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420]근대문화유산 보고 '양명고'
2017.04.18/ #안양 #양명고 #근대문화유산 #문화재/
과거 사회복지법인 좋은집(기독보육원)에서 땅을 구입하여 설립한 안양 양명고 부지내에는 일제강점기 시대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 창고와 한국전쟁 이후 두한미군이 지어준 건물들이 있는 등 안양으로서는 근대문화유산의 보고라 할 수 있다.
학교 뒷쪽에 보면 돌을 쌓아 지은 2동의 건물이 있는데 한국전쟁 당시인 1950년 무렵 주한미군이 지어 의무실 등으로 사용하던 건물로 1동은 비교적 관리가 잘돼 현재 음악실로 이용하고 있으며 1동은 영선반 창고로 사용중인데 지붕 기와가 다 깨지는 등 관리가 엉망인 상태입니다.
음악실옆으로는 현재 테니스장이 있는데 과거 보육원 예배당이 있던 자리로 1950~60년대 안양에 예식장등이 없을 당시 이곳에서 결혼식이나 큰 행사 등이 자주 열렸지요.
특히 내부가 전부 나무로 매우 아름다운 공간이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는데 제 앨범속 빛바랜 흑백 사진에 제가 초등학교 4학년 때인 60년 말 무렵 이곳 예배당에서 있었던 결혼식 후 아버지와 함께 찍은 사진이 있네요.
양명고에는 수령이 100년이 넘는 오래된 소나무들도 있습니다. 안양2동 주민지차위원장을 역임했던 김귀연 전 위원장은 과거 정조대왕 능행차길이 이곳을 통과했을 것으로 생각한다고 하네요. 즉 한양을 출발한 능 행차가 노량진을 지나고 만안교를 지나 보육원 옆 야산(동네 어른들은 호랑이 꼬리 부분-관악산)을 끼고 돌아 이곳을 통과해 안양으로 접어들었다는 것이지요.
참고로 좋은집과 양명고 자리는 일제 강점기 당시 오끼이농장이 있었습니다. 일본 토호 오끼이는 1930년대 안양에서 대규모 농사를 지었는데 안양2동 대부분이 그의 농장이었을 정도로 그 면적 어마어마 했던 것으로 예기되고 있습니다. 과거 안양포도가 유명했는데 사실, 오끼이, 야스에와 같은 일본인 영농가들이 '30년대 중반 일본에서 묘목을 가져다가 재배하여 전국으로 퍼져나간 역사를 갖고 있지요.
기록에 의하면 조선 후기의 문신인 심기원의 묘가 좋은집 자리에 있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청송 심씨 대동보에 「과천 서이면 안양리」라고 기술되어 있으나 정확한 위치는 파악되지 않았으며 비산동에 거주하는 청송심씨 문중에 따르면 1930년대 경성보육원(현 안양기독보육원) 공사 때 그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묘가 발견되어 신문지상에 분묘이장공고까지 냈으나 후손이 나타나지 않자 당시 보육원 측에서 이장했는데 어디인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지요.
한편 양명고와 바로 옆에 자리한 사회복지시설 좋은집 부지는 1918년 서울에서 경성기독보육원으로 출발한 고아원이 1936년 안양으로 이전해 기독보육원이란 이름으로 문을 열었으며 이후 해관보육원, 현재는 좋은집으로 불리우고 있지요.
기록을 보면 좋은집에는 한국 첫 여류화가, 문필가, 여성운동가였던 나혜석이 시대적 편견에 떠밀려 유랑생활을 하던 중인 1947년에 이곳 농장에 머물었으며, 당시 이화여대에서 미술을 공부하고 있던 젊은 시절의 화가 박인경(한국 동양화가의 대가 고암 이응노 화백의 미망인)이 이곳에서 나혜석을 만나는 등 문화 역사적으로도 의미가 있는데, 정작 안양시와 지역문화계에서는 잘 모르고 있는 듯 싶네요.
재일교민 시사정보지 [아리랑] 에 다음과 같은 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긍선(경성기독보육원 설립자)은 1919년 서울 서대문 옥천동(玉川洞) 3천 평의 대지 위에 경성보육원을 설립한다. 세브란스 의전 교장 시절인 1936년경에는 넘쳐나는 고아들로 비좁아져 이를 경기도 안양읍 관악산 밑에 전야(田野) 8만평을 사들여 옮긴다. 따라서 이름도 자연히 안양기독보육원이 되었다. 우리 나라 최대의 고아원이었다. 유치원과 보통학교도 만들어져 있었다. 원래 이곳은 일제 때 일본인의 목장 즉, 마쓰모토 목장(松本牧場)이 있던 자리였다. 오긍선은 1916년 4월부터 1917년 5월까지 동경제대 의학부에서 연구생활을 한 바 있다. 이 시기 나혜석과 오긍선의 도쿄 생활은 겹쳐진다. 이 인연으로 후에 오긍선이 갈곳 없는 나혜석을 보호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