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사진기록 1695

[탐사2]안양9동(1) 새마을 골목길 풍경(2013.02.09)

02차(2013.2.09) 안양9동(1) 새마을 골목길 주거환경개선사업지구로 몇년후에는 사라질 안양9동 새마을(병목안) 골목길 풍경으로 아직 사람사는 냄새가 물씬 풍기는 곳입니다. 새마을은 안양역에서 삼덕공원을 지나 담배촌과 창박골로 올라가는 길목으로 주민들이 농사를 지을 농경지로서 처음에는 신부골(新富谷)로 불리워 오다가 1969년에 주택단지가 조성되면서 새로 생긴 마을이라 하여 새마을로 개칭되었지요. 1977년 안양 대홍수때는 산자락이 무너져 내리고, 수암천변의 주택들이 물살에 쉽쓸려 내려가면서 이곳에서만 수십여명의 주민들이 숨지는 아픔도 있었지요. 새마을 안쪽으로 서쪽 끝자락에는 초등학교가 있는데 1988년에 설립한 양지초등학교입니다. 자료에 의하면 시흥군 안양읍 당시 이곳에 안양공설운동장 설치 계..

[20170426]안양 만안도서관의 원태우의사 조형물

2017.04.26/ #안양 #원태우의사 #만안도서관/ 1992년 11월 새안양회에서 세운 원태우의사 조형물. 이토 히로부미에게 돌멩이 던진 원태우의사 대한민국 사람 중에 1909년 중국 이룽장(黑龍江)성 하얼빈(哈爾濱) 기차역에서 초대 조선통감을 지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저격한 안중근 의사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보다 앞서 1905년 11월 22일 경기 안양에서 열차를 타고 가던 이토 히로부미에게 짱돌을 기막히게 날려 부상을 입힌 안양 출신의 원태우 의사와 민간 항일 운동의 효시라 할수 있는 거사의 현장에 대해서는 모르는 이들이 많다. 1905년은 일제가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한 비운의 해이다. 민족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는 11월 17일 조약 체결을 한 후 5일후인 22일 일..

[20170420]근대문화유산 보고 '양명고'

2017.04.18/ #안양 #양명고 #근대문화유산 #문화재/ 과거 사회복지법인 좋은집(기독보육원)에서 땅을 구입하여 설립한 안양 양명고 부지내에는 일제강점기 시대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 창고와 한국전쟁 이후 두한미군이 지어준 건물들이 있는 등 안양으로서는 근대문화유산의 보고라 할 수 있다. 학교 뒷쪽에 보면 돌을 쌓아 지은 2동의 건물이 있는데 한국전쟁 당시인 1950년 무렵 주한미군이 지어 의무실 등으로 사용하던 건물로 1동은 비교적 관리가 잘돼 현재 음악실로 이용하고 있으며 1동은 영선반 창고로 사용중인데 지붕 기와가 다 깨지는 등 관리가 엉망인 상태입니다. 음악실옆으로는 현재 테니스장이 있는데 과거 보육원 예배당이 있던 자리로 1950~60년대 안양에 예식장등이 없을 당시 이곳에서 결혼식이나 큰 행..

[20170420]안양천에 자리한 안일초등학교

안일초등학교(安一初等學校)는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에 있는 공립 초등학교로 2001년 04월 13일 설립인가를 받아 2002년 03월 01일 초대 김현경 교장선생이 취임하였으며 2002년 03월 02일 21학급(908명)으로 개교했다. 2015년 02월 13일 제13회 졸업생(5학급, 132명)을 배출했으며 2015년 03월 02일 현재 30학급(특수학급1학급 포함)이 편성돼 운영중이다.

[20170420]근대문화유산 보고 '좋은집'

#안양 #좋은집 #기독보육원 #해관보육원 #근대문화유산 #나해석/ 안양시 안양2동 안양천변에 자리한 우리나라에서 처음 설립된 사회복지시설 ‘좋은집’입니다. 이곳에는 1930~1950년대 지어진 옛 건물들이 남아 있습니다. 사회복지시설 좋은집은 한국인 최초로 고아원과 양로원을 설립·운영했으며, 한국인 최초로 미국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아 해방 후 한국 정부가 발행한 최초의 의사 면허 보유자로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 교장이었던 오긍선 박사가 설립한 복지시설이지요. 1918년 12월 어느 날 세브란스병원에 7명의 고아가 찾아온 것이 계기가 되어 서울에서 시작한 경성고아원(1922년 재단법인 경성보육원으로 개칭)은 1936년 9월 안양으로 이전해 기독보육원이란 이름으로 문을 열었으며 이후 해관보육원, 현재는 좋..

[20170412]의왕 고천동 안골마을

#의왕 #고천동 #안골 #의왕시청 #오봉정사/ 의왕시 고천동 안골은 의왕시청 뒷쪽 오봉산 자락의 전원지역으로 1970년 '새마을운동'때 부터 전기電氣가 공급되기 시작한 두메산골 마을로 납골벽과 납골탑 등 죽은이들의 영가를 모신 오봉정사와 전원주택 서너채, 옛 농가를 그대로 간직한 모습 등 마치 한적한 시골의 풍광을 보여주고 있다. 이곳 안골마을에서는 정월 대보름 아침에 흰떡과 복엿을 먹었는데 엿가락처럼 살림이 늘어나서 부자가 된다는 의미라고 한다. 또 칠월 칠석날에는 쌀 한 말을 빻아서 칠성시루라 하여 백설기를 만들고, 밀떡을 부쳐 칠성맞이 고사를 한 후 이웃끼리 돌려 먹었다고 한다. 고천동(古川洞) 조선시대에는 광주군 왕륜면의 평사천(坪沙川)·고정동(古井洞)·고고리(古古里)·내곡동(內谷洞)이었다가 19..

[20170331]안양3동 대농단지 주변과 골목 풍경

#안양 #동네 #골목 #안양3동 #대농단지/ 안양3동에는 대농단지라 불리우는 대규모 주택가가 자리하고 있었다. 일제강점기인 1932년 서이면 안양리 약 1만평에 달하는 부지위에 일본인 자본에 의해 군복용 광목을 생산하는 조선직물주식회사라는 최초의 근대적 방직공장과 조선견직이 들어섰다. 이는 일제가 섬유공업에 적합한 공업용수를 찾아 전국의 물을 조사해 본 바, 박달동 일대에서 채집한 안양천의 수질이 최상이라는 판정을 얻은 결과였다. 덧붙여 안양리 일대의 풍부한 노동력과 서울에 인접한 교통상의 강점도 고려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후 이 공장 자리에는 1938년에는 조선총독부의 지시로 화신백화점 총수였던 박흥식이 해방을 앞둔 1944년 8월19일 자본금 5천만원(당시화폐)으로 부지 3만평에 건평 1만평 규모의..

[20170330]안양 병목안 채석장 철길 남아있는 흔적

2017.03.30/ #안양 #병목안채석장 #철길 #1934년 #안양9동/ 일제 강점기 경부선 복선화공사가 진행될 무렵인 1934년 안양역에서 병목안까지 철길이 놓이고 안양9동 수리산 자락의 커다란 산 하나가 파헤쳐졌다. 경부선을 놓으면서 자갈을 채취하기 위해서다. 해방 이후에도 철도청은 1980년대까지 수도권 일대에 건축용 골재로 제공하기 남포(다이나마이트)를 터트려 산을 깨트렸는데 이곳을 병목안 채석장이라 불렀다. 당시 병목안에는 전국에서 모인 돌 캐는 사람들이 살았음은 물론이다. 1주일에 두세 차례 철도운반 화물열차를 운행했는데 당시 안양9동과 새마을에 살던 중학생 정도의 녀석들은 열차가 지나갈 때를 기다렸다가 화물차 맨 뒷칸에 몰래 매달려 안양시내로 또는 집으로 가기도 했다. 개중에는 어른들도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