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1116]새안양회 1992년 건립 원태우 의거비 자료 발굴

2025.11.16/ #안양 #기록 #옛신문 #원태우 #새안양회 #이재옥 #이승언 #김성희 #이석근/
2000년대 중반 어느날 안양기억찾가탐사대에서 안양6동 동네 마실길에 들련 안양 최초의 시립도서관인 만안도서관에 들렸을때 미당 한귀퉁이에서 조형물 한점을 발견했다. 조형물에 기록된 글을 확인해보니 안영지역 향토 모임인 새안양회에서 1992년 11월2일 건립한 '원태우지사 의거비' 다. 그런데 글씨와 조각등 작품 제작을 누가 했는지 등이 없어 수소문끝에 안양여고 미술교사로 재직중이던 이재옥 선생(현 안양예총회장)이 했음을 알아냈다.
당시만 해도 원태우 지사와 관련해서는 안양 석수동 의거지와 조형물(자유공원동상.안양역 계단벽면 부조)만 알려졌을뿐 의거비가 있다는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새안양회에서도 건립만했지 이후 원태우 지사 추모행사나 의거비 관련 기념식 등 지속가능한 행사를 개최하지 않았기에 지금은 회원들 대다수가 원태우 지사 의거비를 세웠다는 사실 조차 모르고 있다.
마침 안양독립운동기념사업회 발기모임을 준비하던중에 당시 신문기사를 발견했는데 비문 글, 글씨, 조각 등 제작에 참여한 이들의 이름을 확인하게 되었다.
나아가 새안양회가 안양시민의 애향심을 고취하기 위해 성금을 모아 조형물을 건립한 초심으로 되돌아가 매년 원테우지사 의거일에 추모행사 또는 기념식을 개최하여 안양 대선배이신 원지사의 뜻을 본받고 후배로서의 자긍심을 세웠으면 하는 바람이다.
새안양회 원태우 의거비 제막(의거 결행 87주년을 맞아 1992년 11월2일 세우고 12월3일 제막식)
1992년 12월16일자 생활스포츠 신문 기사
을사조약 항거 이등박문 가해 안양시민의 애향심 고취 계기 마런
일본제국주의가 강제로 을사조악을 자행한지 5일후인 1905년 11월22일 안양 석수동에서 오직 구국의 일념으로 우리나라 침략의 원흉 이동박문에게 들을 던져 수주의 상해를 입히고 계속되는 민족의 저항운동을 볼러 일으키며 안중근의사의 의거와 3.1운동의 밑거름이 된 원태우의사의 의거비가 새안양회 최선용회장을 중심으로 기념비건립추진위원회가 구성된후 4백 여명의 전회원의 성금에 의해 학문과 교양을 같고 닦는 안양시립도서관 광장에서 지난 3일 오후4시 제막식이 거행했다.
원지사의 거사에 대하여 학자이자 애국지사인 송주훈씨는 ‘작산태류’이란 저서에서 “성공한걸로 보면 원태우의 말보다 안중근의 권총이 더 현명했다. 그러나 이토가 안중근의 탄환에 죽었다 하더라도 그 꼬투리는 이미 원태우로부터 있었다"라고 원태우 의사를 높이 평가했다. 원지사는 석방된후 흉터때문에 여름에도 긴옷을 입어야 했고 성기보문으로 자식도 두지 못하였으며 가세가 기율어 갖은 고생끝에 한국전쟁이 일어난 1950년 69세를 인기로 운명했다. 그 후 원지사의 유품중 손수 만은 들정구 하나는 독립기념관에 기품되었고 1989년 서지학자 이종학씨가 '의거도' 를 입수하여 세상에 알렸으며 1990년 정부에 의에 군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기념비 조각을 많은 이재옥씨는 한국인의 기개를 떨친 원의사의 거사를 합축적으로 형상화시켰으며 기념비의 형상은 거사 모습을 단순화 시킨것으로 대한 남아의 기개표현을 위해 전체가 햇불이 연상되도목 만들어 원의사의 뜻을 본받고 자궁심의 모체가 되도록 정성을 다했음을 강조했다.
(비문 굴: 이승언, 글씨: 김성희, 조각: 이재옥<안양여고교사>, 제작: 이석근)
제작비 :약 1천50백만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