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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701]안양의 옛이름 "가가례" 역사 기록에 없는 허구다

안양똑딱이 2026. 7. 1. 01:00

 

최근 인터넷과 SNS를 통해 우라가 사는 이땅, 도시의 옛이름을 소개하는 자료가  확산되고 있는 가운데 안양을 가가례라 칭히면서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쭌군지식주입단' 은 <우리 도시의 예쁜 진짜본명 30> 제목의 자료를 작성해 인터넷에 을리면서 안양의 옛 아름이 가가례라고 주장하고 있고 관련 내용의 출처는 물론 사실도 아닌 이같은 내용이 SNS를 통해 무분별하게 확산되고 있다  

자료 ( https://blog.naver.com/siwolae-75/224314277980 )

 

한국인성예절교육원 자료를 보면 ‘가가례(家家禮)’는 ‘집집마다의 예법’이라는 뜻으로, 각 집안이나 지역마다 고유하게 지켜온 풍습과 의례를 의미한다. 가가례(家家禮) 또는 가가예문(家家禮文)이라 하는데, 이는 가문家門에 따라 행하는 예절禮節이 조금 다름을 이르는 말이지, 개개인의 가정마다 예절이 다르다는 말이 아니다. 조선시대 때 지방地方과 당색黨色에 따라 예禮의 절목節目이 조금씩 다른 것을 말한다.

 

더욱이 가가례家家禮라는 말은 남송南宋 주희朱熹의 ≪가례家禮≫, 명明나라 경산瓊山 구준丘濬의 ≪가례의절家禮儀節≫이나 조선시대의 어느 예서禮書에도 없는 말이다.

 

다만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격몽요결擊蒙要訣[1577]≫「제례祭禮」와 호산壺山 박문호朴文鎬의 ≪사례집의四禮集儀[1887]≫「제례祭禮」에 ‘가가부동家家不同’이라는 말이 보인다[今俗祭儀 家家不同 甚可笑].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1762-1836]의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경세유표經世遺表·7」<지관수제地官修制 전제田制>에 “사람들이 늘 ‘가가례’라 말하는데 가가례라는 것은 경악할 만한 말이다[人有恒言曰家家禮 夫家家禮者 可愕之言也].”고 하였다.
이규경李圭景[1788-1856]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인사편人事篇·논례류論禮類」<논례총설論禮總說>에 “근래에 속칭 ‘가가례’라 하면서 임의로 예를 자행한다[近俗稱以家家禮 任自爲禮].”고 하였다.
송남松南 조재삼趙在三[1808-1866]이 1855[철종哲宗 6]년에 편찬한 ≪송남잡지松南雜識≫「방언류方言類」<근취편近取篇>에는 ‘가가례家家禮’라는 말만 등장하고 아무런 설명이 없다. 이를 통해 볼 때, 가가례家家禮라는 말은 19세기 당시에 새롭게 등장한 용어用語였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자료에서 안양의 옛지명이 '가가례'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가가레(家家禮)는  각 집안에 따라 다른 고유의 예법을 의미한다. 즉, 동일한 의례라도 집안이나 학파, 지역에 따라 달리 행해지는 방식을 가리키는 말로 마을 지명으로 맞지 않다. 더욱이 안양 역사 기록에 거론 또는 등장하지도 않는 용어일 뿐만 아나라 찾아볼수도 없다. 따라서 "안양=가가레"는 허구다.

 

안양은 고려 태조 왕건이 창간한 안양사(安養寺)에서 '안양'이라는 이름으로 유래했으며 1000년간 불리웠다.안양은 불교적 의미로는 극락정토, 마음과 몸이 편안한 이상향을 뜻한다  

 

불국정토를 일컫는 <安養> 이라는 표기를 지명으로 사용된 기록은 1861년에 제작된 김정호가 제작한 대동여지도와 대동방여전도(大東方輿全圖)에서 발견된다. 대동여전도는 김정호가 제작한 22첩의 대동여지도와 내용이나 구성이 거의 동일한 채색필사본 지도로 대동여지도에서도 '安養' 한자 표기를 볼수 있어 현재의 안양지역을 오래전부터 안양이라 불렀음을 알수 있다.

 

다른 기록들을 살펴보면 영조 35(1759)에 제작된 여지도서(輿地圖書)’ 금천현도(衿川縣圖)에 실려 있는데, 삼성산 자락 지금의 석수동 일대를 금천현(衿川縣)에 속한 안양리(安養里)로 표시하고 있다.

 

이후 1872년 시흥군 지도와 지방지도에는 안양리(安陽里), 조선지도 과천현(果川縣) 편에는 안양의 지형을 安陽, 금천현(衿川縣) 편에서는 安陽驛, 팔도군현지도 과천현(果川縣)과 금천현(衿川縣) 편에서는 安陽으로 표기하고  조선지도 -과천현(果川縣)편에도 지형 표기에 있어 안양을 安陽으로 표기해 1800년대 '양'자 한자 표기를 '볕양'으로 사용했음을 보여준다.

 

특히 1899년(光武3年) 발간한 시흥군읍지(始興郡邑誌) 지도에는 행정지명의 최말단인 '리' 명칭이 표기된 안양리(安陽里)가 보이는데 주변에 삼성산, 삼막사, 염불암, 만안교(萬安橋), 안양교(安養橋)등이 있다. 이 곳은 지금의 석수동지역로 추정된다. 반면 시흥군읍지(始興郡邑誌) 속지에는 始興郡 관내 郡內面에 안양리(安養里)로 기록하고 한자 지명 표기가 오락가락해 헷갈리게 한다. 당시 과천군에 속한 지역에 안양리(安陽里), 시흥군에 속한 지역에 안양리(安養里.安陽里 )가 있었던 것이다.

 

반면 지승의 과천현(果川縣)과 금천현(衿川縣) 하천 표기에서는 안양(安養)으로 한자 표기가 기를양으로 기록돼 있다.

또한 조선후기 정조 때 화성 능 행차를 기록한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에는 안양참(安養站)이 언급된다.

 

이후 구한말부 시기인 1890년대 발행된 지도에서는 몇집 되지 않아 한적한 동네를 명시하는 안양촌(安陽村)이라 표기했다

 

일제감점기인 1905-1910 발행된 근현대 지도에서는 안양 한자 지명은 安養(편안할안에 기를양) 安陽(편안할 안에 볕양)이 오락가락하며 표기되는데 1910년대 발행한 지도에는 대부분 한자 표기를 볕양으로 명시한 安陽으로 표기했으며 그이후에는 기를양으로 명시한 安養으로 바뀌는 등 安養 安陽이 지도와 문서에 혼용 표기되기도 했다.

 

그런데 안양촌(安陽村), 또는 안양리(安陽里)로 표기되던 마을이 1914년 조선총독부에 의한 행정구역 개편 및 통폐합 때 아무 이유없이 安養里가 되었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일제강점기 발행된 지도들을 살펴보면 1905년부터 1910년 무렵까지 ' 安陽'으로 표기되던 지도들은 이후부터 '安養'으로 기록된다.

 

안양의 한자 변천사를 살펴보면 역사적으로 두 가지로 사용되었다, 安養(편안할 안, 기를 양) 安陽(편안할 안, 볕 양)이다.

조선시대 초에서는 안양의 한자 표기는 주로 安養으로 사용되었다.(대동여지도.1861, 대동방여전도.1861 등)

조선시대 말부터는 安陽의 표기가 등장한다.(시흥군읍지.1899)

근현대 지도에서도 두 표기가 혼용되어 사용되었다.

일제강점기 지도를 보면 1907년 무렵부터 한자 표기가 安陽에서 安養으로 변했다.

이처럼 안양의 한자 표기는 시대와 상황에 따라 변천해왔음을 보여준다.

 

안양에서 우리말 지명이 사용된 것은 안양의 동쪽 동안구 일대가 과거 산이 없는 허허 벌판에 자리잡고 있다 하여  '벌말'이라 불리웠다. 이에 평촌 신도시 조성과 함께 지하철 4호선 역 명칭도 벌말역으로 개통되었다. 지금도 벌말도서관, 벌말초등학교, 벌말오거리 등 평촌의 옛지명인 벌말 상호를 사용하는 곳들이 적지않다.

 

하지만 지하철4호선 개통을 앞두고 처음 역명을 지을 때 경남 진주 인근으로 경전선의 기존 철도역인 '평촌역'과의 중복을 피해 옛 지역 명칭인 '벌말역'으로 이름지었으나 "촌스럽다"는 + "신도시로 몸값을 높이기" 위한 신도시 입주 주민들의 요구와 1996년 안양시의회 결정으로 '평촌역'으로 바뀌고 말았다. 평촌(坪村) 지명은  '평평한 마을'이라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