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1028]조선시대 동여도(東輿圖)속 안양 · 군포 · 의왕 주변 지형

2026.10.28/ #아카이브 #옛지도 #동여도 #조선시대 #안양 #금천 #과천/ 동여도에 표기된 안양 주변 지형/
안양은 과거 금천(衿川)의 변방이자 때로는 과천(果川)의 변방으로 지도에는 안양 표기는 없다. 인앙야 과천현에 속해 있을 이 무렵 지도에는 북쪽에 관악산과 삼상산, 동쪽에 청계산, 남쪽에 태을산이 있고 그 중심을 흐르는 하천(현 학의천)은 인덕원천으로 표기돼 있다.
조선시대 안양은 경기도 과천현에 속해 있었다. 1895년 5월에 칙령 101호에 의해 크게 개정한다. 이때는 종래의 8도제를 소지역주의를 채택하여 전국을 23부로 나눈다. 이때의 안양은 인천부에 속하고 인천부내에 시흥,관천,수원등 12개의 현이었다. 그러나 이 제도는 시행 1년만인 1896년 8월에 13도제로 다시 고쳐 과천군 등은 경기도에 예속 시킨다.
1910년 주권상실 후 일본이 식민 통치에 유리하도록 개편한 것이 1914년 3월 부령 111호에 따라 부, 군을 통폐합하면서 과천군 과 안산군을 합하여 시흥군에 흡수시켰다. 이때 과천군 하서면 과 상서면 을 합해 지명을 서이면 으로 하면서 그 중심지를 지금의 호계 2동(구 교육청부근)에 면사무소를 두었다.
조선시대에 안양(安養)이라 하면 금천현 현내면의 안양리(安養里)를 의미한다. 현재의 안양지역과 관련하여 볼 때 석수동 일대로 안양사(安養寺)와 관계된 지명임을 알 수 있다. 또한 과천군 하서면 안양리(安陽里)가 보이는데 이곳에는 역참인 안양역(安陽驛)이 있었으며, 현재의 안양역 주변으로 추정된다. 대한제국기에도 경부선철도의 임시정거장이 있던 곳이 안양장(安陽場)이었으며, 1905년 11월 원태우 지사가 이등박문이 탄 기차에 돌멩이를 던진 곳도 안양장 근처였다. 그런데 안양장과 안양역참(安養驛站, 撥所)은 안양(安陽)과 안양(安養)이 혼용되어 쓰이고 있는데, 1914년 행정구역통폐합 이후 안양(安養)으로 통일되었다.
1905년 경부선이 개통되기 전까지는 현재의 안양은 군, 현의 변방에 위치하고 역사의 중심에 들지 못하다. 경부선이 개통되면서 교통의 중심이 되고 한 시대 역사의 중심에 위치하게 된다.1917년에 안양 행정의 중심지가 호계리에서 안양리로(현 구 서이면사무소 건물자리) 이전하고 이때 1936년 면의 명칭도 안양면으로 개정한다. 이후 1949년 안양읍으로 승격, 1973년 7월1일 안양시로 승격하였다. 현 안양의 영역은 조선시대 삼성천과 만안교 원위치를 기점으로 안양천을 기준으로 그 북쪽을 금천현의 안양리 그 남쪽은 과천현 안양으로 구분되었으나 여러 차례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현재의 안양을 이루고 있다.
금천은 조선시대 관아와 행궁이 자리했을 만큼 규모가 컷던 고을 행정의 중심이었으며 시흥현과 시흥군의 행정 명칭을 시작한 곳으로 1960-70년대 시흥이라 통칭하고(지금은 행정구역과 전혀 상관없는 시흥시가 사용함) 시흥역(금천구청역 바뀜)이 있었을 만큼 행정구역이 오래된 곳이다,
과천의 역사 또한 아주 오래된 곳이다. 삼국시대의 명칭은 동사힐현(冬斯肹縣)·율목군 등 이었으며 신라의 삼국통일 후 757년에 율진군으로 바꾸어 한주에 속하였다. 이때 곡양현(穀壤縣:시흥)·공암현(孔巖縣:양천)·소성현(邵城縣:인천)을 영현으로 두었다. 940년 과주로 개칭하였으며, 1018년에는 광주에 예속되었다가 뒤에 감무가 파견되어 독립하였다. 1413년(태종 1)에 지금의 이름인 과천현으로 바뀌어 사용하기 시작한다. 이듬해 금천에 병합되어 금과현으로 되었다가 수개월 후에 복구되었고, 세조대에도 금천현과 병합된 적이 있으나 곧 분리되었다. 별호는 부안·부림이었다.
동여도(東輿圖)는 조선 후기 지리학자 김정호가 1856년(철종 7년)에서 1861년(철종 12년) 사이에 제작한 전국 채색 필사본 지도이다. 목판본인 유명한 《대동여지도》를 만들기 전에 제작한 원형(프로토타입)이자 저본(底本) 역할을 한 지도이다.
조선 철종 재위시기인 1856년(철종 7년)부터 1861년(철종 12년) 사이에 김정호가 제작한 채색 지도로, 총 23첩으로 이루어져 있다. 지도의 높이는 약 7m 이다. 가로 80리, 세로 120리를 한 개의 방안으로 하여 만들어졌다.
김정호가 대동여지도를 제작하기 전 프로토타입으로 만들어진 지도로, 주현(州縣) 간의 도로와 산천, 파수(把守), 진보(鎭堡), 역도(驛道), 영진(營鎭), 목소(牧所), 방면(坊面), 봉수(烽燧), 능침(陵寢), 성(城), 창고, 도로 등이 수록되어 있다. 경선 1도 차이는 시간으로 4분이고, 지상에서의 거리는 200리이며, 30도 차이는 1진(辰)이고, 거리로는 6,000리이다.
대동여지도와의 차이점을 살펴보면 주기명(註記名)의 경우 먼저 만들어진 동여도는 18,736개가 수록되었지만, 후대에 만들어진 대동여지도는 13,188여 개로 줄어들었다. 또한 동여도는 지도 여백에 『방여기요(方輿紀要)』에 실려 있는 지도의 중요성을 논한 글귀가 적혀 있으며, 시간의 차이와 경도(經度)의 차이, 그리고 지상에서의 거리 차를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반면에 동여도는 경선 간격의 차이와 지도 제작을 위한 표준위선의 개념이 명백하지 않다.
대동여지도를 만들기 전 선행 제작된 채색 전국지도로, 한국 지리학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한국 옛 지도 가운데 가장 정밀한 지도로, 대한민국의 보물 제1358-1호, 제1358-2호 두 건이 지정되어있다.
철종(哲宗)·고종(高宗) 연간에 고산자(古山子) 김정호(金正浩)가 만든 분첩절첩식(分疊折帖式) 필사 본 채색지도로, 총 23첩이며 수첩(首帖)은 목록집이고, 제1첩부터 제22첩까지는 각 지역의 지리가 그려져 있다.
지도는 산천표시와 함께 주현별(州縣別) 경계선을 그어, 주현간의 도로를 표시하였고, 그 바탕위에 영진(營鎭), 주현(州縣), 진보(鎭堡), 역도(驛道), 목소(牧所), 방면(坊面), 창고(倉庫), 봉수(烽燧), 능 (陵寢), 성(城), 도로(道路), 파수(把守) 등을 표시하였다. 지도상의 거리는 제1첩 1면에 방안을 그려놓고‘方十里每片’이라고 하여 매방(每方)의 실 거리가 10리임을 표시하였다.
동여도는 지금까지 알려진 대동여지도의 필사본 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정밀·정확하게 그려진 훌륭한 지도첩이다. 도화서에서 그린 지도제작 솜씨와도 같은 뛰어난 그림과 글씨, 채색 등이 18세기 후반 기 조선지도 제작기술의 높은 수준을 잘 나타내는 대표적 작품 중의 하나로 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