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625]일제 군사유적 탐사자 이완희PD와의 안양 이야기

오랫동안 일제 군사유적을 추적해 온 전 KBS 이완희PD가 최근 출간한 두 번째 저서『본토 결전의 흔적들 – 일제 해군비행장과 특공기지 탐사 기록』을 보내왔다. "감사합니다"
『본토 결전의 흔적들 - 일제 해군비행장과 특공기지 탐사 기록』은 일제가 한반도에 설치·운용한 해군비행장과 전쟁 말기 구축한 특공기지에 대한 현장 조사 및 사료 연구의 결과물로 제주 알뜨르부터 김해·광주·평택까지 한반도에 새겨진 ‘본토 결전’의 흔적들을 다룬다.
저자는 서울대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한국방송(KBS)에 입사하여 세계는 지금, 뉴스 투데이, 추적60분, 역사스페설, KBS스페셜 등 다수의 시사프로그램을 제작했다. 퇴직 후에는 일제 군사유적과 전쟁유산에 대한 현장 취재와 연구를 이어가고 있다.
그는 전국 각지에 남아 있는 군사유적을 직접 답사하고, 한국과 일본의 아카이브를 넘나들며 관련 자료를 조사·수집했다.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군사유적을 조명하는 한편, 이들 시설이 언제, 어떤 목적 아래 계획·조성·운용되었는지 추적해 왔다.
관련 프로그램
《KBS역사추적》 “제주도 동굴진지의 비밀”(2부작)
《KBS스페셜》 “1945년 한반도는 일제의 결전기지였다”
저서
『한반도는 일제의 군사요새였다』(2014)
최근작 : <본토 결전의 흔적들>,<한반도는 일제의 군사요새였다>



박달군용지는 일제강점기 해방이후 1960년대 미군의 핵탄두 보관소가 잇던곳으로 우리나리 최초의 원자로 설치장소로도 검토되었던곳으로 현재도 한국군이 관리 운영하는 탄약고가 있는 곳이다.
당시 이완희PD와 박달군용지 일대를 돌아보면서 군사지역인 관계로 군사유적이 있을것으로 추정되는 지역에는 들어갈수 없었지만 일제강점기인 1930년 무렵 축조된 박달교를 발견했다.
이 다리가 있는 곳은 일제강점기 이전(박달동 범고개가 개통되기전)에 안양에서 안산으로 가던 옛길의 길목으로 다리를 건넌후 곤두레미 고개를 넘으면 바로 안산 목감으로 연결됐다.
다리를 살펴본바 다리 끝자락 난간 콘크리트 기둥에 박달이라 새겨진 글씨가 아직 선명하다. 반대쪽 기둥에는 소화 5년 5월 00라 적혀있는데 세월이 많이 지나 판독하기 다소 어려운 상황이다. 참고로 소화 5년은 서기 1930년이다.
일제 강점기 설치한 이 다리는 해방후 미군이 주둔하면서 포탄 운반용 트럭과 나이키허큘리스 미사일을 탑재한 대형트레일러를 통과시키기 위해 다리를 보강한 흔적들이 보인다. 이 다리는 현재도 박달군용지내 탄약고를 관리하는 군부대 진입로로 사용중이다.
현재의 박달교에는 다리 끝자락 난간 콘크리트 기둥에 박달이라 새겨진 글씨가 아직 선명하다. 반대쪽 기둥에는 소화 5년 5월 00라 적혀있는데 세월이 많이 지나 판독하기 다소 어려운 상황이다. 참고로 소화 5년은 서기 1930년이다.
박달군용지 탐사이후 이완희 PD가 보내온 자료(아시역사자료센터를 검색해보니 박달교 관련 문서가 있었다고 함)를 보면 1941년 5월 조선군경리부에서 안양-안산 도로 개축공사를 한 설계도가 있는데, 도로의 길이는 12M 폭 1,190M, 7M 폭 5,238M로 그 공사의 일부로 박달교를 만들었던 것 같다는것이다. 박달교는 길이 15M, 폭 4M라고 되어있는데 처음 만들 때는 목조다리로 만들었다가 나중에 콘크리트로 만들고 해방이후 미군이 보강공사라를 한 것 같다고 하면서 관련 문서 자료를 보내왔었다. 이는 현재 다리 상부의 폭과 한쪽 난간이 없어진 형태, 하부의 교각 등을 볼때 처음 축조된 다리는 폭이 좁았으나 이후 다리의 폭을 넓혔던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곤두레미고개는 안양시에서 안산시로 연결되는 자동차도로가 개설되기 이전에는 두 지방을 연결하는 유일한 교통로였으며 안양 박달동의 자연부락이었던 선녀골(仙女谷)과 시흥 목감동 더푼물(신촌)과의 경계였다.
옛날에는 안양에서 곤두레미 고개를 넘어 소래․안산으로 오갔는데, 숲이 울창하고 인적이 드물어 강도나 산적이 많아 고개를 곤두박질쳐서 빨리 넘어야 했기에 이런 이름이 붙게 되었다고도 하고, 몸을 가누지 못한 술 취한 사람들이 쉬어갔던 고개라 하여 붙인 이름이라고도 한다. 원래는 “곤드레뫼(산)고개”였는데 “곤두레미고개”로 부르기 쉽게 바뀐 것으로 여겨진다
한편 박달군용지 옛기록을 살펴보면 일제는 박달군용지에 평양육군병기창 안양분창을 건설하기 위해 이곳에 있던 마을 주민들을 박달2동 호현마을 인근으로 집단 이주시켰다. 기록을 보면 박달 군용지에는 일제강점기 이전 동수암, 막상골, 미름물, 선녀골, 양호다리, 붓골, 웃말, 웃박달리, 햇골 등 8~10개의 마을이 있었는데 일제가 1930년대 평양 육군병기창 안양분창 건설을 하면서 폐동하였다. 또 이곳에 있던 후령군, 엄정구, 엄황, 엄성 등의 묘 및 구만(충신)의 정문 등 선현묘와 문화재가 일실 되었다고 한다.
군용지(병기창)를 건설하면서 안양~안산간 곤드레미 고개길을 폐쇄했다. 이후 안산지방을 왕래하던 도로는 박달삼거리에서 호현(범고개)-시흥시 목감동을 잇는 우회도로(박달로)가 신설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해방 이후 박달군용지에는 미군이 주둔하고 탄약고로 사용된다, 당시 이곳에는 전술핵이 보관됐던 아주 중요한 비밀장소였다. 1968~69년 석수동 미군 83병기대대 전령으로 근무했던 닐 미샬포프 병사가 1968-69년에 찍었던 미군이 박달군용지의 옛 사진을 보면 박달교를 건너면 분지 형태의 넓은 공터가 있고 헬기장과 천막으로 친 막사촌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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