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현일]안양지역 첫 개원의 이형래 선생님 이야기(안양시의사회40년사)

여기가 우리집 대문이요 - 안양지역 첫개원의 이형래 선생님 이야기
2009. 3. 12. 17:54
<2000년에 안양시의사회 회보 '좋은 이웃'에 실렸던 글>
“그 원장님 도대체 무슨 빽이예요?”
어느 날 세무서 직원이 이형래 선생님 병원에서 오는 길이라고 헐레벌떡 뛰어 들어오며 물었다. 70년대 박정희 대통령 시절 선생님이 70대 후반이셨을 때 이야기이다.
그 직원 말이 선생님 병원이 환자 진료비 수납한 실적도, 수입도 없는 것으로 신고 되어 현장 조사를 나가보니 하루 종일 교회 일만 열심히 하고 병원에서는 가끔 가끔 어려운 사람들만 돈도 안 받고 돌봐주고 계시더라고 했다.
그래서 ‘아니 그러러면 병원 문을 닫지 뭐 하러 열어놓고 세무서만 골 아프게 하느냐’고 했더니 ‘의사가 병원 열어 놓고 어려운 사람들 몸 아프면 돌봐 준다는데 네 놈이 감히 누굴 보고 병원 문을 닫아라 말아라 하느냐’면서 구석에 있던 작대기를 꺼내 들고 벽력같이 소리를 치는 바람에 놀라서 도망을 왔다고 했다.
“도대체 그 분이 뭘 믿고 그리 큰 소리를 치느냐”는 것이었다. 내가 나오는 웃음을 참고 하늘을 한번 올려다보면서 “아 엄청난 곳에 빽이 있지요. 공연히 그 분 건드리면 크게 다칩니다.”했더니 그 직원도 나를 따라 하늘을 한번 쳐다보고는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는 채 어정쩡하게 돌아갔다.
선생님은 1906년 안양 근처 수원 파장리에서 태어나서 세브란스 의대를 나오시고 일제하에서는 함경남도 북청, 정평에서 공의로 또 개원의로 12년을 근무하셨다. 그곳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치료해 주시면서 교회 장로 일도 보셨다고 한다. 해방 후 월남해서 고향인 안양으로 돌아와 면사무소 자리인 안양 1동에 ‘삼성의원’을 차리셨다.
1.4 후퇴에 피난을 갔다가 돌아오니 안양이 모두 폐허가 되었는데 선생님 댁과 병원 자리만 동그마니 남아있어 병원을 다시 열고 뒤 뜰 앵두나무 가지에 교회 종을 달고 교회도 다시 시작하셨다고 한다. 그 집이 지금 안양에서 가장 오래된 한옥으로 안양시 문화재 자료 100호로 지정되어 옛 모습대로 복원 되었다.
그후 안양1동에 부지 200여 평을 헌납해 교회를 지으셨는데 그 교회도 지금은 부흥되어 몇 천명의 신도가 모인다. 예배를 드리고 돌아가는 신도들과 일일이 악수하고 인사를 나누는 선생님 모습은 언제 봐도 행복해 보였다. 선생님은 노년에는 병원 일 보다는 교회 일에 더 정성을 쏟아 오셨다. 하늘에 엄청난 빽을 두셨기에 늘 즐겁고, 아무 거리낌이 없으셨던 것 같다.
몇 년 전 90을 넘으셔서 곱게 승천 하시어 화성군 서신면 바닷가 대부도가 바라보이는 교회 묘지에 묻히셨는데, 이 묘역 10여 만 평도 선생님이 1970년에 교회에 헌납하신 곳이다. 10여 년 전에 선생님 권유로 우리 부모님도 그 묘소에 모셨고, 선생님이 시작하신 교회 장학금에도 동참했는데, 높은 곳에 빽이 있어서인지 비포장 도로였던 묘소 가는 길이 지금은 서해안 고속도로와 제부도 관광길과 연결되어 엄청나게 좋아졌고, 교회 장학금도 10억을 훨씬 넘게 모여서 많은 어려운 학생들을 돕게 되었다.
신장 이식의 태두이신 전 카톨릭 의대 이용각교수님이 큰 아드님이시고, 전자공학의 권위자인 전 KT 이용경 사장님이 막내 아드님인걸 보면 ‘내가 의대 다닐 때 공부도 무척 잘 했어요.’라고 농담처럼 말 하신게 농담이 아닌 것 같다. 선생님은 늘 겸손 검약 하셔서 자랑을 하시는 것을 못 들었는데, “내가 성격이 깐깐해서 별명이 꼬챙이요. 눈에 거슬리는 건 그냥 못 지나쳐요.” 자유당 시절 선거 개표 관리위원장을 하면서 부정 선거 하는 것을 보다 못해 위원장직을 내던지고 사퇴하셨던 이야기가 생전의 유일한 자랑거리였다.
1937년부터 선생님이 함남 북청에서 의원을 개원하시면서 쓰던 방광석 분쇄기, 난산아 제거기, 담석주걱, 장골 톱, 수술 가위등 64점의 수술 도구를 전쟁, 피난통에도 챙겨 보관 하셨다가 이용각 교수님을 통해서 한독약품 의약사료실에 기증하시어 귀한 사료로 전시되고 있는 것을 보아도 얼마나 물건을 아끼고 꼼꼼하게 챙기셨는지 알만하다.
개원의로 성공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한 지역에서 35년동안 개원을 해온 나는 아직도 이 답을 찾지 못했다. 명성도 쌓고, 돈도 벌고, 진료도 열심히 하고, 지역사회에 좋은 일도 하고, 주변에서 존경도 받고, 자식들도 잘 키우고, 그러면서도 늘 검소하고, 이런 분이 성공한 개원의라고 흔히들 말한다. 전에 뵈었을 때 이형래 선생님 보고 이런 조건을 다 갖추신 성공한 개원이시라고 말씀드렸더니 펄쩍 뛰면서 아니라고 하셨다.
돈 벌어 놓은 것도 없고, 교회에 나가느라 진료도 열심히 못했고, 자제분들도 각자가 열심히 노력한 덕이라고 하신다.
“막내 아들이 미국서 공부할 때 찾아갔더니 비행장에서 날 잡고 펑펑 울어요. 그래서 나도 마주 잡고 한참 울다가 ‘너 대체 왜 우냐’
했더니 공부가 힘이 들어서 운대요. 그래서 내가 ‘그럼 난 지금 왜 울었냐’ 해서 둘이 한참 웃었죠.” 성공한 개원의 아니냐는 물음에 엉뚱한 대답을 하시며 깔깔 웃으신다.

선생님은 아픈 사람들이 상담을 하면 친근하게 설명을 해 주시고 오래 지나도 꼭 기억했다가 안부를 묻곤 하셨다. 생전에 이웃을 위해 기도도 많이 해 주셨는데 체구에 비해 쩌렁쩌렁한 목소리와 어눌한듯 하면서 진솔한 내용이 지금도 귓가에 쟁쟁하다. 돌아가시기 일 년 전 추운 겨울밤에 정복희 경기도 의사회장과 함께 선생님 댁을 세배 차 찾아 뵌 적이 있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고 차 한잔씩 대접 받고 나오는데 함박눈이 펑펑 쏟아졌다.
들어가시라고 해도 “여기가 우리 집 대문이요.”라고 조촐한 아파트 정문까지 기어이 배웅을 나오셔서 손을 흔들어 주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훗날 내가 천당에 가도 “어서 오세요. 여기가 우리집 대문이요.”하시면서 천국 문 앞까지 마중을 나와서 반갑게 맞아 주실것 같다.
신현일 의사는 안양서 신이비인후과의원을 개원해 운영했으며 틈틈히 글 쓰는 의사였고 안양시의사회 팬플룻동호회 활동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