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원신]안양시민신문 그시절 안양이야기(3) 호계동(虎溪洞)

2026.10.20/ #지명 #안양 #호계동 #변원신
고 변원신 선생이 들려준 안양이야기
호계동은 예전에 방죽말, 샛터말, 안말 일대가 범이 많은 곳이라 하여 범계 즉 호계(虎溪)라 칭한데서 유래되었다. 호계1동은 조선시대에는 과천현 상서면 도양리 지역이었다가 1914년 3월 1일 시흥군 서이면 호계리로 되었다. 1941년 10월 1일 안양면 호계리에서 1949년 8월 15일 대통령령 제162호에 따라 안양읍 호계리로 칭했다.
호계1동은 1983년 10월 1일 시 조례에 의해 호계동을 분동해 덕고개, 금성마을 지역을 호계1동으로 분리하게 되었다. 동으로는 갈산동, 서로 군포시 금정도, 남으로 호계3동, 북으로 호계2동이 각각 위치해있다.
덕고개는 현 호계신사거리에서 교도소로 향하는 고개를 일컬었으며 옛날 지방에서 인자하고 덕을 쌓은 사람이 한양으로 과거를 보러 오고가던 고개라 하여 덕고개라 지칭하게 되었다.
교통의 요충지로 조선시대 만안로가 개설된 이래 1930년대에는 서울과 과천, 남양을 관통하는 도로 및 경수산업도로의 개설로 서울, 과천, 수원, 안산을 연결하는 교통이 발달해 아파트가 급속히 들어서면서 인구의 유입이 급증한 곳이다. 또 중앙제지, LG전선 등 60여 업체가 소재한 중소기업 밀집지역으로 평촌신도시의 배후 상가지역으로 형성되어 있다.
역사적으로 호계1동은 안양지방 최초 개신교의 전래지로 알려지고 있다. 1895년 보고에 의하면 덕고개 출신 허대진이 처음으로 세례를 받았다고 했는데 이때 덕고개교회 즉 감리교회가 설립되었다고 하지만 그 위치는 알 수 없다. 문헌에 따르면 1909년 장로교회에서 인수하여 삼성리 교회로 명칭이 변경되었다고 전해진다.
호계2동은 호계동에서 1983년 10월 1일 시 조례 제600호로 분동해 안말, 방죽말, 샛터말 등의 지역이 호계2동이 되었다. 동으로 신촌동, 서로 안양8동, 남으로 호계1동, 북으로 비산2동이 위치했으며 안양교육의 발상지라고 할 수 있다. 동양나이론, 신아화학 등이 운집한 경공업 지역으로 강남, 경남, 대림, 덕원, 현대 등의 아파트와 연립주택이 밀집한 신흥개발지역이며 주민의 구성은 토박이가 다수를 차지한다.
방죽을 쌓아 농경지에 유입해 농사짓기가 수월했던 곳으로 안양면 이전에는 과천면 상서면사무소가 있었다. 일제강점 초기에는 안양면의 전신인 서이면사무소가 소재한 곳으로 관가의 중심지이기도 했던 호계2동은 안양 최초의 교육시설이 들어선 곳이기도 하다.
숙종 42년 1716년에 창건되어 대원군 집정 때 1870년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된 창강서원(또는 호계서원)과 옛 범계주민들이 풍류를 즐기던 소호정이 있었다. 또 일제강점기 초에 설립된 낙영학교는 비록 남아있지 않고 그 기록만 전해질 뿐이지만 이곳이 이미 오래전부터 안양교육의 발아지였다는 사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전파연구소가 있었고 호계체육관이 최근 건립되었다.

[편집자 주]안양시민신문의 기획 연재 및 지역 향토 기록에서 다뤄진 '그 시절 안양 이야기'는 해방 전후부터 1960~70년대 산업화와 도시화 이전, 안양의 소박했던 동네 풍경과 삶의 애환을 담은 대표적인 지역사 콘텐츠로 작고하신 고 변원신 어르신께서 연재의 글을 쓰셨다.
고 변원신 선생은 1933년 현재 안양9동인 과천군 하서면 후두미(과거 안양3동에서 분리)에서 태어났으며 군 제대후 20대때 시흥군 안양읍 서기로 시작, 안양3리 이장과 초대 안양시의원, 새안양회 회장, 안양시새마을회 초대회장, 사랑의집수리 이사장, 고충처리위원장, 안양시한일친선협회 회장, 안양시 프로축구 LG연고이전 범시민대책위원회 위원장, 안양권 4개시 행정구역 통합추진 안양시위원회 상임대표, 안양시공직자윤리위원장, 협심새마을금 이사장 등을 역임했다.
그는 1960년의 안양읍시절 부터 2000년대의 안양시까지 이어져오는 동안 행정과 시민사회 등 전방위적으로 두루 소통하면서 지역 어르신으로 역활을 해왔으며 과거 시흥군 행정구역 시절부터 맺은 관계를 통해 얻은 지식과 경험을 지역사회 발전 방향에 대한 원로의 입장에서 자문과 고견을 제시하는 등 행정 업무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면서 안양시정과 지역사회 발전에 기여하고 존경받았던 원로 인사였으나 안타깝게도 지난 2015년 9월 6일 오전 5시18분 82세를 일기로 별세하셨다.
[안양 호계동(虎溪洞) 지명 유래]
안양 호계동은 역사적으로 과천군의 상서면사무소와 일제시대 서이면사무소가 소재해 1900년대 초 무렵에 관가의 중심지였다. 안양최초의 교육시설이던 창강서원(호계서원)과 일제시대(과천군 하서면)초 낙영학교(1912년, 폐교) 등이 있었던 안양교육의 발상지이며, 범계 주민들의 풍류를 즐기던 소호정 등이 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안양시 호계동(虎溪洞)의 유래는 예전에는 방축(防築)말(마을), 샛터(新基)말, 안말(內村)일대가 범(호랑이)이 많은 곳이라 하여 호계(또는 범계)라 칭한대서 유래한다. 이곳은 들판과 골짜기 야산이 있어 자연초목이 어우러져 맹수의 서식환경이 양호하여 냇가에 범(호랑이)이 많다하여 범계(또는 호계)라고 불렀고, 이를 한자화하면서 호(虎)계동이 됐다. 범내의 한자 표기인 '호계(虎溪)'는 별칭이 ‘범계’가 있는데, 순우리말 발음을 되살려 '범계'라 불리게 된 것 같다.
안말과 새터말 사이에 축말(방죽마을, 房築洞)이 있다. 방축말에는 조선시대 과천군 하서면의 관가가 있었고 그후 1914~1917까지 시흥군서이면사무소가 있던 유서 깊은 고을이다. 물 범람의 피해를 막기 위하여 둑(堤防, 둑)을 쌓았는데, 조선시대 제방이 있던 마을로 주변이 취락지라 방축말(제방이 있던 마을)이라 부른 연유가 되었다.
이 물줄기는 모락산에서 내려와 안양천으로 합류되는 현재의 호계천이다.
숙종때 발간된 이천읍지(異川邑誌) 제언조(堤堰條)에 호계제언재현서남문18리(虎界堤堰在縣西南門十八里)라 했는데, 이로 미루어 방죽(제언)의 이름은 ‘호계’이고, 그 위치는 과천지소(과천현 관아, 현 과천시 중앙동)에서 서남쪽으로 18리 지점에 있었다.
호계동(虎溪洞) 방죽말에서는 해마다 음력 10월초, 매년 음력 10월 1일이나 2일 중 길일을 택해 고을, 방축 앞에 있던 수령 300년 되는 향나무 앞에서 마을의 안녕과 평화를 기원하는 방죽말 마을굿인 ‘군웅제(群雄祭마을제, 골멕이 제사)’를 지내오다가, 1970년대 나무(神體, 神木)가 죽자 제를 지내지 않고 있다.
안양 최초의 교육시설인 호계서원(虎溪書院)은 호계근린공원주변, 매봉산 일원에 있던, 조선시대 서원으로 과천현 유생의 상소로 (독암)조종경과 그의 증손자 (창강)조속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고 제향(祭享, 제사)을 올리기 위해 안양의 호계동에 창건되었으며, 창강서원(滄江書院)이라고도 한다.
기록에 따라 창건연대가 숙종7년(1681) 또는 숙종42년(병신, 1716)이 등장하나 어느 것이 진실인지는 알 수 없다. 따라서 호계서원은 설립기준으로 지금으로부터 약 254년 전(또는 299년 전)창설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한편 조선 숙종 42년인 1716년 창강서원과 비슷한 시기 과천군내에는 노강서원(鷺江書院), 사충서원(思忠書院)과 함께 지방교육기관으로 과천향교(果川鄕校)가 지방교육의 역할을 분담하며 지역 인재양성을 선도했다.
인재양성의 요람인 호계서원은 조선말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폐원(훼철)되었는데 현재의 호계공원 서쪽 산자락 아래 수도권 외곽순환도로 북쪽의 안양장례식장 뒤편의 사유지에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흔적을 찾기 쉽지 않다.
호계서원 창건관련 문헌기록은 여지도서(영조 1757년 이후), 서원지(1799), 과천현읍지(1899), 증보문헌비고(1908), 연려실기술(1912), 전고대방(1926), 경기도서원총람(2007) 등에 전해 온다.
조선 선비 조종경은 당시 과천현 호계리의 생활상과 시대상의 일면을 알 수 있는 문헌(독암유고)을 남겼는데, 기록 속, 옛시문(한시)에 안양 호랑이가 등장하는 것으로 볼 때 오늘날 ‘호계’라는 자연지명이 정황상 지역에 호랑이서식과 무관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안양과 관련된 지명에 호랑이관련 지명이 흔한 편이지만, 조선시대 문헌 속에서 안양의 호랑이를 발견하고 안양(호계2동 일원)에 호랑이가 실존했음을 확인할 수 있는 귀중한 단서가 되어 반가웠다.
조종경의 독암유고 속 옛 시문에 ‘촌사즉사(村舍卽事, 시골집에서 문득 생각나서)’편에는 한시 속에 “아침에 해가 뜨면 울타리가에 호랑이 자취 많다”는 시어가 등장(원어: 일출이변다호적:日出籬邊多虎跡)하는 문헌상의 정황으로 보아 조선시대 호계서원이 있던 호계촌사(별장) 주변(매봉산, 지금의 안양시 호계2동, 안양장례식장 인근)은 예로부터 호랑이 출몰이 잦았던 것으로 보인다.
독암유고에 자주 등장하는 ‘호계’라는 지명 및 시어 속 ‘호랑이’로 보아 독암유고를 저술한 약 500년 전, 조종경(연산군1~중종30)의 생몰(1495~1535)연대를 감안한다면 지금으로부터 약 480~520년전 당시, ‘과천현 호계리’라는 지명은 일반적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이며, 당시에는 호랑이가 지역에 많이 있었고 오늘날 ‘호계’라는 행정지명도 호랑이와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