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610]1987년 6월 민주항쟁 전개 과정과 안양지역 일지

1987년 6월 민주항쟁 전개과정과 안양지역 일지 (정리: 조완기)
○ 1987. 1.14.
서울대 박종철 학생 치안본부 대공수사단에 연행돼 조사 받던 중 물고문으로 사망
○ 1987. 2.7
박종철군 범국민 추도식 원천 봉쇄로 명동성당을 비롯해 전국 주요도시에서 대규모 시위 전개
○ 1987. 3.3
박종철군 49재와 고문추방 국민대행진 및 전국 각지에서 대규모 거리 시위 전개
○ 1987. 4.13
4.13 호헌 조치, 개헌논의 유보 발표
○ 1987.4.14.~5.20 (18일 故박종철 고문치사 은폐조작 폭로)
가톨릭, 개신교, 불교계 및 학생을 비롯한 각계각층 호헌철폐, 시국선언 및 농성 전개
○ 1987. 5.27.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국본) 발대식- 호헌철폐 및 직선제 개헌 쟁취 선언
○ 1987. 6.9
연세대 학생 이한열군, 6.10 대회 출정식에서 직격 최루탄에 피격(7월 5일 사망)
○ 1987. 6.10. (수) 민주항쟁
6.10 고문살인은폐 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 원천 봉쇄(성공회 성당 12시)에도 불구하고 전국 18개 도시에서 대규모 가두시위 형태로 전개
○ 1987. 6.11~6.17
6.10 대회 참가자중 학생을 중심으로 명동성당 및 전국에서 지속적으로 시위 전개
○ 1987. 6.18.
국민운동본부 전국 각지에서 최루탄 추방 범국민대회 강행
○ 1987년 6월 19일
안양지역 6월 민주항쟁 첫 대중 집회 저녁 7시 30분 무렵부터 안양중앙시장 인근에서 노동운동 그룹을 중심으로 시위를 시작하였다. 이어 퇴근길 시민들이 모여들면서 9시 30분경에는 1만여 명의 시민들이 모여 6차선 도로에서 연좌시위를 전개하였다. 지도부는 10시 경 해산을 결의 하였으나 한번 모인 시민들은 새벽 1시까지 화염병과 돌을 던지며 새벽까지 산발적인 시위를 전개하였다. 경찰 병력은 타 지역 차출로 인하여 초기에는 없었다가 서울과 안산으로 출동했던 경찰이 되돌아와서 협공하면서 새벽 2시경 해산하였다.
○ 1987. 6.22.~28
국민운동본부, 전 국민 민주화 실천 기간 선포. 전국에서 지속적으로 가두시위 전개
○ 1987. 6.23.
안양지역에서 당시 한신대, 경기대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대중 집회를 안양중앙시장에서 시작하여 1만여 명의 시민들이 집결하여 3시간가량 평화적으로 비폭력 대중 집회를 진행하였다. 경찰들로 초기에는 관망을 하며 시위 중단만을 요구하였다.
○ 1987. 6.26. 금요일
6.10 항쟁 이후 최대 인파가 대한민국 전역에서 민주헌법 쟁취 국민 평화대행진 진행
안양지역에서는 안양지역 집회 사상 최대 인원인 2만여 명이 모여 삼원극장 앞에서 시작하여 중앙시장, 벽산쇼핑 일대를 저녁 8시 이후 완전 장악하여 최루탄을 쏘아대는 경찰 병력을 물리치고 안양 경찰서 까지 진격하였다. 새벽 2시경에는 안양경찰서 담벼락이 무너지며 안양경찰서가 점거 위기에 닥치자 각 지역에서 급파된 경찰 병력이 투입되었다. 이후 시위대와 경찰이 일진일퇴의 공방을 거듭하다가 안양 1번가로 시위대가 후퇴하면서 안양역전 파출소가 화염병에 불타고 새벽 4시경 산발적인 시위로 거쳐 안양군포의왕지역 시민의 민주화 대행진이 마무리 되었다.
○ 1987. 6.29 시국수습 특별선언 발표
○ 1987. 7.09 이한열 민주국민장 서울시청 노제 100만명 집결
○ 1987년 7.8.9월 노동자 대투쟁 전개
(안양지역 많은 사업장에서 노동조합의 결성)
1987년 하반기에는 안양지역에서도 다양한 공개 사회, 문화운동단체가 등장하였다. (안양독서회, 안양민요연구회, 우리그림, 등이 만들어 지면서 안양문화운동연합이 결성되었다).
1988년에는 안양지역에서도 청년, 학생, 노동운동 단체들이 만들어지고 공개적인 대중단체로 활동을 시작하였다.
○ 1987. 10.29 헌법개정안 공포
○ 2007. 05. 02 국가(법정)기념일로 제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