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보따리/자료

[자료]마애종/안양 석수동 磨崖鍾마애종 考

안양똑딱이 2016. 6. 11. 22:03
[자료]마애종/안양 석수동 磨崖鍾마애종 考

[2008/11/14 안양민예총]곽 동 해 동국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 교수


 

안양 석수동 磨崖鍾마애종 考
곽 동 해 동국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 교수

서론

경기도 안양시 석수동 안양유원지 입구에서 약 5백 미터 정도 올라가면 좌측 계곡의 岩面암면에 한국 유일의 磨崖鍾마애종이 있다. 바위 면에 불상을 새기는 이른바 마애불의 조성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인도와 중국 등지에도 풍부한 사례가 전해진다. 하지만 마애종은 지구촌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유일무이의 문화유적인 것이다.
마애종은 구경 830㎜, 1220㎜의 크기로서 폭 2200㎜ 높이 2410㎜ 크기의 磨崖鍾架마애종가에 걸려있는 형태로 부조되었다. 그 오른편에는 가사를 입은 스님이 撞木당목으로 鍾종을 치는 모습으로 새겨졌다. 이에 대하여 1960년에 鄭明鎬정명호 교수가 『考古美術4號고고미술4호』「安養의 磨崖鍾과 逸名塔碑 안양의 마애종과 일명탑비」에 처음 소개하였고, 1984년에 廉永夏염영하, 李榮培이영배 교수가 『梵鍾범종14‧15집 』「韓國의 石鐘에 관하여 ‧ 安養磨崖石鐘 한국의 석종에 관하여 ‧ 안양마애석종」을 발표한 바 있다.
이 마애종의 조성연대를 알 수 있는 문헌사료는 전무하다. 이에 대하여 정명호 교수는 고려 전기로 추정했으며, 고 염영하 박사는 고려후기로 추정하였다. 다만 마애종이 신라 興德王 2年(흥덕왕 2년/827)에 창건 완료된 中初寺址중초사지의 권역에 위치하고 있음을 고려한다면, 최고 신라말기까지 올려다 볼 수 있는 가능성은 있다.
본고에서는 이 마애종의 조형특성과 조성시기에 대하여 고찰해 보도록 하겠다.


磨崖鍾마애종의 조형 구성
전술한 바와 같이 마애종의 크기는 구경 830㎜, 1220㎜로서 실물에 비유한다면 대형종이라 할 수 있다. 종고리는 직경 500㎜의 천판위에 單龍단용과 音筒음통으로 龍鈕용뉴를 구성하였다. 음관의 높이는 220㎜이며, 용뉴의 높이는 이보다 약간 큰 250㎜이다.
그림 . 안양 석수동 마애종 실측도
이것은 용보다 음통의 높이가 더 크게 조형되는 한국종의 일반적인 현상에 반하는 모습이다. 음통에는 미약하지만 마디 표현의 흔적이 나타난다.
龍의 형상은 ∩형으로 몸통을 구부렸으며, 아가리를 크게 벌려 천판 위에 밀착시켰다. 용의 머리는 角, 눈, 코, 입술, 혀, 髥翼염익이 묘사되었다. 섬세한 표현이 어려운 화강암면의 특성상 형태는 과감한 생략기법으로 묘사되었지만, 한국종의 특성인 용뉴의 동세표현은 명확히 나타난다.
천판은 거의 수평으로 조형되었는바, 이 역시 완만한 弧形호형이 일반적인 한국종에서는 희귀한 조형사례이다. 鍾身종신의 비례는 상부가 좁고 하부가 넓어져 풍만한 균형감을 보여준다. 종신의 상부에는 유곽이 표현되었고, 그 안에는 9개의 유두가 3열로 가지런히 배치되었다. 상대는 문양이 묘사되지 않아 자칫 생략된 것으로 오인될 수 있지만, 유곽대와 접한 상부부분이 곧 상대임을 알 수그림 . 안양 석수동 마애종 전경
있다. 鍾腹종복에는 자방과 꽃잎이 완연하게 묘사된 직경 140㎜의 蓮華(연화) 당좌가 조형되었다. 부조된 당좌의 수는 3구이지만, 배치형태를 고려한다면 배면의 가상적 당좌까지 포함하여 전체 4구를 염두에 둔 표현이다. 하대는 폭 110㎜의 띠를 돌린 형태로 부조되었다. 그러나 한국종의 중요 장식요소인 비천상은 생략되었는바, 이 역시 섬세한 묘사가 어려운 화강암의 특성을 고려한 것으로 사료된다.

鍾架종가와 僧像승상 및 타종의 상징성
그림 . 天壽國曼茶羅繡帳의 打鍾의식그림
종가의 크기는 하부기단의 폭이 2200㎜, 전체높이 2410㎜이다. 1900㎜의 기둥을 양쪽에 세우고, 그 위에 1970㎜의 橫架횡가를 짜 올린 모습으로 조형되었다. 횡가 위의 양단에는 치미와 같은 장식이 묘사되었으며, 중심 상부에는 여의두형 고리장식이 표현되었고 그 아래에 鐵索철삭을 걸어 종을 매단 모습이다.
鍾架종가의 향우측 기둥 하부에는 스님이 당목을 들고 종을 치는 모습이 부조되었다. 높이 1000㎜ 크기로 묘사된 스님은 민머리에 이목구비가 표현되었으며, 가사를 입고 정면을 향한 모습이다. 이것은 이 마애종이 단순한 묘사에 그치지 않고, 지속적인 타종의식을 행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요소이다.
안양 마애종의 조형과 유사한 사례를 일본 나라[奈良내량] 주구지[中宮寺중궁사]에 조장되고 있는 天壽國曼茶羅繡帳천수국만다라수장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수장은 A.D. 622년에 사망한 쇼토구[聖德성덕]태자를 추모하고 극락왕생을 염원하여 그의 妃비인 橘大女郞귤대여랑이 스이꼬[推古추고]천황의 허락을 얻어 제작한 것이다.
고구려계의 화사 加西溢가서일과 加己利가기리가 밑그림을 그렸으며 백제계의 刺繡匠자수장이 제작하였다고 전해진다.
이 수장의 여러 그림가운데 승려가 종을 치는 그림이 주목되는 부분이다. 종가에 높게 걸린 종을 스님이 당목으로 타종하는 모습이 안양 마애종과 방불함을 느낄 수 있다.
그림 . 天壽國曼茶羅繡帳의 打鍾의식 그림부분.
이 그림은 쇼토쿠태자가 천수국의 화려한 만다라 꽃들과 더불어 왕생을 염원하는 타종의식을 표현한 것이다.
즉, 왕생의 영속성과그림 . 상원사 동종(725년)의 용뉴
더불어 영원한 타종의식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안양 마애종은 누군가는 알 수 없지만 망자의 극락왕생의 영속적인 염원을 의미하는 타종의식의 비현상적 표상이라 할 수 있다.


造成年代조성년대 추정
안양 마애종의 조성 시기에 대해서는 조형양식과 위치환경 등을 고려하여 다양한 분석이 가능하다. 다시 말하자면, 그만큼 정확한 조성시기의 추론이 어렵다고 하겠다.
우선 마애종이 위치한 절터는 신라후기에 창건된 中初寺址중초사지로 밝혀졌다. 이곳을 '中初寺址중초사지'라 하는 이유는 인근에 위치한 幢竿支柱당간지주 때문이다. 이 당간지주는 양 지주가 85cm의 간격을 두고 東西동서로 대립하여 설치되었다. 서쪽 지주의 바깥 면에는 銘文명문이 새겨졌는데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寶曆二年 歲次 丙午 八月 朔六 辛丑日 中初寺 東方僧岳一……(생략)
보력이년 세차 병오 팔월 삭육 신축일 중초사 동방승악一……
그림 . 4구의 당좌가 조형된 청녕4년 명동종(1058년)

명문에 의하면, 이 지주는 신라 흥덕왕 원년(826) 8월 6일에 채석하였고, 이듬해인 흥덕왕 2년(827) 2월 30일에 조성을 완료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명문이 새겨진 당간지주는 국내 유일의 사례이다. 이것은 마애종의 조성시기를 최고 9세기 중반까지 올려 볼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한다.
한편 전술한 마애종의 조형양식을 바탕으로 조성시기를 가늠할 수 있다. 우선 마애종의 용뉴형태는 신라종과 고려전기범종의 전형양식을 보여준다. ∩형의 몸 동세와, 아가리를 크게 벌려 천판 위에 밀착시킨 모습은 고려종보다 오히려 신라종에 더 가깝다.
그러나 당좌가 4구인 경우는 현전하는 신라범종에서 찾아볼 수 없으며, 고려전기 범종에서 나타나기 시작한다. 고려전기 동종 가운데 당좌가 4개인 것은 「용주사 동종(고려전기)」, 「청녕4년 명동종(1058년)」, 「호암미술관 소장 고려동종(고려전기)」, 「在日 고려동종(북구주 안양사, 후쿠오카 원청사)」 2구 등이 전한다.
이러한 사례는 현존하는 고려종 가운데 소수에 불과하지만 양식의 변천시기를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서 또 하나의 단초를 제공한다.
즉, 안양 마애종의 4구의 당좌표현은 이 종이 동일한 사례가 등장하는 최초시기인 고려전기를 초월할 수 없음을 시사해 준다.

결론
지금까지 안양 석수동 마애종에 대하여 고찰해 보았다. 우선 이 마애종은 세계유일의 사례로서 큰 희소가치를 지닌다고 하겠다. 양식적으로는 신라범종과 고려전기 범종양식을 두루 갖추었으나, 당좌가 4개인 점은 이 종의 조성시기를 고려전기 이후로 추정할 수 있는 근거라 하겠다. 아울러 ∩형의 몸 동세와, 아가리를 크게 벌려 천판 위에 밀착시킨 모습은 신라부터 고려전기까지 나타나는 양식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조형양식을 근거로 마애종의 조성시기를 추정한다면 고려전기에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끝으로 마애종은 누군가를 위한 영속적인 타종의식을 상징하고 있다. 天壽國曼茶羅繡帳천수국만다라수장의 打鍾타종그림이 쇼토구[聖德·성덕]태자를 애모하고 극락왕생의 영속적 염원을 위한 것임에 비추어, 이 마애종 역시 불특정 다수의 망자를 위한 것이 아님을 추정할 수 있다. 즉, 彼亡者피망자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지만 당시 국왕과 같은 위대한 권력자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성덕대왕신종과 같이 대부분의 대종들이 위대한 권력자의 사후 극락왕생을 염원하여 조성되었음은 주지의 일이다.
안양 마애종 역시 고려 초기에 활동하였던 특정 망자의 극락왕생을 위하여 조성되었으며, 마애종이라는 영속성에 기인하여 오늘날에도 타종의식에서 파생되는 진여의 메아리가 세인의 마음속에 진동하고 있는 것이다(* 편집자 주
일반 시민과 청소년들도 쉽게 이해하도록 한자말로 된 전문용어를 한글로 함께 풀었습니다.
).

參考文獻
郭東海,『생명의 소리를 담은 장엄, 범종』, 한길아트, 2006.
廉永夏,『韓國의 鍾』, 서울대학교출판부, 1991.
廉永夏, 李榮培,『梵鍾14‧15집 』「韓國의 石鐘에 관하여 ‧ 安養磨崖石鐘」,
한국범종연구회 1984.
鄭明鎬,『考古美術4號』「安養의 磨崖鍾과 逸名塔碑」, 한국미술사학회 1960.
최응천, 김연수『금속공예』, 솔, 2004.

참고문헌
-곽동해,『생명의 소리를 담은 장엄, 범종』, 한길아트, 2006.
-염영하,『한국의 종』, 서울대학교출판부, 1991.
-염영하, 이영배,『범종14‧15집 』「한국의 석종에 관하여 ‧ 안양마애석종」, 한국범종연구회 1984.
-정명호,『고고미술4호』「안양의 마애종과 일명탑비」, 한국미술사학회 1960.
-최응천, 김연수『금속공예』, 솔, 2004.

2008-11-14 15:27: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