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810]안양풀(安養プール) 표지석 글씨 일본인 도지사가 썼다
#도시기록 #아카이브 #표지석 #안양풀 #안양예술공원 #표지석 #마쓰모도/ 안양예술공원 초입 계곡에 있는 일본어 표지석. 일제강점기 당시인 1932년 안양풀을 만들때 조성한 표지석으로 대형 암석에 새겨진 명문이다.
이 표지석은 안양예술공원 입구 주차장을 지나 오른쪽 도로를 따라 100미터쯤 지나 삼성천으로 가는 돌계단을 내려가면 돌을 쌓아 만든 사방댐 중간에 있는데 불쑥 튀어나와 있는 자연석에 글씨가 새겨져 있다.
그러나 초석의 3분의 2 가량이 1977년 대홍수 이후 안양유원지를 재개발하는 과정에서 돌과 콘크리트로 뚝(사방댐)을 쌓으면서 덮어버려 글씨 전체를 판독하기가 쉽지않다.
자료를 보면 자연석으로 된 거대한 초석에는 '일본어로 안양 풀(安養プール) 글씨와 소화 7년 8월 준공(昭和 七年 八月 竣工)'이라는 일본 연호 명문과 마츠모도(松本)라는 공사책임자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그런데 공사책임자 마쓰모도는 누구일까. 이에 대해 민족문제연구소가 최근 펴낸
[이 땅에 남아있는 저들의 기념물 7]
일본인 도지사의 휘호로 새겨진 ‘안양풀(安養プール) 바위글씨(1932년)’
1938년에는 혼다 사다고로(本田貞五郞) 안양역장의 기념비도 건립을 통해 이에 대한 답을 알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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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제연구소 이순우 특임연구원이 조사하고 작성한 글을 보면
마츠모토 마코토라는 이는 이 글씨를 쓸 당시에 경기도지사(재임 1931.9.23~ 1934.11.5)였고, 관직에서 물러난 이후에는 8년 동안 조선제련 사장을 거쳐 조선금융조합연합회 회장을 지내는 등 식민지 조선에서 총독부 고위관료 출신이면서 나름 재계(財界)의 거물로 군림한 인물이었다. 현재 인천광역시 옹진군 덕적면 북리(덕적도)에 남아 있는 ‘조난자위령지비(遭難者慰靈之碑)’의 전면 글씨도 그 당시 경기도지사이던 마츠모토 마코토가 휘호라고 한다.
안양풀은 1932년 7월 10일부터 공사에 착수하여 길이 60미터, 너비 20미터, 깊이 0.8~1.6미터 규모의 수영장과 ‘세멘트 콩크리트’ 둑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때마침 이 지역에서는 경기도가 시행하던 사방공사(砂防工事)가 한창 벌어지고 있던 와중이었으므로, 시흥군 서이면(始興郡 西二面)의 의뢰로 이곳의 인부들을 동원하여 풀장공사가 진행되었다고 전해진다.
그 결과 안양풀장은 1932년 8월에 공사를 마치고 일반에 공개되기에 이른다. 이때 수영장의 개장과 더불어 총독부 철도국에서는 그 부근 선로에 가정거장(假停車場, 임시정거장)을 설치하여 탐방객의 내왕에 편의를 제공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안양풀에 대한 관리는 최초에 ‘서이면사무소’의 소관이었으나 이내 ‘안양풀보존회(安養プール保存會)’라는 것이 조직되면서 이곳의 주관으로 설비수선과 주변환경에 대한 유지가 이뤄지게 되었다.
특히, 안양풀보존회의 대표자로 활동했던 안양역장 혼다 사다고로(本田貞五郞)는 그 누구보다도 이 일에 열성적이었던 모양인데, 그는 안양역장으로 재직했던 기간(1932.3~1938.3)은 물론이고 토성역장(土城驛長)으로 전근발령이 난 이후로도 1주일에 한 번은 빠짐없이 안양풀장을 찾아왔던 것으로 드러난다.
이리하여 안양풀장에는 여름이 가까워지면 매일 수천 명의 인파가 몰려들어 주변 일대가 금세 북새통을 이루곤 했다. 그리고 “경성의 의사보다 안양의 풀장(京の醫師より安養のプール)”이라는 표어(標語) 아래 이곳 계곡은 비단 수영장뿐만이 아니라 여름철 캠핑장과 임간학교(林間學校)와 같은 용도로, 그리고 계절이 바뀌면 관풍(觀楓, 단풍놀이)과 습률(拾栗, 밤줍기)을 즐기는 곳이자 풍성하게 익어가는 포도의 명산지로도 무수한 탐방객을 불러 모으는 공간으로 자리매김되어갔다.
과거 신문기록을 보면 해마다 7월께 수영장 구내에 있던 ‘수천궁(水天宮, 스이텐구)’ 앞에서 수불식(修祓式, 재앙과 부정함을 씻어내는 의식)이 거행된 사실이 확인된다. 일본 쪽에서는 통상 아이를 갖고자 하거나 안산(安産, 순산)을 기원할 때, 그리고 뱃길의 안전을 비는 장소로 바로 이러한 ‘수천궁’을 사용한다는데, 짐작컨대 안양풀이 물놀이와 관련된 시설이다 보니 그들의 습성대로 수신(水神)을 모신 신사를 지어놓고 바로 이 앞에서 매번 개장식을 연 것이 아닌가 싶다.
이곳 안양풀장과 관련하여 조금 특이한 흔적은 중일전쟁 이후 기간에 일제가 거국적으로 강조했던 이른바 ‘국민개영운동(國民皆泳運動)’의 실습장으로 바뀌었다는 사실이다. 이에 관해서는 『매일신보』 1942년 8월 16일자에 수록된 「쇄하연성(鎖夏鍊成)의 도장(道場), 안양수영장(安養水泳場)에 인파만경(人波萬頃)」 제하의 기사를 통해 다음과 같은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마츠모토 경기도지사의 ‘안양풀 바위글씨’ 이외에도 또 다른 그들의 기념물 하나가 조성된 적이 있었던 사실이 포착된다. 이름하여 ‘혼다 사다고로 안양역장 창덕비(本田貞五郞 安養驛長 彰德碑)’가 바로 그것이다. 앞에서도 보았듯이 혼다 안양역장은 안양풀의 개장 때부터 이 일에 앞장섰고, 특히 안양풀보존회의 대표로서도 여러 해에 걸쳐 활동했던 인물이었다.
그러한 그가 1938년 3월에 이르러 토성역장(土城驛長, 경의선)으로 전근 발령이 나자 그간의 공적을 기려 기념비석을 건립하고자 했다. 실제로 그해 7월 3일에 거행된 안양풀 개장식에서는 이미 토성역장으로 옮겨간 혼다 본인도 직접 참석한 가운데 이 창덕비의 제막식과 아울러 성대한 연회가 함께 베풀어 진 것으로 확인된다. 그렇다면 이 비석은 과연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해방 이후 일본인의 흔적이라고 하여 폐기되거나 매몰되었을 거라고 짐작만 할 뿐이지, 이것의 행방에 대해서는 이렇다 할 단서가 전혀 눈에 띄질 않고 있다.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지 않을까? 어느 날 홀연히 땅속에서 그 잔편이나마 발견되어 한창 전성기를 구가했던 안양풀의 존재를 다시 한번 상기시켜주는 날이 올는지는 말이다.
한편 안양예술공원은 1930-50년대 안양풀, 1970-80년대 안양유원지로 불리우던 곳으로 삼성산과 관악산의 풍부한 문화유산과 더불어 고래로 시인묵객들의 발길을 붙잡아 풍류담과 더불어 많은 시문을 남기게 하기도 했으며 고려조의 명신 강감찬은 이 곳을 경기금강이라고 불리웠다.
특히 조선왕조실록 태종 17년 편에 의하면 태종 17년 금천 현감 김 문과 수원 부사 박 강생이 과천 현감 윤 돈의 전별잔치를 안양유원지 계곡에서 열었는데 강권하던 소주를 못 이겨 김 문이 갑자기 죽는 사고가 발생하였다. 어전까지 보고된 이 사고에 대한 태종의 수습책은 의외로 간단해서 "술을 권하는 일은 고래의 미풍이지 악습이 아니다. 그러나 사람이 죽은 일은 큰일이니 관련자들을 파직하라"는 명쾌한 판결로 매듭을 지었다고 한다.
안양유원지 계곡은 관악산의 여러 골짜기 중 수량이 풍부하고 아름다운 곳으로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 부터 여름철 피서지였으며 1930년대 이후 70년대까지 전국에 명성을 알렸다.
공식적인 안양유원지의 출발은 1932년 당시 일본인 안양역장 혼다 사고로(本田貞五郞)가 철도수입 증대와 안양리 개발을 위하여 조한구 서이면장과 야마다(山田) 시흥 군수 및 지역유지들을 설득 당시 1,500원의 예산으로 계곡을 막아 2조의 천연수영장을 만들어 안양풀이라고 명명한 데서 비롯된다. 그 당시 만든 풀장의 둑과 탈의용 계단의 형태는 1990년대 중반까지 보존되어 있었으나 안양유원지 재개발 사업을 하면서 원형들 대부분이 훼손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