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지역얘기/담론

[이영철]헤테로토피아적 환경에서의 균형찾기

안양똑딱이 2016. 6. 30. 15:18
[이영철]헤테로토피아적 환경에서의 균형찾기

[2005/12/19 계원조형대 교수]
헤테로토피아적 환경에서의 균형찾기

2003년 초겨울, 안양유원지에 조성될 조각공원의 자문위원 중 한 사람으로 이곳을 처음 봤을 때 무척 흥미로웠다. 하천을 따라 펼쳐진 산과 아늑한 숲 그리고 허름한 무허가 상가들이 형성하는 계곡 풍경이 매우 인간적이고 독특한 정취를 풍겼기 때문이다. 산과 하천이 많은 한국에는 전국에 이런 곳이 많다. 게다가 우리의 역사가 오랜 만큼, 장소들은 나름의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다. 오랫동안 묶여 있던 그린벨트가 풀리면서 개발이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개발의 관행이나 수준의 한계로 인해 장소가 가진 고유한(vernacular) 속성, 시간과 역사의 흔적은 거의 제거되고 만다. 낙후 지역에 대한 개발의 필요와 그에 따른 부작용이 어쩔 수 없이 공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은 나에게 큰 고민거리가 되었다.

지식인이자 예술인의 한 사람으로서 지금까지 배우고, 가르치고, 꿈꾸어 온 것들이 공적인 공간에서 전혀 실현되지 못하는 현실에 개탄해 봐야 소용없고, 제도 비판의 말과 글은 사태가 벌어지는 현장의 당면 문제 해결에 미치지 못했다. 유원지에 조각공원을 조성하는 일은 문제 해결에 사실상 아무런 보탬이 되지 않기에 내가 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고, 사태의 본질에 접근할 중요한 기회라고 여겨 공공예술 프로젝트를 제안했다. 국내 혹은 지역 수준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국제 공공예술 프로젝트가 되어야 글로벌 무한경쟁시대에 지방 도시가 문화-경제적으로 ‘도약’할 기초를 닦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맨 파워, 시스템 부재, 지역 폐쇄주의 등으로 인해 여러 곤경을 넘어야 했다.

2003년 12월부터 4개월간 유원지 조각공원 조성을 위한 연구 용역을 맡으면서, 매달 1회씩 발표회를 가졌고, 시장 회의실에서 4회에 걸쳐 총 16시간의 발표와 치열한 토론의 기회가 있었다. 새로운 관점, 야심 찬(?) 플랜에 대해 시장의 비상한 관심과 전폭적인 지지, 놀라운 열정에 큰 힘을 얻었고, 이미 진행되고 있던 유원지 개발 플랜에 대한 과감한 지적과 대안이 검토되었다. 이것은 내가 그 동안 광주, 부산, 서울에서 전혀 겪어 보지 못한 새로운 경험이었다.

2004년 8월 시장 일행과 공공예술에 관련하여 일본의 도시와 농촌 세곳을 방문했고, 안양시는 즉시 유원지 개발의 막바지 상황(도시 자연공원 조성사업)에 국제 공공예술 프로젝트를 개입시킬 계획을 수립했다. 조각공원 조성을 위해 이미 확보된 예산을 두 번이나 반납한 뒤, 특별 조례를 제정하고 다시 공공예술을 위한 예산을 시의회에 통과시킨 후 이 일을 추진하게 된 것이다. 152채의 낡은 무허가 음식점 건물이 즐비한 문화 제로 지대에 선진형 예술공원이 들어서는 희안한 순간을 맞게 된 것이다. 리서치를 해보면 곧 드러나겠지만 이는 국내 뿐 아니라 아시아 어느 도시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사례일 것이다.

공공성과 예술성의 결합


먼저 낯선 용어인 공공예술을 정의해 보아야겠다. 공공예술이란 간단히 말해 공공 장소에 설치, 전시되는 예술 작품이나 활동을 지칭한다. 우선 그것은 ‘공공’이라는 사회적 개념과 공적 공간이라는 장소 개념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오늘날 사용되는 공공예술의 공공이란 개념은 19세기 계몽사상에 뿌리를 둔 ‘평등사상’에서 출발했다. 왕정이 무너지고 새로이 대두된 시민 사회 계급은 태어날 때부터 상하가 정해진 계급 개념을 부정하고 모든 이가 동등한 정치적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평등한 개인의 집합체로서의 공공 개념을 바탕으로 새로운 사회 질서를 정립하였다. 이러한 개념을 시각화한 것이 지금 우리가 보는 국립박물관, 국립미술관들이다. 다분히 정치적인 색채가 강한 공공이란 개념이 20세기 후기산업 시대를 거치면서 대중(mass, popular)이란 개념과 구분하기 어려워졌는데, 대량 생산품을 소비할 수 있는 불특정 다수의 ‘소비자 집단’이, 정치적 개념인 ‘공공 개념’과 뒤섞여 버린 것이다. 그 후 공공 개념은 매우 추상적으로 인식된다. 공공을 추상적으로 인식한다는 것은, 동일한 권리를 가진 개인의 집합이라는 공공 개념이다. ‘동일한’ 권리라는 것은 실은 허구이고, 공공이라는 개념은 또 다른 지배체제의 질서 유지를 위해 파생된 개념이다. 시장체제에 부응했던 모더니즘 시대의 공공 예술들도 모더니즘 미술관과 크게 다를 것이 없는, 특정 계층(부르주아 백인 남성)의 취향과 미학을 반영하는 것에 머물러 있었다. 공공성을 내세우지만 실은 권력의 이데올로기를 표상하는 데 지나지 않은 것이다.

‘안양 공공예술 프로젝트(Anyang Public Art Project, APAP)’는 예술의 제 영역이 분리된 모더니즘 미술의 특정 분야로서의 조각공원을 거부하고 건축, 미술, 디자인, 조경이 결합된 넓은 의미의 ‘예술공원’을 국내 최초로 시도했다. 이런 시도는 도시 계획 안에서 한번도 고려된 적이 없는 예술의 필요성을 의도적으로 부각시키려는 구상이었고, 시장 주재하의 열띤 토론과 해외 사례의 조사를 통해서 이미 진행중인 유원지 개발, 즉 토목과 조경이 주가 되던 방식에 새로운 개념의 종합적 예술 플랜을 횡으로 가로지르는 것이었다. 이는 1970년대 이후 토목 중심, 1980년대 이후 조경 중심, 1990년대 이후 디자인 중심의 개발 플랜에 대한 반성을 통해 새로운 길찾기(heuristics), 새로운 종합적 감각에 예술을 개입시키는 일 단계 실험이기도 하다. 이때의 새로운 예술은 기존의 좁은 의미의 예술(제 영역의 분리에 기초한)이 아니며 ‘지리-예술(geo-art)’이라고 부르는 것이 좀더 근접하다는 관점에서, 건축, 미술, 디자인, 조경을 적당히 절충하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접합(articulation)시키는 것을 뜻한다. 즉 건축, 예술, 디자인, 조경을 단단한 중심에서 탈구시켜 부드럽고 색다르게 연결, 재사용하는 특이한 방식을 말한다. 결국 그것은 실제 환경 공간 안에서 거대한 비가시적인 매트릭스가 안으로 섞이며 새로운 시간·공간을 열게 된다. 이것을 해내기 위해 자연과 상가가 뒤섞인 기이한 생태 환경에서의 지리 읽기, 사용자들을 위한 다양한 용도의 작품들 간의 관계, 유원지라는 장소에 새겨지거나 사라진 것들을 불러 내는 상상적, 허구적 이야기 구성 혹은 지역적 특이성의 재맥락화 그리고 근대적 개발 방식에 대한 비판적 관점의 은유적 표현 등으로 짜이는 것이다.

이제는 이곳을 수백 번 오르내려서 눈을 감아도 구석구석이 그려질 정도가 되었다. 대규모 전시를 해 오면서 물리적 공간 전체를 구부리고 접었다 폈다 하는 연습을 많이 했기에, 넓은 옥외 공간에 도전해 본 것이다. 이미 여유 있게 터가 잡힌 곳도 더러 있지만, 나무와 잡목으로 우거진 새로운 장소, 새로운 사물을 발견하는 것은 아주 흥미로운 릴이다. 2개 정도의 후보지를 정한 후에 건축가, 예술가 들을 장소로 안내했고, 그들은 대부분 만족하며 그 장소에서 최선의 작업을 남기려고 노력했다.

하천변의 멋지게 구부러진 소나무 옆자리에 전통 한식 정자의 자리를 잡았더니 어떤 분이 풍수를 언제 공부했느냐고 물었는데, 풍수 공부한 적 없고, 단지 마음 낮추어 상황 속의 관계와 흐름을 보면 보인다는 말 밖에 답하지 못했다. 이것은 작품들이 자리잡을 때 아주 요긴한 방법이라 본다. 보이지 않는 선을 따라가다 보면 작품이 결국 제자리를 찾아가게 된다. 아직도 작품을 기다리는 지점이 몇군데 있다. 방문자들의 동선을 따라 유원지가 불교의 융성지였던 점을 고려해 전체 시나리오(플롯)를 구성했고, ‘리조트의 철학’을 의식하며 각 구역에 10개의 키워드를 부여했으며, 작품들이 각 구역의 적절한 부지에서 플랫폼으로 기능할 수 있게 했다.

안양시가 산의 숲과 광장을 중심으로 행정 명칭을 ‘도시자연공원’이라 붙여서 예술을 개입시킨 이 프로젝트를 부르기 쉽게 ‘예술공원’이라고 칭하고 있지만 기획의 최초 구상은, 모더니즘에서 특정 분야로 취급돼 온 조경공원이 아니라, 다양한 분야의 예술이 있는 산 속의 넓은 ‘자연 숲’을 생각했다. 홍송이 유난히 아름다운 이곳 숲은 인위적으로 조성하거나 많이 손을 댄 공원과는 전혀 달라야 했다. 돈이 없어서 공원을 만들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숲 자체에 전망(view)을 개입시켜 새로운 복합적 풍경(landscapes)을 만들어 볼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디자이너 안상수는 오로지 이 지역의 자연석을 이용한 표지판을 고수했다. 이것은 또한 비토 아콘치의 웜홀 주차장, 켄고 쿠마의 평상 파빌리온, 천대광의 은하수 평상, 사미 린탈라의 천상의 다락방, 헤르만 마이어 노이슈타트의 자연영화관, 예배 하인의 거울 미로, 볼프강 빈터의 빛의 집, 에코 프라워토의 대나무 사원, 클립의 동물원 숲길, 헬렌 박의 쉼터 등에서도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이 밖에도 나빈 라완차이쿨은 ‘파라다이스 안양’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대형 영화간판, 만화책, 불화, 게시판 등을 제작하여 설치했다. 불교적 의미에서 ‘극락정토(유토피아)’를 뜻하는 ‘안양(安養)’에 착안하여 태국 불교에서 볼 수 있는 극락 이미지와 한국의 이미지가 결합한 현대적 풍속화를 그려 넣어 기존 정자(亭子)를 리모델링한 것이다. 건축가 디디에 피우자 파우스티노는 공용주차장에서 필요한 관리실을 고려하여 매우 독특한 실험적 건축물인 1평 타워를 만들었고, 올해 베니스 비엔날레의 벨기에 국가관에 혼자 참가했던 설치미술 작가 호노레 도는 조경 영역에 속하는 하천 분수를 만들었다. 〈물고기의 눈물이 강으로 흐른다〉라는 긴 제목의 이 분수 작품은 1970년대 말 대홍수 당시 산에서 굴러 떨어진 두 개의 거대한 돌 위에 세워진 조형적 구조물이다. 13개의 노즐에서 각기 다른 형태의 물줄기가 다른 시간대로 물을 뿜는다. 물론 호노레 도는 이런 작업을 여기서 처음 하는 것이다. 모든 작품은 장소의 특이성에 맞게 제작된 ‘장소특정형 작업(site specific work)’이다. 우리는 실험적인 전위예술에서 건축과 조경 영역으로 진입해 들어간 대표적인 예술가로 비토 아콘치를 가장 먼저 떠올린다. 1980년대 말부터 젊은 건축가 엔지니어들과 함께 아콘치 스튜디오를 운영해온 그는 나이의 한계를 초월하여 대단히 참신한 상상력과 실험을 과시하고 있다. 우리는 그를 어렵게 섭외했고, 기본 설계를 끝마치고 현재 재공사 도면으로 전환중이다. 주차장과 숲과 야외무대를 170m의 긴 터널로 연결하고 터널은 3.5m 높이로 숲을 가로지르게 된다. 이 모든 작업은 유원지의 지리적 특성 안에서 새롭게 설계되는 것들이므로 오리지널한 신작이다.

예외적으로 볼프강 빈터의 플라스틱 작품은 1997년 뮌스터 프로젝트 당시와 비슷한 색채와 패턴으로 되어 있어 그것을 재현한 것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부지에 맞게 크기, 패턴, 바닥 면과 채색, 조명을 달리했다. 왕두의 작품은 재건축 됨에 따라 곧 사라져 버릴 남루하기 짝이 없는 152채의 무허가 건물 중의 일부를 사진으로 찍어 흰 대리석에 조각한 후, 1km 하천 바닥에 띄엄띄엄 그냥 놓았다. 한 개의 무게가가 1톤으로 물에 쉽게 떠내려 가지 않는다. 이 소형 대리석 집들은 물과 바람에 의해 서서히 사라져 가는 유원지의 마지막 증인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이번 프로젝트에서 초점이 되는 알바로 시자의 건축물은 ‘건축의 시(詩)’로서 너무도 훌륭한 수공적 예술품 같다는 높은 평가와 그런 작품을 하는 건축가는 사업가가 아니라 이미 탁월한 예술가라는 경험적 판단 때문에 접촉 대상 1순위였고, 간신히 연락이 닿아 포르투갈로 즉시 날아가 그의 인품과 작품에 완전 감동하고 말았다. 놀라운 것은 그렇게 아름다운 건축가의 작품이 아시아 국가들 가운데 아직 한 군데도 없다는 사실이었고, 안양유원지에 그의 작품이 만들어진다는 소식에 이번 일을 함께한 프람 기타카와나 일본건축가들이 크게 놀라기도 했다. 그의 건물은 전체 240평 정도의 전시관인데, 천장이 셸(shell) 구조 공법으로 지어지고, 내부 150평의 전시실은 최고 높이가 7미터에 기둥이 전혀 없이 높이가 각기 다른 백색 노출 콘크리트에 얹혀지는 동적인 구조물이다. 현재까지 깔끔하게 진행되고 있으며, 완성도 높은 작품이 나오리라 기대하고 있다. MVRDV는 젊은 건축가들 사이에서 가장 신뢰도가 높다는 점 그리고 장소의 데이터 분석을 기초로한 뜻밖의 상상력으로 결합하는 놀라운 감수성 때문에 일단 대화를 잘 풀어가 보자는 치밀한 계획을 세워 스튜디오를 방문했는데, 그들은 우리의 취지와 목표를 아주 잘 이해했다. 그들은 준비중인 큰 프로젝트가 많았지만 아주 적은 설계비에 안양의 〈산타클로스 프로젝트〉를 수락했다. 파리의 퐁피두 센터 앞 보부르 카페에서 밤 12시에 일본 건축가 시게루 반을 만나 참여 의사를 듣고 나서 안양 프로젝트가 어쩌면 작은 기적을 낳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시게루 반은 퐁피두 분관을 설계중이어서 너무 바빠 나중에 참가를 포기하고 말았다. 시간, 예산의 한계가 분명하므로 아예 솔직하게 단도직입적으로, 그러나 열성을 갖고 프로젝트의 목표, 기대 효과 등에 대해 설명했다. 직접 만났으나 이번 기회에 참여하지 못한 건축가들도 여럿 있다. 프랑스의 도미니크 페로, 일본의 시게루 반, 덴마크의 PLOT, 네덜란드의 WEST 8, 프랑스의 R & Sie, 일본의 세지마 등이다. 이들은 현재 활동하는 쟁쟁한 건축가들이라 할 수 있다. 한꺼번에 일이 밀려 참여하지 못한 사람도 있지만, 우리의 기대(상호 신뢰, 설계비)에 맞지 않아 배제한 경우도 있었다. 예산상의 한계가 컸지만 몇몇 예술가들은 아이디어가 우리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 나중에 제외하기도 했다. 이 프로젝트에 참여한 건축가, 예술가 들은 처음에는 이것이 과연 가능한지 의구심을 갖는 경우도 있었지만 치밀한 진행 과정에 대해 매우 놀랐고, 무엇보다 어려운 조건에서도 스태프들이 맹렬하게 일하는 모습에 감동했다.

문화 선진국이라는 말이 헛된 정치적 슬로건이 되지 않으려면 이제는 도시 발전에 건축과 예술이 긴밀히 합해져 도시 계획의 중심에 서야 한다. 필자의 주관적 견해이지만 새로운 개념의 건축과 예술을 배제한 대규모 청계천 개발 방식은 시대 착오이고, 낙후된 개발이 오히려 향후 수십 년 간 선진적 방향 자체를 차단시키는 과오를 범했다고 본다. 선진국에서는 오히려 도시가 없는 건축, 건축 없는 도시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건축 개념에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유동적 건축(mobile architecture), 소프트 건축(soft architecture)이란 표현이 나오고, 이런 주장을 효과적으로 매개하는 것은 예술의 비정형성, 유연성이다. 안양은 불교의 극락 정토를 뜻한다. 서양식으로는 파라다이스, 유토피아 등과 유사한데, 2년 전 안양유원지를 처음 보았을 때, 허름한 상가 건물이 길게 늘어선 아름다운 계곡에 유토피아 프로젝트가 성사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옆자리에 있던 조경과 교수에게 그런 말을 한 것이 기억난다. 하지만 유토피아는 존재하지 않을 뿐 아니라 역사적으로 모두 실패했으니 그런 순진한 제안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지역의 도시화가 수반하는 과도한 경쟁으로 인심이 파괴되는 마당에 유토피아는 거짓 수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안양 프로젝트를 유토피아가 아니라 헤테로토피아 이야기로 개념적 방향을 잡았다. 인공(도시)/자연, 근대/탈근대, 키치/예술이 공존하는 헤테로토피아 풍경인 것이다.

도시 개발과 문화 마케팅

공공예술은 시민의 세금으로 이뤄지는 것이므로 전적으로 시민들에게 그 수혜가 효과적으로 돌아가야 하고, 시민의 참여를 유발하여 함께 만드는 시도도 다양해져야 한다. 그것은 단순한 참여가 아니라 사전에 좀더 실증적인 사회학적 연구 조사가 선행되어야 하고, 필요한 분야들 간에 협동 프로젝트가 기획되어야 한다. 다만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이 프로젝트가 행정적 자선행위와 혼동되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다. 늘 긴장감을 잃지 않고 수준을 조절해야하며, 시민들의 문화의식을 높이기 위해 공공시설물을 공공 키치 수준으로 떨어뜨리지 않고, 예술 작품을 공적인 영역에서 다양하게 접할 수 있는 기회를 넓히고, 예술적 순도를 높이면서 기능성을 유지하는 방식을 지속적으로 창출하는 일이다. 많은 분들이 이 짧은 기간, 적은 예산에 어떻게 이런 건축가, 예술가 들을 초청할 수 있었는지 궁금해한다. APAP는 장소의 맥락에 대한 창의적 해석과 디자인 없이 오로지 기능적 목적에 따르는 공사들을 일시 중단시키고 성립된 것이지만 핵심적 의미는 아직 잘 전달이 되지않는 것으로 보인다. 대중 홍보 차원에서 APAP가 안양유원지를 관광 명소로 만드는 일에 예술과 건축이 막판에 끼어들어 긍정적인 기능을 한 것으로 평가되지만, 예술가와 건축가들이 이곳을 관광지로 만들어 주는 사업 목적에 참여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프로젝트의 첫 테이프를 끊기 위해 필요한 문화산업용 홍보 슬로건이다. 하지만 만일 그런 목적으로 예술가들을 섭외했더라면 모두 참가를 꺼렸을 것이고, 설령 참가하더라도 설계비나 디자인비를 많이 요구했을 것이다. 또한 예술의 관점에서 이 프로젝트가 조각공원을 만들거나 야외에서 벌이는 흔한 국제 전시 이벤트나 새로운 국제 비엔날레라고 한다면, 마찬가지로 건축가들이나 예술가들이 이 부족한 시간, 적은 예산, 알려지지 않은 한국 소도시의 불확실한 프로젝트에 참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안양유원지의 장소적 의미와 역사의 문맥, 도시화와 탈산업화 과정에 소외된 지역을 예술의 개입으로 활성화한다는 사실로 작가들에게 자신이 참여할 수 있는 분명한 명분을 만들어 주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만일 낙후하고 가난한 지역에 대한 일반적 수준의 행정적 자선행위에 예술을 결합시키자고 요구했다면, 이 프로젝트는 참가자들로부터 집중적인 관심과 에너지를 모을 수 없었을 것이다. 국가 내에서 특정 지역이 수도에 문화적으로 종속되지 않고, 독자적 특성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국가 너머의 바깥 세계와 교통할 수 있는 루트를 끊임없이 개척하고 유지해 가는 노력이 필요하다.

안양시에서는 내년에 공공예술을 도심으로 확대해 배기구, 환기구, 게시판, 스트리트 퍼니처 등을 제작하려고 한다. 2007년에 제2회 APAP를 하게 되지 않을까 기대하며, 일단 시청 안에 관련 부서들을 통합해서 효율적인 공공예술 추진 시스템을 구축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 안양시가 국내에서 가장 앞서가는 공공예술 프로젝트의 발원지가 되리라 믿는다. 그리고 다른 시군들에도 점차 확대되어 가기를 기대한다.

2005-12-19 10:39: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