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11]한국 기계공업 전초기지 현대양행 군포공장
2024.03.11/ #아카이브 #옛사진 #안양 #군포 #한라 #만도 #군포종합기계공장/ 고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의 동생인 고 정인영 회장이 설립한 현대양행이 만도-한라-HL로 이어지는 그룹의 출발점에는 안양과 군포에 있던 공장들이 한몫을 한다.
1962년 10월 '5대양 6대주를 넘어 나아간다'는 뜻의 사명으로 서울 중구 무교동 92번지에서 ㈜현대양행으로 창립한 후 1964년 6월1일 안양시 박달동 120에 안양공장(안양기계제작소)를 신축한다. 안양기계제작소는 초창기 스푼, 나이프, 포크와 주전자, 냄비 등을 생산한 양식기 공장이었으나 1969년부터 자동차부품을 생산한다.
1970년대 들어서면서 현대양행은 안양기계제작소의 자동차 부품 생산이 본궤도에 오르며 기계공업으로 그 활동 영역을 넓혀간다
1976년 12월에는 군포종합기계공장을 완공한다. 군포공장은 자동차부품, 건설중장비, 산업플랜트용 기계 등을 생산해 한국 기계공업의 전초기지 역할을 담당했다.
군포공장 건설 일지
1970년 12월 주물공장 준공
1972년 6월 기계공장 준공
1973년 1월 주조공장 준공
1974년 10월 중기계공장 준공
1976년 8월 경기계공장 준공
1976년 12월 중기계, 주물공장 증축, 군포종합기계공장 완공
1977년 6월 단조공장 가동
[한라그룹 변천사 통사에서 군포기계종합기계공장 관련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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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영 명예회장과 현대양행은 1970년 봄 주물공장을 시작으로 군포공장 건설에 착수하며 기계공업의 불모지 개척에 나섰다. 국내 최초로 트럭크레인을 생산하는 등 건설중장비 국산화를 선도한 현대양행은 민간 기업 최초로 ADB 차관을 도입, 군포종합기계공장을 완공하고 발전설비를 비롯해 주단조, 제철, 섬유, 공작, 펄프 및 제지 설비 등 기계공업의 꽃을 피웠다.
군포공장 구상과 본사 안양 이전
현대양행이 본격적으로 중공업에 손을대기 위해서는 새롭 게 공장을 마련해야 했다. 안양공장은 자동차부품 사업의 성장으로 기계공장을 신설할 여력이 없었다.
새롭게 공장을 세우기 위해 안양공장과 가까운 장소를 물색했다. 마침 경기도 시흥군 남면(1979년 5월 1일자로 군포읍으로 행정구역 개편) 당정리 일대에 알맞은 곳을 발 견했다. 부지는 23만 1404m²(7만평)에 달했다. 정인영 명 예회장은 주물·주조공장을 시작으로 중기공장, 대형 플 랜트공장을 단계적으로 세워 중공업 기반을 갖춘 다음 최 종적으로 세계적 플랜트 수출을 주력 사업으로 해 나간다 는 구상을 세웠다.
이를 위해 현대양행은 산업은행에서 전대차관 110여만 달러를 받았다. 그리고 중장비부품 생산 사업계획을 수립, 군포공장 건설을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군포공장은 현대양행의 기계공업 진출 전초기지였다. 1970년 착공과 함께 많은 인원이 선진 기술제휴 업체에서 연수교육을 받았다. 최신 설비와 장비, 새로운 관리기술 및 제조기술 등의 부문에서 착실하게 기술력을 쌓아갔다. 설계에 관한 사항 외에도 각종 제품의 제작에 관한 특수치 공구(Special Tooling), 작업 방법 및 표준화, 자재 및 공정 의 관리기술, 공장 설비 및 기계 배치 등 생산 전반에 걸쳐 기술 습득에 전념했다. 이와 함께 사내 직업훈련소를 설치 하고 현장 실무교육을 실시해 기능인력을 지속적으로 양 성했다.
우리나라 기계공업의 효시라고 할 수 있는 군포공장의 특징은 '수(修) 파(破) 리(離)'로 대표됐다. '수'는 기본의 형(形)을 배우는 것, '파'는 그 형을 깨고 새로운 형을 모색 하는 것, 그리고 '리'는 형을 초월해 독자의 경지를 열어감 을 의미했다. '수(修)파(破)리(離)' 정신아래 군포공장은 1차적인 기술도입에서 독자적인 기술개발로 발전해 나가 기 시작했다.
한편 현대양행은 1971년 11월 21일 본사를 안양공장으 로 이전했다. 당시 단순한 양식기 제조에서 나아가 점차 자 동차부품 중심으로 사업이 확장일로에 있었다. 본사의 안 양공장 이전은 이러한 사업 확대에 발맞춰 현장과 본사의 유기적 경영을 도모하기 위함이었다. 또한 안양공장 부근에 새로운 기계공업의 터전인 군포공장을 설립하는 데 따 른 후속 조치의 의미도 담고 있었다.
군포종합기계공장 건설
1. 군포 기계공장 건설 시작
현대양행은 1970년 봄 우선 주물공장 건설에 착수했다. 정 인영 명예회장은 소재에서부터 완성품에 이르는 대단위 기계공장을 구상하고 있었다. 그래서 주물공장 건설에 먼 저 착수해 소재 생산능력을 갖추고자 했다. 소재가 좋아야 완성제품의 질도 보장된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건설과정은 녹록지 않았다. 70톤이 넘는 주강기계 받 침대를 인력으로 운반해야 하는 어려운 공사였다. 1년여 의 공사 끝에 1970년 12월 주물공장을 완공하고 이듬해인 1971년 1월 가동에 들어갔다. 주 생산제품은 금형 소재, 조 크러셔 부품, 덤프트럭 호일 등이었다.
이어 1972년 6월 기계공장을 준공했다. 그해 11월 국내 최초로 트럭크레인을 생산하면서 현대양행은 건설중장비 국산화시대를 활짝 열었다. 이에 앞서 9월에는 단조공장 을 착공했다.
군포공장은 이후에도 1973년 1월 주조공장, 1974년 10 월 중기계공장, 1976년 8월 경기계공장을 차례로 준공했 다. 이로써 군포공장은 한국 최고의 기계공장으로 자리매김했다.
군포공장의 건설에 힘입어 현대양행은 1970년대 급성 장을 구가했다. 1970~1976년까지 7년간 연평균 101.8% 에 달하는 시설투자를 단행했다. 이는 동종업계 40.5%, 제 조업 평균 32.5%를 훨씬 상회하는 수준이었다. 또한 50여 개 부문에 걸친 첨단 외국기술을 도입한 결과 같은 기간연 평균 94.5%의 매출신장을 보였다. 이 같은 신장률은 동종 업계 매출신장률의 2배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1975년에는 매출액 100억 원을 돌파했다. 이후에도 동종업계 51%, 제 조업 35%보다 훨씬 높은 연평균 104.3%의 초고속 성장을 이뤘다.
매출액에서도 군포공장은 안양공장을 앞서 갔다.
1975년까지는 안양공장의 자동차부품 매출액이 총매출 액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이후 군포공장에서 건설 중 장비 및 각종 산업플랜트용 산업기계 생산이 활발해짐에 따라 총매출액에서 차지하는 군포공장의 몫이 점차 증가 했다.
군포공장 건설 일지
1970년 12월 주물공장 준공
1972년 6월 기계공장 준공
1973년 1월 주조공장 준공
1974년 10월 중기계공장 준공
1976년 8월 경기계공장 준공
1976년 12월 중기계, 주물공장 증축, 군포종합기계공장 완공
1977년 6월 단조공장 가동
2. 정부의 '중화학공업화' 선언
정인영 명예회장이 군포공장 건설로 한국 중공업 진흥을 일구던 무렵, 박정희 대통령이 1973년 1월 연두 기자회견 에서 "우리나라 공업은 이제 바야흐로 중화학시대에 들어 갔다. 따라서 이제부터 중화학공업 육성에 중점을 두는중 화학공업 정책을 선언한다"고 천명했다.
정부의 중화학공업화 선언은 당시 개발과정에서 드러 난 문제점을 해소하고 장기 고도 경제성장을 지속하기 위 한 방안을 모색한 결과였다. 그동안 경제개발계획을 추진 하면서 농업 및 지역 간의 불균형, 대외의존도의 심화, 만 성적인 인플레이션, 최종 소비재 중심의 공업구조, 중복투 자로 인한 산업능률 저하 등 여러 가지 문제점이 드러나고 있었다. 중화학공업화에 의한 공업구조의 전환과 고도화 없이는 이러한 문제점을 해소할 수 없다는 것이 정부의 판단이었다. 공업의 구조적 해외 의존도를 탈피하고 자립화 기반을 다지기 위해서는 중화학공업 육성을 통한 시설재 와 중간재의 자급이 시급했다. 또한 경공업만으로는 1972 년 11월 박정희 대통령이 제시한 100억 달러 수출목표 달성은 불가능했다.
정부는 중화학공업화 선언 직후인 1973년 2월 중화학 공업 추진기구로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하는 '중화학공 업추진위원회'를 설립하기로 계획하고 그해 5월 위원회 설립을 국무회의에서 정식 의결했다.
그리고 실무추진 기구로 '중화학공업추진위원회기획 단'을 구성했다. 단장은 청와대 경제수석비서관이, 간사는 행정개혁위원회 사무국장이 겸임케 하고 상공부 기계공업 국장을 비롯해 관계부처의 국장급을 실무위원으로 파견 근무케 했다.
중화학공업추진위원회기획단은 1973년 초부터 세부계 획 작성에 들어가 2월 말에는 기본계획, 지원계획, 자금조 달연구 등의 1차 시안을 마련했다. 이어 1973년 6월 보완된 시안인 '중화학공업 육성계획'을 발표했다. 이에 대해 7월 한 달간 평가작업을 거쳐 대통령의 재가를 받아 확정계획 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정부는 중화학공업 육성계획을 통해 먼저 1971년 35.2%에 머물고 있던 국내 중화학공업의 비율을 1981년 까지 51.5%로 고도화하기로 했다. 수출구조 면에서도 중화학공업 제품의 비율을 1971년의 19.1%에서 1981년에는 60% 이상으로 끌어올리기로 했다. 이를 통해 1980년대 소 득 1000달러와 수출 100억 달러를 달성할 수 있는 기반을 조성한다는 청사진이었다.
이와 함께 정부는 1973년 9월 창원기계공업단지 건설 을 기초로 하는 '장기 기계공업육성계획'을 공포했다. 동시 에 중화학공업을 집중적으로 개발하기 위한 산업기지개발 촉진법안을 만들어 온산, 창원, 여수, 광양 등 4개 지역을 산업기지개발구역으로 지정했다.
이러한 정부의 중화학공업 육성책에 앞서 정인영 명예 회장은 군포 기계공장을 건설하면서 우리나라 중공업 진 흥의 선도자를 자처하고 나섰다. 정인영 명예회장의 선견 지명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3. 국내 최초 건설중장비 생산
1971년 1월 주물공장 가동, 1972년 6월 기계공장 준공 등 을 통해 군포공장은 점차 기계공장으로서 모습을 갖춰갔 다. 이에 발맞춰 기술과 생산 부문도 점차 활기를 띠기 시 작했다. 첫 국산화 품목은 건설중장비였다.
1970년에 이미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됐지만 그때까지 도국산 건설중장비는 전무했다. 미군에서 불하받은 중장 비가 고작이었다.
이러한 현실은 현대건설의 해외 공사 수행과정에서 건 설 공사의 성패는 중장비에 있다고 느낀 정인영 명예회장 에게 가슴 아프게 다가왔다. 군포공장의 첫 국산화 품목이 건설 중장비였던 것은 바로 이러한 정인영 명예회장의 산 업보국 정신에 기반하고 있었다.
군포공장의 중장비 개발팀은 6명으로 출발했다. 그리 고 1972년 11월 미국의 아메리칸 호이스트 앤 데릭사와 기 술제휴를 맺고 트럭크레인을 국내 최초로 생산했다. 현대 양행 군포공장이 첫선을 보인 국내 최초의 트럭크레인은 아메리칸 호이스트 2420 모델이었다.
현대양행은 이후 1974년 2월 프랑스 포크레인사와 기술 제휴를 맺고 굴삭기 생산을 개시했다. 이어 그해 6월 미국 피아트 앨리스사와 기술제휴를 체결, 불도저, 모터그레이 더, 휠로더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이때 상표를 'HALLA 로 하며, '한라'의 이름이 등장했다. 정인영 명예회장은 세 계 진출을 적극 모색하며 발음하기 쉬운 '한라'로 상표를 정했다. 특히 중동에서는 한라가 '환영한다'는 뜻을 담고 있었다.
4. 종합기계공장 건설과 본사 군포 이전
기계공장을 완공한 직후 1972년 7월 현대양행은 새로운 공장 건설 계획을 추진했다. 수년 내에 군포에 종합기계공 장을 완공한다는 계획이었다. 건설 중장비의 생산라인을 확장하고 석유화학을 제외한 중공업 전반에 걸쳐 새로운 사업 영역을 개척하기로 한 것이었다.
이때 수립한 건설 계획은 외자 1500만 달러, 내자 1569 만7000달러 등 총 3069만7000달러(122억7900만 원)를 투입해 공작기계 연산 550대를 비롯해 섬유기계, 시멘트 기계, 제지기계, 중장비, 냉동기 등을 생산한다는 내용이었 다. 1979년 기준 2208만8000달러의 수입대체 효과를 가 져올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됐다.
문제는 자금이었다. 현대양행은 1973년 2월 아시아개 발은행(ADB)에 차관공여를 타진했다. 그러나 ADB는 난 색을 표했다. ADB는 자금을 민간 기업에 빌려준 적이 한 번도 없었던 것이다. 정인영 명예회장은 ADB 이사로 재직 중이던 계봉혁 박사의 도움으로 ADB 인사들에게 종합기 계공장 건설 계획을 설명할 기회를 얻었다.
그 결과 일단 내부적으로 검토하겠다는 연락을 받고 바 로 경제기획원에 차관신청서를 제출했다. 그런데 상공부 가 1974년 8월 28일자 '1975년도 공공차관 도입계획서 작 성 제출'에 첨부된 도입계획서 부문에 "기계공업 발전에 기 여도가 큰 공작기계, 중장비, 산업기계 등을 국산화함으로 써 관련 기계공업 기반을 구축키 위해 필요 시 공작기계의 공장건설 입지는 창원공업기지 내로 변경토록 해야 할 것 임"이라고 되어있음을 들어 처음으로 공작기계공장 입지 를 창원으로 바꾸라고 시달했다.
이런 상황에서 ADB 측이 1974년 10월 1일 현지 조사 차 현대양행을 방문했다. 그해 12월 ADB 평가조사단과 상공부의 기계공업국장, 산업과장 등이 현대양행 차관공 여 문제에 대한 협의에 들어갔다.
그 결과 외자 1500만 달러가 ADB에서 차관 공여되면 내자는 정부에서 국민투자기금 등을 통해 지원하도록 했 다. 건설 입지는 당초 창원기계공업기지 내에 유치하려 했 으나 현대양행이 군포 · 안양에 이미 수만 평의 부지를 확 보하고 있으므로 기존 공장의 시설을 활용하기로 했다. 이 에 따라 군포종합기계공장과는 별도로 창원공장의 추진 이 이뤄지게 됐다.
1975년 6월 ADB와 당초 계획보다 증가된 1750만 달러 에 대한 차관계약을 체결하면서 군포 종합기계공장 건설 은 급물살을 탔다. 국민투자기금 1241만 달러를 더한 총 2991만 달러를 투자해 1975년 6월 10일 공장 건설에 착수 했다. 1976년 12월 중기계공장과 주물공장을 증축하면서 군포공장은 단일공장으로서는 국내 최대의 종합기계공장 으로 부상했다. 경·중기계류와 그 연관제품, 건설 중장비 및 각종 공작기계, 공기조화기기, 시멘트공장설비, 섬유기 계, 운반하역설비 등을 생산하는 명실상부한 종합기계공 장의 탄생이었다. 종합기계공장 내의 단조공장은 이보다 늦은 1977년 4월경 고성능 최신 기계를 설치하면서 6월부터 정상 가동에 들어갔다.
군포종합기계공장은 이밖에도 공장 가동을 위해 760만 달러를 별도로 투자했다. 최고의 공장을 만들기 위한 집념 때문이었다.
그 결과 매 2년마다 공장규모나 생산량에서 무려 10배 에 이르는 성장을 지속했다. 한편 현대양행은 군포공장내 에 사옥을 신축하고 1975년 7월 본사를 안양에서 군포로 이전했다. 연면적 9만 9173m²(3만여 평) 규모로 군포종합 기계공장이 건설됨에 따라 본사 이전을 통해 사세 신장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함이었다.
군포공장은 또 그해 9월 압력용기 (Pressure Vessel) 제작의 품질을 보증하는 6개 부문의 ASME 스탬프를 받 았다. 발전용 및 석유화학용 플랜트 수출의 물꼬를 트는 계기였다. 이를 바탕으로 군산·영월 복합화력발전소용 설비뿐 아니라 호남정유의 제2 확장공사(13만 BPSD 증 설 공사)를 위한 압력용기 및 열교환기 등을 자체 기술로 제작, 납품할 수 있었다. 이후에도 한국플라스틱, 동양화 학, 플로어코리아, 한국전력, 진해화학 등에서 각종 설비 를 수주하며 발전설비 분야에서 독보적인 위상을 구축해 나갔다.
2. 중장비 및 운반하역 장비 확대
1970년대 초 트럭크레인, 굴삭기, 불도저, 휠로더 등을 생 산하며 한국 최고의 중장비 업체로 자리매김한 현대양행 은 1975년 1월 지게차 국산화에 성공했다. 이후 1978년 9 월 미국의 옵코사와 대형 덤프트럭에 관한 기술제휴를 성사시켰다. 사업영역의 확대와 더불어 불모지나 다름없던 국내 중장비산업을 개척하는 의미 있는 한걸음 한걸음이 었다.
1978년 11월에는 이탈리아의 피아트사와 농업용 트랙 터에 관한 기술제휴를 성사시켰다. 이를 바탕으로 그동안 중장비에서 얻은 지식과 경험의 토대 위에서 각종 농업용 장비 개발에 나섰다.
그 결과 군포공장은 1970년대 말에 이르러 우리나라 중 장비시장을 이끄는 대규모 공장으로 자리 잡았다. 생산품 목의 경우 건설 중장비는 불도저, 휠로더, 크로러로더, 엑 스카베이터, 모터그레이더, 트럭크레인, 크롤라크레인, 운 반하역기계는 전기 고가 이동 크레인, 포크리프트 트럭, 포테이너, 광산건설 기계는 크러싱 플랜트, 아스팔트 플랜 트 등에 이르렀다.
운반하역설비 부문은 1976년 10월 미국의 P&H사와 고가 크레인 제작에 관한 기술제휴를 맺으면서 성장가도 를 달렸다. 1977년 3월 제작에 착수해 1978년 9월 국내 처 음으로 생산, 시운전에 성공한 고가 크레인은 호이스트타 입(Hoist Type), 갠트리 타입(Gantry Type), 컨테이너 핸 들링 크레인(Container Handling Crane) 등 각종 타입 을 생산했다. 특히 0.5Ts 지브 크레인(Jib Crane)에서부터 10Ts~300Ts에 이르는 각종 제품의 설계에서부터 제작에 이르기까지의 전 과정을 완전 국산화했다.
현대양행은 1978년 국내 최초로 중장비 수출에 성공했 다. 인도네시아에 2300만 달러 상당의 중장비를 수출하며 현대양행은 국제적인 중장비 수출회사로 이름을 드높일 계기를 마련했다.
1차 선적은 1978년 11월 14일 인천항 중앙부두에서 이 뤄졌다. 최각규 상공부 장관, Poernomosidi 인도네시아 건 설 전력성 장관, 정인영 명예회장 등 내외인사 5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HALLA의 상표로 불도저, 휠로더, 엑스카 베이터 등 60여 대를 1차 선적했다. 뒤이어 11월 20일 78대 를 2차 선적했고, 마지막 3차분 110여 대는 12월 중순 선적 했다.
3. 주단조, 제철설비 주도
1973년 주조공장을 건설한 현대양행은 1974년 10톤 아크 로를 설치해 앵커(Anchor), 벨마우스(Bell Mouth) 등조 선용 주조품을 생산했다. 1970년대 조선업의 활황과 함 께 증대한 중소형 주강품 수요에 대응하기 위해서였다. 1976년에는 중장비 사업을 본격 추진함에 따라 중장비 부 품생산을 위한 몰딩(Molding) 라인을 갖췄다.
특히 1977년 4월 기계 설치를 완료한 단조공장은 컴퓨 터에 의해 매 30초 만에 24종류의 금속원소를 동시에 검출 해낼 수 있는 분광분석기를 비롯해 방사선 시험, 초음파 시 험 등 금속에 대한 어떠한 시험도 가능한 첨단 실험실을 자 랑했다.
단조공장의 가동과 함께 현대양행은 주단조 분야에 서 첨단의 기술력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을 가속화했다. 1977년 8월 이탈리아의 테르니사와 주조 및 단조품 제작 을 위한 기술제휴를 체결했으며, 이듬해 1월에는 특수 대 형주·단조품 제작을 위해 주 단조공장 설비의 설계 기 술용역을 추가로 계약했다.
종합기계공업의 총화로 불리는 제철설비는 중화학공업에서 차지하는 막대한 비중에도 불구하고 당시까지 소 요설비의 전량을 외국에 의존하고 있었다. 이는 대규모 설 비투자에 대한 부담과 국내 기계공업의 낙후성에 기인하 고 있었지만 제철설비의 국산화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시 급한 과제였다. 무엇보다 국내 경제의 고도성장 및 산업의 다양화에 따른 내수 증가로 포항제철의 설비투자가 크게 늘어날 것으로 예측됐다.
현대양행은 중화학공업의 핵심인 제선, 제강, 압연 및 부 대설비를 국산화하기 위해 1976년 3월 당시 개발부 내에 제 철과를 신설했다.
1977년 1월에는 이를 제철사업부로 승격시켰다. 아울러 방대한 자료수집과 함께 제선, 제강 및 압연 분야에서 세계 정상에 오른 데마크, 크니세이 등 원천 기술 보유사와 제휴 를 맺고 기술을 축적해 갔다.
1977년 7월 일본 니세이사와 전기로(Electric Arc Furnace)에 관한 기술제휴를 맺은 데 이어 그해 8월 세계 적인 제철 제강설비 업체인 독일 데마크사와 연속주조설 비(Continuous Steel Casters)의 기술제휴를 체결했다. 이로써 군포공장은 용광로, 전기로, 압연설비, 연속주조 설비 등 제철 제강의 주요 설비를 모두 제작할 수 있게 됐 다. 1978년 5월에는 데마크사와 세계 최대 규모인 1만톤 에서 1만3000톤급의 자유단조형 단조기(Forging Press) 를 공동 제작하기로 합의했다.
현대양행은 또 1978년 5월 23일 군포공장에 보일러용 용기 제작에 필수적인 150Ts/CH 용량의 대형 열처리로를 완공했다. 대형 압력용기까지 제작할 수 있는 시설능력을 확보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