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420]근대문화유산 보고 '좋은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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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양시 안양2동 안양천변에 자리한 우리나라에서 처음 설립된 사회복지시설 ‘좋은집’입니다. 이곳에는 1930~1950년대 지어진 옛 건물들이 남아 있습니다. 사회복지시설 좋은집은 한국인 최초로 고아원과 양로원을 설립·운영했으며, 한국인 최초로 미국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아 해방 후 한국 정부가 발행한 최초의 의사 면허 보유자로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 교장이었던 오긍선 박사가 설립한 복지시설이지요.
1918년 12월 어느 날 세브란스병원에 7명의 고아가 찾아온 것이 계기가 되어 서울에서 시작한 경성고아원(1922년 재단법인 경성보육원으로 개칭)은 1936년 9월 안양으로 이전해 기독보육원이란 이름으로 문을 열었으며 이후 해관보육원, 현재는 좋은집으로 불리우고 있지요.
안양 기독보육원 자리는 일제 강점기 드넓었던 일본인 소유의 오끼 농장중 일부로 경시기독보육원 설립자인 오긍선 박사가 8만평을 매입해 원아 숙소와 농장 등을 지으면서 터를 잡았는데 6.25전쟁으로 경남 가덕도로 피난갔다가 다시 돌아와 1954-56년 무렵 미군과 선교사 등의 지원 등을 받아 숙소를 짓고 다시 둥지를 틀었지요.
1960년대 말경에는 기독보육원 일부가 매각돼 1974년에 해송고등학교(현 양명고)와 양명여고가 개교했는데 지금도 양명고 뒷쪽에는 1950년대 주한미군이 보육원에 지어준 의무실과 사무실, 예배당 등의 건물이 남아 있습니다. 목조 건물로 지어진 예배당은 1960년대 안양사람들의 결혼식장 등으로도 이용되기도 했는데 1980년대 초 철거된 후 그 자리에 학교 테니스장이 들어서 지역사에 중요한 가치가 있는 건물이 사라져 아쉽기만 합니다.
한편 기록을 보면 좋은집에는 한국 첫 여류화가, 문필가, 여성운동가였던 나혜석이 시대적 편견에 떠밀려 유랑생활을 하던 중인 1947년에 이곳 농장에 머물었으며, 당시 이화여대에서 미술을 공부하고 있던 젊은 시절의 화가 박인경(한국 동양화가의 대가 고암 이응노 화백의 미망인)이 이곳에서 나혜석을 만나는 등 문화 역사적으로도 의미가 있습니다.
좋은집과 바로 옆의 양명고(과거 기독보육원 땅) 자리에는 일제 강점기 당시 오끼이농장이 있었습니다. 일본 토호 오끼이는 1930년대 안양에서 대규모 농사를 지었는데 안양2동 대부분이 그의 농장이었을 정도로 그 면적 어마어마 했다고 합니다. 과거 안양포도가 유명했는데 사실, 오끼이, 야스에와 같은 일본인 영농가들이 '30년대 중반 일본에서 묘목을 가져다가 재배하여 전국으로 퍼져나간 역사를 갖고 있지요.
좋은집에는 한국 첫 여류화가, 문필가, 여성운동가였던 나혜석이 시대적 편견에 떠밀려 유랑생활을 하던 중인 1947년에 이곳 농장에 머물렀습니다. 당시 이화여대에서 미술을 공부하고 있던 젊은 시절의 화가 박인경(한국 동양화가의 대가 고암 이응노 화백의 미망인)이 이곳에서 나혜석을 만나는 등 문화 역사적으로도 의미가 있지요.
기록에 의하면 조선 후기의 문신인 심기원의 묘가 좋은집 자리에 있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청송 심씨 대동보에 「과천 서이면 안양리」라고 기술되어 있으나 정확한 위치는 파악되지 않았으며 비산동에 거주하는 청송심씨 문중에 따르면 1930년대 경성보육원(현 안양기독보육원) 공사 때 그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묘가 발견되어 신문지상에 분묘이장공고까지 냈으나 후손이 나타나지 않자 당시 보육원 측에서 이장했는데 어디인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지요.
재일교민 시사정보지 [아리랑] 에 다음과 같은 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긍선(경성기독보육원 설립자)은 1919년 서울 서대문 옥천동(玉川洞) 3천 평의 대지 위에 경성보육원을 설립한다. 세브란스 의전 교장 시절인 1936년경에는 넘쳐나는 고아들로 비좁아져 이를 경기도 안양읍 관악산 밑에 전야(田野) 8만평을 사들여 옮긴다. 따라서 이름도 자연히 안양기독보육원이 되었다. 우리 나라 최대의 고아원이었다. 유치원과 보통학교도 만들어져 있었다. 원래 이곳은 일제 때 일본인의 목장 즉, 마쓰모토 목장(松本牧場)이 있던 자리였다. 오긍선은 1916년 4월부터 1917년 5월까지 동경제대 의학부에서 연구생활을 한 바 있다. 이 시기 나혜석과 오긍선의 도쿄 생활은 겹쳐진다. 이 인연으로 후에 오긍선이 갈곳 없는 나혜석을 보호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의학자ㆍ사회사업가 오긍선(吳兢善1879.고종 16∼1963)
오긍선.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중극(重克), 호는 해관(海觀). 아버지 인묵(仁默)과 어머니 한산 이씨 사이의 장남으로 충청남도 공주에서 태어났다. 8세부터 한학을 공부하여, 상경 후 내부주사(內部主事)를 지냈으나 개화의 물결로 1896년 배재학당에 입학하여 협성회(協成會)ㆍ독립협회ㆍ만국공동회 간부로 활약하였다. 일제에 의해 체포령이 내려져 피신하면서 공주·논산·군산 등지에서 선교사와 개인교사를 하였다.
1902년 미국유학을 하여 센트럴대학 교양학부를 수료하고, 켄터키주 루이빌의과대학에서 수학하고 의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07년 루이빌시립병원 인턴으로 들어가 6개월간 피부과를 전공하였고, 같은 해 10월 미국남장로회선교부로부터 한국 파견 선교사 자격을 얻어 6년 만에 귀국, 전라북도 군산 야소병원장에 취임하여 본격적인 의료봉사사업을 시작하였다.
1909년 군산에 영명중학교(永明中學校)를 설립하여 교장직을 맡아가며 청소년교육을 실시하는 한편, 구암교회도 설립하였다. 1910년 봄, 군산을 떠나 전라남도 광주로 가서 광주야소교병원장에 취임하고, 1911년에는 목포야소교병원장으로 전임하여 목포 정명여학교(貞明女學校) 교장직도 겸임하였다. 1912년에는 남장로회 선교부 대표자격으로 세브란스의학 전문학교 조교수 겸 진료의사로 취임하였는데, 이는 한국인 교수로는 첫 등용이었다.
1916년 4월부터 1년간 일본 동경제국대학 의학부에서 피부비뇨기과학을 전공하고 돌아와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에 피부과를 신설하여 과장 겸 주임교수로 피임되었다. 1919년에는 경성보육원(京城保育員)을 설립하여 고아양육사업을 시작하고, 1934년 2월에 에비슨교장 후임으로 제2대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교장에 취임하였으며, 교장취임을 축하하는 명예이학박사와 명예법학박사학위를 미국 센트럴대학과 루이빌대학에서 각각 받았다.
1942년 1월 일제의 압력으로 교장직을 사임한 뒤로 보육사업에만 전념하였다. 광복 후에는 관계진출의 권유를 뿌리치고 안양기독보육원장으로서만 진력하였는데, 그간 조선피부비뇨기과학회 명예회장, 대한성서공회이사장, 기독청년회이사, 서울여자의과대학 재단이사 등을 지냈으며, 구황실재산관리총국장을 지내기도 하였다.
서울특별시 시민보건위생공로감사장, 민간사회 분야 사회사업공로표창, 대한의학협회 의학교육공로표창, 정부의 공익포장(公益褒章), 새싹회의 소파상(小波賞) 등을 수상. 1963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증되었다.
<의학박사 제1호> - 동아일보(1985. 10. 5)
우리 나라 의학박사 제1호, 최초의 고아원 설립자. 1896년 배재학당에 입학, 서재필이 주도하던 학생자치조직 [협성회(協成會)]에 가입했으며, [독립협회]에도 참여, 활약하던 중 1899년 체포령이 내리자 미국으로 건너가 켄터키주 센추럴대학과 루이빌 의과대학에서 수학, 1907년 한국 국적자로서는 최초로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귀국 후 5년 동안 군산, 광주, 목포 등지에서 [야소교] 병원장을 지내며 [안락학교] [정명학교] 등을 설립, 어린이교육을 시작했으며, 1912년부터는 세브란스 의전(醫專)에서 후진을 양성하다 3ㆍ1운동이 일어났던 1919년 서대문구 옥천동에 [경성보육원]을 설립, 그가 평생을 바친 고아양육사업을 처음으로 시작했다.
1936년 사재를 털어 안양에 땅 15만 평을 구입, 현재의 [안양기독보육원]을 만들었다. 1962년 소파상을 받았다. 1963년 대한민국장 추서. 1885년 10월 4일 세브란스 병원 구내에 동상 제막.(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