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117]이범석장군 꿩 사냥 했던 1963년 안양 수리산

2026.01.17/ #아카이브 #옛사진 #수리산 #안양 #이범석장군 #
광복군 참모장 출신으로 청산리전투를 승리로 이끌고 대한민국 초대 국방부장관, 내무부장관,국무총리 등을 지낸 독립운동가 철기 이범석 장군의 회고록 '우둥불'에 수록된 사진으로 1963년의 안양 수리산 풍경이다.
사냥용 산탄총을 든 이범석장군이 맹견이었던 사냥개 핫사와 함께 찍은 사진에는 논이 넓다랗게 펼쳐져 있고, 그 뒤로 멀리 민둥산에 가까운 수리산 자락 아래에는 초가집들이 일렬로 자리잡고 있다. 사진에 표기된 설명으로는 '1963년 안양 서쪽에서 꿩사냥을 즐겼다'라고 기록돼 있다
이범석은 후기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자금도 매일같이 새벽이면 사나운 말을 타고, 계절이 오면 격렬한 사냥도 한다. 나이 70이 훨씬 넘은 몸에 무리를 느끼지 않는 바도 아니지만, 이것이 끝까지 자연에 대해 지속해야 할 자세라고 믿고 있기 때문에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언젠가 듣건데 관악산 삼막사 아래쪽에 이승만 정권의 실세 이기붕의 별장이 있었다고 하고..지금의 아냥(안양)은 사냥 그리고 별장을 매칭할 수 없는, 그야말로 꿈같은 이야기이겠다.
출처: 우둥불(삼육출판사)
삼육출판사(1971년 초판 발행)에서 펴낸 우둥불은 광복군 단체사진의 표지가 이범석장군 독사진으로 바뀌어 2016년에 다시 출간됐다. 책 제목 우둥불은 모닥불에 해당하는 함경도 지방의 방언으로 사전을 보면 잎나무나 검불 따위를 모아 놓고 피우는 불의 방언 등으로 나와 있다. 말그대로 평안도 지방에서 산속에서 추위를 이기기 위해, 험한 짐승들을 피하기 위해 나무들을 모아서 밤새 피우는 모닥불을 말한다. 당시 한데서 잠자는 군인들이 몸을 덮이기 위해 피우는 불이다(p324) 그야말로 풍찬노숙(風餐露宿)이다.
이범석 장군이 우둥불이라는 책에서 직접 설명한 '우둥불'의 의미를 알아보자
서명으로 명제한 "우둥불"은 함경북도 방언이다. 로영화(露營火), 야외에서 피우는 불을 의미한다. 우둥불은 한데서 (밖에서) 잠자는 군인들이 몸을 덮히기 위해 피우는 불이다. 나는 독립 투쟁 30여년간을 대개 이 우둥불 곁에서 지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선에서, 광야에서, 몽고에서 사냥할 때에도, 혼자서 또 몇 사람이 둘어 앉아 잡담을 할 때나, 수많은 군대를 데리고서나, 그 어디서나 이 우둥불은 나의 잊지 못할 반려였다.
그 불길을 바라보며 때로는 어려서 자랄 때의 동년(어린 시절)을 생각했고 그리운 조국을 생각했었다. 우둥불 앞에서 불꼿사이로 어른거리는 회상---쓰러져간 전우들을 생각했었다. 우리의 자유를 꿈처럼 그려보기도 했었다.
조국의앞날을 환산으로 엮어도 보았었다. 이글대는 불길속에 내일의 승리를 다짐했었다. 상념은 하염없이, 막연한 후세대의 생각도 해 보았다.
우둥불이 있었기에 이역만리 살을 저미고 뼈를 에이는 혹한을 참고 견딜 수 있었다. 그처럼 견디기 기로운 향수와 고독도 달랠 수 있었다.
또 우둥불의 불길이 칠흑의 야암을 뚫고 치솟을 때, 가슴속에 겹겹이 쌓인 오뇌와 번민이 함께 타는 듯 싶어 후련함을 느낀 적도 많았다. 뿐만 아니라 그 불길속에 전우들의 얼굴이 하나씩 둘씩 솟아오른 것도 한 두번이 아니었다.
우둥불은 사나이 뺨 위의 눈물을 언제나 말려 주었다. 어떤 밤에는 중얼거리는 나의 잠꼬대에 불티를 튈겨서 내게 화답을 해주었다.
이 책의 한 장인 '원야(原野)의 낭만'가운데서도 많이 썻지만, 눈보라처럼 겨울밤엔 물론이지만 모기 깍다뒤 몰려드는 여름밤에도 우둥불은 피워야 했다. 우둥불을 한문 글자로는 낭화(狼火)라고 쓴다. 이는 몽고사람들이 승냥이로부터, 소나 양무리를 보호하기 위해 피우는 불더미를 뜻한다. 낭화는 우둥불보다는 어감이 약하나 여러 개 모아 피우는 무리불이므로 고독하지 않다. 아마 남쪽 사람들더구나 안정된 사회에서 생활하고 자란 청년들은 우둥불을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그러므로 수십년이 지난 지금 서울의 밤 하늘에 휘황찬란히 수놓는 네온의 채광을 보다가도, 가끔 옛날의 우둥불 생각에 빠지곤 한다.
이처럼 내마음속 깊은 곳에 어직 꺼지지 않고 있는 '우둥불'이 있기에 앞으로 계속 낼지도 모르지만, 우선 나오게 된 이 책에 "우둥불"이라고 이름 붙인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국가, 민족내지 세계 인류에 공헌한 큰 위인, 명사들은 흔히 "---회고록"이니 " ---전기" 이니 하지만, 나는 겸허한 생각에서가 아니라 그렇게 붙이기가 왜 그런지 싫어 "우둥불"이라 명제했음을 아울러 밝힌다. pp 324~325.우둥불 책속에서
이범석장군은 누구인가
독립운동가ㆍ정치가ㆍ군인. 호 철기(鐵驥). 서울 출생. 1915년 경성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중국으로 망명, 1919년 윈난(雲南)에 있는 중국육군강무학교(中國陸軍講武學校) 기병과(騎兵科)를 졸업하고 둥베이(東北.만주)로 진출하였다. 1920년 청산리(靑山里)전투에서 중대장으로 참가,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데 큰 공을 세웠다. 1922년 소련합동민족군 연해주지구 지휘관으로 소련 혁명전(革命戰)에 참가하였고, 1933년 중국 뤄양(洛陽)군관학교 한인장교대장, 1936년 중국 제3로군 사령관, 1940년 중국 중앙훈련단 중대장을 지냈다. 1941년 한국광복군 참모장에 취임하고, 1945년 광복군 중장으로 8월 귀국하였다. 1946년 조선민족청년단(朝鮮民族靑年團)을 창설하였으며, 1948년 정부수립 후 초대 국무총리에 기용되고 국방장관을 겸임하였다. 1950년 주중(駐中)대사, 1952년 자유당 부(副)당수 및 내무장관 등을 지냈으며, 그 해 8월과 1956년 2차례 부통령(副統領)에 입후보하였으나 모두 낙선하였다. 1960년 충남에서 자유연맹(自由聯盟) 소속 참의원(參議員)에 당선되었고, 1963년 ‘국민의 당’ 최고위원에 추대되었다. 1963년 건국공로훈장 복장(復章), 1969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받았다.
1910년 일본의 강제침탈로 나라를 빼앗긴 후 수많은 의병과 독립 운동가들이 일본군을 공격하고 저항했다. 그들이 뿌린 씨앗이 다시 열매가 되어 저항은 이어졌고 3·1만세운동, 6·10만세사건, 광주학생운동 등 굵직굵직한 항일운동이 끊이지 않고 일어났다. 국내에서의 일제경찰 탄압에 견딜 수 없었던 인사들이 몰래 중국으로 빠져나가 독립운동에 진념했다.
김구 선생을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들은 맨 주먹으로 일본을 타도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윤봉길 의사 등 수없이 많은 청년열사를 길렀다. 상해 홍구 공원에서 열린 천장절 행사장을 아비규환으로 만든 윤봉길 도시락 폭탄은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든 대표적 항일투쟁으로 기록된다. 이런 와중에 혜성처럼 나타난 청년 독립군의 장교가 철기(鐵驥) 이범석(李範奭)장군이다.
그는 1900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경성고보(현재의 경기고교) 3학년 때 몽양 여운형선생의 권유를 받아 중국으로 망명을 결행했으니 나이 열여섯이었다. 타고난 용기와 배짱으로 중국 육군학교 기병과에 들어가 졸업한 후 독립군 훈련소인 신흥무관학교에서 김경천 지청천 (일명 이청천)장군과 함께 교관으로 근무한다. 이 때 신흥무관학교는 총이 전혀 없어 목총만으로 훈련했으니 사격연습조차 하지 못하는 딱한 실정이었다.
그러나 마음만은 조국광복의 첨병이 되었다는 열망으로 흐뭇했다. 백야 김좌진 장군을 만난 것이 이 때였다. 백야는 이범석을 북로군정서 사관연성소 교관 겸 교수부장으로 초치하여 본격적인 독립군을 양성하게 되었다. 이들은 러시아에 출병했다가 철수하는 체코 정규군에게서 중화기와 다량의 탄약까지 헐값에 인수하여 완전무장을 갖췄다. 때마침 일본군 토벌부대가 독립군 소탕을 목적으로 이동한다는 첩보가 입수되었다.
김좌진 장군으로부터 출동명령을 받은 이범석은 1920년 10월 21부터 22일까지 600명의 사관생도 대를 이끌고 청산리 산악지대에 매복한다. 깊고 깊은 산속에서 일본 정규군 3000명과 맞싸운다는 것은 전투경험도 없는 나이 어린 사관생도로서는 모험이었으나 지리(地利)의 이점(利點)이 있었다. 길고 긴 협곡에 들어선 일본군을 사격권내에 끌어들인 후 퍼부은 총탄은 혼비백산 도망가기에 바쁜 그들을 피로 물들이기에 충분했다.
그 후 그는 잠시 쏘련 혁명전에도 참여한 일이 있어 그의 능력을 시샘하는 무리로부터 공산주의자로 모략을 받고 홀로 피신하는 고행을 겪기도 하면서 때로는 중국군 소장으로, 때로는 한국광복군 참모장으로 군과 떨어지려야 떨어질 수 없는 생활을 영위한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그는 광복군 제2지대장에 취임하여 미군과 연합작전을 짠다. 1942년 때다.
그러나 원폭에 겁을 먹은 일본이 예상외로 빨리 항복하는 통에 조국 상륙작전에 참여하지 못하는 쓰라림 속에 쓸쓸히 환국한다. 민족청년단을 창설하여 민족과 국가지상의 이념을 실현할 청년을 양성하고 건국 후 이승만대통령의 권유로 국무총리 겸 국방부장관에 취임한다. 그 후 이승만과 불화하여 중국대사로 밀렸다가 내무부장관을 역임한다. 4·19 이후 충남에서 참의원으로 당선했지만 정치적인 운세는 없었다.
5ㆍ16이후 ‘국민의 당’을 창당했지만 야당통합에 실패한 후 정계를 떠나 ‘혈전’ ‘민족과 청년’ ‘방랑의 정열’ ‘톰스크의 하늘아래’ ‘우둥불’ 등의 저서를 남겼다. 1972년 5월 11일 파란만장했던 생을 마감하고 5월 17일 국민장으로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그는 군인․정치가로서 그 분야 외에 문학 분야에서도 역시 상당한 재능을 발휘한 것으로 새삼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그의 대부분의 작품은 중국의 작가 복래부(卜萊夫), 복사부(卜沙夫) 형제가 그의 구술(口述)을 받아 기록한 것이다. 그의 작품 중에서 뛰어난 것은 <북극풍정화>이다. 원본에 ‘무명씨 저(無名氏著)’로 되어 있는 이 소설도 역시 구술로 복내부가 받아 쓴 작품으로, 이 소설이 1942년의 첫 간행 이래 그 동안 대만(臺灣)에서만도 수10만 부가 팔려나갔다고 한다. 당시 본명을 밝히지 않고 ‘무명씨’로 한 것은 항일운동을 하는 사람으로서, 정체를 감추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북극풍정화>는 그가 러시아에서 겪은 체험을 근거로 쓰여진 것인데, 아름다우면서도 힘에 넘치는 다이나믹한 문장, 때묻지 않은 감각과 활달한 상상력, 드라마를 전개하는 특이한 구성 등, 이 작품이 결코 아마추어가 여기(餘技)로 만든 것이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한다. 이 작품이 중국어로 쓰여진 것이 유감이기는 하나, 1940년대에 일어(日語)로밖에 글을 쓸 수 없었던 상황을 참작한다면, 차라리 변절자들의 일어문학(日語文學)보다는 훨씬 값진 것이다. 철기의 문학은 망명문학의 독특한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한국문학사에 편입될 여지를 지니고 있다. (김병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