는 변경지역으로 변화되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안양 지역은 백제나 고구려의 변경 지역이었다가 신라가 553년 한강유역을 빼앗고 新州를 설치하면서 중요한 지역으로 자리 잡았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안양 지역이 한강과 인천에서 비교적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서해안의 화성에 소재한 당항성(黨項城)과도 그리 멀지 않은 지역이었던 것으로 보아 그 중요성이 서서히 부각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안양은 통일신라 말기와 고려시대에 들어와 중앙정부와도 일정한 관계를 유지하는 지역으로 부상하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사실은 당시 폭넓게 신앙되었던 불교와 그에 따른 사찰의 건립이 간접적으로 전해주고 있다. 특히 826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827년 완공되었다는 명문에 의하면 이곳이 中初寺임과 동시에 幢竿支柱가 826년(흥덕왕 1) 8월 6일 採石하여 827년 2월 30일에 완공되었음을 알 수 있다(엄기표, 『한국의 당간과 당간지주』, 학연문화사, 2004, pp. 320~323).
정확한 건립 연대가 銘文으로 남아있는 中初寺址 幢竿支柱는 朴慶植,「安養 中初寺址에 대한 考察」,『實學思想硏究』 14집, 모악실학회, 2000.
안양시청, 『中初寺址 幢竿支柱 修理 報告書』, 2000.
당시 안양 지역과 경주의 중앙 정부와 일정한 관계를 보여준다.
먼저 당시 당간지주가 건립될 정도의 대규모 사원이 창건되어 있었으며, 지방에 소재하였지만 중앙에 있는 敎宗寺刹들과 밀착된 사찰이었음을 알려준다. 즉, 명문에 의하면 당간지주 건립에 황룡사 항창화상(皇龍寺 恒昌和尙)을 비롯하여 10명의 승려가 후원 寶曆二年歲次丙午八月朔六辛丑日中初寺東方僧岳 (보력이년세차병오팔월삭육신축일중초사동방승악)
石分二得同月卄八日二徒作初奄九月一日此處至丁未年 (석분이득동월입팔일이도작초엄구월일일차처지정미년)
二月卅日了成之 節州統皇龍寺恒昌和尙上坐 (이월삽일요성지 절주통황룡사항창화상상좌)
眞行法師貞坐義說法師上坐年嵩法師史師二 (진행법사정좌의설법사상좌년숭법사사사이)
妙凡法師則永法師典都唯乃二昌樂法師法智法師 (묘범법사칙영법사전도유내이창락법사법지법사)
徒上二智生法師眞方法師作上秀南法師 (도상이지생법사진방법사작상수남법사)
하였다고 한다. 당시 황룡사는 경주에 있었던 사찰로 불교계의 중심 사찰이었는데 중초사와 일정한 관계가 있었음을 알려준다. 이와 같이 중초사가 9세기 초반 경에는 널리 알려진 사찰이었으며, 중앙에 있는 사찰과도 교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엄기표, 「통일신라시대의 당간과 당간지주 연구」, 文化史學 6․7호, 한국문화사학회, 1997.
한편 안양의 역사와 오늘날까지 사용되는 지명과 관련하여 가장 주목되는 시기는 고려시대이다. 특히 고려 초기에 창건된 安養寺가 안양의 지명과 역사를 가장 잘 대변해주는 곳이라 할 수 있다. 안양사는 고려 태조 王建에 의하여 창건된 것으로 전하고 있으며, 창건 이후 고려 말기까지 이 지역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던 사찰이었다. 고려시대 安養寺에는 칠층전탑(七層塼塔) 외에 다수의 전각(殿閣)이 건립되었다. 현재 전탑은 남아있지 않지만 전탑이 있었던 흔적과 일부 부재가 수습되기도 하였다. 박경식, 「安養 安養寺의 칠층전탑과 귀부」, 文化史學 제 11․12․13 호, 한국문화사학회, 1999.
그리고 안양사에는 고려시대 건립된 귀부(龜趺)와 석조부도(石造浮屠)가 남아있다. 당시 석조부도와 귀부는 王師나 國師를 역임하였거나 그러한 지위에 상응하는 예우를 받았던 고승들에 한하여 건립되었다. 엄기표, 『신라와 고려시대 석조부도』, 학연문화사, 2003.
이러한 사실에 비추어볼 때 안양사에 귀부와 석조부도가 건립되었다는 것은 안양사가 왕실이나 중앙정부와 밀접한 관계에 있었음을 시사한다. 이러한 것으로 보아 현재 사용되고 있는 安養이라는 지명이 고려 초기에 창건된 안양사에서 유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즉, 安養이라는 지명은 불교적인 성격이 짙으며, 이 지역민들의 불교적인 성향이나 색채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安養은 불교적인 세계관과 내세관이 반영된 지명이라 할 수 있다. 나아가 안양이라는 지명은 현재 中初寺, 安養寺, 三幕寺 등이 분포되어 있는 지역에서 유래되었으며 이 지역이 적어도 고려시대까지만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시대까지 정치, 행정, 문화의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던 사찰들이 이 지역에 밀집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지역이 적어도 삼국시대에서 고려시대까지 중심적인 곳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안양은 불교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이와 관련하여 소위 정토삼부경(淨土三部經)으로 불리는 『아미타경(阿彌陀經)』, 『무량수경(無量壽經)』, 『관무량수불경(觀無量壽佛經)』 등이 주목된다. 이 경전에서 안양과 관련하여 극락세계(極樂世界)의 모습과 극락에 이르는 길을 설하고 있는 내용이 주목된다. 극락은 현실 속에 존재하는 세계이며, 죽은 후에 가는 세계로 화려하고 고뇌가 없으며 쉽게 해탈에 이를 수 있는 세계라고 한다. 인간이 죽은 이후에 갈 수 있는 세상이고, 사바세계와 완전히 분리된 세계가 아니라 연결되어 있는 세계로 아미타 부처가 주재하고 있는 세계이다. ‘사바’는 참고 견딘다는 뜻으로 인간을 비롯한 모든 중생들이 괴롭고 고통스러워도 참고 견디면서 살아가는 세계가 사바세계이다. 그러나 극락은 고통이 없이 짧은 기간 동안의 수행 정진을 통하여 윤회를 초월하고 해탈할 수 있는 곳이다.
이와 같이 佛家에서는 서쪽으로 십만 억 불국토를 지나가면 한 세계가 나타나는데, 바로 그곳이 극락세계라고 하였다. 그래서 불경에는 현재나 미래나 모든 중생들이 청정한 善業을 닦게 되면 서쪽 방향에 있는 극락에 반드시 태어난다고 한다. 극락은 황금 기둥으로 집들이 지어져 있고, 수백 가지의 보석들이 줄줄이 박혀 있으며, 보석마다 일천 가지나 되는 광채가 나고, 광채마다 팔만사천의 빛깔이 있는 세계이다. 또한 항상 음악이 울려 퍼지며, 강당과 정자들이 칠보로 장엄되어 있고,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연못들이 아름답고 균형 있게 자리 잡고 있으며, 나무에서는 항상 향기가 나고, 온갖 기묘한 꽃과 향이 있으며, 의복과 음식이 수백 가지라고 한다. 공파스님 번역, 佛說阿彌陀經, 불광출판부, 1998, pp. 270~273.
이외에도 극락은 불가에서 가장 이상적인 상상의 세계로 묘사되고 있다.
인간이 현실 속에서 도달하기 힘든 세계이며, 희망과 기원을 가지고 갈구하는 세계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극락은 오래전부터 서쪽에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방위 관념이 불교에 습합된 것은 고대 인도에서 유래하였다. 인도에서 서쪽은 그리스 로마 문명이 있는 곳으로, 선진문물이 서쪽으로부터 전래되었기 때문에 인도인들은 오래전부터 西方을 이상적인 세계로 인식하였다. 이러한 관념이 불교에 반영되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래서 사찰에서는 서방을 신성시하며, 서쪽에 죽은 사람의 유골이나 사리를 매장 또는 봉안하는 장소로 많이 활용되고 있다. 이처럼 極樂은 불가에서 가장 평화스럽고 행복하고 안온한 세상이며, 근심 걱정이 없는 세계이다. 그리고 죽은 자의 영혼이 더 좋은 세계로 태어날 수 있다고 믿었던 방향이다.
安養은 바로 이러한 극락세계의 이칭이다. 글자 그대로의 안양의 의미는 마음을 편이하고 몸을 수양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佛經에 의하면 ‘모든 부처가 보살에게 말하여 安養佛을 찾아보게 하였다.’고 『無量壽經』下, 流通分(大正新修大藏經 卷 12, p. 360a).
한다. 즉, 아미타불(阿彌陀佛)은 安養佛이라 부르기도 하였으며, 부처들 중에서도 으뜸에 속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안양즉적광(安養卽寂光)’이라 하여 西方에 있는 극락은 4種의 국토가 있는데, 이중에서 安養 國土가 최하위이지만 원융무애(圓融無碍)한 도리로 말하면 최상의 극락이 安養이고 그곳이 적광토(寂光土)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래서 ‘安養知足’은 극락정토나 도솔천을 의미한다. 이와 같이 安養은 極樂의 별칭으로 극락세계는 安養界, 安養樂, 安養世界, 安養淨土, 安養淨業 등과 상통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安養은 『관무량수불경(觀無量壽佛經)』에 나와 있는 것처럼 ‘미타정토 안락장엄(彌陀淨土 安樂莊嚴)’의 세계임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안양은 불교적인 색채가 강한 지명으로 불교적인 세계관이 반영되었으며, 그러한 지명을 사용한 것은 安養이 곧 極樂이라는 관념에서 유래하였음을 알 수 있다.
Ⅲ. 마애종의 양식과 조성 시기
안양시 석수동에 소재하고 있는 磨崖鐘은 대형의 암벽을 비교적 고르게 다듬은 다음 낮게 陰刻과 陽刻을 활용하여 조각하였다.(암벽 535×505cm) 그리고 안양시 전체를 바라보도록<사진-1>. 上院寺銅鐘(725년)
<사진-2>. 聖德大王神鐘(771년)
하였다.
이와 같이 바위 면에 범종을 조각한 것은 유일한 것으로 범종 연구뿐만 아니라 장인의 창의성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단국대학교 매장문화재연구소, 『안양시의 역사와 문화유적』, 2001, p. 174.
먼저 범종의 기원과 유래에 대하여 간략하게 살펴보도록 하겠다.
범종(梵鐘)은 중국 고대의 동기(銅器)로 악기 종류였던 용종(甬鍾)으로부터 기원하였다고 한다. 이것은 周나라 때 제작되어 성행했던 樂器로 전국시대 이후 소멸되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영호, 「한국동종의 특性과 양식변천」, 金屬工藝, 韓國의 美 23, 중앙일보사, 1985, p. 169.
정명호, 「타명구의 종뉴과 조형뉴의 기원에 관한 고찰」, 梵鐘 18․19 합본, 한국범종연구회, 1998.
이러한 종이 일찍이 불교에 채용되어 악기가 아닌 의식용 또는 신호용 도구로 사용되면서, 불교 공예의 중요한 한분야로 자리 잡게 된다. 그래서 점차 동종은 부처님의 설법을 상징하고 소리로서 중생들을 구제하는 신앙 활동의 중심적인 도구가 되어 가람에서 종을 걸어두는 별도의 건물이 만들어지기 시작하였다. 이와 같이 梵鐘은 佛家에서 불교 의식 시에 사용되었으며, 대중들을 모으거나 공양과 예불 시간을 알리는 중요한 佛具였다. 또한 종소리는 번뇌를 씻어주고 마음을 안정시켜 주며, 지옥에 떨어진 衆生을 구제해 준다고 믿었다.
우리나라 범종의 형태는 甬鍾과 유사하며 삼국시대 목조건축이나 석탑의 처마부에 장식하였던 풍탁(風鐸)과도 형식면에서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한편 梵鐘은 鐘身을 주요 구성 부분으로 하여 鐘口와 당좌(撞座) 등이 있는 기본적인 양식은 같지만 시대별․지역별로 부분적인 변천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신라의 범종은 동양의 어떤 나라의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소리를 내며, 독특한 양식과 구조를 구비하고 있다. 즉, 신라의 전형적인 범종이라 할 수 있는 상원사동종(上院寺銅鐘/ 725년 주성),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鐘/ 771년 주성), 선림원지 출토 동종(禪林院址 出土 銅鐘/ 804년 주성) 등은 중국이나 일본의 범종과는 다른 독특한 특성을 지니고 있다. 이외에도 통일신라시대 조성된 범종들이 있는데, 일본에 가있는 것으로 雲樹寺鐘, 常宮神社鐘, 宇佐神宮鐘, 光明寺鐘 등이 있으며, 청주 운천동에서 출토된 신라 동종 등이 있다.
<사진-3>상원사 동종 용뉴와 용통
<사진-4>. 성덕대왕신종 용뉴와 용통
범종의 상단부 천판 위에는 용뉴(龍鈕)와 음통(音筒)이 부착되어 있다. 용뉴는 범종각에 종을 거는 부분을 용의 모양으로 하여 마치 용이 두발로 땅을 딛고 머리를 숙여 종을 한입에 물어서 힘차게 들어 올리는 듯하게 형상화한 부분이다. 그래서 용뉴부는 용의 모습을 형상
화함으로써 수호적인 의미와 함께 범종이 갖는 상징성을 가장 잘 드러내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黃壽永, 「新羅鐘의 鐘鈕」, 梵鐘 9, 한국범종연구회, 1986.
音筒은 범종의 소리에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치는 부분으로 天板을 뚫어 내부로 연결되어 있다. 음통은 종을 쳐서 내부에서 울리는 소리가 은은하게 오랫동안 잔음(殘音)을 간직하고, 멀리 퍼져나가도록 하기 위한 구조이다. 이러한 것은 소위 맥놀이 현상으로 종소리에 생명력을 불어넣고 심오함을 더해주고 있다. 이장무․김석현, 「한국종의 진동특성에 관한 연구」, 梵鐘 18․19 합본, 한국범종연구회, 1998.
鐘身은 상대-중대-하대로 나눌 수 있다. 상대(上帶)는 종신의 가장 윗부분을 띠모양으로 두르고 당초문이나 반원으로 장식된 부분이다. 종신에는 마치 젖꼭지의 모양과 같다고 하여 이름 지은 乳頭와 이를 둘러싼 유곽(乳廓), 연꽃모양으로<사진-5>禪林院址 出土 銅鐘(804년)
打鐘되어지는 부분에는 당좌(撞座)가 대칭으로 배치되어 있다. 유곽은 보통 4개이며 하나의 유곽 안에는 9개의 유두가 솟아있는데, 이것은 한국 범종만이 가지는 특징적인 부분이다. 그리고 기타 공간에는 비천상(飛天像)이나 菩薩像을 莊嚴하거나 銘文을 새겨 넣기도 한다.
上院寺銅鐘은 천판에 명문이 새겨져 있지만 聖德大王神鐘을 비롯하여 대부분의 동종이 종신에 명문이 새겨져 있다. 下帶는 종의 입구 부분을 띠모양으로 둘러 당초문이나 보상화문으로 화려하게 장식한 부위로 鐘口가 있는 부분이라고 하여 口緣帶라고도 한다. 그리고 하단부에 종을 치면 소리가 울려 퍼져 나오는 부분을 鐘口라고 한다. 종의 아래에는 종소리가 진동하여 은은하게 널리 퍼져 나가 중생을 구제하도록 반원형으로 둥그렇게 만든다. 이러한 양식적 특징은 우리나라 범종의 주요한 특징이기도 하며, 신라시대 범종이 중국이나 일본 범종과 대별되는 특징이기도 하다.
<사진-6>안양 석수동 마애종 원경
그런데 고려시대에는 통일신라시대의 범종 양식을 계승하지만 상대에 立狀花紋 장식이 새로이 첨가되고, 용의 입안에 있던 여의주가 발 위나 음통 위에 장식되며 종신에 奏樂飛天像 대신 菩薩像 및 三尊像 등이 배치되는 변화를 가져온다. 특히 고려 말기에는 중국 원나라의 영향으로 중국종의 양식을 모방한 작품이 제작되어 조선초기까지 지속된다. 조선초기의 범종은 음통이 없어지고, 한 마리만 배치되던 용뉴가 雙龍으로 변하며, 立狀花紋帶는 소멸되고, 유곽은 上帶에서 떨어져 보다 밑으로 내려오며, 당좌는 없어지거나 장식문양으로 전락해 버린다.
종신의 주요 구성 부분이 갖는 장식성이나 기능성이 서서히 간략화되는 경향을 보인다. 또한 종신에는 합장한 형태의 보살입상이 장식되거나 용문․범자문․파도문 등이 표현되며, 기타 공간에는 명문을 새긴 점 등이 특징이다. 鄭永鎬, 「韓國銅鐘의 特性과 樣式變遷」, 金屬工藝, 韓國의 美 23, 중앙일보사, 1985.
廉永夏, 韓國의 鐘, 서울대출판부, 1991.
곽동해, 「韓․中․日 三國銅鍾의 조형양식 비교 연구」, 梵鍾 18․19 합본, 한국범종연구회, 1998.
崔元禎, 「韓國 梵鍾 樣式 小攷」, 文化史學 17號, 韓國文化史學會, 2002.
<사진-7>안양 석수동 마애종 근경
안양 석수동 마애종은 먼저 외곽에 일정한 너비로 돋을대를 사각형으로 구획하여, 鐘閣을 飜案하고 있다. 좌우에는 높은 기둥을 세웠으며, 상부에는 기둥을 가로 질러 보(樑)를 걸쳤다. 보 좌우측 상부에는 독특한 구름문을 장식하였는데, 목조건축물의 보아지처럼 초각된 형태를 취하고 있다. 또는 목조건물의 용마루 양 끝에 장엄되는 치미를 형상화한 듯한 모습이다. 그리고 가운데에도 구름문이 寶珠形을 이루며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모양으로 조각하였다. 이러한 문양들은 鐘閣에서 유일하게 보이는 장식들로 종각의 신성성이나 신비감을 더해 주기 위하여 장식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보의 한가운데에는 아래로 철띠를 촘촘하게 엮은 쇠사슬을 내려 범종의 용뉴에 걸었다. 그런데 범종의 규모에 비하여 기둥이나 보의 규모가 작아 전체적으로 불안정한 인상을 주고 있다. 또한 기둥과 보의 연결 부위를 밋밋하게 처리하여 생략된 기법을 보이고 있으며, 초각된 문양이나 구름문양도 단순하게 처리하여 사실성이 다소 떨어진다.
보와 쇠사슬로 연결된 마애 범종은 상단부에 龍鈕와 音筒을 구비하고 있다. 이러한 용뉴와 음통은 통일신라시대와 고려시대 제작된 전형적인 범종에서 많이 나타나는 우리나라 범종만의 주요한 특성이다. 음통은 오른쪽에 대나무의 한마디처럼 곧게 세워져 있다.
용뉴는 용신은 가늘고 비늘무늬는 표현되지 않았지만 龍頭는 역동적이고 사실적인 형상을 하고 있다. 용두는 입을 크게 벌려 범종의 天板에 연결되고 있으며, 코와 눈 등 통일신라 말기에 성행한 龜趺의 龜頭처럼 볼륨감이 강하고 생동감있는 인상을 주고 있다. 龍身은 반원형으로 굽히고 있으며, 굽힌 안쪽으로 쇠사슬이 연결되고 있다. 용뉴의 규모는 종신의 규모에 비하여 다소 작게 표현되었다. 그리고 龍身에서 뻗어 나오는 다리를 표현하지 않은 점은 磨崖라는 평면적인 조각의 한계도 있었겠지만 사실성이나 긴장감이 다소 이완된 시기에 조각되었음을 간접적으로 시사한다.
鐘身은 크게 2부분으로 나누어 있다. 종신의 상부는 上帶와 乳廓이 있고, 그 아래로 撞座와 下帶가 있다. 유곽은 사각형으로 외부에 넓게 돋을대를 돌려 마련하였다. 상대나 유곽에 문양은 장식되지 않았다. 이러한 것은 재질의 특성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유곽 안에는 비교적 높게 돌출된 9개의 乳頭를 마련하였다. 유두에 특별한 문양이 표현되지는 않았지만 신라 典型期에 조성된 범종처럼 9개의 유두를 정확하게 배치한 점은 주목된다. 이와 같이 유곽을 마련하고 그 안에 9개의 유두를 배치하였다는 것은 한국의 범종을 표본으로 하여 조각되었으며, 이를 조각한 장인이 범종의 세부 특성을 잘 알고 있었던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종신 하부에는 3곳에 撞座를 배치하였다. 당좌는 가운데에 원형으로 타종 부위를 만들고, 그 주위에 12엽의 연화문을 돌렸다. 좌우측 모서리에는 당좌가 반만 표현되었다. 한가운데 1개를 배치하고 좌우측에 반만 표현된 당좌를 배치한 것은 장인이 사실적인 조각 기법에 의하여 마애종을 표현하였음을 알 수 있게 한다.
즉, 장인은 사람의 눈에 보이는 그대로의 범종 형상을 조각하였다. 당좌는 타종하는 부분으로 다양한 문양이 장식되기도 하는데, 朴銀卿, 「統一新羅․高麗 銅鐘의 撞座와 上․下帶 文樣에 관한 硏究」, 考古歷史學志 제3집, 동아대학교 박물관, 1987.
마애종은 불교를 상징하는 연화문을 장식하였다. 그리고 下帶는 일정한 너비로 띠가 형성되도록 하였다. 하대에 문양은 표현되지 않았지만 唐草紋이나 草花紋이 화려하게 장식된 듯한 인상을 연상케 한다. 그런데 상대와 하대의 표면에 문양을 생략한 점은 사실주의에 입각하여 세련되고 정교한 미를 추구하였던 통일신라시대보다는 간략화 경향이 진행된 고려시대에 조각되었음을 시사한다.
또한 상대와 하대를 일정한 너비로 표현하였지만 밋밋하게 처리한 점이나 당좌의 위치를 사실적으로 표현하였지만 일정한 간격으로 적당하게 위치를 선정하여 표현하고 있어 형식화의 경향이 엿보인다.
<사진-8>마애종의 동종
<사진-9>마애종의 僧侶像
그리고 磨崖鐘에서 특히 주목되는 부분은 범종 좌측으로 기둥 앞쪽에 서있는 승려의 모습이다.(僧侶像 높이 102cm, 머리 높이 19cm, 머리 너비 20cm) 승려는 길다란 法衣를 걸치고, 두 손으로 종을 치기 위한 형상을 하고 있다. 두 손으로 나무로 만들어진 打鐘具를 들고 있다. 왼손은 손가락이 표현되었고, 오른손은 손등이 보이고 있어 타종구를 교차되게 잡고 있는데 다소 어색한 자세이다. 얼굴에 눈, 코, 입 등이 분명하게 표현되기는 하였으나 세련되거나 섬세하지는 못하다.
僧侶像은 상체와 하체 등 전체적인 신체의 비례는 잘 어울리고 있는데, 얼굴이 다소 큰 인상을 주고 있어 불균형적인 조각 기법을 보인다. 특히 頭部는 머리를 깎은 승려를 표현하였는데, 평면적이고 사실적이지 못한 인상을 주고 있다. 또한 타종구와 종신의 당좌 위치가 어울리지 않아 형식적으로 표현된 경향을 보이고 있다. 스님이 종을 치기 위해서는 타종구를 상당히 들어 올려 타종하여야 하는데, 당좌의 위치가 다소 높게 표현되어 사실성이 떨어진다. 그리고 스님이 걸친 법의도 옷주름을 주름지게 대충대충 처리하여 간략화의 경향이 보인다. 또한 두 발은 발등을 측면으로 90도 정도 완전히 틀어 두발이 나란히 배치되도록 기형적인 표현 기법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표현은 의학적으로 불가능한 표현이다. 따라서 스님상은 사실적인 표현 수법이 이완되고, 간략화의 경향이 진전된 시기에 조각되었음을 알려<도면-1>. 안양 석수동 마애종 도면
준다.
어쨌든 석수동 마애종에서 범종은 전체적인 모습이 종의 형태를 그대로 묘사하고 있다. 종의 외곽이 부드럽게 곡선을 이루면서 아래로 내려가도록 하였으며, 종의 상하부에 상대와 하대를 표현하고 유곽을 비롯하여 유두를 사실적으로 표현하였다. 또한 종의 상단부에 역동적인 용뉴를 조각하고, 음통을 세워 典型期에 성행한 동종을 모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석수동 마애종은 범종의 양식이 통일신라시대 조성된 상원사동종이나 성덕대왕신종과 강한 친연성을 보이고 있다. 그런데 鐘身에 飛天像을 조각하지 않았으며, 龍鈕의 龍身이 天板과 직접 연결되어 있고, 음통이나 종신의 상대와 하대에 문양이 표현되지 않았으며, 유곽이 단순한 형태로 조각된 점 등은 전형기 이후에 만들어진 동종의 형태가 모방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종신의 전체적인 형태에서 상대에서 하대로 이어지는 외곽선이 유려하지 못하고 밋밋하게 처리된 점도 고려 범종의 경향을 보인다. 또한 하대를 평면적으로 단순하게 표현하였으며, 鐘口를 간략하게 수평선으로 처리한 점 등도 전형적인 신라 범종과는 차이를 보이고 있다. 한편 범종 옆에 승려가 조각되어 있어 종을 타종하는 생생한 장면을 사실적으로 표현한 점은 돋보인다. 그런데 마애종의 조성 시기와 관련하여 승려상의 표현 기법은 간략화의 경향을 보이고 있으며, 다소 경직된 인상을 주고 있다. 또한 범종의 규모나 위치를 고려할 때 스님상의 규모나 타종구의 위치가 다소 어색하며, 스님상 자체의 표현 기법도 단순하게 조각하였다. 이러한 것으로 보아 석수동 마애종은 고려 초기에 조각된 것으로 추정된다.
Ⅳ. 마애종이 갖는 과거와 현재의 의미
현재 안양 일대에는 고대 안양의 역사와 문화를 알 수 있고, 안양의 정체성을 확립시켜 줄 수 있는 문화유산이 상당수 전해오고 있다. 특히 안양시에 소재하고 있는 중초사지 당간지주와 석탑, 안양사의 석조부도와 귀부 등을 비롯하여 석수동 마애종이 대표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문화재들은 유형의 소산으로 안양에 살았던 사람들의 신앙 대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또한 이들은 불교 문화재들이다. 불교적인 미술품들은 한시대의 문화가 담겨 있으며, 장인들의 숨결이 배어있는 조형물이다. 불교미술품들은 불교가 전래된 삼국시대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하였으며 나무, 돌, 금, 동 등 다양한 재료들이 사용되었다. 그 규모도 초대형에서 초소형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즉, 그것이 갖고 있는 重要性이나 신앙의 對象性에 따라 또는 用度에 따라 다양한 재료가 활용되었으며, 그 규모가 결정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현재 안양에 있는 불교적인 문화유산들은 안양이라는 지역의 역사성을 부여하고 지역 공동체를 형성케 하는 구심점이 되어 왔고, 앞으로도 될 것이다. 다시 말해 이 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문화적 구심점 역할과 동시에 공동체라는 의식을 형성시키는 상징적 의미가 내재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비록 그것들이 고대에 만들어졌지만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로 하여금 안양의 歷史性을 조명해 보게 하는 문화유산들이다. 안양시민들에게 안양이 짧지 않은 역사 속에 형성된 도시임을 자각하게 하는 소중한 유산이다. 나아가 왜 이곳에 만들어졌는가에 대하여 되새겨보게 함으로써 내가 살고 있는 지역과 一體感을 갖도록 하여 地域性을 형성시켜 주는 연결 고리가 될 수 있다.
안양에도 원래는 많은 문화유산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한 문화유산들은 안양의 역사나 안양에 살았던 사람들의 삶과 애환을 담고 있는 흔적물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것들은 한번 파괴되면 영원히 회복할 수 없이 사라지고 만다. 아직도 도시개발로 인하여 급속하게 지형과 도시 환경이 변화되면서 원형을 잃는 경우가 많다. 또한 보존과 개발이라는 논리 속에서 개발과 경제가 우선시되면서 문화유산들이 파괴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특히 현대사회는 도시화와 교통의 발달로 인구의 이동이 많고, 자기가 살고 있는 지역 사회에 대한 일체감이나 공동체 의식이 결여되어 가는 상황이다. 그런데 오랫동안 일정 지역에 위치한 문화유산들은 한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歷史意識을 함양하여 애향심을 갖게 하고, 共同體라는 同質性을 유지시켜 주는 중요한 매개체이다. 나아가 지역민들 간에 일체감이나 공동체 의식을 함양시킬 수 있는 구심점 역할을 할 수 있는 중요한 有形의 文化的 所産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안양에는 여러 가지 문화유산들이 전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중요한 문화재들이 석수동 마애종이 있는 일대인 中初寺, 安養寺, 三幕寺 등에 집중 분포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석수동 마애종과 관련하여 주목되는 문화재가 幢竿支柱이다. 중초사지는 安養寺로 들어가는 도로를 따라 가다가 왼편 개울 건너에 삼층석탑과 함께 세워져 있다. 현재 사지 일대에 건물이 들어서 있어 정확한 사역의 규모는 알 수 없지만 개울을 건너 경내로 진입하게 되어 있었으며, 당간지주가 그 입구에 배치되었음을 알 수 있다(안양시청, 『中初寺址 幢竿支柱 修理 報告書』, 2000). 당간지주 북편으로 초석을 비롯한 석재들이 일부 노출되어 있으며, 경작지에는 많은 기와 조각들이 흩어져 있다. 그리고 동쪽지주 내면 윗부분에는 끌구멍이 3군데 남아 있는데, 이것은 해방 이후 인근의 석공들이 반출하려고 했던 흔적이라고 구전되고 있다(경기도 편, 京畿文化財大觀 -國家指定篇-, 1989, p. 62).
당간지주는 幢竿을 세워 幢을 걸기 위한 구조물이다. 현재는 두 지주만이 남아있지만 원래는 높은 당간을 세워 그 꼭대기에 당을 걸어 휘날리게 함으로써 사찰의 位相을 드러냈을 것이다. 그런데 중초사지 당간지주는 銘文이 새겨져 있다. 명문에 의하면 당시 건립 책임자로 節州統 皇龍寺 恒昌和尙을 비롯하여 10명의 승려가 후원하였음을 알 수 있다.
당시 불교계의 중심 사찰이었던 황룡사 승려가 후원한 것으로 보아 중초사가 늦어도 9세기 초반경에 널리 알려진 사찰이었으며, 중앙에 있는 사찰과도 교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것으로 보아 안양 지역이 통일신라 말기에는 중요한 사찰이 건립될 만큼 중요한 지역이었으며, 불교가 성행하고 사찰이 건립되면서 佛世界에 대한 인식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불교에 대한 인식과 이해가 安養이라는 지명이 태동되는 배경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들 사찰이 소재한 지역이 당시 중심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곳에 남아있는 문화재들은 고대의 중심지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안양의 歷史性를 보여주는 문화재가 당간지주를 비롯한 마애종이며, 이들 문화재가 분포하고 있는 지역은 역사적인 관점에서 안양의 地域性을 대변해준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건의 발원에 의하여 安養寺가 건립된다. 절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안양사를 이곳에 세운 것은 安養世界, 즉 極樂世界의 구현과 실천이라는 사상과 관련되어 있었을 것이다. 당시 많은 佛徒들은 안양사를 지어 이 지역을 상상속의 극락이 아닌 현실속의 극락을 만들고자 했을 것이다. 그러한 발원의 일환으로 대형의 암반에 마애종을 새겼을지도 모른다. 마애종은 한 승려가 타종구를 들고 있어 마치 종소리가 정지된 것이 아니라 울려 퍼지는 듯한 인상을 주고 있다.
이 마애종을 새긴 장인은 보는 이로 하여금 종소리를 들으며 보도록 의도하였으며, 그러면서 경건한 신앙심을 갖도록 유도하였다. 기발한 착상이다. 동시에 범종은 불가에서 그 소리로서 부처의 진리를 전하여 모든 중생들을 구제해 준다고 한다. 석수동 마애종의 소속 사찰이 중초사든 안양사든 모든 중생들을 구제하여 다같이 극락에 이르고자 하는 발원과 바로 이곳이 현실속의 극락임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자 조각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인지 마애종은 멀리 안양시내를 굽어보고 있다. 이와 같이 마애종을 조각한 것은 불가의 세계처럼 안양 지역을 淸淨케 하고, 모든 중생들을 구제하여 極樂往生을 염원코자 하는 바램에서 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마애종은 안양=극락=살기 좋은 곳이라는 지역성을 부여할 수 있는 상징적인 문화유산이라 할 수 있다.
안양 석수동 磨崖鐘은 우리나라에서 유일무이한 문화재이다. 다시 말해 독특하기도 하지만 하나밖에 없는 창조적인 유산이다. 현대는 창조는 거의 없고 模倣과 飜案이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데 반해 오래전에 안양에 이러한 전무후무한 마애종이 조각되어 있다는 것은 안양의 역사성을 이해하는데 아주 중요한 자료이다. 즉, 안양이 오래전부터 창의적이고 새로운 문화에 대한 창출지로서의 의미가 내재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마애종은 새로운 문화 창출의 원동력 대상으로 접근해야 할 것이다.
Ⅴ. 맺음말
지금까지 안양의 역사와 그 지명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에 대하여 간략하게 개괄하고, 안양 석수동 마애종에 대한 미술사적인 고찰을 통하여 조성 시기를 제시해 보았다. 그리고 안양의 역사 속에서 그것이 차지하고 있는 가치와 앞으로의 활용 방안에 대하여 필자 나름대로의 소견을 개진하였다.
安養이라는 지명은 佛家의 極樂世界에서 유래하였다. 따라서 안양은 불교적인 색채가 강한 지명으로 불교적인 세계관이 반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곳에 새겨진 석수동 마애종은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예이며, 모든 중생들을 소리로서 구제하고자 하는 장인의 기원을 담고 있는 화폭처럼 조각된 점은 돋보이는 구도이다. 나아가 불교를 통하여 중생들을 구제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안양이라는 지명이 불가의 극락세계에서 유래한 것처럼 석수동 마애종을 후원하였거나 조각한 장인들은 종소리로 중생들을 구제하고 극락왕생을 염원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석수동 마애종은 범종의 양식이 전형적인 신라 범종의 양식을 보이고 있어 주목된다. 그런데 범종은 세부적으로 문양이나 구성 수법 등이 간략화의 경향을 보이고 있으며, 형식화의 경향도 보인다. 또한 조각 장인은 마애종과 승려상 등 전체적으로 정교함이나 화려함보다는 단순화시켜 표현하고자 하였다. 승려상은 경직된 인상을 주고 있으며, 승려상과 범종이 다소 어색한 비례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점으로 보아 고려 초기에 조각된 것으로 추정하였다.
안양 석수동 마애종은 오늘날까지 안양의 역사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안양 시민들에게 同質性과 一體感을 형성시킬 수 있는 훌륭한 문화유산이라 할 수 있다. 안양에 歷史性을 부여하고, 안양 지역에 地域性을 부여하고, 나아가 시민들에게 歷史意識과 愛鄕意識을 함양시킬 수 있는 매개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2008-11-14 15:2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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