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동네수원]역사와 종교의 공간 북수동성당
2016년 6월 6일 월요일
수원 최초의 성당 북수동성당
수원 화성의 중심부인 장안문 인근에 있는 북수동성당(구 수원성당)은 수원 시내에서 가장 역사가 오래된 본당으로 과거 순교자들이 신앙을 증거하다 치명한 중영(中營, 摠理營)인 포도청 터와 그리고 수원 최대의 부잣집들이 모였던 팔부자의 집터와 일부 겹쳐지는 공간으로 2000년 천주교 수원성지로 선포한 역사와 종교의 숨결이 깃든 근대문화유산이라 할 수 있다.
북수동성당은 1890년 왕림성당의 수원공소로 출발해 1904년부터는 남수리 황학정 정자와 그 대지 800평을 사들여 공소 강당과 화양학교를 개설하여, 남녀 아동 200여 명을 교육하다가 1906년 북수리(현 북수동 성당 자리)의 세칭 팔부자 집이라 불리운 기와집 두 채와 행랑채를 매수하여 본당 창설 기지를 삼아 1923년 11월 23일 수원성당 본당으로 독립한다.
1932년 11월 13일 수원 최초의 고딕식 성당이며 근대식 건축물인 성당을 건립하였다. 옛 성당은 1978년 철거되고 1979년 4월 현재의 성당이 건립되었다.
1930년 북수동성당 4대 주임으로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의 심응영-폴리(Polly, 沈應榮, 1884~1950, 데시데라토) 신부가 부임하고 나서부터 재임 18년간 수원의 천주교회는 크게 발전하기 시작하였는데 그는 6.25 때 몸을 피하지 않고 의연히 성당 안에서 기도하던 중 인민군에게 끌려가 순교하였다.
심 신부는 수원 화성의 거룩한 순교를 기념하고 미신을 타파하기 위해 일제강점기인 1932년 파리외방전교회의 원조와 그의 모친이 삯바느질로 모아서 보내 준 돈으로 기와집 성당을 헐고 중국인 기술자들을 고용하여 고딕식 성당(75평)을 신축하였는데 이는 수원 최초의 고딕식 성당이며 근대식 건축물이다.
1934년 학술 강습회 소화학원을 개설하였고, 해방 후인 1946년에는 소화국민학교를 인가받아 성당안에 개교하였는데 수원시민들이 가장 보내고 싶은 사립학교였다.
1976년 구식의 석조 사제관을 헐고 다목적 사제관을 다시 건립하고, 1979년 4월 5일에는 40년 묵은 옛 고딕 성당을 철거하고 연건평 236평의 주교관(主敎冠) 모양으로 된 현재의 새 성당을 준공 축성하였다.
현재 성지 마당에는 정약용이 설계한 봉화대 보양의 묵주 알고 버드나무 형태로 성곽 둘레를 축소한 로사리오의 화단이 조성되어 우리 꽃, 야생화 1천여 종이 심어진 방화수주길을 이루고 있다.
그럼 북수동성당이 수원성지가 된 배경을 살펴보자.
정조대왕이 49세에 갑자기 의문사하자 이듬해인 1801년(신유박해)부터 전국적으로 천주교 박해가 시작된다.
수원 지역에는 신유박해를 계기로 서울, 광주, 내포 등지로부터 신자들이 숨어들어 공동체를 형성하자 한강 이남을 비롯하여 경기도와 충청도 일대에서 체포된 천주교인들은 수원유수부 관할하던 정조의 정치 무대였던 수원화성으로 압송되어 갖은 고문과 박해를 겪는다.
올해는 병인박해(1866년~1871년) 150주년이 되는 해이다. 수원에서의 순교는 병인박해 때 집중되는데 수원 화성에서 취조와 고문을 당한 후 옥사, 장하치명, 백지사형, 참수형, 미루나무에 교수형, 아사형, 장살형 등 다양한 형태로 순교를 당한다. 파악된 기록에 의하면 수원에서 처형된 순교자는 83위이며 대부분이 병인박해 당시 순교한 것으로 밝혀졌고 이 외에 이름이 알려지지 않고 기록 없이 순교한 분들이 수천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현재까지 순교지로 밝혀진 곳은 ‘화성행궁’, ‘화청관 이아’, ‘중영’, ‘동남각루’, ‘남암문’, ‘형옥’, ‘팔달문 밖 장터’와 ‘장안문 밖 장터’이며 그 외에도 ‘종로 사거리’, ‘화령전과 화서문 사이 사형터’, ‘동장대’, ‘토포청’, ‘방화수류정’, ‘화홍문’ 등도 순교지로 추정돼 수원 화성 성곽 전체나 다름없다.
수원성지에서는 박해 시대에 수원 화성에서 순교한 일흔여덟분(『치명일기』)과 수많은 무명 순교자들의 순교 정신을 기리고 있는데 특별히 그 가운데 지 다두를 비롯한 수원 성지 순교자 여덟분의 시복 운동을 벌이고 있다.
한편 수원 화성(華城 : 아름다운 성)은 조선 제22대 정조대왕의 명을 받아 다산 정약용(요한) 선생이 설계, 시공한 성으로 1794년(정조 18년) 1월 착공하여 2년 9개월 뒤인 1796년(정조 20년) 9월에 완성된 둘레 총길이 5.743km, 직경 평균 1.8km의 성곽이다.
화성은 다산 선생의 천주 신앙을 뿌리로 하여 과학적이고 합리적이며, 실용적인 구조로 설계되었는데, 성벽은 외측만 쌓고 내측은 자연 지세를 이용해 흙을 돋우어 메운 축성술뿐 아니라 성곽 곳곳에 천주교를 상징하는 삽자가 형태 양식이 가미되는 등 신앙과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이룬 수작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다산 선생이 수원 8경 중의 하나인 화홍문과 그 위쪽에 방화수류정을 세웠는데 화홍문은 아름다운 무지개 문이란 뜻으로 하느님께서 노아와 맺은 구약의 계약을 상징하고, 화홍문을 떠받치고 있는 7개의 수문은 예수님께서 인간과 맺은 신약의 계약인 7성사를 상징하고 있다 할 수 있다.
방화수류정은 “꽃을 쫓고 버드나무 길을 따라가는 아름다운 정자”란 의미이다. 서쪽 벽에 십자가 문양이 86개(기둥 때문에 5개는 반쪽 십자가)가 새겨져 있는데, 당시 천주학이 서양의 학문인 서학이라 하여 서쪽 벽에 새겨 넣었고, 해가 져 어두워질 무렵에 십자가가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반짝 빛이 나도록 만들었다. 이는 세상 어둠이 드리우는 곳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광명의 빛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하겠다. 지붕도 8각을 기본으로 남북에 합각을 더 세워 십자(十)형으로 되어 있고 방화수류정 안으로 올라서서 위를 바라보면 천정을 받치고 있는 서까래들이 십자가형으로 되어 있다.
이에 1997년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으로 등재된 수원 화성은 2000년 대희년에 수원교구장 최덕기 바오로 주교에 의해 천주교 성지로 선포됐다.
수원화성의 박해지는 수원성(화성) 곳곳에 거쳐 산재해 있는 데 다음과 같습니다.
-. 행궁 : 정조대왕이 부친 사도세자의 융능참배 행차시 처소. 양반 교인을 심문한 곳
-. 이아(화청관) : 지방행정업무를 담당했던 관아. 중인이하 일반인, 천민들이 심문을 받던 곳
-. 중영(토포청) : 지방포도청, 치안 및 검찰청. 비공개적으로 백지사형과 교수형이 집행된 곳
-. 동남각루 : 동남쪽의 보초경계지. 천주교인을 참수형에 처해 몸을 성밖으로 내던진 곳
-. 남암문(시구문) : 화성 남쪽 팔달문 동편의 비상문. 참수된 천주교인 목을 매달아 놓았던 곳
-. 형옥(초혹) : 6칸으로 된 형무소 감옥. 현재도 옥거리라 부름. 비공개 아사형이 집행된 곳
-. 팔달문(남문) 밖 장터 :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공개적으로 천주교인의 장살형(몽둥이)이 집행된 곳
-. 장안문(북문) 박 장터 :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공개적으로 천주교인의 장살형(몽둥이)이 집행된 곳
-. 사형터 : 화령전과 화서문 사이의 사형터. 천주교신자들도 일반죄수들과 함께 처형된 곳으로 추정됨
-. 종로사거리 : 행궁앞 광장사거리. 왕래가 빈번한 종로에서 교인들이 공개적으로 처형된 곳으로 추정됨
-. 동장대 : 서장대와 함께 군사훈련장. 군사 제식행사 중에 교인들이 공개적으로 처형된 곳으로 추정됨
-. 화홍문과 방화수류정 : 다산 정약용(요한)의 깊은 신심표출. 7성사수문, 십자가지붕, 서벽에 십자가 문양 새김
출처 : '한국 천주교 성지순례' - 한국천주교주교회의著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