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보따리 503

[기억-정진원]마음속의 청산 청계산과 청계사

청계산(淸溪山)은 어릴 적 우리들 마음속의 청산(靑山)이었다. ‘살어리랏다’ 청산이었다. 나무와 풀들과 온갖 덩굴들이 어우러져 숲이 되고, 숲이 수해를 이루어 우리들은 파도를 타듯이 울렁대는 수림 위에서 자맥질했다. 아니 운해가 되어 스펀지 구름 위에서 텀블링을 하듯이 했었다. 아프리카에만 따로 밀림에 타잔이 있는 것이 아니었고, 너구리나 고라니만 우리와 아주 다른 산짐승이 아니었다. 머루랑 다래랑 널려 있었다. 우리들은 청산에 청사슴이 되어 나무 사이를 뛰어다니거나, 아니면 그곳에 청벌레가 되어 나뭇잎 뒤에 붙어 있어도 좋았다. 살고 싶다, 살고 싶다. 푸른산에 살고 싶다. 머루랑 다래랑 먹고 푸른산에 살고 싶다. 「청산별곡(靑山別曲)」첫 연 청계산 깊숙한 속에 청계사 절이 있었다. 한직골, 새말, 토..

[기억-정진원]의왕 백운호수

요즈음 그럴듯하게 말해서 호수이지, 처음에는 그곳을 ‘수리조합’이라 하였고, 한참 후에는 ‘저수지’라고도 불렀었다. 6ㆍ25 전쟁 몇 년 후부터 물막이 공사가 시작되었던 듯하다. 산허리를 끊어내고, 남포를 터뜨리고, 둑 막기 흙을 나르기 위해서 쇠로 된 간이 레일을 깔고, 그 위를 소형 흙차가 달리는 모양이 아주 신기하게 보였었다. 상당히 많은 인부들이 분주하게 일하고 있었으며, 그 때 공사 감독자를 십장이라고 불렀던 것 같았다. 외지인들이 많이 들어와 일했으므로, 그 쪽 동네 분위기는 우리네와 아주 달랐었다. 19세기 중반 미국 서부의 골드러시, 북적대던 곳의 모양이 그랬을 거라고 생각해 본다. 양지편에서 학현 쪽을 잇는 제법 긴 제방이 만들어졌다. 제방 북쪽 끝에서 저수지 물 안쪽으로 난 좁은 철 난..

[기억-정진원]안양읍내 이야기

지금은 경기도 안양시가 되었지만 전에는 시흥군 안양읍이었다. 시흥군에 딸린 하나의 읍이었다. 군에 딸린 면 소재지가 도시 모양을 갖춰가면서 인구수가 2~5만 명 정도가 되면 읍이 되었다. 당시 안양읍의 다운타운에 안양읍사무소, 남쪽으로 조금 떨어져서 시흥군청, 군청 맞은편 길 건너로 안양경찰서가 있었다. 그 길로 조금 나가면서 왼쪽으로 안양성당(지금 안양중앙성당)이 있었고, 거기서 성당을 끼고 왼쪽으로 돌아 올라가면 냉천동이었다. 언덕배기에 구세군 교회가 있었다. 읍사무소에서는 정오가 되면 사이렌이 울려서 정오를 알렸다. 시계가 드물던 시대의 관의 대민 서비스였다. 당시엔 교회들도 주일 오전 11시 예배를 알리기 위에서 30 분 전에 초종, 11 시에 재종을 쳤었는데, 그 종소리가 조용한 시골에서는 십리..

[기억-정진원]의왕에서 용인 넘어가는 고개 '고분재' 지명유래

꼬부랑 할머니가 꼬부랑 지팡이를 짚고 꼬부랑 고갯길을 올라가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렇잖아도 파주시 파평면에 ‘꼬부랑고개’가 있다. 땅이름도 땅 생긴 모양대로 이름을 짓게 마련이다. 마을이름도 땅 생김새에서 비롯된 것들이 아주 많다. 고개가 어떻게든지 고부라져 있으므로 고개가 되었을 것이므로 곱은 고개가 된 것은 당연하다 할 것이다. 곱은 고개라 하여 ‘고분재’라 했으니 직설 표현이다. 의왕시 학의동 백운호수 동쪽 송말에서 용인시 수지구 고기동으로 넘어가는 고개가 고분재이다. 고분재 고개 밑에 있다 하여 고분재란 마을이 고기동에 있다. 용인시 처인구 이동면에 아흔아홉 구비의 고개라 해서 아흔아홉고개, 보령시 미산면에 아홉사리고개, 강화군 양도면에 고분개(논), 용인시 기흥구 보정동에 긴(높은) 고개라서..

[기억-정진원]의왕 청계사 초입 언덕배기 '옥박골' 지명유래

마을이름을 대할 때에는 그냥 가까이 가서, 있는 그대로 보고, 쉽게 이해하려는 태도가 필요하다. 필요에 따라 마을이름을 상고할 때에는 내 안에 먼저 들어와 있는 선입개념을 버리고, 본질을 ‘바로 보는(직관)’, 이른바 ‘현상학적 방법’이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버려야 할 것 가운데 우선은 ‘한자(漢字)’의 우상이고, ‘한자화(漢字化)’의 오류이다. 한자화는 본래말보다 더 좋은 뜻으로 음역한 경우도 있지만, 전혀 엉뚱한 한자를 쓴 경우가 허다하다. ‘참새울[작동(雀洞)]’하면 얼마나 아름다운 마을이름인가, 그것을 ‘진조동(眞鳥洞)’이라 했고(연천군 백학면), ‘쇠무덤’은 소의 무덤이란 뜻인데, 그것을 셋이 모였다는 뜻으로 ‘삼회리(三會里)’라 했으니(가평군 외서면) 우습지도 않다. 마을이름에서 쉬운 것을 어..

[기억-정진원]의왕 오매기 마을 지명유래

의왕시 오전동에 오매기란 마을이 있다. 지금 의왕문화원이 있는 곳에서 위쪽으로 백운호수 쪽으로 넘어가는 고개 밑에 있는 동네이다. 그곳에서 아래로 사나골, 용머리, 목배미, 뒷골, 백운산 등 작은 마을들을 합쳐서 넓게 오매기라 부르기도 했었다. 8ㆍ15 해방 때에 약 70호 정도였다고 한다. 어떤 분은 그곳에 집[막(幕)]이 다섯 채가 있어서 ‘오막(五幕)>오막이>오매기’가 되었을 것으로 보는데, 그것은 적절치 못한 것으로 생각한다. 그 골짜기에 동네가 형성될 때에 집 다섯 채가 한꺼번에 만들어질 수도 없었을 것이며, 그렇게 되었다 해도 마을이름을 바로 ‘오막(五幕)>오막이>오매기’로 부르게 되었다는 것은 지나친 견강부회이다. 움막이 아닌 다음에야 집을 막(幕)이라 하지는 않았으며, 다섯 채 집이 만들어..

[기억-정진원]교통 요충지였던 의왕 한재굴

의왕시 청계동에 한재굴이란 동네가 있다. 지금은 고가도로가 얼기설기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마을이 되었지만 우리 어릴 적에는 덕장초등학교에서 남쪽으로 개울 건너에 한재굴이란 마을이 있었다. 길가에 늘어선 동네였다. 판교ㆍ성남으로 나가는 도로가 개통되기 전까지는 안양에서 가끔씩 들어오는 버스의 종점이었다. 당시에는 대단한 터미널이었다. 한재굴에서 청계ㆍ 청계사, 학현ㆍ원터, 백운호수ㆍ능안 방면 등의 세 길이 만나서 안양 쪽 한길로 이어지는 교통의 요충지였다. ‘한재굴’이라 했었다. 그것을 어떤 근거에선지 ‘한직동’이란 조금 딱딱한 한자 이름으로 고쳐 썼다. 마음이름, 특히 그 작명 이유를 살펴보는 데 다음과 같은 점이 중요하다고 본다. 첫째는 대부분의 마을이름은 순수한 우리말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그런..

[기억-정진원]덕장초등학교의 추억, 분유와 디디티

초등학교의 추억, 분유와 디디티 모두가 6ㆍ25 전쟁 이후에 시골 초등학교에서 벌어졌던 일들이었다. 요즘하고 달라서 당시 시골의 초등학교는 새로운 변화와 놀라운 쇄신의 중심점이었다. 우선 책상과 걸상이 있는 교실이 얼마나 기이한 공간이었던가. 언제 의자라는 것에 앉아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유리창이 있는 교실, 기다란 복도, 잃어버리면 어쩌나하면서 고무신을 얹어놓곤 했었던 복도 끝에 있었던 신발장, 분필과 흑판, 처음에 낯설었던 동무들 등이 모두 예사로운 것들이 아니었다. 바야흐로 배워서 알게 되는 신학문의 깊은 맛을 무엇에 비견할 것인가. 양주동이 영어 문법 공부의 처음에 나오는 3인칭의 의미를 알기 위해서 눈길 얼마를 걸어가서 그 뜻을 배워 알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지 않은가. 너와 나를 뺀 우수마발..

[기억-정진원]학의천은 알몸일 때까지만 벌모루 개울이었다

알몸일 때까지만 벌모루 개울이었다 청계산 청계사 옆 골짜기에서 시작된 작은 실개울 물은 상청계ㆍ중청계ㆍ하청계를 거치면서 물이 조금씩 불어나 한직골 옆에 이른다. 하우고개, 원터, 독쟁이 쪽에서 내려온 물도 한직골 조금 아래쪽에서 그 물과 합쳐졌다. 광교산 바라산 골짜기에서 흘러내린 물과 능안 쪽 모락산에서 내려온 물이 백운호수에 고여 있다가 무넘기를 넘쳐 내려서 삼벌내에서 다른 두 물줄기와 합해서 아래로 흘러내렸다. ‘삼벌내’라니, 세 갈래의 물이 합쳐져서 된 시내라는 뜻인가 보다. 이 물줄기가 양지편 앞, 벌모루 앞을 지나 흐르는데, 안양 쪽으로 흘러가므로 안양천이라 부르다가 지금은 학의천이라 한다. 덕장골 안의 두 실개울, 우리 집 옆을 흘러내린 물과 동편 사당골에서 흘러내린 물이 벌모루에서 학의천과..

[기억-정진원]1912년 안양에 전기 처음 들어온 기억

등잔불에서 전등불까지 등잔불. 그것은 따듯하고, 푸근했다. 그 불빛은 지나칠 것도 없고, 그렇다고 못 미칠 것도 아니었다. 디테일한 것은 과감히 소거해 버리고, 아주 대국적으로 사물을 보게 했다. 대서특필(大書特筆)만 돋보기 없이 볼 수 있을 정도의 어스름이었다. 등잔불에서는 할머니와 어머니와 사랑방 머슴의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등잔은 대개 백색 자기였다. 뚜껑에는 창호지를 말아서 심지를 박는다. 밖으로 조금 잡아 빼서 끝을 조금 남기고 가위로 잘라낸다. 등잔은 등잔걸이 위에 놓는다. 가늘고 약한 불이어서 콧숨만 조금 크게 내어도 꺼졌다. 켜 있을 때는 있는 둥 마는 둥 했었지만 막상 꺼지고 나면 갑자기 칠흑 같은 어둠이 방안에 가득했었다. 그러면 됫박 성냥 알을 찾고, 화로에 남은 불씨를 찾다보면 ..