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111]안양 장내동성당(현 중앙성당)의 1960년대 옛모습
2024.11.11./ #아카이브 #기록 #옛사진 #장내동성당/ 안양유치원 제6회 졸업(1964년 2월)앨범에 수록된 안양 장내동성당(현 중앙성당)의 옛 기록으로 1960년대 초반의 성당 모습이 담겨있다.
안양지역 신앙의 역사는 박해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는 “늦어도 기해박해가 일어난 1839년에는 안양에서 서쪽으로 10리 거리인 수리산 깊은 산속에 박해시대의 전형적인 교우촌이 형성돼 60여 명의 신자들이 살고 있었다”고 전한다.
최경환 성인과 그 일가가 생활하던 수리산 교우촌이 그곳이다. 성인의 아내 복녀 이성례와 그 아들로서 후에 사제품을 받은 최양업도 이곳에 숨어 신앙생활을 해나가고 있었다. 교우촌은 담배농사를 지어 생계를 꾸려갔기에 담배촌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다.
박해가 끝나자 안양·시흥 지역 곳곳에 공소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본당의 모태가 되는 안양공소는 의왕 하우현본당 관할 공소로 역시 박해 이후 생긴 공소였다.
당시 관할 교구인 서울교구는 1937년 밤나무밭 6,657평을 교회부지로 매입한 후 1954년 9월 7일 초대 주임신부인 구천우(具天祐)신부가 안양읍내에서는 처음으로 24평의 목조건물 성당을 지어 노기남 주교의 주례로 안양성당 축성식을 가졌다. 성당 주변은 당시 밤나무, 뽕나무 등이 많았던 곳인데, 밤나무 울타리안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예전에는 담안(장내동)이라 불렀다.
본당을 설립한 1954년 경 신자는 약 30세대로 공소를 포함해도 신자 수 1000명이 넘지 않았다. 본당의 적극적인 전교로 신자수가 날로 증가함에 따라, 임시로 마련한 목조성당을 대신할 새 성전이 절실해졌다. 본당은 가난한 환경 속에서도 성전건축기금을 모으고 노기남 주교의 도움을 받아 1958년에 명동성당과 같은 고딕형 성당을 세멘트와 목조로 신축해 1959년 봉헌식을 가졌다. 성당에는 3개의 종이 설치됐는데, 수리산공소는 물론이고 10㎞ 가량 떨어진 하우현의 신자들도 이 소리를 듣고 삼종기도를 바쳤다고 한다. 이때 성모성심을 본당 주보로 선포했으며 장내동성당이라 불렀다.
장내동성당은 다양한 사목을 펼쳐왔으며 독재로 암울했던 시기인 1980년대에는 안양지역사회의 상징적인 존재로 역할도 하는 등 안양지역에 복음을 전해왔다. 1956년 5월4일에 개원한 본당 부설 안양유치원은 안양 최초의 유치원으로 안양지역 유아교육사에 새로운 장을 열었다. 유치원은 60년이 지난 지금도 하느님 사랑에 근거한 유아교육을 실현해 나가고 있다.
순교자 현양에도 앞장섰다. 본당은 1963년 수리산에 순교기념비를 설립하고, 해마다 예수승천대축일에 최경환 성인 묘역에서 야외미사를 봉헌했다. 이후 수리산성지 전담사제가 파견된 2000년까지 본당은 성지를 가꾸며 순교자 현양에 앞장서왔다.
1971년에는 성당 앞에 근로자회관을 설치하고 국제가톨릭형제회(AFI)에 운영을 맡겨 객지에서 저임금으로 생활하는 가난한 근로자를 돌봤다. 근로자회관은 이후전진상복지관으로 명칭이 바뀌었다가 폐관한후 현재 교구 사회복지회관으로서 여전히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위한 활동에 이용되고 있다.
성당 명칭이 안양에서 장내동으로, 장내동에서 안양4동성당으로 그라고 현재의 안양중앙성당으로 본당명이 바뀌었지만 전교에 대한 열정은 한결같았다. 본당 신자 수는 날로 증가해 1975년 호계동본당을 분당시키기 시작해 8개 본당을 분당시켜왔다.
세월이 흐르면서 건물의 노후화로 안전문제가 생기자 1991년 고딕식형태의 아름던 성당을 하고 새 성당을 신축했다. 당대 종교건축물 설계자로 유명한 김영섭건축가가 살계한 새 성당은 콘크리트 노출 방식 중에서도 가장 규모 있고 독특한 디자인으로 2003년 안양시에서 건축문화상을 받는 등 건축학적으로 관심을 모으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