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포장 5

[20190329]군포시, 오는 30일 100년전 군포장역앞 만세운동 기념

군포시가 100년 전 군포장(軍浦場) 역 앞에서 일어난 항일 만세운동을 기념하는 행사를 오는 3월 30일 개최한다. 이날 시는 전철 1호선 군포역 일대의 교통을 통제하고 특별 무대를 설치, 1919년 3월 31일 목숨을 위협하는 일본군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항일 독립 만세운동을 전개한 시민들(현재의 군포, 안양, 의왕 거주민 2천여명)의 애국심을 기리는 기념식을 진행한다. 먼저 오전에는 공식 기념행사와 100년 전 만세운동을 전문 배우 10여명과 시민 200여명이 재연하는 거리극, ‘군포에 울려 퍼지는 대한독립만세’라는 주제의 기념공연 등이 진행돼 100년 전의 감동과 열망을 재현한다. 이어 오후에는 군포시립여성합창단 등의 출연하는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면’이라는 주제의 기념음악회, 군포지역 청소년들의 ..

[자료]군포라는 이름은 어디에서 비롯되었나?

군포라는 이름은 어디에서 비롯되었나? 사람들에게는 모두 각자의 이름이 있듯이 땅에는 땅 이름, 즉 지명(地明)이 있다. 지명은 인류의 사회생활과 더불어 자연발생적으로 나타났으며 그 지역의 주변 환경과 역사, 이에 대한 의미부여 등 여러 가지 요인이 다양하게 얽히면서 생겨나게 되었다. 따라서 지명에는 그 지역에 대한 역사와 풍속, 문화 등은 물론 그 지역의 독특한 자연환경이나 생활풍습 등이 녹아있는 경우가 많다. 지명에 대한 유래를 살펴보는데 있어서 먼저 해야 하는 것이 있다면 그 지명에 대한 의미를 해석하는 일이다. 지명이 고유어(순 우리말)라면 이에 대한 의미를 찾아보는 것이고, 한자어가 있다면 그 한자어에 담긴 의미를 해석해 보는 일이다. 군포시는 1979년 5월에 시흥군 남면에서 군포읍으로 승격하였..

[최병렬]군포장의 변천과정 이야기

사람들의 왕래에 영향을 미친 또 하나의 요소는 장시이다. 장시는 15세기 말에 발생하여 조선 후기에는 전국적으로 5일장의 형태로 발전했다. 일반 백성들은 장시에서 잉여 물자를 팔고, 부족한 물자를 보충하였다. 따라서 장시는 일반 백성들의 왕래에 중요한 요인이 되었으며, 옛길의 형성에도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안양시 지명유래』에 따르면, 군포장(軍浦場)은 수원에서 지지대 고개를 넘어 안양을 거쳐 한양으로 가던 시흥로 역로(驛路)의 중간 지점인 현재의 호계동 삼신아파트와 진우아파트 지역에 인접한 구군포 사거리와 안양천(맑은내, 군포천) 사이로 지금도 이곳 구장터 부근 도로는 구군포길로 불리우고, 옛 군포장이 위치하던 지역은 ‘구장터1로’에서 ‘구장터3로’까지의 도로 명칭을 지니고 있어 이곳이 장터였음을 보..

1939년 군포장-부천 버스 운행한 소신여객

#군포 #부천 #소신여객 #기록 #기억/ 1930년 합자회사로 출발해 현재도 31개 노선에서 운행되고 있는 경기도 부천의 대표적인 운수회사인 소신자동차부(소신여객)의 1939년 11월 1일 촬영한 모습으로 지금의 부천역 남부,조흥은행 동쪽 건너편이다. 소신여객의 소신은 설립 초기 운행 구간이었던 소사리(素砂里, 현 부천시 소사동 및 소사본동, 신천리-현 신천동의 앞 글자를 딴 것이다. 새해 첫날을 기념하여 운전기사, 종업원 등 직원들이 함께 촬영한 것으로 보인다. 사진 오른편 간판에 버스가 운행하는 신천, 포리, 안산, 반월 군포장이란 글자가 보인다. 출처: 부천시 홈페이지 http://btv.bucheon.go.kr/site/program/board/photoboard/view?currentpage=1..

[자료-최고당]군포장(軍浦場)을 아시나요.

군포장(軍浦場)을 아시나요. 군포장 (軍浦場)은 과거 인근 충청도에까지 입소문이 흘러 장돌뱅이들과 장꾼들을 불러 모아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한다. 웬만한 장꾼들이라면 을 모르는 사람들이 없을 정도였다고 하니 그 규모가 얼마나 컸던지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겠다. 어린 시절, 장날은 명절 다음으로 기다려지는 설렘이었다. 장에 가신 아버지의 손에 들려 있을 자반고등어와 총천연색이 어우러진 사탕, 그 사탕가운데 가장 인기가 있었던 것은 줄무늬가 들어간 왕눈깔 사탕이었다. 입안에 넣으면 오랫동안 단맛을 즐길 수 있는 사탕은 어린 시절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최대의 기쁨이었고 즐거움이었다. 장터는 많은 이야기들을 생산해 내고 있었다. 고만고만한 이야기들이 상당부분 과장되거나 와전되기도 했는데 장돌뱅이와 과수댁의 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