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015]1970년대 안양읍내(당시 북부동)의 모습
2024/1014/ #아카이브 ##옛사진 #기록 #기억 #안양 #since1972/ 안양박물관이 소장하고 옛 기록물로 1972년에 발행된 시흥화보의 표지에 실린 사진이다.
10970년대 초반의 안양읍 당시 북부동(안양 2.3동)지역의 모습이 담긴 사진으로 망해암이 있는 비봉산 자락에서 찍은 것으로 보인다. 사진 아래쪽 좌우로 길게 놓여진 비포장도는 경수산업도로로 이제 공사를 막 시작한 초창기인듯 싶다. 사진 아래 좌측에 넓은 밭이 있는 곳은 삼영농장(현 대우아파트)이고 농장 오른쪽에 이는 소로길 우측으로는 안양기독보육원(현 좋은집과 앙명곡.여고)이 있엇다
삼영농장 위로는 안양천이 흐르고 그위로는 서울 수원간 1번국도(석수동에서 안양역앞을 지나 구 안양경찰서로 연결)가 지나가고 있다.
안양천 위로 사진 중앙의 넓은,길은 1번 국도에서 안양여고 사거리를 지나 박달리와 안산으로 가는 도로다. 사진 중간의 사거리 우측이 안양여고, 좌축에 보이는 큰 건물들이 안양3동대부분을 차지했던 금성방직(대농단지-댕리단길) 공장이다.
사진에 희미하지만 수암천의 옛 물줄기 모습을 볼 수 있다. 당시 물줄기는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다. 수암천 물줄기는 안양3동과 박달동을 지난 석수동에서 안양천과 합류됐는데 1970년대 중반 작강화 공사를 통해 지금처럼 바뀐것이다.
사진 아래 왼쪽의 넓은 밭이 있는 삼양농원(현대우아파트) 오른쪽 안양기독보육원(현 좋은집)에 대해 좀 더 들여다 보자.
비봉산 산자락을 깍아 경수산업도로(현 1번국도)가 놓여지면서 산 끝자락에 있던 삼영농장과 안양기독보육원 땅도 많이 훼손됐다. 삼양농원과 안양기독보육원 경계에는 사잇길이 있었는데 사진 중간 오른쪽에 보이는 흰줄 형태의 길이다.
당시 어디 놀러갈곳이 마땅히 않았던 시절 안양사람들은 안양읍내가 내려다 보이는 망해암과 안양풀(안양유원지-안양예술공원)로 소풍과 마실을 갔는데 시내에서 구도로(만안로)와 안양천을 건너와 안양풀로 가던 지름길이자 망해암에 가던 길이었다. 망해암으로 올라가던길 초입에는 칠성사이다와 주점부리를 팔던 매점이 있었다.
삼양농원에는 아름다운 정원이 있었다. 정원을 만들고 채으로 발표한 정원가.동경상과대학 졸업을 하고 상공부차관 역임했덩 윤인상씨는 큰 농가의 적산가옥과 농장을 인수후 농장경영을 하였으며 정원이란 제목의 책을 펴내기도 했다
윤씨는 정원에 유토피아적 농촌그림을 그리고 수림이 울창하고 맑은 물이 흐르는 풍요한 농촌은 우리가 바라는 우리 농촌의 미래상을 담았다. 또 무었보다도 근검절약으로 부채없는 농촌이라야 한다고 기록하였다.
1970년대 초 안양읍내에서 망해암이나 안양풀(유원지)로 가려면 안양역위 철길을 넘은후 안양천을 건너야 하는데 당시 안양천에는 흐르는 물이 많아 대형드럼통으로 만든 줄배를 이용해 건넜다.
안양기독보육원이 있던 자리는 일제강점기 오끼농장이 있던 곳이디. 오끼농장은 안양포도를 들여온 농장인데 당시 만안구 거의 전지역이 농장땅이었다고 한다.
해방 이전에 서울에 있던 경성기독보육원이 이곳으로 이전해 온 이후 안양기독보육원(현 좋은집)이라 불리웠다. 이곳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류화가 나혜석이 말년에 잠시 머물기도 했던 곳으로 또다른 의미가 있다.
현재의 양명고, 양명여고 학교 부지도 보육원 땅 이었다. 1970년대 해송학원에 매각돼 해송고등학교(현 양명고)가 들어선 것이다.
지금도 좋은집의 대지 면적은 매우 넓다. 경수산업도로변은 물론 안양예술공원 가는 도로옆에 있는 골프장도 좋은 집이 관리운영하고 있다.
이곳에는 근대문화유산이 자리하고 있다..한국전쟁이 끝난 후 미군과 미국 선교사 등의 지원과 원조로 기독보육원에 여러채의 원아들 숙소와 건물을 신축했다. 당시 지은 건물중 현재 보육원에 두채의 숙소가 남아 있고, 현 양명고 뒷쪽에 석조외벽에 기와를 얹은 집 두채가 남아 있는데 안양시 관내에서 현존하는 건축물중(증개축.리모델링 제외)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