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원 21

[기억-정진원]어릴 적 제비울@꿈속고향.사이버허공

제비울@꿈속고향.사이버허공 어릴 적 제비울은 꿈속에 있었던 동네였다. 하늘가 어디엔가 있었을 미지의 땅(terra incognita)이었다. 가끔 어른들의 이야기 결에 들려오곤 했던 동네 이름이었다. 그 이름이 조금은 특이해서 일찍이 어린 아이 뇌엽에 끼어들게 되었나보다. 시골 동네 이름들이 대개 새터, 양지편, 벌말, 논골 등 사실적인 것들이 대부분인데, 제비울이란 이름은 이색적이다. 아름다운 지명이다. 그곳 이야기는 무슨 먼 나라 이야기처럼 들렸었다. 고향 마을 덕장골의 작은 분점이 어느 산 구석에 떨어져 있는 것으로 생각되기도 했었다. 왜 제비울이라 하였는지 모른다. 봄날에 제비들이 먼저 찾아와 울안으로 왁자지껄 모여드는 고요한 동네여서 붙여진 이름일 것이다. 제비들의 동네였던가 보다. 제비는 그 ..

[기억-정진원]마음속의 청산 청계산과 청계사

청계산(淸溪山)은 어릴 적 우리들 마음속의 청산(靑山)이었다. ‘살어리랏다’ 청산이었다. 나무와 풀들과 온갖 덩굴들이 어우러져 숲이 되고, 숲이 수해를 이루어 우리들은 파도를 타듯이 울렁대는 수림 위에서 자맥질했다. 아니 운해가 되어 스펀지 구름 위에서 텀블링을 하듯이 했었다. 아프리카에만 따로 밀림에 타잔이 있는 것이 아니었고, 너구리나 고라니만 우리와 아주 다른 산짐승이 아니었다. 머루랑 다래랑 널려 있었다. 우리들은 청산에 청사슴이 되어 나무 사이를 뛰어다니거나, 아니면 그곳에 청벌레가 되어 나뭇잎 뒤에 붙어 있어도 좋았다. 살고 싶다, 살고 싶다. 푸른산에 살고 싶다. 머루랑 다래랑 먹고 푸른산에 살고 싶다. 「청산별곡(靑山別曲)」첫 연 청계산 깊숙한 속에 청계사 절이 있었다. 한직골, 새말, 토..

[기억-정진원]안양읍내 이야기

지금은 경기도 안양시가 되었지만 전에는 시흥군 안양읍이었다. 시흥군에 딸린 하나의 읍이었다. 군에 딸린 면 소재지가 도시 모양을 갖춰가면서 인구수가 2~5만 명 정도가 되면 읍이 되었다. 당시 안양읍의 다운타운에 안양읍사무소, 남쪽으로 조금 떨어져서 시흥군청, 군청 맞은편 길 건너로 안양경찰서가 있었다. 그 길로 조금 나가면서 왼쪽으로 안양성당(지금 안양중앙성당)이 있었고, 거기서 성당을 끼고 왼쪽으로 돌아 올라가면 냉천동이었다. 언덕배기에 구세군 교회가 있었다. 읍사무소에서는 정오가 되면 사이렌이 울려서 정오를 알렸다. 시계가 드물던 시대의 관의 대민 서비스였다. 당시엔 교회들도 주일 오전 11시 예배를 알리기 위에서 30 분 전에 초종, 11 시에 재종을 쳤었는데, 그 종소리가 조용한 시골에서는 십리..

[기억-정진원]의왕 청계사 초입 언덕배기 '옥박골' 지명유래

마을이름을 대할 때에는 그냥 가까이 가서, 있는 그대로 보고, 쉽게 이해하려는 태도가 필요하다. 필요에 따라 마을이름을 상고할 때에는 내 안에 먼저 들어와 있는 선입개념을 버리고, 본질을 ‘바로 보는(직관)’, 이른바 ‘현상학적 방법’이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버려야 할 것 가운데 우선은 ‘한자(漢字)’의 우상이고, ‘한자화(漢字化)’의 오류이다. 한자화는 본래말보다 더 좋은 뜻으로 음역한 경우도 있지만, 전혀 엉뚱한 한자를 쓴 경우가 허다하다. ‘참새울[작동(雀洞)]’하면 얼마나 아름다운 마을이름인가, 그것을 ‘진조동(眞鳥洞)’이라 했고(연천군 백학면), ‘쇠무덤’은 소의 무덤이란 뜻인데, 그것을 셋이 모였다는 뜻으로 ‘삼회리(三會里)’라 했으니(가평군 외서면) 우습지도 않다. 마을이름에서 쉬운 것을 어..

[기억-정진원]의왕 오매기 마을 지명유래

의왕시 오전동에 오매기란 마을이 있다. 지금 의왕문화원이 있는 곳에서 위쪽으로 백운호수 쪽으로 넘어가는 고개 밑에 있는 동네이다. 그곳에서 아래로 사나골, 용머리, 목배미, 뒷골, 백운산 등 작은 마을들을 합쳐서 넓게 오매기라 부르기도 했었다. 8ㆍ15 해방 때에 약 70호 정도였다고 한다. 어떤 분은 그곳에 집[막(幕)]이 다섯 채가 있어서 ‘오막(五幕)>오막이>오매기’가 되었을 것으로 보는데, 그것은 적절치 못한 것으로 생각한다. 그 골짜기에 동네가 형성될 때에 집 다섯 채가 한꺼번에 만들어질 수도 없었을 것이며, 그렇게 되었다 해도 마을이름을 바로 ‘오막(五幕)>오막이>오매기’로 부르게 되었다는 것은 지나친 견강부회이다. 움막이 아닌 다음에야 집을 막(幕)이라 하지는 않았으며, 다섯 채 집이 만들어..

[기억-정진원]덕장초등학교의 추억, 분유와 디디티

초등학교의 추억, 분유와 디디티 모두가 6ㆍ25 전쟁 이후에 시골 초등학교에서 벌어졌던 일들이었다. 요즘하고 달라서 당시 시골의 초등학교는 새로운 변화와 놀라운 쇄신의 중심점이었다. 우선 책상과 걸상이 있는 교실이 얼마나 기이한 공간이었던가. 언제 의자라는 것에 앉아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유리창이 있는 교실, 기다란 복도, 잃어버리면 어쩌나하면서 고무신을 얹어놓곤 했었던 복도 끝에 있었던 신발장, 분필과 흑판, 처음에 낯설었던 동무들 등이 모두 예사로운 것들이 아니었다. 바야흐로 배워서 알게 되는 신학문의 깊은 맛을 무엇에 비견할 것인가. 양주동이 영어 문법 공부의 처음에 나오는 3인칭의 의미를 알기 위해서 눈길 얼마를 걸어가서 그 뜻을 배워 알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지 않은가. 너와 나를 뺀 우수마발..

[기억-정진원]학의천은 알몸일 때까지만 벌모루 개울이었다

알몸일 때까지만 벌모루 개울이었다 청계산 청계사 옆 골짜기에서 시작된 작은 실개울 물은 상청계ㆍ중청계ㆍ하청계를 거치면서 물이 조금씩 불어나 한직골 옆에 이른다. 하우고개, 원터, 독쟁이 쪽에서 내려온 물도 한직골 조금 아래쪽에서 그 물과 합쳐졌다. 광교산 바라산 골짜기에서 흘러내린 물과 능안 쪽 모락산에서 내려온 물이 백운호수에 고여 있다가 무넘기를 넘쳐 내려서 삼벌내에서 다른 두 물줄기와 합해서 아래로 흘러내렸다. ‘삼벌내’라니, 세 갈래의 물이 합쳐져서 된 시내라는 뜻인가 보다. 이 물줄기가 양지편 앞, 벌모루 앞을 지나 흐르는데, 안양 쪽으로 흘러가므로 안양천이라 부르다가 지금은 학의천이라 한다. 덕장골 안의 두 실개울, 우리 집 옆을 흘러내린 물과 동편 사당골에서 흘러내린 물이 벌모루에서 학의천과..

[기억-정진원]장터(장대 場垈)

장(場)이 서던 곳이 장터이다. 대개는 오일장, 닷새에 한 번씩 장이 서는 정기시였다. 물건(상품)의 수요공급의 균형을 시간 차로 조절하던 전통시장 시스템이다. 그래서 정기시 장터를 돌아다니면서 물건을 파는 장돌림(장돌뱅이)이 있게 마련이었다. 전국 어디에나 그런 장터가 있었다. 이른바 전통시장으로 명맥을 지키고 있는 곳도 있지만 도시화가 진전되면서 대개는 대규모 상업지역, 상가로 변화되면서 퇴색되어 버렸다. 안양에도 안양장이 열렸었다. 비산동에서 임곡교를 건너면 바로 오른쪽으로 소시장, 왼쪽으로 태평방직공장이 있었고, 그곳에서 철도 길까지 좌우로 안양(시)장이 있었다. 새 시장이 만들어지면서 그곳이 구시장이 되더니, 지금은 장터 흔적조차 찾기 어렵다. 장터에 얽힌 이야기는 다 말할 수 없이 많다. 독립..

[기억-정진원]읍내, 안양

지금은 경기도 안양시가 되었지만 전에는 시흥군 안양읍이었다. 시흥군에 딸린 하나의 읍이었다. 군에 딸린 면 소재지가 도시 모양을 갖춰가면서 인구수가 2~5만 명 정도가 되면 읍이 되었다. 당시 안양읍의 다운타운에 안양읍사무소, 남쪽으로 조금 떨어져서 시흥군청, 군청 맞은편 길 건너로 안양경찰서가 있었다. 그 길로 조금 나가면서 왼쪽으로 안양성당(지금 안양중앙성당)이 있었고, 거기서 성당을 끼고 왼쪽으로 돌아 올라가면 냉천동이었다. 언덕배기에 구세군 교회가 있었다. 읍사무소에서는 정오가 되면 사이렌이 울려서 정오를 알렸다. 시계가 드물던 시대의 관의 대민 서비스였다. 당시엔 교회들도 주일 오전 11시 예배를 알리기 위에서 30 분 전에 초종, 11 시에 재종을 쳤었는데, 그 종소리가 조용한 시골에서는 십리..

[기억-정진원]안양, 역전부락

먼저 경인선, 나중에 경부선 철로가 깔리고, 여기저기 역이 만들어지고, 철마(기차 汽車)가 놀라운 길이와 크기와 대단한 위세로 기적(汽笛)을 울리며 달리는 모습은 보기만 하여도 하늘이 놀라고, 땅이 흔들릴 정도의 일이었다. 시골 마을길에 소달구지가 고작이었던 시절에 벌어진 사건이었다. 그때가 어떤 세상이었다는 것과 그 철도, 철마, 역을 만든 사람들이 누구였다고 하면 공연히 친일 사대주의자들을 추어주는 것이 될 것이므로 알 만한 이는 아는 것이므로 이만 해 둔다. 여하튼 그렇게 만들어진 역은 신문명·문물·인류가 이합집산하는 거점이 되었다. 60여 년 전 필자는 안양역에서 노량진역까지 기차로 통학했었다. 당시 안양역은 단층짜리 역사였다. 그땐 대단한 것이었으나 지금 생각하면 보잘 것 없는 건물이었다. 입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