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1022]의왕 하우현성당(1971년)과 은퇴사제 김영근 신부님

2026.10.22/ #아카이브 #기록 #옛사진 #since1971 #의왕 #하우현성당/ 1971년에 촬영한 의왕 청계동의 하우현성당 모습으로 국사편찬위회 전자사료관에서 발견한 기록이다. 사료 생산자는 안양 중앙성당으로 되어있다.(원본 보기: https://archive.history.go.kr/image/viewer.do?gid=DKI012_04_01&catalogId=DKI012_04_01V0000_008 )
하우현 성당은 1971년 무렵 교세가 작아 안양성당에서 관할하던 공소였기에 주임신부가 없었다. 당시 성당에는 사제 은퇴후 상주하며 휴양과 성당을 돌보던 원로 사제 한분이 계셨는데 천주교 수원교구 김영근(1894~1971) 신부님이시다.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를 졸업하고 1923년 5월 20일 사제로 서품되어 갓등이(현 왕림) 본당 보좌신부로 사제 생활을 시작 김신부님은 1964년 6월 17일 사목 일선에서 은퇴후 하우현 본당에 머무르면서 1965년 미군 부대로부터 건축 자재를 지원받아 현재의 하우현 성당을 신축하였다.
하우현(下牛峴)성당은 본당 설립 100년이 넘는 역사에 안양지역 천주교 전파의 첫 머리를 차지하는 의미 있는 곳이다. 신도수 200여명에 성당 규모는 전국 본당 성당 중 가장 작은 성당이지만 이 곳은 한국천주교뿐 아니라 근대역사의 흔적뿐 아니라 한국과 프랑스 건축양식을 절충한 한옥 사제관을 통해 근대사적 건축양식까지 만날 수 있는 역사 깊은 성당이다.
하우현에는 개화기인 1884년에 이미 공소가 시작되어 뮈텔 신부가 정기적으로 찾아와서 전교하였다. 이때까지도 한국 천주교는 박해하에 있었기 때문에, 뮈텔 신부는 상복으로 변장하고 은밀히 하우현을 방문하였다. 1885년부터는 프와넬(Poisnel, 朴道行) 신부가 전교한 기록이 남아 있다. \
1886년 한불조약의 성립으로 한국 천주교회에는 신교의 자유가 허용되기 시작했다. 이 조약이 비준된 이듬해인 1888년 7월 왕림(갓등이)이 최초로 본당으로 설정되자 그 관할공소로 편입되었다.
1894년 5월 왕림본당 2대 신부인 알릭스(Alix) 신부는 하우현 신자들이 공소 강당없이 교우 집에서 공소 예절을 행하는 것을 보고 알릭스 신부가 협조한 금액과 하우현 교우들이 모금한 1,500냥으로 초가 목조 강당 10간이 건축되었으며, 이 건물이 명동성당에 이어 우리나라의 두 번째 성당이었다.
그 뒤 왕림 본당 주임신부 대리인 이종국(李鍾國, 바오로) 신부는 1899년과 1900년에 걸쳐 자주 이곳에 체류하면서 사목활동을 하였다. 하우현이 본당으로 되고 샤플랭 신부가 부임하여 5년간 전교하였다.
1900년 9월경 갓등이 성당에서 분리돼 하우현이 본당으로 되고 샤플랭(Chapelain, 한국명 채시걸) 신부가 부임하면서 정식 본당이 되었다. 주보성인은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와 성 루도비코 서 볼리외 신부이다.
하우현성당 우측에는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사제관이 자리하고 있다. 초대 주임 샤플랭 신부가 1906년 부임한 신부가 생활할 수 있도록 건축한 것으로, 처음에는 벽체를 거의 벽돌로 쌓고 서양식 지붕틀에 함석지붕을 올리고, 외부에 초석을 갖춘 기둥을 세워 회랑을 마련하였다. 이후 개보수를 거치면서 돌로 만든 벽체에 팔작 기와지붕을 올렸다. 우리나라와 서양식을 절충한 근대 건축양식의 하나로서, 2001년 사제관의 문화재적 가치를 인정하여 경기도 기념물 제176호로 지정 보호하고 있다. 사제관 앞뜰에는 프랑스 볼리외 신부와 김영근 신부의 기념비가 각각 세워져 있다. 2004년 사제관 건물을 복원하고 주변을 새롭게 단장하였다.
하우현성당에서는 1903~1904년경부터 학교를 설립하여 운영하였다. 1920년 윤예원(尹禮源, 1889~1869) 신부가 하우현으로 오면서 학교의 성격에 변화가 생겼다. 학교 이름은 ‘경애강습소(敬愛講習所)’라 했으며, 체계를 갖춘 4년제 초등교육 기관이었다. 이전의 학교가 종교교육이 목적이었다면, 윤예원 신부 부임 이후는 선교와 함께 봉사, 애국심 함양 등을 교육의 중점으로 하면서 문맹퇴치와 더불어 근대교육의 중심적 역할을 했다.
윤예원 신부는 부임하기 전 황해도 은율본당에 있을 때 신자들에게 독립의식을 심어주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지원하기도 했다. 경애강습소는 윤예원 신부가 전임한 이후 운영상의 어려움을 겪다 1929~1930년경 폐쇄되었고, 당시 주변 청계지역의 서당들과 모두 합하여 정준모(鄭俊謨, 1893~1958) 선생이 이끄는 성현서당(星峴書堂)으로 이어졌다.
하우현에 언제부터 교우들이 모여들어 살게 되었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청계산과 광교산 등 높은 산들로 인해 자연의 계곡과 울창한 수목이 있었던 이 일대는 19세기 초 조선시대 말 박해를 피해 산길을 찾던 천주교인들에게는 더 할 나위 없는 피난처였음에 비추어 교우촌이 형성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천주교 교우들은 때로는 땅을 파고 토굴 속에서 살았다고 한다. 따라서 '토굴이'라고도 불리우기도 했다. 하우현에서 국사봉을 넘어 5키로 정도 가면 둔토리성지가 대표적인 곳이다.
한편 현 의왕시 청계동, 과거 시흥군 의왕읍 청계리(始興郡 儀旺邑 淸溪里) 속칭 ‘하우고개’ 자락과 청계산과 광교산맥을 잇는 골짜기에 자리하고 있는 하우현은 서울에서 약 24㎞ 떨어져 있고 안양시와는 20리 거리로 근접해 있으며 조선시대 동양원이라는 역원(驛院)이 있던 곳으로 현재 원터라고도 불리운다.
역원이란 과거 중앙관청의 공문을 지방관청에 전달하고 사신의 왕래나 관리 부임시 마필을 공급하던 역(驛)과 숙식을 제공하던 국가운영 여관 원(院)을 합친 말이다. 하우현은 조선시대에 인천, 제물포, 이천, 여주를 잇는 간선로가 통과하면서 동양원(洞陽院) 이라는 역원이 있던 곳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