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사진기록/탐사공지

[공지]안양탐사대 136차 탐방(20180721)_안양3동 양지마을(2)

안양똑딱이 2018. 7. 19. 15:21

 

안양탐사대 136차 여정_안양3동 양지마을(2) - 안양공고 주변

7월 21일(토) 오후 4시/ 집결_삼덕공원내 굴뚝앞


안양탐사대가 2018년 7월 21일 136차 여정으로 찾아갈 곳은 안양3동 양짓말(양지마을) 두번째로 지난주(14일) 135차 탐사에서 돌아보지 못한 안양공고와 삼덕공원 주변 동네입니다. 이곳은 2013년 3월 2일(5차)과 2014년 2월15일(37차)에도 찾아가 당시 풍경을 사진으로 남기기도 했지만 안양 도심에서 동네와 골목이 사라지고 있는 가운데 그래도 옛 골목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곳이지요.
양짓말은 이 마을의 지세가 양지바른 곳에 자리잡은 마을이라 하여 예로 부터 '양짓말'로 불리우다 행정명칭인 양지동(陽地洞)으로 지금은 안양3동이라 불리우지요.
안양시사 등 기록을 보면 이 마을에는 조선조 제 2대 정종의 7남인 수도군(守道君)의 증손 이공(지제부수) 이 처음으로 살기 시작한 이래 원주 원씨 등이 세거했답니다. 마을 명칭 에 대하여 양지(陽地), (陽智), (陽知), (陽至)등 문헌마다 다르게 기록되어 있는데, 이 마을의 지세가 양지바른 곳에 자리잡은 마을이므로 양지동(陽地洞)이라고 표기함이 옳다는군요.
이곳은 1928년에 지금의 안양3동 부근에 안양산업사(安養産業社)란 안양 최초의 공장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광복직전 일제강점기에는 아사히학교가 설립 되었고, 광복 직후에는 안양중학교(1948), 안양공고(1949)를 개교해 산업 역군을 배출하던 학교를 유명세를 날렸으며 이후 안양서초, 안양예고, 안양여상, 안양외고, 연성대학교 등 초등학교에서 대학교까지 들어서 안양에서 학교들이 가장 많이 운집한 지역으로 안양교육의 요람지라 할 수 있지요.
양지동은 안양을 대표하는 시인 김대규(金大圭1942-2018)의 출생지이며, 방송작가 이서구(李瑞求1899-1981), 소설가 채만식(蔡萬植1904-1950), 시인.평론가 정귀영(鄭貴永 1917- ), 시인 성기조(1934- )등 문인들이 살며 문학 활동을 한 곳이기도 합니다. 특히 특히 1938년 <조선일보>에 '탁류'를 연재하는 등 일제강점기에 풍류작가로 평가받고 있는 전북 군산의 대표적 작가인 채만식이 1940년 이곳으로 이사와 살다가 1941년까지 살았는데 당시 이곳에서 살던 얘기를 쓴 안양복거기<安養卜居記>가 매일신보에 발표되기도 했지요.
현 안양과학대학 자리에는 절이 있었으나 빈대를 잡으려고 붙인 불이 원인이 되어 화재로 소실되었으며, 1928년에는 엄기승이 안양3동사무소 부근에 안양 최초의 회사인 안양산업사를, 현 대농단지에는 1932년에는 조선직물이 들어섰고 광복이 되자 그 자리에 금성방직이 설립되었는데, 조선직물은 군복용 광목을 생산하던 곳으로 해방직전인 1944년에 군수공장으로 운영되어 프로펠러 전투기 생산에 나섰다가 조립과정에서 폐망하며 문을 닫습니다.
수암천 건너편의 현 성원아파트 자리는 일제 때 일본인이 내하목제회사를 운영하다가 해방 후 삼영하드보드회사로 바뀌어 건축자재를 생산하던 곳으로 당시 수암천물은 펄프찌거기가 쌓여 주민들이 이를 말려 땔감으로 사용하기도 했지여.
안양은 예전에 안양포도로 유명했는데 그 이전에는 밤나무가 참 많았다고 합니다. 안양예고 자리는 노적봉이라 불리우던 산이었는데 1932년 조선일보신문에 전국 부녀자 밤줍기대회가 열렸다는 기사가 실릴 정도였답니다.

양지마을 옆에 있는 삼덕공원에 자리했던 삼덕제지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살펴볼까요?

삼덕제지 자리에는 일제강점기 당시인 1941년 일본인 고토우가 설립한 삼왕제지가 있었는데 일반 종이류의 제조 및 가공 판매, 제지업 관련 투자 등을 목적으로 설립되었는데 자본금은 49만 원이었으며 최초 12만2500원이 불입되었는데 모조지 생산에 주력했답니다.
경영진은 사장 이하 4명의 이사와 2명의 감사로 구성되었는데, 모두 일본인이었으며 삼왕제지의 설립 후 일제 패전 시까지의 경영 실태에 대해서는 자료가 없어 내용을 잘 알기 어렵습니다.
해방이 되면서 일본인이 떠나고 삼왕제지는 귀속기업체로 미군정에 접수되었고, 정부 수립 후 대한민국 정부에 이관되었다가 휴전 직전인 1953년 6월 관리인이었던 조경묵(曺庚黙)에게 174만 환에 불하되지요.(안양시 연표에는 1945년 11월 25일 설립. 좀 더 확인해야 할 사안 )
조경묵은 회사명(社名)을 삼덕제지(三德製紙)로 바꾸고, 운크라(UNKRA) 원조자금을 받아 시설을 개선하여 모조지와 선화지를 생산하는 등 본격적인 경영을 시작하였으나 회사 운영은 순탄하지 않았고, 1950년대 말에는 경영난에 직면한 것으로 보입니다.
결국 1961년 조경묵은 개성 출신의 전재준(全在俊)에게 경영권을 넘겨 이후 2003년 삼정펄프주식회사에 흡수·합병될 때까지 경영을 지속하였는데 삼덕제지는 신문지와 함께 국내 제지업계의 양대 축이었던 백상지(모조지) 생산 분야의 선두기업으로 자리잡지요.
삼덕제지에서는 공장 수암천으로 종이슬러지가 흘러나왔고, 갈수기에는 삼덕제지 아래쪽 하천이 이 슬러지로 뒤덮일 지경으로 오염되기도 하였으나, 모든 물자가 귀하던 1960년 이전에는 인근주민들이 이 슬러지로 땔감으로 쓰기도 했는데 병목안 철길과 천변 뚝방은 물론 인근 집등 마당에는 슬로지를 말리는 풍경이 펼쳐졌지요.
삼덕제지는 2003년 7월 폐업합니다. 기업주인 전재준 회장은 11월 3일 공장부지를 공원으로 만들 것을 조건으로로 안양시에 기부하였는데 일방적인 굴뚝 철거와 지하주차장 조성 등으로 시와 기증자간에갈등을 빚기도 하다가 2007년 7월18일 공원 조성 공사를 착공해 2008년 11월에 삼덕공원이라는 이름으로 기업의 역사를 남긴 공원이 만들어지지요.


 

 

 

안양탐사대는 도시와 마을과 동네의 골목길에서 사라지고 변화되는 흔적들을 찾아 지난 2003년 2월부터 매주 토요일 마을과 동네 골목길을 걷는 마실을 해 왔습니다. 사진, 영상, 스케치, 이야기 등으로 도시를 기억하고 기록하고 이를 통해 또다른 프로젝트, 기획 등을 해보려는 도시.마을.골목연구, 건축, 사진, 걷기 등에 관심있는 시민은 탐사여정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탐사에 참여코자 하시는 분은 SNS 페이스북 안양기억찾기탐사대 ( www.facebook.com/groups/132023160294699/ )에 접속후 신청해 주시거나 전화주시기 바랍니다. 문의: 길잡이 최병렬(016-311-1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