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지역얘기/담론

[전비담]2017 우리동네한바퀴-안양 원도심 중심기 골목 이야기

안양똑딱이 2026. 8. 18. 12:05

안양작가회의 기관지 안양작가가 지난 2호에 이어 이번 4호에도 다시 한 번 우리 안양 한바퀴를 수록해주었다. 이번에는 아홉 번째의 안양 원도심 중심가 골목 이야기다.우리 안양 한바퀴2017년 안양시 인문학 프로젝트에 참여하여 시민들과 함께 안양의 골목골목을 누비고 답사하면서 만들어낸 안양 이야기책이다.

안양기억찾기 탐사대 최병렬 대장의 안내를 따라 권영세 사진작가, 강보람 팀장, 문화해설사, 그리고 시민들과 함께 수개월 동안 안양 곳곳을 발로 걸으며 골목의 풍경을 살피고 오래된 흔적과 기록들을 찾아다녔다.

답사를 마친 뒤에는 취재노트를 다시 펼쳐 자료를 보태고, 몇 달에 걸쳐 관련 기록을 찾아 확인했다. 필요한 내용은 해당 기관의 담당자를 직접 찾아가거나 전화를 걸어 묻고, 서로 다른 자료를 대조하여 하나하나 교차검증하며 마치 한 권의 연구서를 쓰는 연구자라도 된 듯 자료에 파묻혀 써내려간 우리 안양 한바퀴가 출간된 지 그새 10년이 다 되어 간다.

쓰는 과정은 고되고 지난했지만 한 번 세상에 나온 이야기가 오래도록 인용되고 다시 지면에 실리고 새로운 독자들에게 읽히니 글을 쓴 사람으로서는 무척 기분 좋은 일이다. 안양작가에 다시 펼쳐진 우리 안양 한바퀴를 바라보며, 그때 함께 안양의 골목을 걸었던 사람들과 시간들이 새삼 고맙고 뿌듯하다. 오래된 골목의 풍경처럼 우리가 남긴 이야기 또한 오래 살아남아 안양의 기억 한켠에 자리하기를 바란다.

 

글쓴이 시인 전비담

2013년 제8<최치원신인문학상> 수상으로 시산맥등단한 시인이다. 대표 저서로 청소년역사소설집철탑에 집을 지은 새외 다수 공동 시집, 소설집 하늘과 땅을 움직인 사람들(공저), 현대로 온 예술가들(공저). 도시인문학프로젝트 공공저작물이 있다.

 

아홉 번째 날_안양 원도심 중심가 골목

 

안양 원도심가 지명 유래

 

남부동(南部洞)_안양1안양시가지 남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남부동이라 한다. 일제강점기에는 안양5동의 찬우물에서 흘러내리는 물로 농사를 짓던 전형적인 농촌지역이었는데 해방직후 벽산쇼핑 앞에 드문드문 민가가 자리잡더니 1960년대에 원예·청과시장이 개설되고 숙박업이 번성하면서 급성장하였다.

시대동(市垈洞, 舊市場)_안양1 중앙동 동쪽으로 한국제지와 진흥아파트 사이에 자리잡은 마을이다. 시대동이라는 명칭은 안양시장이 있었다는 데서 유래하였으며 구시장이라 하기도 한다. 안양의 중심부로 군포, 의왕, 과천, 광명, 수암, 군자 등이 인접하여 시장으로 최적지였다. 이곳 시장은 19261월에 개시되었는데 192761일자 동아일보는 안양시장일주기념(安養市場一週記念)이란 제하에 기사를 냈다.

경기도 시흥군 서이면 안양은 군의 중앙일 뿐 아니라, 교통이 편리하고 따라서 산물도 상당함으로 동면에서는 작년 중에 안양시장을 설치한 후 유래 성적이 비상히 상호하던 바 더욱이 안양번영의 일책으로 오는 64(단오일)을 기하여 전시장(全市場) 일주년 기념식을 성대히 거행하리라 하며 여흥으로 예기의 가무와 오산청년(烏山靑年)의 소인극(小人劇) 외 안양소년 척후대 주최의 축구대회 및 동화동요회 등이 있어서 많은 흥미가 있으리라더라.”

이 일주기 행사는 대성황을 이루었다. 안양시장은 이후로도 씨름대회, 그네대회를 개최하여 시장의 번영을 도모하였다. 하지만 이곳은 저지대로 홍수 때는 침수되기 일쑤여서 196111월에 안양4동으로 시장이 이전되면서 쇠퇴하기 시작하다가 옛 태평방직 자리에 대규모의 진흥아파트가 들어서면서 다시 번성하였다. 이곳은 1929년 안양최초로 전기가 송전된 곳이기도 하다.

중앙동(中央洞)_안양1 북부동과 시대동 또는 남부동 사이의 마을. 안양시가지 중심에 있다 하여 중앙동이다. 이 마을을 중심으로 북쪽은 북부동 남쪽은 남부동이다. 조선 제22대 정조임금이 1795년에 시흥현과 과천현 경계지에 만안교를 가설한 후 화산능행의 노정을 과천-인덕원-수원에서 시흥-안양-수원으로 바꾸면서 유래정(안양1674-67)에 안양행궁을 짓자 주변에 민가가 생겨났다. 1905년 경부선의 개통으로 안양역이 건설되면서 교통의 요지로 발달하고 1917년에는 호계2동의 서이면사무소가 안양1동사무소 옆으로 이전하였다. 일제강점기에 이곳에 안양금융조합과 안양연초조합이 있었고 해방 후에는 시흥군청을 비롯하여 안양경찰서, 안양읍사무소 등의 공공기관이 들어서 관가의 거리로 형성되었다가 1970년대에 이들 기관이 이전하고 뉴코리아호텔, 안양백화점과 여러 상점들, 유흥음식점들이 들어서며 안양의 1번가로 자리잡았다.

장내동(墻內洞, 澹安)_안양4조선시대에는 과천군 하서면 장내리라 칭했던 마을로 진주강씨, 전주이씨, 원주원씨 등이 세거하였다. 이곳은 밤나무와 뽕나무가 많아 나무울타리 안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장내동 또는 담안이라 한다. 196111월 시대동에 있던 안양시장이 이전해오면서 상권이 형성되고 중앙로 개통으로 인구가 급증하면서 오늘날 안양최대의 번화가로 변모하였다.

교하동(校下洞, 敎化洞)_안양5남부동과 주접동 사이에 있는 마을로 구한말까지 대부분이 소나무가 무성했던 지역이다. 일제강점기 때 왜병의 군사훈련장으로 이용되다가 1927년에 안양초등학교가 설립되면서 주변에 민가가 늘기 시작했다. 구전에 의하면, 조선 중엽에 이 마을에 가난한 부부가 외아들과 함께 살았는데 아들이 서당선생의 도움으로 무료로 글을 배워 과거에 합격하였다. 조정에서 그에게 높은 관직을 제수하였으나 끝내 사양하며 고향으로 내려가 향교를 짓고 백성을 가르치겠다고 임금에게 아뢰었다. 그 뜻에 감복한 임금이 이곳에 큰 집을 지어 교화당(敎化堂)이라 명명해주었다. 그 후부터 그 주변마을을 교화동(敎化洞)으로 부르다가 안양초등학교가 세워지자 학교 아래의 마을이라 하여 교하동으로 개칭하였다.

 

안양역 근대안양은 안양역의 개통과 더불어 시작하였다. 190511일 보통역으로 영업을 시작한 안양역은 이후 역사의 노후로 1938년에 신축하였으나 한국전쟁 1.4후퇴 때 완전히 소실되는 수난을 겪는다. 1956년에 건평95평으로 다시 세워 운영하다가 1974년 전철개통과 함께 선상역사를 증설했다. 1995년부터 ()안양민자역사와 철도청은 천백억 원을 들여 안양1881 일대 2847제곱미터의 부지에 지하3층 지상9층의 현대식 복합건축물로 역사를 신설하여 2001년에 민자역사개통식을 갖고 안양역은 재탄생하게 되었다. 2004년에는 롯데백화점, 골프연습장, 문화센터, 769대 수용규모의 주차장시설을 갖춘 지하1층 지상9층의 부대건물까지 완공해서 운영하고 있다.

1970년대 여름철이면 안양유원지풀장(현 안양예술공원)으로 오는 피서인파가 늘어나 안양역은 피서객들로 붐볐다. 하지만 안양역에서 유원지까지 운행하는 미니합승버스가 몇 대 없어 안양역에서 하차한 피서객들이 풀장까지 걸어서 먼 길을 오가곤 했다. 이런 불편을 해소하기 위해 안양유원지입구(현 전철전력분배함 장소)에 임시역을 개설하여 열차를 운행했다. 당시 임시역에서 내려 유원지까지 1번국도를 따라 걸어가는 피서행렬이 장관을 이루었다. 피서철인 여름에 안양유원지입구에 기차가 정차하는 일은 일제강점기 때부터 이어져왔다고 당시에 발행된 신문에 나와 있기도 하다.

 

안양 미륵당 1699년 과천현에서 발간된 과천현신수읍지에는 안양 미륵 과천 서쪽 20리 안양벌 큰 길가에 있으며 몸높이가 2이라는 기록이 남아있다. 기록상의 미륵불을 모신 미륵당은 1900년 중반까지 안양역 앞에 있었다. 미륵당은 정조임금의 화산능행차 때 임금의 신변안전을 위한 척후복병이 머문 24개소의 당마(塘馬) 중 제13당마소 안양미륵당참(安養彌勒當站)이다.

1932년 민속학자 석남송석하(1904~1948)가 안양역 앞을 지나다가 미륵당을 카메라에 담았는데 1996년과 2005년 두 차례에 걸쳐 유족들이 이 필름을 국립민속박물관에 기증하면서 미륵당의 실체가 드러나게 되었다. 그런데 미륵당은 언제인지 사라지고 미륵불은 용화사 자리로 옮겨져서 당시의 주민들은 용화사를 미륵당이라 불렀다. 금강산에서 온 화응큰스님이 1943년에 창건한 용화사는 화재로 그을리는 수난을 겪다가 1983년의 도시개발에 밀려나 그 자리에는 본백화점이 들어서게 된다. 용화사가 안양 호계2동으로, 2000년에는 다시 의왕 내손동으로 이전하면서 미륵불도 안양을 떠나게 된다. 의왕으로 절을 이전할 당시 미륵불의 무게가 8.5톤이고 조성연대는 4·5백 년 된 것이라고 용화사 측은 말하는데 그것은 안양역 앞의 미륵불과는 판이한 것이다. 그렇다면 1,600년 전에 조성된 미륵불은 어디로 간 것일까. 역사 속에서 찾아야 할 과제로 남아 있다.

 

병목안 채석장 철길 일제강점기인 1934년 안양역에서 병목안까지 철길이 놓이고 수리산자락 하나가 파헤쳐진다. 경부선 복선화공사를 위한 자갈을 채취하기 위해서다. 해방이후에도 철도청은 남포(다이너마이트)로 이곳 산을 깨트려 수도권일대의 건축용골재를 공급했는데 이곳을 병목안채석장이라 한다. 당시 병목안에는 전국에서 돌을 캐러 모여든 사람들이 살았다. 일주일에 두세 차례 돌을 실어나르기 위한 화물열차를 운행했는데 당시 안양9동과 새마을에 살던 소년들은 열차가 지나가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열차의 맨 뒤 칸에 몰래 매달려 안양시내나 집으로 가기도 했다. 걔 중에는 어른도 있었다. 또 레일에 못을 올려놓아 열차가 지나간 후 못이 납작해지면 그것을 갈아 연필을 깎는 칼로 쓰기도 했다. 이 칼은 학교에서 최고로 인기였다.

80년대 초에 이 화물열차의 운행은 완전히 중단되고 2004년부터 안양시가 흉측하게 깎여진 채 방치된 채석장부지에 사업비 260억 원을 들여 인공폭포, 잔디광장을 만들어 병목안시민공원으로 조성했다. 이때 도로를 확장하면서 철거되거나 아스팔트에 파묻힌 채 잊혀져가던 철도레일의 일부가 2002년 무렵에 일부 발견되었다. 안양9동 창박로 금용아파트 천변 단독주택가 뒤쪽 약100여 미터 구간에 침목, 레일, 쇠못 등 철길의 흔적이 발견된 것이다. 썩어가는 침목의 구멍 속에는 들풀들이 자라고 레일은 쇠락했지만 남아있는 철도의 일부는 안양의 역사·문화유산으로 보존해야 할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후 2014년까지만 해도 1930년대의 철길흔적을 볼 수 있던 것이 제대로 관리가 안 된 채 방치되어 침목, 레일, 레일연결부위의 쇠못, 쇠판 등의 많은 것이 유실되었다. 뒤늦게 그 사실을 보고받은 안양시가 문화유산보호안내판을 현장에 세운 것이 2016. 그나마 다행이다.

 

삼덕제지 공장_기부의 표상 공장을 경영하면서 먼지와 소음을 내뿜어 지역 주민들께 많은 불편을 주어 미안하게 생각했는데 안양시민에게 돌려주는 것이 당연합니다.…… 지금까지의 마음의 빚을 조금이나마 갚은 것 같아 오히려 마음이 가볍습니다.”

고 전재준 삼정펄프 회장(2010년 타계)2003년 삼덕제지를 폐업하며 300억 원대의 공장부지를 공원으로 만들 조건으로 안양시에 기부하면서 한 말이다. 당초 보존하기로 했던 공장굴뚝을 안양시가 일방적으로 철거하면서 갈등을 빚기도 했지만 지난 2008년 안양시는 전재준 회장에게 안양시명예시민증서를 수여했다. 안양시의 80번째이며 내국인으로서는 최초의 명예시민이다.

삼덕제지안양공장 자리에는 일제강점기인 1941년 일본인 고토우가 설립한 삼왕제지가 있었다. 삼왕제지는 일반종이류를 제조·가공하여 판매하고 제지업관련투자를 하던 회사였는데 경영진은 모두 일본인이었다. 해방이 되면서 삼왕제지는 귀속업체로 미군정에 접수되고, 정부수립 후 대한민국정부에 이관되었다가 휴전직전인 1953년에 관리인이던 조경묵에게 불하된다. 조경묵은 회사명을 삼덕제지로 바꾸고 운크라(UNKRA.유엔한국부흥위원단)원조자금을 받아 시설개선을 하여 모조지와 선화지를 생산하였으나 1950년대 말에는 경영난을 겪게 되었다. 결국 1961년에 조경묵은 개성출신의 전재준에게 경영권을 넘겼다. 삼덕제지는 2003년 삼정펄프주식회사에 흡수·합병될 때까지 운영을 지속하며 백상지(모조지) 생산분야의 선두기업이 되었다. 당시 백상지는 신문지와 함께 국내제지업계의 양대 축이었다.

삼덕제지로부터 수암천으로 종이슬러지가 흘러나왔는데 물자가 귀하던 1960년대 당시 주민들은 이 슬러지를 건져 땔감으로 썼다. 병목안철길과 천변둑방은 수암천에서 건져낸 슬러지를 말리는 모습으로 진풍경이었다.

 

안양지역의 시민운동

6월민주항쟁 6월항쟁은 1987610일부터 29일까지 전국에서 일어난 반독재·민주화운동이다. 안양에서도 19, 23, 26. 모두 세 차례의 대규모 집회와 시위가 일어났다.

안양 첫 대중집회인 619일집회에 대해 시사월간지 19878월호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930분경 1만여 명의 시민들이 도로에 앉아 대중집회가 시작되었다. …… 2시간 가까이 집회가 계속된 후 시위초기에 잡혀간 사람들을 구출하자는 주장이 터져나왔고 마침내 전경대에 달려들어 투구와 방패를 빼앗는 등 몸싸움이 벌어졌다.”

23일집회는 보다 조직적이었다. 안양중앙시장을 돌면서 동참자를 모아 중앙로에 한신대, 경기대 학생 2백여 명과 시민 1만여 명이 한 줄로 서서 3시간가량 시위를 계속하다가 밤 10시경 경찰의 최루탄발사로 해산되었다.

26일집회는 국민운동본부가 선포한 6·26민주헌법쟁취 국민평화대행진과 맞물려 2만여 명의 시민들이 안양1번가에서 우체국에 이르는 거리를 가득 메웠다. 시민들은 호헌철폐독재타도를 외치며 만안구청(안양시청)을 지나 성결대 앞 사거리(안양경찰서)까지 행진하였다. 1970년대에는 둘만 낳아 잘 기르자등의 구호를 내건 관제캠페인이 자주 열리던 안양광장 일대가 민주화항쟁의 해방구로 변모한 것이다.

이날 시위에는 노동자·학생에서 아이를 무등태운 시민까지 민중의 자발적 참여가 늘어났다. 1030분경 전투경찰을 무장해제 시키기 위해 시민들이 전경대열에 돌격하자 경찰은 최루탄을 쏘았다. 그러나 시민들이 물러나지 않고 달려들자 놀란 전경들의 전열이 무너졌다. 성난 시민들은 민정당 안양지구당사로 몰려가 투석·화염병세례를 퍼부었다. 민정당지구당사가 불에 타고 맞은편의 경찰초소까지 불길에 휩싸였다. 미국계 금융기관인 한미은행에도 돌이 날아갔다. 시위대는 시청으로 가자!“는 함성을 지르며 서안양우체국울 거쳐 안양8동으로 돌진해 삽시간에 안양시청(현 만안구청)을 에워쌌다. 당시 시청공무원들은 겁에 질려 시청의 철문을 굳게 잠그고 있었는데 시위대 시민의 일부가 돌을 던지고 철문을 흔들어대자 다른 시민들이 여기는 시청이니 경찰서로 가자고 외쳤다. 시위대의 방향은 안양경찰서로 바뀌었다. 도중에 노동부안양출장소를 불태우고 밤1120분경에 본격적으로 경찰과의 대치와 충돌이 일어나면서 부상자도 속출했다. 시위대는 경찰서의 벽돌담을 무너뜨리고 관사를 불태웠다. 새벽2시 다급해진 경찰은 각지에 지원병의 급파를 요청했다. 수원에서 투입된 경찰병력이 시민들을 향해 직격탄을 쏘아 3명이 부상당했다. 경찰의 진압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시위대는 사방으로 흩어졌다. 하지만 시위대는 안양세무서 뒷길과 만안로를 우회하여 안양역으로 재집결했다. 100여 명의 시위대는 새벽230분경 안양역 옆의 역전파출소를 불태웠다. 불길이 옆의 상가로 번지려 하자 시위대는 자발적으로 진화작업을 벌이기도 했다. 그날 파출소와 안양민정당사만 불태운 것이 아니라 노동부안양출장소도 불태웠는데, 노동자를 보호하기는커녕 회사측 편들기에 급급했던 노동부출장소를 시민들이 더는 두고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새벽2시를 넘기면서 대다수의 시민들은 귀가하고 2~300명의 시민들이 새벽4시까지 중앙시장으로 흩어졌다 모이기를 반복하며 산발적인 시위를 이어갔다.

노동자대투쟁_사회운동확산 876월항쟁은 곧바로 7,8,9월의 노동자대투쟁과 연계되어 안양에 다양한 사회운동과 문화운동이 만개하는 촉진제가 되었다. 87727일 한국제지를 시작으로 분출되기 시작한 노조결성과 어용노조민주화투쟁은 만도기계, 태광산업, 삼덕제지, 대우중공업, 경원제지, 유신중전기, 금성전선, ()농심, 안양전자, 다우전자 등 안양권역 거의 모든 사업장으로 파도처럼 번져나갔다. 노조설립과 근무조건개선을 위해 난생처음 파업을 해보는 노동자들은 현장노동운동을 통해 당당한 자주적 인간, 역사의 주역으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노동운동이 노조설립 등으로 진전되면서 안양민주화운동청년연합, 안양노동자회가 결성되는 등 다양한 사회운동(민민운동) 단체들이 조직되었다. 1987년 하반기에 안양독서회, 안양민요연구회, 우리그림 등의 문화단체도 결성되어 1988년에는 이들이 연대한 안양문화운동연합으로 발전하여 안양권역 문화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게 되었다.

 

안양중앙시장_안양일번가의 모태 안양일번가는 번화한 안양의 이미지를 규정하는 대표명소다. 이 대표명소의 모태가 안양중앙시장이다. 안양일번가와 삼락공원 맞은편에 있는 안양중앙시장은 일제강점기 192615일 오일장의 정기시장으로 개장하였는데 1961년부터는 상설시장으로 운영되어왔다. 1960년대에 경수산업도로와 근접한 주변에 섬유와 제지업체들이 많이 들어섰는데 그 영향으로 안양중앙시장에 청바지골목이 생겨났다. ‘청바지골목을 모르면 간첩이다할 정도로 유명한 이 청바지골목에서 국산청바지의 판매와 수선은 물론 외제청바지도 암거래되었다. 1984년에는 낡은 건물을 헐고 지금의 현대식 주상복합건물을 지었다. 1994년 정부의 수도권외곽이주정책으로 안양의 공장들이 대거 이전하면서 공업도시 안양은 점차 상업도시로 변모하기 시작하였다. 안양역을 중심으로 주변에 안양일번가와 백화점을 비롯한 대형유통업체들이 들어서면서 소비고급화, 할인저가구입, 쾌적한 소비공간요구, 넓은 주차공간사용 등 소비양상의 변화로 인해 안양중앙시장은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이러한 재래시장의 어려움을 극복하고자 지방자치단체는 전통시장 및 상점가 육성을 위한 특별법에 따라 대형유통업체들과 경쟁할 수 있도록 전통시장활성화 방안을 모색하게 되었다. 한복류, 채소류, 슈퍼, 공산품, 식당, 전통식품, 생선 등을 취급하는 종합상설시장 안양중앙시장은 안양시와 경기도의 특화시장으로 지정되어 정부의 지원을 받으며 곱창로, 포목로 등을 재정비하고 총11개의 특화사업을 진행하며 재도약할 수 있었다. 주변에 롯데백화점, 2001아울렛할인점, E마트, 남부시장, 중앙지하상가, 역전지하상가쇼핑몰 등이 있어 고객들이 다양한 쇼핑도 즐길 수 있는 조건도 갖추었다.

안양중앙시장은 대형마트와 백화점에 밀려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가는 재래시장의 입지 속에서도 여전히 활기찬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안양일번가가 젊은이의 거리라면 안양중앙시장은 아이부터 어른까지 모든 세대가 어우러지는 장소다. 안양중앙시장을 젊은이들도 많이 찾는 이유는, 안양일번가와의 접근성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값싸고 푸짐한 먹거리들이 풍부하기 때문이다. 새로 단장한 산뜻한 4개의 입구와 아치형의 지붕은 안양중앙시장이 100년 전통의 시장이라는 사실을 잠시 잊을 정도다.

그러나 최근의 속내를 들여다보면 도로 쪽으로 상가가 형성되면서 시장의 동공화현상이 일어나 정작 크고 화려한 주상복합의 시장건물 안은 창고로 쓰이는 일이 많아지고 있다. 대책이 필요하다.

 

안양중앙성당의 옛 이름은 장내동 성당이다. 장내동 성당 주변은 밤나무와 뽕나무가 많아 나무울타리 안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장내동 또는 담안이라 불렀다. 장내동 성당은 서울교구가 1937년 교회부지로 6,657평을 매입한 밤나무밭에 1954년 초대주임 구천우 신부가 안양에서 처음으로 24평의 목조건물 성당으로 설립한 성당이다. 성당설립 후 1956년에는 안양 최초의 유치원인 안양유치원을 개원했다. 1959년에는 명동성당과 같은 고딕형 목조건물로 개축하여 안양지역사회의 상징적인 존재로 자리매김해왔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건물이 노화되고 안전에 문제가 생기자 1991년에 기존의 성당을 헐고 현대식 건물을 신축하였다. 60년대 말까지 성당 뒤로 소나무들이 울창하여 동네 개구쟁이들의 놀이터가 되어주었다.

 

항아리골목 이름이 정감넘치는 골목이 안양에는 여럿 있다. 밧데리골목, 변전소골목, 곱창골목, 한복골목…… . 항아리골목도 그 중 하나다. 1970년대에는 양은그릇과 함께 항아리그릇이 인기여서 안양4동 중앙시장과 안양1동 남부시장 주변에는 항아리가게들이 여럿 있었다. 특히 장내동성당(현 중앙성당)과 벽산아파트 사이 골목에는 철조망 담벼락을 따라 항아리들을 쌓아놓은 가게가 많았고, 이 골목을 항아리골목이라 불렀다.

안양항아리골목은 늘 호황이었다. 안양의 산업화로 일자리를 찾아 몰려든 사람들 덕분에 안양중심가에는 생필품가게가 줄지어 생겨났다. 1977년 중앙로가 개통되면서 안양4동의 새 시장(현 중앙시장)은 인근 군포, 의왕, 과천은 물론 멀리 안산, 군자에서도 물건을 구입하러 오는 손님들로 붐볐다. 그러나 가볍고 편한 플라스틱과 가전제품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항아리는 점차 설 자리를 잃게 되었고 유약파동까지 일어났다. 남부시장과 중앙시장 주변의 항아리가게들이 줄줄이 문을 닫고 말았다. 지금은 성당담벼락에 있던 신일항아리 한 곳만 남아 항아리골목의 명맥을 잇고 있다.

신일항아리는 안양5동 냉천로길에 있다. 애초에 자리하던 성당담벼락 옛 항아리골목에서 50미터 들어간 곳이다. 다소 인적이 드문 주택가골목 안에 있지만 아직도 군포·의왕·과천·광명·성남에서까지 주문이 들어올 정도로 오랜 단골이 많고 입소문이 나있다. 음식발효에 좋고 저장과 정화의 기능이 탁월한 항아리를 쓰려는 사람들이 꾸준히 신일항아리를 찾고 있는 것이다. 신일항아리에는 전국에서 생산되는 모든 종류의 옹기가 모여 있다. 약탕기, 떡시루, 요강까지 삶에 필요한 용기는 무엇이든 있다. 1970년대만 해도 5톤트럭으로 항아리를 날랐으나 김치냉장고 등이 등장한 요즈음엔 큰 항아리의 수요는 많지 않다. 대신 옹기명장, 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 등 주로 장인들의 작품을 많이 가져온다. 최근에는 웰빙바람을 타고 신세대형 항아리의 수요도 늘어나고 있다. 옛날 방 한쪽에 곱게 자리하던 요강이 최근엔 잘 보이지 않는데, 한국을 다녀간 어느 외국인가정에 갔더니 난초가 그려진 아주 예쁜 요강단지가 식탁에서 스프를 담아내는 그릇으로 요긴하게 쓰이고 있더라는 글을 어디서 본 기억이 난다.

신일항아리의 창업주는 신영철씨다. 한동안 둘째 아들 신동윤씨가 가게에 있더니 얼마 전부터는 다시 신영철씨가 자리를 지키고 있다. 우리안양지에서 점주인 신영철씨를 인터뷰할 정도로 신일항아리는 안양의 명소다.

 

고서적·중고책방 아단문고 오래된 종이책에 얼굴을 묻고 묵은 글자의 냄새를 맡아보고 싶다면 안양42001아울렛 옆 우리은행 뒷골목(안양로263)으로 가라. 거기에 아단문고가 있다. 아단문고는 처음 고 한상동씨가 1984년에 안양역지하상가에서 경향서점이란 상호로 개업했다. 당시에 그곳에 중고서점이 여럿 있었는데 컴퓨터가 보급되면서 폐업하거나 이전하는 책방이 늘게 되자 경향서점도 지금의 자리로 옯겼다. 아단(亞旦)이란 상호는 고 한상동씨가 새벽의 수리산 태을봉에 올라 아침햇살을 보며 지은 것으로 아시아의 아침이란 뜻이다. 40여 평 매장에 8만여 권의 책을 비치하고 있다. 매장과는 별도의 창고 세 군데에 있는 책까지 합하면 약30만 권의 책을 소장하고 있다. 허름한 한옥의 주매장은 중고서적백화점이라 할 정도로 각종분야별 서적들이 일목요여하게 진열되어있다. 또한 흔히 구할 수 없는 고서적, 해방과 한국전쟁 전후에 간행된 교과서, 정부발행정기간행물, 계몽용서적, 역학서술집 등 다양한 간행물들과 우리나라에서 발간된 모든 종류의 잡지와 카탈로그들을 소장하고 있다. 아단문고는 싼값으로 오래된 책 속에 배어있는 비싼 값의 추억을 선사받는 곳이다. 지금은 작고하신 고 한상동씨의 자제 한한이와 한한모 남매가 가업을 잇고 있다.

 

극락정토 안양_무속(巫俗)정토 안양 안양(安養)이란 불교의 극락정토(極樂淨土)즐거움이 가득하고 자유로운 이상향의 안양세계(安養世界)’란 뜻이다. 이 같은 지명과 관련이 있어서인지 예로부터 안양은 기와 영성이 강한 도시라고 했다.

안양에는 삼막사, 연주암, 불성사, 염불암, 망해암, 수리사, 청계사 등 천년고찰과 불교조계종의 수행도량처인 한마음선원이 있다. 중앙동의 원불교안양교당, 천주교성지인 담배촌의 최경환성지, 국내 5번째로 문을 연 이슬람성원, 안양5동의 현충탑의 단학성지, 신도20만의 기독교 대형교회인 은혜와진리교회 등의 갖가지 종교시설들이 있다. 국내에서 무속신앙인들이 가장 많이 거주하는 곳도 안양이다. 안양 만안구 수리산계곡에는 치성을 드리는 장소가 많고 굿당도 서너 곳이나 있다. 자연환경복구 차원에서 이들 치성소와 굿당이 정비되어 많이 사라지긴 했으나 지금도 만안구 4·5·6동을 중심으로 8·9동까지 원도심의 골목에는 무속인의 집을 표시하는 빨강·하양·파랑의 깃발들이 곳곳에서 눈에 띈다. 안양4동의 골목과 안양5동의 현충탑 뒤편 언덕 위에는 대형무속용품전문매장도 있다. 한민족전통종교총연합회 안양본부 한상윤본부장의 말에 의하면 안양에는 1,200여 명의 무속인이 활동하고 있으며 미등록무속인까지 합하면 2천여 명을 웃돌 것이라 한다. 매년 가을 병목안시민공원에는 무예술제가 개최된다. 안양은 무속신앙의 기운이 센 곳이다. 이밖에 요가, 마음수련, 아봐타영성수련자들도 많이 거주하는 안양은 종교박람장이라 할 만하다. 또한 수리산은 음산이요, 관악산은 양산이니 음·양의 기운을 고루 갖춘 안양은 참으로 기가 센 도시이겠다.

 

옛 시흥군도서관 건물 1960년 초에 지어진 옛 시흥군도서관은 2001아울렛사거리에 현존한다. 이 일대는 과거 시흥군과 안양읍 관공서들이 있던 안양일번가에서 가까운 곳이다. 당시의 관공서건물들 대부분이 없어졌는데도 이 건물만 50년 넘은 골조 그대로 남아있다. 이 건물이 언제 지어졌고 언제 매각되었는지에 관한 이력은 아직 찾지 못했다. 1970년대 중반의 사진에 1층은 경기민생상호신용금고, 3층은 문화양재전문학원이 있으며 안양라이온스클럽, 기타연구실, 다방 등의 간판도 보인다. 옆에는 안양극장 건물이 있다. 도서관 건물 앞에 흰색 쳘제로 된 사각우리의 설치물이 있는데, 교통위반자를 가둬 30분 정도 서있게 하는 처벌구역이다.

 

철길 터 골목_안양역 앞에서 삼덕공원까지 지금은 아스팔트로 덮인 옛 철길 터를 따라 걸으며 구도심을 상상해본다. 안양역에서 옛 삼덕제지 터(삼덕공원)까지 이어지는 골목초입에는 옛날 방석집이라고 불리던 술집들이 즐비했는데 지금은 몇 안 남고 신축원룸들이 들어서있다. 안양 최초의 목욕탕 자리임을 알 수 있는 갈색의 높다란 굴뚝도 만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